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자정을 넘기면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만찬장을 빠져나가며 저녁 만찬도 서서히 파장 분위기로 접어들었다.
다섯 귀족들 중 앨빈과 케이런은 피곤하다며 벌써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고, 페이슨과 테이거도 막 술잔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때 데보라가 에반스에게 다가갔다.
“후작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심각한 표정의 데보라를 보고 에반스가 말했다.
“네. 말하세요.”
“여기서는 곤란하고 조용한 곳으로 가죠.”
데보라의 말에 에반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만찬장의 발코니 쪽으로 데리고 갔다. 차가운 밤공기를 맡으며 에반스가 말했다.
“할 말이 뭡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데보라의 갑작스런 물음에 에반스는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네?”
“제가 여자로 매력이 없나요?”
데보라 정도면 트렌시아 제국의 일등 신부감이었다. 아름다운 외모에 가문도 대단하지, 뭐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레이디였다. 하지만 그 능력이 너무 출중한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일 수 있었다.
보통 남자로는 소드 마스터인 그녀를 감당해 낼 리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략적으로 봤을 때 결혼과 동시에 소드 마스터 한 명을 얻게 되니, 그녀와 결혼하기를 원하는 대단한 가문의 자제들이 줄을 서 있는 실정이었다.
데보라는 적어도 에반스가 자신을 싫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착각이었다.
“그렇게 물으시니 사실대로 대답하지요. 데보라 양은 분명 매력적인 레이디입니다. 하지만 저는 별 관심이 없군요.”
“뭐, 뭐라고요?”
데보라는 너무 기가 막혀서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그녀를 싫다는 남자는 없었던 것이다. 그 잘난 제국의 황태자도 데보라에게 관심을 보였는데 지방 제후 따위에게 차였으니, 그녀의 심정은 가히 비참하기까지 했다.
“저와 데보라 양이 서로 인연이 아닌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제 말을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진 마십시오.”
에반스의 말에 데보라가 억지로 웃었다.
“호호호, 물론이에요. 저도 싫다는 사람에게 매달리는 그런 여자는 아니에요.”
그렇게 말한 후, 데보라는 싸늘하게 뒤돌아섰다. 그리고 곧장 만찬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데보라가 나가자 남아 있던 페이슨과 테이거도 만찬장을 나갔다.
다섯 귀족들이 모두 만찬장을 나가자 에반스는 만찬장의 주인인 라르손에게 만찬을 끝내라고 한 후, 그 역시 밖으로 나섰다.
“아, 영주님.”
만찬장을 나서 귀빈실로 향하려는데 막 루미나를 재우고 나온 시스턴이 에반스를 불렀다.
“만찬은 끝난 모양이군요?”
시스턴의 물음에 에반스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방금 끝났네. 루미나는 자나?”
“네. 좀 전에 잠들었습니다.”
“루미나가 선배 노릇을 하려 든다지?”
시스턴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루미나가 비록 어리지만 그 아이에게 배울 점도 있을 거야.”
“알고 있습니다. 처음엔 그저 귀엽게만 여겼는데 지금은 다릅니다. 그녀는 제게 소중한 선배입니다.”
시스턴의 말에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인 에반스가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그런 에반스를 향해 시스턴이 허리를 숙였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시스턴은 에반스가 방에 들어가고 나서야 숙였던 허리를 폈다. 그리고 존경스런 표정으로 잠시 에반스의 방을 쳐다보다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날이 밝자 다섯 귀족 일행은 파르미르 고원의 남쪽 숲으로 떠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들이 곧 떠날 거라는 소식을 듣고 에반스는 루미나와 시스턴을 데리고 그들을 배웅 나갔다.
“조심해서 다녀오시오.”
에반스가 다섯 귀족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안드레이 공작과 루크가 영주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앙리, 잘 있어.”
데보라가 그나마 가장 친했던 안드레이 공작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안드레이 공작도 다섯 귀족들이 남쪽 숲으로 떠난다는 말을 듣고 그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잘 다녀오라는 말을 전했다.
어제 일 이후, 데보라는 시종일관 에반스에게 쌀쌀맞게 대했다. 자신에게 관심 없는 남자는 데보라도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영주인 에반스와 작별 인사까지 하자 떠날 준비가 완전히 끝났다.
귀족들을 남쪽 숲으로 안내할 관리가 앞장서서 움직였다. 곧 다섯 귀족들은 영주관을 벗어나서 카라스 영지성의 성문 쪽으로 움직였다.
그때 문득 케이런이 앨빈에게 말을 건넸다.
“저 젊은 후작 말이야. 왠지 기분 나쁘지 않아?”
케이런의 말에 앨빈도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악수 할 때도 기분이 좀 더럽더군.”
다섯 귀족들은 에반스가 직접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할지 모르는 제거 대상들이었다. 살심을 억제한다고 했지만, 그것이 완전히 숨겨지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에반스가 그들보다 한 단계 이상 수준이 높았기 망정이지, 자칫 그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켰을지도 몰랐던 위험천만했던 순간이었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다들 그런 거야?”
뒤쪽의 페이슨도 거들고 나섰다.
그때 테이거가 힐끗 데보라를 쳐다보았다. 어제 저녁 데보라와 에반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데보라가 에반스에게 차였다는 사실은 테이거만 알았다. 어젯밤 잔뜩 화가 난 데보라를 테이거가 겨우 다독였던 것이다. 테이거는 혹시나 하고 데보라를 살폈지만 데보라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우리에게 호의를 베푼 건 사실이잖아. 그러니 기분 더럽더라도 참아. 더 이상 볼일도 없잖아?”
데보라가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그 말에 나머지 네 명의 귀족들도 동의하는지, 더 이상 에반스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다섯 귀족들이 카라스 영지성을 벗어나서 파르미르 고원의 남쪽 숲으로 이동할 무렵, 에반스는 심각한 표정의안드레이 공작과 마주 앉아 있었다.
“야만족들에게 윈스트런이 그렇게 대단한 존재였단 말이지요?”
“그래. 천 년 전 윈스트런은 대륙의 지배자였던 셈이지.”
에반스도 윈스트런의 진정한 정체를 알고는 많이 놀란 표정이었다.
“그런 윈스트런의 무덤과 드워프의 검이 관련이 있단 말이지요?”
“응. 그래서 말인데…….”
안드레이 공작은 에반스에게 드워프의 검을 좀 더 살펴봤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려다가 결국 하지 못했다. 에반스도 안드레이 공작이 하려는 말이 뭔지 알면서 그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자 그냥 모른 척했다.
에반스는 드워프의 검만 생각하면 이상하게 그 검을 누구에게도 줘선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왜 그런지 그 이유까지 생각하진 못했다.
파르미르 고원은 하르메니안 대륙의 등줄기로 대륙을 남북으로 양분하는 기준이기도 했다. 대륙에서 가장 긴 카르카스 산맥과 가장 큰 호수인 파로스 호수, 그리고 가장 큰 강인 유프라스 강도 바로 이 파르미르 고원에 위치해 있었다.
대륙에서 가장 장엄한 지형을 가지고 있는 파르미르 고원의 정상은 항상 만년설로 뒤덮여 있었다.
다섯 귀족 일행들이 카라스 영지를 떠난 후, 에반스 일행도 파르미르 고원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그 다음 날, 바로 카라스 영지를 떠났다.
카라스 영지의 영주인 라르손은 자신의 신부를 데려간다고 푸념을 늘어놓았지만, 카라스 영지에서 파르미르 고원까지는 그리 먼 거리도 아니었다.
따라가겠다는 라르손을 라일라가 억지로 떼어 놓고서야 에반스 일행은 파르미르 고원을 향해 출발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이틀 정도 가자 만년설이 쌓여 있는 파르미르 고원이 웅장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이틀만 더 가면 셰르파가 있는 곳에 도착할 거예요.”
라일라의 말에 에반스 일행은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에반스와 안드레이 공작 사이는 또다시 서먹서먹해졌다.
안드레이 공작은 눈치를 주었음에도 에반스가 드워프의 검을 보여 주지 않자 그것이 괘씸해서 말을 걸지 않았고, 에반스 역시 말을 하다 보면 안드레이 공작이 드워프의 검을 보자고 할지 몰라서 일부러 대화를 피했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은 이틀 동안 서로에게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 때문에 답답한 것은 그 주위 사람들이었다.
특히 루크와 라일라가 답답해 하며 어떻게든 두 사람을 화해시켜 보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에반스는 여정 중 주로 루미나와 시스턴에게 검술을 가르쳤고, 안드레이 공작은 윈스트런에 이어서 고대 바바리안들에 대해 연구했다.
그렇게 일행이 파르미르 고원 아래 한 작은 마을에 도착했을 땐 이미 사위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길을 안내하던 라일라가 일행들에게 소리쳤다.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파르미르 고원을 오르도록 하죠.”
에반스 일행이 머물기로 한 마을은 십여 가구밖에 살지 않는, 마을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곳이었다.
원래 이 근처에는 마을이 없어서 보통은 야영을 해야 했지만, 라일라가 예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 발견했던 이 작은 마을을 기억하고 있어서 다행히 밤이슬을 맞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 중 라일라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어서 일행은 그 사람의 집을 통째로 빌릴 수 있었다.
집은 그리 크지 않은 통나무집이었지만 에반스 일행이 휴식을 취하는데 지장은 없었다. 루미나와 시스턴이 장작을 구해 오자 루크가 모닥불을 피웠고, 라일라가 음식을 만들었다.
따뜻한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나자 노곤하니 잠이 쏟아졌다. 아무래도 고지대다 보니 알게 모르게 피로가 쌓여 있었다.
루미나와 라일라가 먼저 곯아떨어지고 뒤이어서 루크와 시스턴이 잠들었다.
휘이이잉!
바깥에는 매섭게 바람이 불었지만 따뜻한 집안에 있는 일행에게는 고즈넉한 밤이었다.
곧 모두가 잠들고 에반스와 안드레이 공작,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왠지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그나마 안드레이 공작은 책이라도 보는 척 했지만, 에반스는 멀뚱하니 할 짓도 없었다.
결국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에반스가 집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칼바람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끼며, 에반스는 잠시 집 밖을 걸었다.
그때, 밤하늘에서 별똥별이 떨어졌다.
“아……!”
진귀한 광경에 에반스가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부스럭!
에반스의 귀에 인기척이 들렸다.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자 마을 촌장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나타났다.
“추운데 왜 밖에 나와 있는 거요?”
“아, 네. 잠깐 바람 좀 쐴까하고요.”
“잘 됐네. 내 일 좀 거들어 주시겠소?”
순박한 마을 촌장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에반스는 그와 함께 마을 바깥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울타리가 처져 있었는데, 그 안에 마을 사람들이 방목해서 키우는 요크(산악 지역에 사는 염소)들이 있었다.
“가끔 퓨마들이 요크들을 노리고 여기에 나타나곤 하지요.”
그렇게 말한 마을 촌장은 울타리 옆 창고로 가서 죽은 요크의 시체를 꺼내 울타리 밖 어두침침한 곳에 던져 두었다.
“뭐하시는 겁니까?”
“퓨마가 먹으라고 던져 둔 거요.”
“네?”
에반스는 잘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마을 촌장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마을 촌장이 사람 좋은 얼굴로 말했다.
“퓨마들도 배가 고플 거 아니오. 죽은 요크가 없을 땐 어쩔 수 없지만 녀석들에게 줄 먹이가 있으니 나눠야 하지 않겠소.”
마을 촌장의 말을 들으며, 에반스는 가슴 한편이 훈훈히 지는 것을 느꼈다.
***
파르미르 고원은 방대한 만큼이나 비밀스러운 곳도 많은 곳이었다.
학자들은 파르미르 고원에 수많은 고대 유적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학자들이 본격적으로 유적 탐사에 나서지 못하는 것은, 그곳이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파르미르 고원의 산악 지대에는 천연 동굴들이 많았다. 그 동굴들은 얼마 들어가지 않아 막힌 곳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동혈들이 대부분이었다. 해서 야만족들도 혼자서는 절대 동굴 속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동굴 속에는 다양한 몬스터들이 서식했고 그놈들은 대부분 인간을 먹이로 잡아먹는 포식자들이었다.
파르미르 고원 너머 천연 동굴들이 유독 많은 지역에서도 눈이 쌓이지 않은 황무지가 듬성듬성 보이는, 사방에는 사람 키만 한 잡초들이 우거진 그곳에 거대한 동굴의 입구가 보였다.
그때 길을 잃은 듯한 요크 한 마리가 동굴 입구에서 서성대다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슈슈슈슝!
퍼퍼퍽!
캬아앙!
무언가 쏘아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가냘픈 요크의 울음소리가 동굴 속에서 들리고 잠시 후, 주위는 쥐죽은 듯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동굴 안쪽에는 인위적으로 만든 벽이 보였고, 그 벽에는 규칙적인 홈이 파여 있었다. 자세히 보면 그 홈 속에 날카로운 화살촉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바닥에는 조금 전 요크가 흘린 것으로 보이는 핏자국이 보였다. 그리고 그 벽면 반대쪽에는 고슴도치 마냥 그 몸에 화살을 빽빽이 박고 죽은 요크가 보였다.
동굴 안은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었다.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동굴 속 통로는 지하로 이어져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도 넘게 지하로 이어진 통로를 따라 이동하다 보면 제법 널찍한 광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장까지 높이만 10미터는 족히 되었고, 그 크기는 웬만한 귀족 저택이 들어서도 될 만큼 넓었다. 사방 벽은 모두 커다란 암석을 반듯하게 자른 뒤 서로 엇갈리게 쌓아 만들었는데, 이끼가 잔뜩 낀 모습으로 보아 이미 오래전에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지하 광장 저편에는 녹슬어 보이는 육중한 철문 하나가 있었다. 그 철문이 열리면 다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는데, 그 계단 아래에 위치한 석실이 바로 랄트족 주술사들의 아지트였다.
우순바는 검을 찾아오라고 제자들을 보냈는데 며칠이 지나도 소식 하나 없자 불같이 화를 냈다.
“이놈들이 대체 뭐하느라고 아무 소식도 없단 말이냐?”
우순바는 직접 제자를 거뒀다. 그리고 개별적으로 그들에게 주술을 가르쳤다. 때문에 우순바의 제자들에겐 동문 간의 우애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쟁하는 관계로,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우순바에게 귀여움을 받는 제자는 더 많은 주술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니 그런 제자 일수록 더 강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 와!”
우순바의 명령에 주술사들이 분주히 지하 석실 내부를 움직였다.
그렇게 하루의 시간이 흐른 뒤, 우순바는 자신이 보낸 10명의 제자들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뭐라고? 열 명이나 우르르 몰려가서 고작 검 하나 찾아오는 일도 못하고 뒈지다니, 이 쓰레기만도 못한…….”
제자들이 10명이나 죽은 마당에 스승이란 자가 슬퍼하긴커녕,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한참을 씩씩대던 우순바가 큰소리로 외쳤다.
“루브카! 어서 루크카를 불러와라!”
잠시 후, 우순바 앞에 역시나 검은 로브에 후드를 덮어쓴 음침한 분위기의 중년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찾으셨습니까. 스승님.”
중년 남자가 우순바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어서 오너라. 루브카.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생겼다.”
우순바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우순바가 가장 믿고 신뢰하는 제자는 다섯뿐이었다.
루브카는 바로 그 다섯 제자 중에서 한 명이었다. 루크카는 고위 어둠의 주술사로서 우순바와 같이 소환술에 능하고 특히 독을 다루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인물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루브카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너도 들었을 것이다. 검을 찾으러 제자들을 세상으로 내보냈다는 것을 말이다.”
“열 명이나 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멍청이들이 다 죽었다는구나.”
우순바의 말에 루브카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들 10명은 어둠의 주술사로서 그리 강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도 엄연히 어둠의 주술사였다. 소드 마스터나 마도사급 마법사가 아니고서는 어쩌지 못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10명이나 한꺼번에 죽었다니, 결코 가볍게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상대가 누군지 궁금하군요.”
루브카가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그 일을 네가 맡아 줘야겠다. 그리고 뭐가 중요한지는 너도 잘 알겠지? 어떤 일보다 검을 찾는 것이 우선이다. 그 점 명심하고.”
“네. 스승님.”
간단히 대답을 마친 루브카가 등을 돌려 석실 밖으로 나갔다. 그런 루크카를 보면서 우순바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루크카라면 그 검을 내게 가져다 주겠지. 으음, 그러고 보니 윈스트런이 죽은 날이 며칠 남지 않았군.”
작게 중얼거린 우순바의 모습이 어둠의 장막 속으로 사라졌다.
***
에반스가 마을 촌장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어둠 속에서 뭔가가 나타났다. 그리고 음지에 있던 요크의 시체를 물고 사라졌다. 그것을 보고 마을 촌장이 만족스런 얼굴로 에반스에게 말했다.
“다 됐네. 이제 가세.”
“네? 하지만 퓨마가 더 있을 수 있잖습니까?”
“물론 더 있지. 하지만 이 울타리 속의 요크들을 잡아먹을 수 있는 퓨마는 한 마리뿐이라네. 그 녀석이 먹이를 물고 갔으니 더 이상 피해는 없는 거지.”
“아!”
아마 퓨마 간에도 세력권이 있는 모양이었다.
즉, 조금 전 요크를 물고 간 퓨마가 인근에서 가장 강한 녀석으로, 녀석이 시퍼렇게 눈뜨고 있는 한 다른 퓨마들은 울타리 안의 요크를 감히 노릴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에반스는 마을 촌장을 따라다시 마을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마을 촌장이 에반스에게 말했다.
“수고했는데 따뜻하게 데운 요크 젖이라도 한잔 마시고 가게.”
“아, 네.”
에반스는 마을 촌장을 따라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마을 촌장이 뜨거운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나무 잔을 에반스에게 건넸다.
에반스는 그 잔을 받아서 한 모금 마셨다. 요크 젖은 처음엔 비릿한 냄새가 강했지만 입안으로 들어가자 고소한 맛과 함께 스르르 목으로 넘어갔다.
“맛이 어떤가?”
“맛있습니다.”
에반스의 대답에 마을 촌장은 이빨을 드러내면서 기분 좋게 웃었다. 그때 에반스가 집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혼자 사십니까?”
에반스의 물음에 웃고 있던 마을 촌장의 얼굴빛이 갑자기 우울하게 변했다.
“처음부터 혼자였겠나. 몇 년 전 불의의 사고로 가족들을 모두 잃었네.”
“어쩌다 그런……. 죄송합니다. 제가 아픈 기억을 들춘 것 같군요.”
“괜찮네. 어차피 죽으면 다시 만날 수 있지 않겠나.”
모든 것을 달관한 듯 보이는 마을 촌장의 얼굴을 보면서 에반스는 왠지 가슴이 뭉클했다. 그때 마을 촌장이 에반스를 보고 말했다.
“너무 아등바등 살지 말게. 어차피 맨손으로 태어나서 맨손으로 떠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지 않나?”
그 말을 듣고 에반스가 싱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 바쁘다는 핑계로 그동안 자신을 너무 돌아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마을 촌장이 모닥불을 보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 년 전인가, 늙은 수도사가 여기를 찾은 적이 있었지. 당시 이곳 사정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어. 세끼 먹기도 빠듯했으니 말이야. 손님은 잘 대접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지만, 나도 내일 먹을 것은 있어야 하니 먹을 것을 조금 밖에 내어 주지 않았어. 그러자 그 음식을 먹고 난 늙은 수도사가 갑자기 웃으며 자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내게 해 주더군. 그때 그가 한 말이 꽤나 인상적이었지.”
잠시 뜸을 들인 후, 마을 촌장이 계속 말했다.
“자신의 젊은 시절, 그가 막 수도자의 길을 걷겠다며 수도원을 찾았을 때라고 했었지, 아마. 그때 그 수도원의 원장이 그에게 물었다더군. 금화 세 개가 지금 수중에 있다면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겠느냐고 말이야? 당시 그는 금화 세 개 모두를 가난한 사람에게 주겠다고 대답했다네. 그러자 수도원의 원장이 다시 은화 세 개가 있다면 어쩌겠느냐고 물었고, 그는 주저 없이 그 은화 세 개도 가난한 사람에게 주겠다고 말했네. 마지막으로 수도원의 원장이 동전 세 개가 수중에 있다면 어쩌겠냐고 물었는데, 그때 그는 대답을 주저했다고 하네.”
“네? 금화도, 은화도 다 주겠다던 사람이 고작 동전 세 개에 대답을 주저했다고요?”
에반스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마을 촌장을 쳐다보자 마을 촌장이 웃으며 말했다.
“그는 고심 끝에 수도원의 원장에게 그 동전 세 개는 줄 수 없다고 대답했다네. 그가 그렇게 대답한 이유는 실제 그의 수중에 동전 세 개 밖에 없었기 때문이네. 그는 우리가 갖지 못하는 것은 나눌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가진 것은 나누지 못하는 것이 우리 본심이 아니겠냐고 해맑게 웃더군. 부끄러워진 나는 내일 내가 먹을 음식을 그 늙은 수도사에게 내주었다네.”
“아!”
그 말을 듣고 에반스의 입에서 절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자신이 드워프의 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이 탐욕스런 욕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리석었다. 검 하나 때문에 장작 중요한 사람을 잃을 뻔했구나.’
깨달음을 얻은 듯 편안해 보이는 에반스의 얼굴을 보고 마을 촌장이 조용히 웃었다.
마을 촌장의 집을 나선 에반스는 일행들이 묵고 있는 집으로 곧장 향했다.
그리고 집 안으로 들어가서 아직 자고 있지 않은 안드레이 공작에게 다가갔다.
“그동안 미안했습니다.”
에반스는 사과와 함께 귀 속에 끼워 두었던 드워프의 검을 빼내서 안드레이 공작에게 건넸다.
에반스가 드워프의 검을 내놓자 안드레이 공작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왜 내게 검을 내주는 건가?”
안드레이 공작의 물음에 에반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누는 기쁨을 알았다고 할까요?”
안드레이 공작은 그게 무슨 소리냐며 에반스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에반스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깔아 둔 자신의 잠자리로 가서 그 어느 때보다 밝은 얼굴로 잠들었다.
드워프의 검을 만든 것은 드워프의 왕인 쿠레거였고, 그 검에 마법 문양을 새긴 것은 엘프족의 족장인 히메데스였다. 그리고 프로세우스는 신성력을 주입시켰다.
이렇듯 자신의 무덤을 봉인할 열쇠인 검에 대해 윈스트런은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사실과 달리 윈스트런은 그 검에 자신의 능력을 주입시켰다. 단지 그 검에 특별한 금제를 가했기 때문에, 그 금제가 풀리기 전까지 그의 능력은 사용할 수 없을 뿐이었다.
윈스트런은 그 검에 주술을 걸어 두었다. 바로 그 검에 대한 욕심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주술 말이다. 즉, 검에 대한 소유욕을 버리지 못하는 한, 윈스트런이 가해 놓은 금제는 풀리지 않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에반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드워프의 검을 수중에 넣고 나서, 에반스는 줄곧 드워프의 검을 누가 훔쳐가지 않을까, 혹은 누군가에게 빼앗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그래서 드워프의 검의 크기를 줄여서 귀 속에 끼워 넣고 다니기까지 했었다.
그런 에반스가 한 마을 촌장의 도움으로 깨달음을 얻었고 검에 대한 욕심을 버림으로써, 윈스트런이 걸어 놓은 금제가 풀리게 되었다.
에반스는 꿈을 꾸었다.
그 꿈속에서 하얀 로브를 입은 머리와 수염까지 온통 흰색인 덩치 큰 인물이 에반스에게 말했다.
“반갑다. 연자여. 나는 윈스트런이라고 한다.”
“윈스트런?”
에반스가 깜짝 놀라자 윈스트런에 에반스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나의 금제를 풀었으니 내 능력을 너에게 심어 주겠다.”
“다, 당신의 능력이라니요?”
“앞으로 그 어떤 부정한 존재도 너를 해칠 수 없을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윈스트런이 손에서 밝은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크윽!”
에반스는 너무 눈부셔서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때 라일라의 목소리가 에반스의 귓가에 들려왔다.
“해가 뜬 지가 언젠데 아직 자고 있어요?”
에반스가 천천히 눈을 뜨자 일행들이 자신들 내려다보고 있었다.
에반스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윈스트런은 보이지 않았다.
‘꿈을 꾼 모양이군.’
꿈이라기에는 너무도 생동감 있었기에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차린 에반스가 펼쳐 놓은 잠자리를 정리했다.
아침 식사를 한 후, 일행은 파르미르 고원을 오르기 위해 그 작은 마을을 떠났다.
떠나기 직전 에반스는 자신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해 준 그 마을 촌장을 찾아갔지만, 마을 촌장은 일하러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별수 없이 작별 인사도 뒤로 미루고, 에반스와 일행은 비탈진 파르미르 고원을 올랐다.
그렇게 해발 천여 미터를 올라가고 나서야 셰르파들이 사는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히 해가 지기 전인 오후라 에반스와 일행은 마을의 유일한 여관에 먼저 방을 잡았다.
일행들이 짐을 풀며 휴식을 취할 때 라일라는 셰르파 멜란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 멜란은 그의 집에 있었다.
“반가워요. 멜란.”
라일라를 보고 멜란이 생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열 달 안에 오신다더니, 전 영영 안 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미안해요. 많이 늦었죠?”
“뭐, 이 년이면 그리 늦은 건 아니죠.”
멜란은 라일라가 주고 간 20개의 금화로 요크를 사서 제법 돈을 벌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제는 위험한 셰르파 일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안드레이 공작은 자신의 제자가 드워프의 검을 가져온 그곳이 어딘지 꼭 가야 한다고 설쳤다.
그곳이 바로 윈스트런의 무덤일 거라고 하면서 말이다.
라일라는 일단 일행들이 있는 여관으로 멜란을 데리고 갔다.
***
우순바의 명령을 받고 아지트를 빠져나온 루브카는 10명의 주술사들의 행적을 쫓아서 패런 영지성에 이르렀다.
북쪽 숲에서 어둠의 주술사들이 죽은 자들을 깨우려 한 흔적과, 영주관에서 있었던 검은 로브를 입은 수상한 자들이 귀빈들을 습격했다는 얘기를 들은 루브카는, 10명의 주술사들이 바로 이곳, 패런 영지성에서 죽었음을 알 수 있었다. 루브카는 패런 영지성 내에서 가장 유명한 술집으로 들어갔다.
시간은 오후로 접어들어서 술집 안은 한산한 편이었다. 검은 로브에 후드를 덮어쓴 루브카의 등장에 술집 안의 시선이 잠시 루브카에게 집중되었다.
대낮에 후드로 얼굴을 숨길 이유는 얼굴이 보기 흉하던지, 아니면 정체를 숨길 필요가 있던지 둘 중 하나였다.
술집 주인과 종업원은 그 어떤 경우든 루브카가 그냥 도로 나가 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들의 염원과 달리 루브카는 술집 한가운데 테이블에 앉았다. 별수 없이 종업원이 루브카에게 주문을 받았다.
“뭘 드릴까요?”
“시원한 맥주와 훈제 오리 한 마리.”
후드 안에서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종업원은 루브카가 늦은 점심을 먹으려 하는 줄 알고 서둘러 주문한 맥주와 훈제 오리를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이 수상쩍은 남자가 어서 빨리 먹고 나가 주길 바랐다.
하지만 루브카는 천천히 맥주를 마시고 느긋하게 오리 고기를 먹었다.
그렇게 그가 한 시간가량 죽치고 있을 때였다.
덜컹!
술집 문이 열리고 남자 셋이 들어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을 보고 술집 주인과 종업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일대에 악명 높은 건달들이 찾아온 것이다.
“어이~ 장사 잘 되나?”
건달 두목 녀석이 친한 척 손을 흔들자 술집 주인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 그저 그렇습니다.”
“그저 그래서야 되나? 뭐 어려운 일 있으면 말 만해.”
그렇게 말하면서 건달 두목이 한 손을 내밀었다. 술집 주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은화 두 개를 건달 두목 손에 쥐어 주었다. 은화를 보고 건달 두목의 얼굴이 미소가 어렸다.
“크음, 목이 좀 칼칼하군. 맥주 좀 내오지?”
건달 두목의 말에 술집 주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돈을 줬으면 조용히 사라질 것이지 술까지 공짜로 처먹겠다는 심보가 아닌가?
뭐라고 말을 하려던 주인이 이내 포기하고 종업원에게 눈짓을 보냈다.
종업원이 맥주 세 잔을 내어주자 건달이 맥주를 받아서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때 건달들의 눈에 루브카가 눈에 띠었다.
“뭐야? 갑갑하게 뭘 뒤집어쓰고 다니는 거야?”
건달 중 하나가 루브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막 루브카가 쓰고 있던 후드를 벗기려 할 때였다.
“컥!”
갑자기 건달이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눈과 코, 입에서 피를 주르르 흘렸다.
털썩!
그대로 쓰러진 건달은 죽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헉!”
놀란 나머지 건달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검은 로브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가, 가 봐.”
그때 건달 두목이 부하 건달을 쓰러진 건달 쪽으로 떠밀었다. 떠밀린 건달은 쓰러진 동료 건달에게 조심스레 다가가서 상태를 살폈다.
“주, 죽었다! 사, 살인이다!”
동료 건달의 죽음을 확인한 건달이 소리쳤다.
그때였다. 그 건달의 귀에서 피가 흘렀다. 이어 코피까지 흘리더니, 입에서 한 움큼의 피를 토했다.
“으으으으……! 사, 살려줘…… 컥!”
공포에 떨던 건달이 이내 죽은 동료 위에 몸을 포갰다. 건달 두목은 부하 건달 둘이 피를 흘리며 죽는 것을 보고 기겁해서 술집 밖으로 달아났다.
루브카가 원한 것은 자신에게 시비를 걸어 줄 자였다. 그 대상이 누가 되던 상관없었다. 몇 명 죽여 놓으면 영지성의 관리나 병사들이 달려올 것이고, 루브카는 바로 그들에게 물을 것이 있었다.
건달 둘을 독에 중독시켜 죽여 놓자 곧 병사들이 달려왔다.
“저, 저깁니다.”
달아났던 건달 두목이 병사들을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꼼짝 마라!”
병사 네 명이 루브카를 빙 둘러싸며 외쳤다. 그러자 루브카가 병사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최근래에 여기 나처럼 검은 로브에 후드를 쓴 자를 본 사람?”
“무슨 헛소리…… 컥!”
병사 중 한 명이 들고 있던 창을 떨어트리고 목을 움켜쥐었다. 이윽고 얼굴이 시커멓게 변한 병사가 맥없이 쓰러졌다.
루브카가 남은 세 병사를 둘러보며 말했다.
“최근 나처럼 검은 로브에 후드를 쓴 자를 본 적이 있는 사람?”
싸늘한 어투가 병사들에게 향했다.
그렇게 잠시 후, 두 명의 병사가 더 쓰러지고 혼자 남은 병사가 바들바들 몸을 떨며 루브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니까, 영주의 명령으로 그자들의 시신을 태워서 묻었단 말이지?”
“그, 그렇습니다.”
병사가 공손히 대답했다.
“그곳이 어디지?”
병사는 10명의 주술사들의 시신을 태워 묻은 곳을 루브카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그 얘기를 모두 듣고 난 루브카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무런 말없이 술집 밖으로 나갔다.
“휴우…….”
그러자 살아남은 병사와 건달 두목, 그리고 술집 주인과 종업원이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술집 주인은 종업원의 코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봤고, 종업원은 술집 주인의 귀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봤다.
또 병사는 건달 두목의 눈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건달 두목은 병사의 입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목격했다.
털썩!
더 이상 술집 안에 살아 있는 생명체는 없었다. 자신을 본 목격자들까지 처리한 루브카는 10명의 주술사들을 태워 묻었다는 곳으로 바로 움직였다.
쾅!
폭발과 함께 땅이 움푹 파였다. 루브카는 땅속에서 불에 탄 시신 10구를 찾아냈다.
시신들이 걸치고 있는 타다만 검은 로브는, 분명 어둠의 주술사들의 로브가 맞았다.
그때 루브카의 입에서 주문이 흘러나왔다.
죽은 자에게 영혼을 불어 넣는 것이다.
투툭, 투툭!
10구의 시신이 몸을 일으켰다. 불에 타서 시신이 심하게 훼손되었지만, 루브카는 시신들이 대부분 검에 베여 죽었음을 알 수 있었다.
“소드 마스터의 짓인가?”
어둠의 주술사를 이렇게 깨끗이 벨 수 있는 존재는 소드 마스터뿐이었다.
하지만 의문이 들었다.
10명이나 되는 어둠의 주술사를 소드 마스터 혼자서 다 베어 죽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막말로 10명이 줄을 서서 차례차례 소드 마스터를 상대로 싸웠다면 모를까 말이다.
적어도 한두 명은 이곳에서 탈출해서 아지트에 상황을 알려야 했다.
그런데 10명이 모두 당했다. 그 말은 소드 마스터가 한두 명이 아니란 소리였다.
“허어, 이거 황당하군. 상황을 봐서는 소드 마스터가 적어도 대여섯 명은 됐다는 얘긴데.”
한 명도 구경하기 어려운 소드 마스터가 대여섯 명씩 뭉쳐 다닌다는 게 어디 말이 되는가?
괜히 조사했다가 머리만 아파진 루브카는 주술사들을 다시 땅에 묻었다. 그리고 당시 영주관에 머물렀던 자들이 카라스 영지로 갔다는 얘기를 듣고, 그 자들의 뒤를 쫓아 카라스 영지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