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5 주술사들의 습격Ⅲ (45/90)

 Chapter 5   주술사들의 습격Ⅲ

안드레이 공작은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몰랐기 때문에 서둘러 주술사에게 질문을 했다.

“너희들이 잡아간 마법사는 지금 어디 있느냐?”

“검을 훔쳐 간 마법사라면 며칠 전 죽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제자가 불과 며칠 전 죽었다는 말에 안드레이 공작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어, 어떻게 죽었느냐?”

“내 스승인 우순바 님께서 키우는 괴수인 케스퍼의 먹이가 되었다.”

‘우순바? 케스퍼?’

처음 듣는 이름에도 안드레이 공작은 차분하게 다음 질문을 했다.

“왜 우릴 노렸지?”

“그건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검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며 주술사가 안드레이 공작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안드레이 공작은 전혀 얼굴의 표정 변화 없이 계속 질문을 했고, 주술사는 사실대로 간략히 대답했다.

중간에 에반스가 나서서 몇 가지 질문을 더했을 때, 순순히 대답을 하던 주술사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고 고통스러운지, 입에서 연신 비명 소리가 흘러나왔다.

“크으으으으!”

이어서 잠시 뒤에는 입에서 게거품을 물더니 이내 고개를 떨어뜨리고 절명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에반스의 물음에 안드레이 공작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순바란 자가 이자의 뇌에 금제를 걸어 둔 모양이다.”

“금제라니요?”

“금기시하는 내용을 말할 때 발작과 함께 뇌와 심장을 멈추는 수법이지. 고대에 전해 오던 악독한 수법으로, 사라진 줄 알았는데 어둠의 주술사들 사이에서는 아직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모양이다.”

아직 알아내야 할 것들이 많았는데 주술사가 갑자기 죽음으로 인해 안드레이 공작과 에반스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곧 안드레이 공작의 제자가 어떻게 되었고, 누가 검을 찾으려 하는지는 알게 되었다는데 만족하기로 했다.

“아쉽군요.”

에반스가 여전히 죽은 주술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가운데 안드레이 공작이 차분히 말했다.

“더 많이 알아냈으면 좋았겠지만 지금까지 알아낸 것만으로도 많이 알아낸 것이다. 더 자세한 것은 그 우순바란 자를 만나면 알게 되겠지.”

안드레이 공작의 말을 듣고 에반스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우순바란 자를 만나겠다는 소리는 죽은 제자의 복수를 하겠다는 소리였다.

실종된 마법사가 죽은 건 분명 안쓰러운 일이다. 허나 그 마법사는 에반스와 서로 만난 적도 없는, 생판 남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자를 위해 위험천만한 일에 나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 에반스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안드레이 공작이 말했다.

“파르미르 고원의 그 셰르파만 소개시켜 다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안드레이 공작의 말에 에반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부탁이라면 충분히 들어 줄 수 있는 일이었다.

북쪽 숲에서 주술사들의 음모를 분쇄한 에반스 일행이 다시 영지성으로 향할 때였다.

콰과과과광!

영지성 안에서 폭발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놀란 에반스와 안드레이 공작, 루크는 서둘러 영지성 안으로 달려갔다.

다섯 명의 주술사들이 북쪽 숲에서 죽은 자들을 깨우고 있을 때, 나머지 다섯 명의 주술사들은 다섯 귀족들이 기거하고 있는 영주관으로 몰래 접근했다.

시간이 자정을 막 넘기고 있었기 때문에 영주관 안에는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단지 영주관 밖에서 몇 명의 경비병들이 화롯불을 밝힌 체 보초를 서고 있을 뿐이었다.

주술사들은 어둠만 있으면 그 속으로 숨어 들어갈 수 있었다. 경비병들이 서 있는 화롯불 가에는 경비병들이 만들어 낸 그림자들이 있었다.

스르르르!

그 그림자에서 주술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웁!”

주술사들은 뒤에서 경비병들의 입을 틀어막고 가볍게 목을 돌려 버렸다.

두둑!

목이 돌아간 경비병들은 혀를 길게 빼물고 두 눈을 부릅뜬 채 죽었다. 시체가 쓰러지는 소리가 나지 않게 화롯불 가 근처에 조심스레 내려놓은 다섯 주술사들은 조용히 영주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주술을 사용해서 영주관 안을 살피던 주술사 하나가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압실론 후작 일행 중 셋이 보이지 않습니다.”

“뭐? 대체 그놈들이 어디를 갔단 말인가?”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북쪽 숲에서 일이 터지면 그 놈들은 그쪽으로 달려갈 거잖아.”

“으음……. 그건 그렇군.”

“우린 그 다섯 귀족들만 제거하고 놈들이 검을 가지고 있는지만 확인하면 그만이야.”

“맞는 말이다. 압실론 후작 일행은 신경 쓰지 말고 다섯 귀족들이 있는지만 확인해 봐.”

“그자들은 그대로 있다. 호흡 소리가 규칙적인 것으로 봐서 다들 깊이 잠든 모양이다.”

“잘 됐군. 그럼 우리 다섯이 각각 한 놈씩 맡아서 놈들을 처치하고 검을 찾으면 되겠군.”

다섯 주술사들은 가능한 빠르게 다섯 귀족들의 방을 한번에 덮쳐서 검을 찾은 후 영주관을 벗어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다섯 주술사들은 각자 다섯 귀족들이 자고 있는 방문 앞에 섰다.

“셋에 동시에 들어간다. 하나, 둘, 셋!”

콰과과과광!

다섯 주술사들은 어둠의 마력을 이용해서 단숨에 방문을 부쉈다. 그리고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런데 방 안으로 들어선 다섯 주술사들의 입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다급한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허억!”

다섯 주술사 모두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날아온 검을 보고 놀라 어둠의 장막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들이 몸을 숨긴 어둠의 장막은 오러 블레이드나 6서클의 고위 마법이 아니고서는 피해를 입힐 수 없었다.

즉, 소드 마스터나 마도사급의 마법사가 아니고서는 그들을 해칠 자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쳇, 하필 실력이 뛰어난 자가 걸렸군.’

다섯 주술사는 모두 귀찮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필 자신이 택한 방에 있는 자가 제법 검술 실력을 갖춘 귀족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들은 꿈에도 몰랐다.

그들이 습격한 다섯 방의 주인들이 모두 소드 마스터란 사실을 말이다.

주술사들이 조심한다고 했지만, 그들이 내는 소리는 다섯 소드 마스터들에게 전부 들렸다. 하지만 그들은 설마 주술사들이 방문을 부수고 습격을 가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감히 어떤 겁대가리를 상실한 자가 소드 마스터가 자고 있는 방을 덮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폭발과 함께 문짝이 박살나는 순간, 다섯 소드 마스터들의 손에는 검이 들려져 있었다.

데보라는 자신의 방문을 부수고 들어선 주술사를 보고 그자의 얼굴에다 검을 찔러 넣었다.

휘릭!

그런데 주술사가 갑자기 사라졌다. 데보라의 검은 허공을 찔렀고, 방 안은 곧 어둠에 잠겼다.

불을 밝히고 싶었지만 데보라는 움직이지 못했다. 상대가 아직 방 안에 있는 것이 확실한 이상,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데보라는 최대한 집중해서 기감으로 상대가 어디 있는지를 찾았다. 아무리 어두워도 소드 마스터는 기감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간파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기감에 상대가 전혀 잡히지 않았다.

‘뭐지?’

사람이라면 결코 소드 마스터의 기감을 피할 수 없었다. 그때 데보라의 머릿속에 뭔가 떠올랐다.

그것은 오래전, 그녀의 부친인 도널드 후작이 해 주었던 이야기였다.

***

“세상에는 무서운 존재들이 많단다. 소드 마스터가 조심해야 할 상대로 사람들은 흔히 마도사를 손꼽는데 마도사말고도 무서운 자들이 더 있다”

“그들이 누군가요?”

“그들은 바로 주술사들이다. 주술사들 중에서도 특히 어둠의 주술사들은 상대하기 까다로운 자들이지. 하지만 그자들을 상대할 때 한 가지만 유의하면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

“그게 뭐죠?”

“그자들의 어둠의 장막을 자르는 거지. 하지만 그 어둠의 장막을 자를 수 있는 것은 오러 블레이드뿐이다.”

“뭐예요. 그럼 결국 그자들을 벨 수 있는 건 오러 블레이드뿐이란 소리잖아요?”

“맞다. 그러니 네가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할 수 없다면 그자들을 만나서는 안 되겠지. 만약 만난다면 넌 죽은 목숨인 것이고.”

***

당시 데보라는 부친의 말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어둠의 주술사가 두려워서 유년시절 열심히 검술을 수련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서, 설마 어둠의 주술사?’

부친에 말에 따르면 주술사가 어둠의 장막 속에 숨으면 누구도 그자의 기척을 감지해 내지 못한다고 했다.

소드 마스터인 그녀의 기감에도 잡히지 않는다면 정말 어둠의 주술사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둠의 주술사를 벨 수 있는 것은 오직 오러 블레이드뿐이다.’

데보라는 검에 오러 블레이드를 주입시키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상대가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상대가 움직이는 즉시 오러 블레이드로 단번에 베어 버릴 요량이었다.

하지만 어둠에 숨은 주술사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다른 방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술사들은 굳이 위험을 감수하며 강한 상대를 먼저 공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다른 방에서 주술사들이 귀족들을 제거하고 검을 찾고 있을 터였다. 만약 그들 중 검을 발견한다면 조용히 방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발견하지 못할 경우, 다른 주술사들의 도움을 받아 안전하게 자신이 맡은 상대를 제거하면 됐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주술사들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다섯 개 방 모두 너무 조용했다.

‘뭐지?’

다섯 명의 주술사들은 모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주위가 너무 조용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문을 박살 낸 뒤로 이렇다 할 소음이 없었다.

다섯 방 안의 사정은 똑같았다. 다섯 명의 귀족들은 모두 일체 움직이지 않고 어둠 속에 숨은 주술사들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데보라 말고도 나머지 네 명의 귀족들 역시 상대가 어둠의 주술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존재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도 잘 알았다.

주술사들 만큼이나 다섯 명의 소드 마스터들의 인내심도 상당했다. 하긴, 그러니 젊은 나이에 벌써 소드 마스터가 되었겠지만 말이다.

여기서 문제는 다섯 귀족들은 상대를 알고 있지만 다섯 주술사들은 상대를 모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의 차이는 컸다.

다섯 주술사 중 한 명이 10분이 넘었는데도 주위가 너무 조용하자 바깥 동향을 살필 요량으로 어둠의 장막 안에서 살짝 몸을 움직였다.

그 작은 낌새를 놓칠 앨빈이 아니었다.

‘거기 있었군.’

실룩!

앨빈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감과 동시에, 그의 검이 어두운 방 안쪽 공간을 벴다.

스팟!

“컥!”

비명과 함께 어둠 속에서 주술사가 배를 잡고 비틀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앨빈의 오러 블레이드에 복부를 길게 베인 주술사는 쏟아지는 내장을 끌어안고 안으로 도로 집어넣었다. 그때 언제 움직였는지 앨빈이 주술사의 앞에 섰다.

주술사가 그를 올려다보자, 앨빈이 들고 있던 검으로 주술사의 목을 벴다.

쿵!

주술사의 잘린 목이 바닥에 떨어지고 나서 주술사의 목에서 핏물이 솟구쳤다. 그때 앨빈의 모습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앨빈의 방에서 들린 단말마의 비명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주술사들이 움직였다. 그러자 네 명의 소드 마스터들이 일제히 오러 블레이드로 숨어 있던 주술사들을 벴다.

외부였다면 좀 나았을 테지만 실내에서 주술사들이 숨을 수 있는 위치는 제한적이었다. 그렇다 보니 소드 마스터들의 공격에 주술사들은 모두 부상을 입고 어둠의 장막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데보라 역시 정확하게 오러 블레이드가 맺힌 검으로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주술사를 벴다.

“크으으윽!”

키가 컸던 탓에 주술사가 고통스러운 듯, 피가 흐르는 사타구니를 손으로 막은 채 비틀거리며 옆으로 물러났다.

“차앗!”

데보라는 그런 주술사에게 망설임 없이 뛰어들어 검을 휘둘렀다. 부친에게 들은 기억으로 어둠의 주술사에게 절대 시간적 여유를 줘서는 안 됐다. 부친은 그들이 온갖 사악한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잠시의 방심이 큰 화를 불러올 수 있다고 했다.

데보라는 주술사가 죽기 전까지 공격을 계속 퍼부을 생각이었다.

휘리리릭!

그녀의 검이 주술사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어떻게 대응하려 해도 전혀 그럴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으니 주술사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푹!

데보라의 검이 주술사의 가슴을 꿰뚫었다.

“컥!”

후드를 쓰고 있던 주술사의 입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데보라는 끝까지 방심하지 않고 가슴에 박은 검을 틀었다. 그녀가 검을 비틀자 주술사의 심장이 완전히 파열되었고, 주술사는 선 자세에서 즉사했다.

스윽!

데보라가 검을 뽑자 생명이 사라진 주술사의 시신이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털썩!

그때 네 명의 귀족들이 데보라의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괜찮아?”

앨빈과 케이런, 페이슨, 테이거가 동시에 소리쳤다. 데보라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그들을 향해 말했다.

“뭐야, 날 걱정한 거야?”

퉁명스러운 그녀의 말에 데보라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네 명의 귀족들이 일제히 발걸음을 돌렸다.

에반스 일행이 영주관에 도착했을 때, 다섯 귀족들의 방에서 시체 다섯 구가 밖으로 끌어내지고 있었다.

에반스는 다섯 명의 주술사들이 다섯 귀족들을 습격했다가 되레 죽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완전히 재수 없는 놈들이로군. 하필 저 녀석들 방으로 기어 들어가다니.’

그때 라일라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헉!”

다섯 구의 시체를 발견한 라일라가 깜짝 놀랄 때 그녀의 뒤쪽에서 루미나와 시스턴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반스는 일행들이 모두 무사하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앨빈이 에반스를 발견하고 그에게 다가섰다.

“이거, 본의 아니게 살생을 저질렀군요. 하지만 내 방을 습격하는 자까지 살려 둘 수는 없었습니다.”

앨빈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아무래도 어제 데보라를 통해 영지에서 살생을 자제해 달라고 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는 모양이었다.

“정당방위에 대해서 내가 왈가왈부할 이유가 없지요. 나는 단지 무의미한 희생은 자제해 달라는 의미에서 데보라에게 내 뜻을 잘 전해 달라고 한 것인데, 그것이 기분 나쁘셨나보군요. 그러셨다면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

에반스가 갑자기 저자세로 나오자 앨빈은 이자가 무슨 꿍꿍인지를 생각하느라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데보라가 걸어와서 말했다.

“저자들이 누군지 조사해 주세요. 우리 다섯을 노린 것으로 봐선 무슨 의도가 있는 것 같으니 말이에요.”

데보라의 요청을 에반스가 바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하지요. 저자들에 대해서 날이 밝는 대로 면밀히 조사토록 하겠습니다.”

앨빈과 데보라는 더 할 말이 없자 곧 자신들의 방으로 돌아갔다. 앨빈과 데보라가 자신들의 방으로 들어가자 방문 앞에 서 있던 다른 세 명의 귀족들도 방문을 닫았다.

“뭐예요?”

라일라가 루크를 보며 물었다. 그러자 루크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우, 그런 일이 좀 있었어. 가서 얘기하자고.”

루크가 라일라의 등을 떠밀었다. 그리고 라일라의 뒤에 멍하니 서 있던 루미나와 시스턴까지 데리고 그들의 방으로 움직였다.

영주관 밖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죽고 영주관 안에 있던 귀빈들이 습격을 받았기 때문에 영주관은 이미 발칵 뒤집어 진 상태였다.

“괜찮으십니까?”

소식을 듣고 한참이나 늦게 달려온 영주가 에반스를 보고 물었다.

“나는 괜찮네. 북쪽 숲에도 저들과 같은 시체들이 있을 거야. 그 시체들도 치워. 단, 시체들은 가능한 만지지 말고 바로 불태우도록.”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둠의 주술사들은 그 시신도 위험했다. 에반스는 안드레이 공작이 시킨 대로 주술사들의 시신을 불태우라고 영주에게 명했다.

주술사들의 시체를 치우라는 명을 내린 뒤 에반스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때 안드레이 공작이 그를 불러 세웠다.

“자네에게 할 말이 있네.”

“가시죠.”

에반스는 안드레이 공작과 함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하실 말씀이 뭡니까?”

“드워프의 검을 한번 봤으면 하네.”

안드레이 공작의 말에 에반스는 잠시 망설였다. 그럴 리 없지만 견물생심이라고, 드워프의 검을 본 안드레이 공작이 혹시 딴 마음을 먹지 않을까 걱정한 것이다.

“내 이름을 걸지. 딴 마음은 먹지 않을 테니 보여 주게.”

안드레이 공작이 자신의 이름까지 걸겠다고 하니 도저히 보여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에반스는 귀 안에 숨겨 둔 작은 막대를 꺼냈다. 그리고 주문을 외우자 그 막대가 드워프의 검으로 변했다.

그것을 보고 안드레이 공작이 말했다.

“역시 자네가 내게 보여 준 그 문양이 드워프의 검에 새겨져 있던 마법 문양이었군.”

에반스는 드워프의 검을 안드레이 공작에게 건넸다. 안드레이 공작은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드워프의 검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드워프의 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게 십여 분, 안드레이 공작은 드워프의 검을 꼼꼼히 살폈다. 그리고 검을 뽑은 안드레이 공작이 검신까지 살핀 후 검집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감탄하며 말했다.

“과연…….”

에반스는 안드레이 공작이 검집 속에서 뭔가를 찾아냈음을 알 수 있었다.

안드레이 공작은 잉크를 천에 묻혀서 검집 안쪽에 묻혔다. 그리고 종이를 집어넣어서 꾸욱 눌렀다. 그러자 종이에 글자가 찍혀 나왔다. 그것을 보고 안드레이 공작이 말했다.

“이 검을 만들고 이 검에 자신의 능력을 주입시킨 존재들의 이름이네. 드워프의 왕인 쿠레거, 엘프족의 족장 히메데스, 휴먼족의 신전 대주교 프로세우스. 가만……. 프로세우스?”

프로세우스라면 안드레이 공작도 아는 인물이었다. 그는 인간으로서는 최초로 주신의 복음을 전파한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이 검이 만들어진 것이 천 년도 넘었단 말인가?”

프로세우스가 활약할 당시 대륙에는 제대로 된 왕국조차 없었다.

천 년 전의 기록도 별로 없었다. 해 봐야 신전에 있는 것이 다인데, 그 내용이 하도 허무맹랑해서 그 기록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 현 학자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프로세우스란 이름이 거론된 이상 그 기록이라도 다시 살펴봐야겠다는 것이 안드레이 공작의 생각이었다.

안드레이 공작은 탁본을 찍은 쪽 말고 그 반대쪽에도 무슨 기록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잉크를 칠하고 종이를 찍어 보았다. 그러자 역시 그 반대편에도 글씨가 찍혀 나왔다.

“윈스트런의 영면을 깨우지 말지어다. 윈스트런?”

안드레이 공작은 몇 분 더 드워프의 검을 살핀 뒤 그 검을 에반스에게 돌려주었다. 에반스는 드워프의 검의 크기를 줄여서 다시 귀 속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검집 속에서 뜬 탁본을 보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안드레이 공작에게 물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에반스의 물음에 안드레이 공작이 바로 대답했다.

“일단 여기 적혀 있는 자들에 대해 알아볼 생각이네.”

아무래도 안드레이 공작은 잘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안드레이 공작은 탁본 종이를 들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안드레이 공작이 돌아가고 나자 에반스도 겉옷을 벗고 신고 있던 부츠를 벗은 뒤 침대에 누웠다.

긴 밤이 겨우 지나가고 있었다.

“음…….”

잠깐 눈을 감은 것 같았는데 벌써 날이 훤하게 밝아 있었다. 어제 주술사들을 상대로 무리를 한 터라 에반스도 피로했던 모양이었다.

에반스가 막 세수를 끝냈을 때, 안드레이 공작이 노크도 없이 에반스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것을 보게.”

안드레이 공작이 오래된 고서를 에반스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거기에 기록된 글은 에반스가 읽을 수 없는 글이었다.

“아, 그렇지! 내가 읽어 주겠네.”

안드레이 공작은 손가락으로 글자를 가리키며 그 내용을 해석해 주었다.

“‘지상이 바바리안에 의해 지배될 때, 그들의 우상인 윈스트런은 마왕을 소환해서 세상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이에 드워프의 왕과 엘프족의 족장, 그리고 신전의 대주교이신 프로세우스께서 함께 힘을 모아 윈스트런을 봉인했다.’ 비록 당시 보다 백 년 늦은 구백여 년 전 쓰인 기록이지만 그때에도 윈스트런이란 존재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네. 이로 미뤄 윈스트런은 실존 인물이며, 대단한 존재였음이 분명하네.”

안드레이 공작은 대단한 것을 찾아내기라도 한 듯 극도로 흥분해 있었다.

“보다 더 정확한 기록을 보려면 좀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조만간 윈스트런이 누군지 정확히 알게 될 거야. 그럼 드워프의 검의 비밀도 모두 풀릴 것이고, 우순바란 자가 왜 그 검을 그렇게 찾는지 그 이유도 알 수 있겠지.”

안드레이 공작은 우순바란 자를 찾기 전에 왜 그자가 드워프의 검을 찾지 못해 안달인지 그 이유를 밝혀낼 생각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에반스는 달랐다.

우순바가 누구든 에반스와는 상관없는 인물이었다. 에반스는 하루빨리 안드레이 공작을 파르미르 고원까지 데려다 주고 멜란이란 셰르파만 붙여 주면 그만이었다.

압실론 후작령에는 에반스가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파르미르 고원을 넘어서 어둠의 주술사들과 싸움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안드레이 공작이 늦장을 피우는 바람에 에반스 일행은 다섯 귀족 일행들에 비해 두 시간이나 늦게 패런 영지를 출발해야 했다.

이후에도 안드레이 공작은 마법 길드가 위치한 마을이나 영지에서 시간을 꽤 많이 잡아먹었다.

패런 영지에서 주술사들이 습격을 받은 뒤, 에반스 일행은 셋으로 나뉘었다.

안드레이 공작과 루크는 뭘 하는지 매일 정신이 없었고, 에반스는 루미나와 시스턴에게 검술을 가르쳤다. 그리고 라일라는 목적지에만 도착하면 흥청망청 술을 마시고 뻗었다.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 훌쩍 흐르면서 에반스 일행은 파르미르 고원으로 가기 위한 기착지 중에서 가장 큰 영지인 카라스 영지에 도착했다.

에반스 일행이 카라스 영지에 도착했을 때, 다섯 귀족들은 하루 휴식을 취한 뒤 남쪽 숲으로 떠나기 위한 준비에 바빴다.

“늦었군요?”

데보라가 에반스 일행을 보고 아는 척을 했다.

“네. 그렇게 됐습니다. 남쪽 숲으로는 언제 출발할 겁니까?”

에반스의 물음에 데보라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내일 아침에요. 오늘이 지나면 당분간 볼 수 없는데 같이 식사라도 하죠?”

데보라의 제의를 에반스가 흔쾌히 수락했다.

“그러시죠. 카라스의 영주에게 저녁 만찬을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호호호. 덕분에 오늘 저녁도 즐겁게 먹고 마실 수 있겠군요.”

에반스는 데보라에게 저녁 때 영주관에서 보자고 말하고서는 일행과 같이 영주관으로 움직였다.

“도련님!”

영주관에 들어서자 카라스의 영주인 라르손이 에반스를 향해 달려왔다.

에반스에게는 형제와 같은 라르손이었다. 에반스 역시 라르손을 반갑게 맞으며 안아주었다.

“쯧쯧, 도련님이라니. 카라스의 영주란 자가.”

에반스가 한마디하자 라르손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게 지금도 도련님만 보면, 아니, 후작님만 보면 도련님이란 말부터 불쑥 튀어나오니…….”

“영지엔 별일 없지?”

에반스가 라르손의 어깨에 한 손을 올리며 물었다.

“네. 조용합니다.”

에반스와 라르손이 서로 떨어질 줄 모르고 영주관을 향해 걸어갈 때, 그 뒤에 있던 라일라의 표정은 어두웠다. 사실 요 며칠 라일라가 술만 퍼 마신 것은 모두 라르손 때문이었다.

‘뭐? 나 아니면 죽겠다고 하더니 결혼을 해?’

얼마 전, 라일라는 카라스의 젊은 영주가 곧 이웃 영지의 귀족 영애와 결혼할 거라는 소문을 들었다. 라일라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그래서 라일라는 매일 같이 술만 마셔댔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르손은 에반스에게만 신경을 쓰고 라일라는 나 몰라라 하고 있었다. 그 태도에 라일라는 소문이 사실이라고 단단히 오해하고 말았다.

안드레이 공작과 루크는 카라스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에반스 일행과 헤어져서 젝크와 그 부친부터 만났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들은 얘기는 안드레이 공작도 이미 알고 있는 얘기들뿐이었다.

실종된 제자가 죽은 이상, 그들에게서 확인할 것은 그들이 주술사를 만났냐는 것인데 대화를 나눠 본 결과, 그들은 주술사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실망한 안드레이 공작은 루크를 데리고 곧장 야만족 전용 여관으로 향했다.

수도에서 보내온 자료만으로 만족할 만한 사실을 알아 내지 못한 안드레이 공작은, 윈스트런이 옛 야만족의 조상이었던 바바리안의 우상이란 말에 착안해서 야만족에게 윈스트런에 대한 정보를 알아낼 심산이었다.

이에 카라스 영지에서 산 적이 있던 루크는 안드레이 공작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루크는 카라스 영지의 관리들과 친분이 있었다. 때문에 야만족을 만나는데 관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저기 보이는 늙은이가 카라스 영지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야만족입니다.”

관리가 루크와 안드레이 공작을 늙은 야만족 노인에게 데려갔다.

“도르만, 여기 이분들이 자네에게 물을 것이 있다고 하니 성의껏 대답하게. 알겠나?”

“아이고. 그렇고 말구요.”

관리의 말에 야만족 노인이 굽실대며 대답했다.

“그럼 편하게 물어보십시오.”

“고맙네.”

관리가 인사를 하고 떠나자 안드레이 공작이 노인에게 물었다.

“혹시 윈스트런이란 이름을 기억하시오?”

안드레이 공작이 존댓말을 사용하자 야만족 노인이 황송하다는 듯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아이고, 저 같은 야만족에게 존대라니요. 가당치 않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누구라고 하셨습니까?”

“윈스트런이라고 했네.”

루크가 재빨리 말했다.

“윈스트런이라? 아! 기억이 납니다. 제가 어린 시절 제 아버지께서 부르셨던 노래에 그 이름이 있었습니다.”

“노래? 그게 어떤 노래인가?”

안드레이 공작이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그러자 노인이 야만족의 말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게 무슨 뜻인지 말해 줄 수 있겠나?”

“별 내용은 아닙니다. 너무 황당한 내용이라 저도 어릴 때 듣고 웃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무슨 내용인지 알려 주게.”

안드레이 공작이 간절한 눈빛으로 말하자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노래를 설명했다.

노인의 말대로 노래의 내용은 황당무계했다.

윈스트런이 마계의 마왕을 종으로 부리고 신들을 불러서 왜 가뭄이 들게 했는지 질타하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하지만 안드레이 공작은 그 노래에서 야만족들에게 윈스트런이 어떤 존재였는지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윈스트런에 대해 더 자세히 아시려면 주술사를 만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주술사!”

안드레이 공작은 망치로 강하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허어, 왜 주술사를 만날 생각은 하지 못한 거지?’

천 년 전의 기록이 겨우 신전에만 남아 있듯이, 야만족의 기록 역시 주술사들의 입을 통해서 구전되어 오고 있음은 안드레이 공작도 잘 알고 있었다.

수만 년을 이어온 주술이다. 주술사에도 종류가 많았다.

“주술사를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안드레이 공작의 물음에 야만족 노인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두 분께서는 운이 좋으시오. 오늘 고란족에서 꽤 유명한 주술사께서 저희 가게를 찾아오셨으니 말입니다.”

“그 주술사를 만나게 해 주시오.”

안드레이 공작의 부탁에 야만족 노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드레이 공작과 루크는 야만족 노인과 같이 고란족의 주술사를 만나러 갔다. 안드레이 공작이 만난 고란족의 주술사는 주로 길흉화복을 점치는 일반 주술사로, 꽤 나이가 많은 주술사였다.

안드레이 공작은 그 주술사에게 윈스트런에 대해 물었다.

“허허허! 휴먼족 중 윈스트런에 대해 아는 자가 있다니…….”

늙은 주술사는 안드레이 공작을 보고 감탄하며 자신이 아는 윈스트런에 대해 설명했다.

늙은 주술사가 말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안드레이 공작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제야 윈스트런에 대한 진실과 대면하게 된 것이다.

마법으로 치자면 윈스트런은 인간이 오를 수 없는 궁극의 경지인 9서클의 마법사인 셈이었다. 안드레이 공작은 윈스트런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였는지, 또 그 제자들 역시 엄청난 주술사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윈스트런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그 제자들이 싸웠으며 그 싸움의 결과, 바바리안이 대륙의 주인의 자리를 휴먼족에게 내어 주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혹시 드워프의 왕인 쿠레거, 엘프족의 족장 히메데스, 휴먼족의 신전 대주교 프로세우스에 대해 아십니까?”

안드레이 공작의 물음에 늙은 주술사가 깜작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허어……! 그들은 어찌 아는가?”

“윈스트런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하긴, 윈스트런을 알면서 그의 세 친구를 모른대서야 말이 안 되지.”

“세 친구요?”

“그래. 그들 세 명은 윈스트런이 인정한, 그가 믿고 의지했던 친구들이었지.”

늙은 주술사는 윈스트런과 세 종족의 친구들에 얽힌 얘기를 안드레이 공작에게 들려주었다.

“그, 그러니까 그 세 존재들이 윈스트런의 무덤을 만들고 그를 직접 묻었단 말이군요?”

“그래. 하지만 그 무덤의 위치는 아무도 모르지. 내가 알기로 그 셋이 윈스트런을 위해 뭔가를 만들었다고 전해지는데 그게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네.”

‘드워프의 검!’

세 존재가 윈스트런을 위해 만든 물건은 바로 에반스가 가지고 있는 드워프의 검이었다.

‘윈스트런의 무덤과 드워프의 검이라? 가만, 그러고 보니 내 제자 녀석이 드워프의 검을 발견한 곳이 어느 동굴 속 무덤이라고 했었다. 그렇다면 혹시 그 무덤이란 곳이 윈스트런의 무덤이 아닐까? 그리고 그 무덤에 드워프의 검이 있다면 그건 드워프의 검이 윈스트런의 무덤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다는 말이고…….’

안드레이 공작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점차 자신이 찾는 해답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늙은 주술사와 밤새도록 윈스트런에 대해 얘기를 나눈 뒤, 안드레이 공작은 환하게 밝은 얼굴로 영주관으로 향했다.

***

전날 밤, 에반스는 안드레이 공작과 루크가 불참한 가운데 다섯 귀족들과 저녁 만찬을 가졌다.

여느 귀족의 만찬과 마찬가지로 음식도 많았고 술도 넉넉했다. 하지만 그 밤의 주인은 라르손과 라일라였다.

라르손은 에반스에게 저녁 만찬 전, 라일라에게 정식으로 청혼할 거라고 했다. 그러니 에반스가 그 증인이 되어 달라고 했다.

그 말은 라르손이 저녁 만찬 자리에서 라일라와 약혼을 하겠다는 소리와 같았다.

라르손은 이미 반지까지 준비해 놓고 있었다.

“기어이 나보다 먼저 결혼하겠다 이거지?”

에반스가 괘씸하다는 듯 투덜대자 라르손이 쑥스럽다는 듯 헤벌쭉 웃었다.

“그렇게 좋냐?”

그 모습에 기가 차다는 듯 묻자 라르손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네! 좋습니다.”

그런 라르손을 보고 에반스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이때 정작 당사자인 라일라는 절망감에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래서 저녁 만찬 자리에도 참석하지 않으려다가 그곳에서 술이나 실컷 퍼마셔야겠다고 생각하고 억지로 나갔다.

만찬장에서 라일라의 눈에는 술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술을 마시려고 하면 시종들이 슬쩍 술병을 치웠다.

“이런…….”

발끈한 라일라가 시종에게서 술병을 뺏으려 할 때, 라르손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씩씩대는 그녀를 데리고 만찬장 한가운데로 움직였다.

그 자리에는 대영주인 에반스가 서 있었다.

“야! 이거 못 놔?”

버럭 화를 내던 라일라는 라르손이 에반스 앞에 그녀를 데려가자 그제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만찬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라르손과 라일라를 쳐다보고 부럽다는 눈빛을 보냈다.

“뭐, 뭐하자는 거야?”

라일라가 목소리를 낮춰 라르손에게 물었다. 그때 라르손이 에반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카라스의 영주 라르손이 여기 라일라와 결혼을 할까 합니다. 그 증인이 되어 주십시오.”

라르손의 외침이 만찬장에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

짝짝짝!

만찬장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라르손의 결혼을 축하하며 함성과 함께 박수를 쳤다.

‘겨, 결혼!’

라르손의 그 말이 라일라의 귀에 천둥처럼 크게 울렸다. 에반스가 뭐라고 말을 했는데, 그 말을 뭔지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크게 울렸다.

라르손이 일어나서 라일라의 손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라일라가 제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이미 공식적인 라르손의 부인이 되어 있었다. 며칠 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던 라일라가 결국 울분을 터트렸다.

“이 나쁜 놈아!

라일라가 라르손을 격하게 끌어안았다.

“하하하하!

“호호호호!

그 모습을 보고 만찬장에 있던 사람들이 큰소리로 웃었다.

그렇게 에반스 일행과 다섯 귀족들 간의 마지막 저녁 만찬은, 라일라와 라르손의 약혼식으로 인해 피로연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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