소설리스트

Chapter 7 스노우 맨Ⅰ (47/90)

Chapter 7   스노우 맨Ⅰ

멜란을 데리고 여관으로 간 라일라는 자신이 데려온 일행들을 소개했다.

에반스가 슬쩍 라일라에게 눈짓을 보냈다. 멜란에게 자신의 신분까지 밝히지 말라는 뜻이었다.

눈치 빠른 라일라는 에반스를 두루뭉술하게 귀족이라고만 설명했다. 그리고 안드레이 공작과 루크는 마법사로, 루미나와 시스턴은 자신의 동료라고만 소개했다.

어차피 셰르파인 멜란에게 상대의 정확한 신분까지 알 필요는 없었다. 라일라는 이미 그와 거래로 신용이 있었고, 그런 그녀가 데려온 손님이니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에반스가 멜란에게 예전에 마법사가 갔던 곳까지만 데려다 주면 100골드를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선금으로 50골드가 든 돈주머니를 건넸다.

위험한 셰르파 일을 그만두었던 멜란이 얼마든지 다시 셰르파로 나설 만큼 큰돈이었다.

‘이 돈으로 요크를 더 구입하면 이 마을에서 제일 부자가 될 수 있겠어. 그럼 그녀의 아버지도 나와 그녀의 결혼을 허락해 주겠지.’

멜란은 셰르파의 마을에서 가장 예쁜 루실과 사귀는 사이였다. 하지만 그녀의 부친은 그녀를 데려가려면 지참금으로 요크 100마리는 내놔야 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멜란이 열심히 요크를 키우는 이유도 바로 과도한 지참금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지금 멜란은 53마리의 요크를 키우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건네는 50골드로도 200마리가 넘는 요크를 살 수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멜란은 결국 에반스가 건네는 돈주머니를 받았다.

‘그래 한 번이다. 이번 한 번만 더 셰르파가 되자.’

멜란이 돈을 받자 라일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로써 그녀가 할 일은 모두 끝났다. 그리고 에반스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안드레이 공작이 멜란과 같이 파르미르 고원을 넘어서 윈스트런의 무덤을 찾는 일만 남은 것이다. 그때 루크가 에반스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저기, 저라도 안드레이 공작님을 따라가면 안 될까요?”

루크의 말에 에반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루크는 에반스의 마법사였다. 그런데 안드레이 공작을 따라 저 위험한 파르미르 고원을 넘겠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

그때 안드레이 공작이 루크에게 말했다.

“자네의 뜻은 고마우나 그러지 않아도 되네.”

안드레이 공작도 그동안 알게 모르게 에반스에게 민폐를 끼쳤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루크는 에반스에게 가신과 같았다. 그런 가신을 자신이 데려간다는 것은 너무 염치없는 짓이었다.

안드레이 공작의 말에 에반스가 루크에게 말했다.

“그 문제는 좀 더 생각해 보도록 하지.”

에반스는 안드레이 공작이 보는 앞에서 차마 매정하게 안 된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어쨌든 결론은 내일 아침 안드레이 공작과 셰프파 멜란이 파르미르 고원을 오르고, 나머지 일행들은 내일 파르미르 고원에서 철수하기로 결정이 났다.

멜란은 내일 아침에 여관에서 만나기로 하고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파르미르 고원에 밤이 찾아왔다.

공기가 부족한 만큼 일행은 쉽게 지쳐서 일찍들 잠이 들었다. 그때 아직 잠을 자지 않고 있던 안드레이 공작이 에반스의 방을 찾았다.

“이거 받게.”

안드레이 공작이 에반스에게 가지고 있던 드워프의 검을 돌려주었다. 그러자 그 검을 보고 에반스가 말했다.

“정말 필요하시면 가지고 가셔도 됩니다.”

손안에 있을 때는 절대 내놓고 싶지 않았던 드워프의 검이었다. 하지만 검에 대한 미련을 버린 뒤, 에반스는 더 이상 그에 대해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없으면 또 없는 대로 살면 그뿐.’

에반스의 말을 듣고 안드레이 공작이 가볍게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이 검이 욕심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건 어쨌든 자네 것이잖은가? 주인이 가져가는 게 옳다고 생각하네.”

안드레이 공작은 드워프의 검을 에반스에게 돌려주면서도 여전히 검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한 듯 보였다.

돌려주겠다는데 굳이 안 받을 이유가 없었다. 막말로 그냥 검을 팔더라도 어마어마하게 큰돈을 받을 수 있었다.

‘이걸 팔면 영지마다 학교를 지어 줄 수 있다.’

어느새 현실적인 대영주로 돌아온 에반스는 안드레이 공작으로부터 드워프의 검을 받아 그 크기를 줄여서 귀 속에 끼워 넣었다. 그때까지도 안드레이 공작의 시선은 드워프의 검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안드레이 공작이 방을 나가자 에반스는 잠을 청했다. 어쨌든 내일부터 부지런히 압실론 후작성으로 돌아가서 밀린 정무를 돌봐야 하니 지금부터라도 잠을 충분히 자 둘 필요가 있었다.

잠시 후, 에반스가 깊게 잠이 들었을 때였다.

“어젠 만남이 좀 짧았지?”

에반스는 자신의 눈앞에 어젯밤 꿈에서 보았던 윈스트런이 나타나자 흠칫 놀랐다.

“다, 당신은…….”

“그래. 어제 소개했었지. 네가 가지고 있는 검의 진짜 주인인 윈스트런이다.”

“여긴 내 꿈속인거요?”

에반스의 물음에 윈스트런이 바로 대답했다.

“그런 셈이지. 네 무의식의 세계 속이니까.”

“무의식의 세계?”

“마음의 심층이랄까?”

“어려운 말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하하하. 유식한 척한 게 티가 난 모양이군.”

“어제 당신의 능력은 내게 다 준 게 아닙니까?”

에반스는 윈스트런의 그 능력이 뭔지 관심도 없다는 듯 말했다.

“물론이네. 그 능력을 주느라 어제 시간을 너무 소비한 탓에 자네와 심도 깊게 대화를 나눌 시간이 부족했지.”

“그래서 어제에 이어 오늘도 저를 찾아왔단 말이군요?”

“하하하. 자넨 내 예상보다 훨씬 똑똑하군. 뭐, 그렇다면 길게 돌려 말할 것 없이 바로 얘기하도록 하지. 난 내가 인정하지 않은 자가 내 소울 베슬을 차지하는 것을 원치 않네. 해서 자네가 내 소울 베슬을 찾아서 없애 주게.”

“소울 베슬이요?”

“나 같은 존재가 죽게 되면 그 영혼의 일부가 지상에 남게 되네. 그것을 영혼의 그릇, 소울 베슬이라고 부르지. 뭐, 별 대단한 것도 아닌데 그것을 차지하겠다고 그렇게 피터지게 싸우는 이유를 모르겠어. 쯧쯧…….”

혀를 차는 윈스트런을 보고 에반스가 말했다.

“당신이 정말 위대한 존재였다면 당신의 전인이 당신의 닮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그들이 피터지게 싸우도록 만든 당사자가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되죠.”

에반스의 말에 윈스트런이 놀란 눈으로 에반스를 쳐다보았다.

“오오, 이거 봐라. 정말 독특한 정신세계를 가진 인간이로군. 가만……. 너, 너는…….”

윈스트런의 눈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에반스는 그 눈빛을 피할 수도, 눈을 깜빡일 수도 없었다.

“으으으으…….”

에반스의 뇌리에 그동안 그의 기억들이 모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윈스트런은 에반스의 머릿속의 기억을 모조리 읽어 냈다. 그리고 에반스가 최진철이란 전혀 다른 세상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최진철의 기억을 읽으면서 윈스트런의 입에서 여러 차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최진철의 기억을 모두 살핀 윈스트런이 말했다.

“과학 기술이란 것이 그토록 대단하단 말인가?”

“끄응, 하지만 지금 당장 그 과학 기술을 이용할 수는 없지요.”

에반스가 두통이 심한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말했다. 그러자 윈스트런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후후후. 마법과 주술에 과학 기술까지 더해진다면 세상은 훨씬 더 발전하겠지.”

그리고 흐뭇한 얼굴로 에반스를 쳐다보았다.

“왜 저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시는 겁니까?”

“너라면 내 후계자로서 모자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난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지. 해서 내 후계자만은 내 꿈을 이뤄 주길 바랐다. 하지만 내 제자들은 내 후계자란 허울 좋은 자리만을 원했지 내 꿈을 이뤄 줄 생각은 없었어. 그래서 내가 그들을 버린 것이다. 하지만 지금 널 보니 알겠다. 네가 바로 내 꿈을 이뤄 줄, 진짜 내 후계자란 것을 말이다.”

윈스트런의 말에 에반스가 기막히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흥! 지금 무슨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겁니까?”

“궤변이라? 후후후, 과연 그럴까? 난 인간으로 가장 신의 능력에 근접한 존재다. 내 힘을 네가 물려받는다면 너는 신에 버금가는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래도 싫으냐?”

윈스트런의 말에 에반스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말했다.

“신이고 나발이고, 헛소리 그만 늘어놓고 어서 내 꿈에서 사라지시오.”

윈스트런은 자신의 말이 씨알도 먹히지 않자 어이없다는 눈으로 에반스를 쳐다보다가 한 마디 내뱉었다.

“네 기억 속을 보니 검공 라마스란 존재가 있더구나.”

“검공 라마스가 왜요?”

검공 라마스란 말에 자신을 미친놈 취급하던 에반스가 급관심을 보이자 윈스트런이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바로 이거로군.’

“그 검술이 꽤 대단한 모양이지?”

“내 기억을 다 봤다면 검공 라마스의 검술 역시 봤을 거 아닙니까?”

‘봤지. 내 힘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발에 피에 불과한 그런 것을 가지고…….’

속이 부글부글 타올랐지만, 윈스트런은 속내를 숨기고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래, 대단하긴 하더구나. 그런데 네 실력이 그래서 어쩌지? 그 검공 라마스의 제자인 렉터 공작이란 자의 배은망덕한 제자들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면서 말이다.”

“뭐, 열심히 수련하는 수밖에요.”

“으음……. 그거 그렇게 열심히 수련하지 않고도 빠른 시일 내에 그 검공 라마스란 자가 이룬 검술 경지에 오를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한데.”

윈스트런의 말에 에반스가 바로 반응을 보였다.

“뭐라고요?”

‘옳거니.’

“한 닷새면 될 거 같은데……. 쯧쯧, 넌 관심이 없다니 어쩔 수 없지.”

윈스트런이 뒤돌아서자 에반스가 다급히 그를 불렀다.

“자, 잠깐만요.”

“왜 그러느냐?”

“정말입니까?”

“뭐가 말이냐?”

“정말 내가 닷새 만에 검공 라마스가 이룬 검술 경지에 오를 수 있냔 말입니다.”

“그야 당연하지. 내가 고작 닷새 뒤 밝혀질 거짓말을 너에게 하고 있겠느냐?”

윈스트런의 말에 에반스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당신 말을 믿지요?”

“나를 믿을 수 없단 건가? 나 윈스트런을?”

윈스트런의 몸에서 절대자의 위엄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윈스트런의 말처럼 이곳은 에반스의 무의식의 세계였다. 꿈속이란 소리다.

지금 보이는 윈스트런의 모습에 혹해서 그의 말을 전부 신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 에반스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윈스트런이 말했다.

“좋다. 내 말이 사실이란 것을 증명해 보이도록 하지. 우선 내가 너에게 준 능력부터 증명해 보이겠다. 지금 잠에서 깨어나면 밖으로 나가라. 그리고…….”

윈스트런의 설명을 듣고 난 뒤 에반스는 정말 잠에서 깨었다.

“헉!”

휘이이잉!

아직 밤이었다.

사위는 어두웠고, 밖에선 매서운 바람이 불어 댔다. 에반스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단순히 꿈을 치부하고 무시해 버릴 것인가? 아니면 윈스트런이 말한 대로 할 것인가?”

고심하던 에반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결국 윈스트런이 시킨 대로 밖으로 나갔다.

***

파르미르 고원에는 많은 주술사들이 살고 있었다.

수만 년의 세월 동안 주술은 다양하게 발전했다. 하지만 주술사들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큰 주술사들은 역시 어둠의 주술사들이었다.

주술 중에서도 어둠의 주술이 가장 강했으니, 많은 주술사들이 어둠의 주술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런 어둠의 주술사에도 여러 파벌이 존재했지만, 현재 야만족에서 가장 큰 파벌은 역시 우순바가 이끄는 랄트족의 주술사들이었다.

하지만 그에는 조금 못 미치지만 파르미르 고원에서 꽤 인정받고 있는 주술사들이 있었다.

바로 고란족의 주술사들이었다.

고란족의 주술사는 셰르파의 마을 근처에도 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다융. 어둠의 주술사로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자였다.

다융이 셰르파가 사는 마을까지 와서 혼자 살게 된 것은, 바로 셰르파의 마을에 그의 자식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외로워진 다융은 가끔 자식을 보는 낙으로 살고 있었다.

그가 사는 곳은 셰르파 마을에서 몬스터들이 산다고 알려진 동굴이었다. 다융은 그 동굴에 살던 몬스터들을 다 죽이고 그 동굴의 주인이 되었다.

셰르파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동굴 속에 무서운 몬스터가 있다고 여기고 그 동굴 근처는 일체 접근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웬 미친놈이 동굴에 나타났다.

동굴 입구에 걸어 둔 주술을 통해 침입자가 보통 성인 남자임을 안 다융은, 자신의 잠을 깨운 간 큰 남자가 누군지 두 눈으로 직접 보기로 했다.

겁도 없이 동굴 안쪽으로 잘도 걸어 들어온 그 남자에게 다륭이 소리쳤다.

“넌 뭐야?”

당연히 자신을 본 남자를 그냥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던 다융이었다.

그때 그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남자가 말했다.

“혹시 어둠의 주술사요?”

“응? 혹시 나를 아느냐?”

“당신이 어둠의 주술사가 맞다면 나에게 주술을 걸어 보시오.”

허무맹랑한 남자의 말에 다융은 기가 찼다.

“이런 미친놈. 뒈지려면 그냥 밖에서 곱게 얼어 죽을 것이지.”

다융은 그 미친 남자을 향해 한 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다융의 손에서 강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가서 침입자를 덮쳤다.

우우우웅!

“…….”

다융이 조금 전 펼친 주술은 마력이 깃들어 있어서, 보통 사람의 몸쯤은 폭발시켜 갈기갈기 찢어 버릴 위력이 실려 있었다.

그런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저벅저벅!

침입자가 다융에게 걸어왔다. 다융은 이번에 두 손을 내뻗었다.

우우우웅!

앞서 보다 더 강력한 기운이 침입자를 향해 뿜어졌다.

“…….”

그러나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사이 침입자가 다융과 다섯 걸음까지 거리를 좁혀왔다.

다융의 눈에 침입자의 얼굴이 보였다. 침입자 역시 다융의 얼굴을 보고 걷던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다융의 머리꼭지가 돌아 버릴 소릴 내뱉었다.

“정말 어둠의 주술사 맞소?”

“뭐, 뭐라고!”

격분한 다융이 소환술을 펼쳤다. 그러자 동굴 천장의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마계의 괴수 한 마리가 소환되어 모습을 드러냈다.

“쿠어어어!”

곰처럼 생긴 녀석인데 덩치는 곰보다 세 배는 더 컸고, 손톱과 발톱도 훨씬 길었다.

다융이 격분해서 소리쳤다.

“저놈을 찢어 죽여!”

쿼어!

다융의 명령에 괴수가 침입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파파파팟!

생기기는 곰처럼 생긴 녀석이 빠르기는 표범보다 더 민첩하고 빨랐다.

민첩하게 움직이던 괴수가 막 침입자를 향해 앞발을 치켜들었을 때였다.

킁킁!

갑자기 침입자의 냄새를 맡던 괴수가 치켜들고 있던 앞발을 조용히 내렸다.

“헉! 뭐야?”

다융은 할 말을 잊었다.

마계 괴수가 자신을 소환한 주술사의 명령을 듣지 않은 것은, 다융도 지금 처음 보는 것이었다.

에반스는 윈스트런이 시키는 대로 어둠의 주술사가 있다는 동굴로 향했다. 그랬더니 정말 그 안에 어둠의 주술사가 살고 있었다.

반신반의한 에반스가 윈스트런이 말한 대로 어둠의 주술사에게 자신을 공격해 보라고 했다.

과연, 어둠의 주술사가 화를 내며 마력을 사용해서 자신을 공격했다.

그런데 엄청난 풍압과 함께 날아오던 기운이 에반스 앞에 도착하자 순풍이 되어 사라졌다.

내심 대비하고 있던 에반스가 일단 가슴을 쓸어내렸다.

공격이 먹히지 않자 어둠의 주술사가 더 강한 기운을 내뿜었다. 하지만 그 역시 에반스 앞에서 순풍으로 바뀌었다.

아무래도 이상했던 에반스는 상대에게 어둠의 주술사가 맞는지 물었다. 그러자 화를 내던 상대가 대뜸 괴물을 불러냈다.

‘정말 어둠의 주술사가 맞구나.’

소환된 괴물이 에반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에반스는 역시 윈스트런의 말만 믿고 괴물이 덤벼 와도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다.

그러자 자신을 공격하려던 괴물이 갑자기 동작을 멈추고는 에반스에게 다가와서 그의 발을 핥았다. 마치 에반스가 그의 주인이기라도 하다는 듯 말이다.

그것을 보고 에반스는 윈스트런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에반스는 어젯밤 꿈에 윈스트런이 그의 능력을 자신에게 주입시키며 했던 말이 뇌리에 떠올랐다.

-앞으로 그 어떤 부정한 존재도 너를 해칠 수 없을 것이다.

그 부정한 존재가 어둠의 힘을 사용하는 자들이라면, 이제 에반스는 어둠의 주술사들과 그들이 사용하는 주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한마디로, 어둠의 주술사들에게 최악의 천적이 생긴 것이다.

에반스는 자신의 발을 열심히 핥고 있는 괴물을 지나쳐서 반쯤 넋이 나가 있는 어둠의 주술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치며 말했다.

“수고했어.”

그렇게 말한 후, 에반스는 동굴 밖으로 나갔다.

다융은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자기 볼이 떨어져 나가라 세게 꼬집은 다융은 고통에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악!”

그리고 잠시 후, 다융은 불러낸 괴수를 마계로 돌려보내고 동굴을 정리했다.

대충 필요한 짐만 챙긴 다융은 동굴을 버리고 떠났다. 자신의 비밀 거처가 누군가에게 들통 났으니 더 이상 이 동굴에서 살 수 없는 노릇이었다.

괜히 잘 살고 있던 어둠의 주술사의 보금자리를 뺏은 에반스는 흥분한 얼굴로 다시 여관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서는 호흡을 가다듬은 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곧 잠이 든 에반스는 보란 듯이 팔짱을 끼고 있는 윈스트런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어떤가? 이래도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직접 경험까지 했으니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좋습니다. 당신 말을 믿도록 하지요. 그래서 내게 원하는 게 뭡니까?”

“하하하! 이제야 얘기가 되겠군.”

윈스트런은 에반스가 자신의 무덤을 찾아가서 봉인된 자신의 소울 베슬을 찾기를 바랐다.

“그러니까 그 소울 베슬만 찾으면 내게 검공 라마스가 이뤘던 검술의 경지에 올라서게 해 주겠다는 말이지요?”

확실히 유혹적인 제의였다. 에반스가 검공 라마스가 올랐던 검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면 렉터 공작을 배신한 그 제자들 따윈 더 이상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그렇다. 앞으로 닷새 뒤면 넌 나의 소울 베슬을 찾고 검공 라마스가 이룬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윈스트런이 자신 있게 대답하며 음흉하게 웃었다. 에반스는 윈스트런의 말을 믿고 그의 무덤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

다음 날 아침.

셰르파 멜란이 여관에 도착했을 때, 에반스 일행 역시 떠날 준비를 다 갖추고 있었다. 안드레이 공작은 약간 서운한 얼굴로 에반스에게 가서 악수를 청했다.

“여기서 헤어져야겠군. 그동안 고마웠네. 조심해서 돌아가게.”

그런데 에반스는 안드레이 공작이 내민 악수를 받아 주지 않았다. 그리고 힐끗 멜란을 보면서 말했다.

“나도 따라가기로 했네.”

“…….”

생뚱맞은 에반스의 말에 모두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에반스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떠날 채비를 할 때 라일라를 비롯한 일행들 모두 에반스가 너무한다고 생각했다.

압실론 후작성으로 떠나는 것은 안드레이 공작을 배웅하고 나서 해도 되는데 굳이 이렇게 서두를 필요가 있냐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런데 에반스는 안드레이 공작을 따라 파르미르 고원을 올라갈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러지 않아도 되네. 그동안 나를 도운 것만으로도…….”

“아닙니다. 저도 생각해 봤는데 이왕 이렇게 시간을 투자한 거, 끝장을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윈스트런이란 자의 무덤이 어떻게 생겼는지 제 눈으로 봐야겠습니다.”

에반스는 이미 결정을 내린 듯 보였다.

“루크와 시스턴은 따라가고 라일라와 루미나는 여기서 기다리는 게 좋겠어.”

이어지는 말에 루미나가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그러자 안드레이 공작이 루미나를 조용히 잠재워 버렸다.

“그럼 다녀오도록 하지. 루미나가 깨어나면 잘 다독여 줘.”

에반스의 부탁에 라일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알았어요.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에반스는 멜란을 앞장세우고 안드레이 공작과 루크, 시스턴을 데리고 파르미르 고원을 올랐다.

“헉헉!”

고도가 높아지면서 온도가 더 떨어졌고 숨쉬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에반스 일행 중에는 마도사와 5서클의 마법사가 있었다. 안드레이 공작과 루크는 자신들의 몸과 에반스, 시스턴의 몸에 체온 보존 마법을 걸어 주고 수시로 신선한 공기도 제공해 주었다.

하지만 산이 워낙 가파르다 보니 체력적으로 힘든 것은 마법사들도 어쩔 수 없었다. 중간 중간 피로 회복 마법을 걸었지만 그때뿐, 또 얼마 올라가지 않아서 지쳐서 쉬어야 했다.

아무래도 체력에서는 마법사인 안드레이 공작과 루크가 에반스와 시스턴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셰르파 멜란은 마법사들의 도움도 없이 잘도 산을 올랐다.

어느새 꽤 많이 오른 듯, 산 주위로 듬성듬성 눈이 보였다.

그 위를 올려다보자 만년설이 쌓여 있는 고원 지대의 하얀 정상이 눈에 선명히 보였다.

멜란이 해가 빠르게 기우는 것을 보고 뒤쪽 일행들에게 소리쳤다.

“조금만 더 가면 동굴이 있습니다. 안전한 곳이니 그곳에서 쉬었다가 날이 밝으면 고원 정상을 넘도록 하죠.”

“헥헥, 더는 못 가……. 여기서 좀 쉬었다 가…….”

루크가 벌렁 대자로 드러누운 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그 옆의 안드레이 공작 역시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에반스는 여기서 시간을 끌게 되면 목적했던 곳에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에반스가 안드레이 공작을 부축하며 말했다.

“시스턴, 넌 루크를 맡아라.”

그 말에 시스턴이 늘어진 루크를 어깨에 들쳐 멨다. 그 모습을 보고 멜란이 가볍게 웃으며 앞서 산을 올랐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더 산을 오르자 곧 멜란이 말한 동굴이 나타났다.

파르미르 고원에 서서히 어둠이 깔렸다.

셰르파 멜란은 동굴 안에 들어가서 서둘러 불을 피웠다. 동굴은 불과 20여 미터 길이로, 안이 막혀 있는 구조였다. 그러니 멜란의 말처럼 안전한 동굴일 수밖에 없었다.

불을 피우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동굴 안에 온기가 흘렀다. 멜란은 준비해 온 육포를 눈을 녹인 물에 넣고 끓였다. 그리고 위로 호밀 가루를 뿌리자 그럴 듯한 스프가 되었다.

일행은 따끈한 스프로 겨우 시장기를 해결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양이 적었다.

멜란은 적게 먹고도 잘 움직였지만 에반스 일행은 달랐다. 특시 시스턴은 배가 고파서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시스턴이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제가 나가서 먹을 것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때 멜란은 식사를 마친 뒤 바로 잠든 뒤였다.

“같이 가지.”

아무래도 시스턴을 혼자 보내는 것이 걱정된 에반스가 시스턴을 따라나섰다.

“근처만 뒤져 보고 먹을 것이 없으면 그냥 돌아오게. 괜히 헤매다가 길 잃지 말고 말이야.”

안드레이 공작의 말을 뒤로하고, 에반스와 시스턴은 동굴 밖으로 나섰다.

휘이이잉!

파르미르 고원의 밤은 추웠다.

특히 산 중턱을 넘어서서 산 정상을 향해 가는 중간 지점에는 살을 저미는 듯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멜란의 말대로 동굴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큰일 날 뻔했단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동굴을 나서서 10여 분. 주위를 돌아다니는 동안 에반스와 시스턴은 더 돌아다니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이 추위에 먹을 게 있을 리 없지.’

안드레이 공작이 걸어 준 체온 보존 마법이 없었다면 에반스와 시스턴은 지금쯤 고드름처럼 뻣뻣하게 굳어 버렸을지 몰랐다.

에반스가 먼저 손짓으로 동굴 쪽을 가리켰다. 너무 추워서 입조차 벌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시스턴 역시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막 시스턴이 몸을 틀려 할 때였다.

파팟!

뭔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에반스 역시 들었다. 에반스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둠 속에서 야생 요크 한 마리가 산 위로 껑충껑충 뛰어오르고 있었다.

좀 이상하긴 했지만 배가 고팠던 에반스는 재빨리 돌멩이 하나를 주워서 야생 요크를 향해 던졌다.

쌔앵!

에반스가 던진 돌멩이가 매서운 산바람을 뚫고 날아가서 야생 요크의 머리를 맞혔다.

낑!

야생 요크가 애절한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그것을 보고 시스턴이 빠르게 뛰어 올라 쓰러진 야생 요크를 들고 에반스가 있는 쪽으로 다시 내려왔다.

그동안 에반스는 주위를 자세히 살폈다.

이런 생명체가 살기 힘든 곳에 갑자기 혼자 나타난 야생 요크라니, 아무래도 수상쩍은 일이었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의 예민한 기감에도 주위에 생명체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에반스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시스턴이 웃는 얼굴로 야생 요크를 들고 에반스 앞에 나타났다.

“어서 가서 구워 먹죠.”

조금 전까지는 추워서 입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야생 요크를 잡고 나자 무슨 힘이 났는지, 시스턴이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소리쳤다. 에반스도 야생 요크를 보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아무래도 이상했지만 당장 배가 고프니, 다른 생각은 잠시 접고 일단 먹고 보자 싶었다.

“가자.”

에반스와 시스턴이 황급히 동굴 쪽으로 걸어갈 때였다. 눈이 쌓여 있던 산 위쪽에서 눈덩이가 갑자기 움직였다.

부스스스.

그리고 그 눈덩이 속에서 뭔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후, 그곳에서 녹색의 두 눈이 섬뜩하게 빛을 내뿜었다. 그 눈빛은 에반스와 시스턴이 동굴 안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그대로 있다가 그들이 동굴 안으로 사라지자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시스턴은 동굴 입구에서 야생 요크를 해체했다. 그리고 그 고기를 구웠다. 배가 고팠던 에반스와 일행들은 고기가 구워지는 대로 허겁지겁 먹었다.

순식간에 야생 요크 반 마리를 구워 먹어 버린 일행이 포만감에 행복해 할 때, 시스턴이 남은 요크 고기를 정리한 후 잘 포장해서 자신의 배낭에 넣었다.

“내일도 먹어야지요. 또 운 좋게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시스턴의 말을 듣고 뭔가 생각이 난 듯, 에반스가 안드레이 공작에게 말했다.

“이 주위를 좀 살펴 주십시오.”

“왜 그러나?”

“뭔가 좀 이상해서 그렇습니다.”

에반스의 요청에 안드레이 공작은 동굴 주위에서 반경 1킬로미터까지 탐지 마법으로 뭐가 있는지 살폈다. 그리고 잠시 뒤,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이 근처에 생명체는 우리 말고 없네.”,

마도사인 안드레이 공작이 주위에 아무도 없다니, 에반스도 더는 의심하지 않고 잠자리를 폈다.

그렇게 몇 분 뒤, 에반스 일행은 모닥불을 피워 둔 상태로 모두 잠이 들었다.

에반스가 윈스트런의 무덤을 찾아가기로 결정한 뒤, 더 이상 에반스의 꿈에 윈스트런은 나타나지 않았다.

소드 마스터인 에반스였지만 파르미르 고원을 오르는 것이 힘들었던지 꼬박 잠이 들었다.

그가 깨었을 때는 이미 어슴푸레하게 날이 밝고 있었다. 에반스는 불씨가 거의 사라져 가는 모닥불에 불을 살렸다.

그때 멜란이 깨어났다.

“일찍 일어나셨군요.”

에반스에게 아침 인사를 하고 나서 멜란은 곧장 동굴 밖으로 나가 근처 눈으로 세수를 했다. 그리고 어젯밤처럼 눈을 녹이고 육포와 호밀 가루로 스프를 만들었다.

구수한 스프 냄새에 일행들이 하나둘씩 일어났다.

스프로 아침 식사를 마친 일행이 짐을 챙기고 있을 때 멜란이 말했다.

“오늘이 제일 중요합니다. 오늘 우린 저 정상을 넘어야 합니다. 만약 중간에 발이 묶이게 되면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제 말을 잘 따라 행동해 주십시오.”

멜란이 평소와 달리 굳은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하자, 에반스와 일행들도 바짝 긴장한 채 멜란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멜란은 일행이 짐을 다 정리하자 큰소리로 외쳤다.

“정오까지 산 정상에 도착해야 하니 지금부터 휴식 시간 없이 강행군을 할 겁니다. 그럼 바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멜란이 앞장서서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그러자 에반스 일행이 곧장 그 뒤를 따라 하얀 만년설로 뒤덮인 산을 올랐다.

정오까지 거의 다섯 시간을 한 번도 쉬지 않고 산을 오르고 또 올랐다. 그리고 드디어, 고원의 산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비록 파르미르 고원에서 가장 낮은 산맥의 정상이었지만 산을 정복했다는 뿌듯한 느낌에 에반스도, 일행들도 모두 감격에 겨워 서로를 껴안았다.

그때 멜란이 소리쳤다.

“그만 내려가야 합니다. 산사태가 날 수 있으니 가급적 불필요한 말과 행동은 삼가 주십시오.”

에반스 일행의 목적은 파르미르 고원을 넘는 것이지 산 정상에 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멜란의 말에 그 사실을 깨달은 일행은 산을 넘어서 그 아래로 발길을 옮겼다.

그렇게 산을 내려가던 중, 갑자기 앞서 가던 셰르파 멜란이 걸음을 멈추고 뒤쪽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를 보고 체력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에반스가 멜란에게 뛰어갔다.

“무슨 일인가?”

에반스가 다급히 멜란에게 물었다. 그러자 멜란이 손짓으로 자신의 정면을 가리켰다.

“뭔데 그러나…… 헉!”

에반스가 무심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에반스의 입에서 절로 경악성이 흘러나왔다.

하얀 눈밭 위로 붉은 피와 선홍빛의 살점들이 널려 있었다. 그런데 그 속에 사람들의 머리통과 팔다리가 보였다.

“효야 아저씨!”

그때 멜란이 눈밭에 널브러져 있는 머리통 하나를 주워 들며 외쳤다. 아마 잘 아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그 외에도 대략 10여 구의 시신이 눈밭 위에 을씨년스럽게 널려 있었다.

그런 사람들의 시신 위로 산악 독수리들이 날아들어서 때아닌 포식을 즐기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뒤늦게 달려온 안드레이 공작이 경악하며 에반스에게 물었다. 루크와 시스턴도 눈앞에 펼쳐진 참담한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에반스는 널려 있는 머리통과 팔다리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강력한 힘에 머리통과 팔다리가 통째 뜯겨 나갔습니다.”

“허어……! 그 정도 힘이면 오거와 비슷하겠군.”

안드레이 공작의 말에 멜란이 퍼뜩 뭔가 생각난 듯 외쳤다.

“서, 설마 스노우 맨?”

“스노우 맨이라니?”

안드레이 공작이 멜란을 쳐다보자 멜란이 말했다.

“파르미르 고원의 만년설에 사는 설인들을 스노우 맨이라고 부릅니다. 덩치는 보통 인간의 세 배에 온몸은 하얀 털로 뒤덮여 있고, 매번 산을 옮겨 다니며 사냥을 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힘도 세고 머리도 좋아서 파르미르 고원의 먹이 사슬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는 종족입니다.”

멜란의 말에 에반스가 눈밭에 널려 있는 시신들을 보며 말했다.

“적어도 사람을 사냥하진 않는 모양이군. 찢어 죽이긴 해도 먹지는 않은 것을 보니 말이야.”

에반스는 눈밭의 참상을 저지른 것이 스노우 맨의 소행이라 단정 지으며 말했다.

“네. 설인들은 자신들과 같이 두 발로 서서 다니는 인간은 사냥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위험에 처하면 구해 주기도 하는, 비교적 인간들에게 우호적인 종족들입니다.”

“그런데 왜 스노우 맨들이 인간들을 이렇게 참혹하게 죽였을까?”

안드레이 공작 역시 에반스와 같이 사람들을 찢어 죽인 흉수가 스노우 맨들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에반스와 안드레이 공작은 눈밭에서 인간이 아닌 두 발로 직립하는 존재의 발자국과 현장 주위에 떨어져 있는 하얀 털을 발견했다. 두발로 걷는 하얀 털의 존재라면 멜란이 말한 스노우 맨이 틀림없었다.

그때였다. 에반스가 일행들의 뒤쪽을 쳐다보며 감탄사를 터트리며 말했다.

“오오! 이거 정말 놀랍군.”

에반스의 감탄에 안드레이 공작이 에반스의 시선을 쫓아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안드레이 공작 역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아! 어떻게…….”

그때 두 사람의 반응에 다른 일행들이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헉! 저, 저들은……!”

“맙소사! 스노우 맨!”

일행들은 인간의 세 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체구에, 온몸이 하얀 털로 뒤덮인 설인들을 발견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때 다른 일행들과 달리 에반스는 소드 마스터인 자신의 기감에 들키지 않고 신비하게 모습을 드러낸 설인에 놀라고 있었고, 마도사인 안드레이 공작 역시 만약을 위해 걸어 둔 탐지 마법에 걸리지 않고 자신의 눈앞에 버젓이 나타난 설인들에 놀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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