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에서 온 다섯 귀족들은 아침 일찍부터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그들은 자신들을 안내할 관리가 후작 저택에 오면 후작에게 바로 인사를 하고 출발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짐을 챙겨서 현관 앞에 대기 중이었다.
“잘 잤어요?”
그때 앙리와 압실론 후작이 현관에 나타났다. 앙리가 반가운 척 다섯 귀족 중 유일한 여자인 데보라에게 뛰어갔다.
“어, 그래. 너도 잘 잤어?”
“네. 지금 갈 건가 봐요?”
“응. 먼 길을 가야하니까 서둘러야지. 설마 우릴 마중 나온 거야?”
데보라가 은근한 눈길로 에반스를 힐끗 쳐다본 후 앙리에게 물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트렌시아 제국의 제후 중, 20대는 에반스가 유일했다. 트렌시아 제국에서는 최고의 신랑감으로 황태자 다음으로 에반스가 꼽히고 있었다.
그런 일등 신랑감인 에반스에게 데보라가 신경 쓰지 않을 리 없었다. 데보라는 혹시 에반스가 자신을 보러 나온 게 아닐까 싶어 에반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앙리가 확실히 깨 주었다.
“우리도 여행 떠나요.”
“여행?”
“네. 우리도 파르미르 고원까지 가거든요. 그쪽은 남쪽 숲으로 간다면서요?”
남쪽 숲도 결국 파르미르 고원의 지류에 위치했다.
“뭐? 그럼 우리와 같이 가는 거야?”
데보라가 기대 어린 눈빛으로 다시 힐끗 에반스를 쳐다보았다. 그때 그들을 안내할 관리가 도착했다. 그리고 에반스와 안드레이 공작을 파르미르 고원까지 안내할 라일라도 도착했다.
그때 다섯 귀족의 대표인 앨빈이 에반스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후작님께서 보여 주신 호의는 잊지 않겠습니다.”
정중한 앨빈의 말에 에반스도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그때 안드레이 공작이 끼어들었다.
“뭘 벌써부터 인사하고 그래요? 중간에 헤어질 거지만 그래도 가는 데까지 같이 동행하면 되잖아요?”
안드레이 공작의 말에 앨빈도, 에반스도 할 말을 잊었다.
“같이 가죠.”
그때 데보라가 약간 흥분한 듯 말했다. 그러자 나머지 세 명의 젊은 귀족들은 상관없다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게 다섯 귀족 일행과 에반스와 안드레이 공작 일행은 일단 동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데 뒤늦게 루크가 도착했다. 그런데 그 옆에 도끼눈을 뜨고 있는 여자 아이가 있었다.
바로 에반스의 제자인 루미나였다.
“스승님. 바쁘시다면서요?”
“하하하. 그게 말이야. 너도 데려 가려 했다. 그렇지 루크?”
그녀를 보고 에반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루크를 애처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루크가 불쌍하다는 듯 에반스의 편을 들어 주었다.
“그래. 어제 내게도 널 데리고 가야겠다고 말씀하셨다.”
“정말이요?”
“그렇다니까.”
“좋아요. 그럼 이번엔 용서해 드릴게요.”
에반스와 안드레이 공작의 일행은 그렇게 라일라와 루크, 루미나까지 모두 다섯이 되었다.
“이제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관리가 에반스에게 물었다. 전체 일행 중 가장 지위가 높은 것이 에반스였으니, 출발 전에 그의 양해를 구한 것이다.
“그래. 출발하지.”
에반스가 허락하자 관리가 짐꾼들과 일행을 호위할 병사들에게 출발을 명했다.
다섯 귀족 일행이 앞장을 서고, 에반스와 안드레이 공작 일행은 그 뒤쪽에서 움직였다.
에반스는 자신의 일행을 안드레이 공작에게 소개시켰다. 마법사 루크는 새파랗게 젊은 20대 초반의 남자가 안드레이 공작이라고 하자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펑!
“개골개골!”
안드레이 공작이 루크를 개구리로 만들었다. 그제서야 모두 에반스보다 어려 보이는 젊은 남자가 안드레이 공작이 맞다고 인정했다.
“오오, 믿기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안드레이 공작을 반긴 것은 개구리로 변했다가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루크였다. 루크는 안드레이 공작의 손을 잡고 감격 어린 표정으로 한시도 그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퍼엉!
심기가 불편해진 안드레이 공작이 루크를 다시 개구리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몇 시간 뒤, 보다 못한 에반스의 간청에 안드레이 공작은 개구리 루크를 다시 사람으로 변신시켰다. 그제야 정신이 든 듯, 루크는 안드레이 공작 앞에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녀석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감시해.”
에반스의 명에 루크가 마침 일행의 주위에 날아다니던 잠자리에게 종속 마법을 걸었다.
마법에 걸린 잠자리가 앞으로 날아갔다. 그것을 본 안드레이 공작이 에반스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지금 종속 마법을 걸어서 앞에 있는 애들을 감시하려는 거냐?”
안드레이 공작이 루크가 종속 마법을 건 것을 알아 본 모양이었다.
“네. 일단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알아 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에반스의 말에 안드레이 공작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당장 치워. 들킬 짓을 왜 해?”
“네?”
에반스가 어리둥절할 때였다.
“컥!”
갑자기 루크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오고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쯧쯧, 거 봐. 걸렸잖아?”
안드레이 공작이 루크에게 다가가서 마법을 걸었다.
“리커버리.”
마도사의 회복 마법이 루크에게 시전되자, 의식을 잃고 쓰러졌던 루크가 다시 제정신을 찾았다.
“무슨 일이야?”
에반스의 물음에 루크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종속 마법에 걸린 잠자리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정신적 데미지를 입었습니다.”
루크의 말에 안드레이 공작이 설명했다.
“정신계 마법은 시술자와 피시술자간에 교감이 중요하지. 해서 한쪽이 데미지를 입으면 다른 쪽도 데미지가 입을 수밖에 없어. 그보다 저쪽에서도 눈치가 빠른 걸?”
그때 앞쪽에서 앨빈이 뒤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에반스와 그 일행을 훑어보았다.
“왜 그러세요?”
안드레이 공작이 능청스럽게 앨빈에게 물었다.
“아, 아니다. 어디 불편한 사람이 없나 해서. 다들 괜찮아 보이니 됐다.”
앨빈이 몸을 돌려 다시 앞쪽으로 갔다. 그러자 루크가 앨빈을 쏘아보며 조용히 말했다.
“잠자리를 제거한 자가 바로 저자입니다.”
루크의 말에 안드레이 공작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그러게 상대를 잘 봐가면서 감시를 했어야지.”
그 말에 에반스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안드레이 공작이 말했다.
“설마 쟤들이 팔과 다리에 차고 있는 마나 제어기를 보지 못한 거냐?”
“마나 제어기요?”
에반스가 어리둥절해 할 때 루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야? 너 마나 제어기도 몰라?”
안드레이 공작이 기가 차다는 눈으로 에반스를 쳐다보았다. 루크가 대신 에반스에게 설명했다.
“마나 제어기는 체내 마나를 일정하게 조절해 주는 장치입니다. 처음에는 마법사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지금은 다용도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저들이 마나 제어기를 차고 있다는 건 그만큼 그 힘을 숨기고 있다는 소리입니다. 즉, 지금 보이는 게 그들의 전부가 아니란 말이지요.”
루크의 말에 에반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이제야 안 모양이군. 저 아이들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들인지 말이야.”
에반스가 느낀 수도에서 온 다섯 귀족들은 그 수준이 소드 익스퍼트 상급 정도였다. 놀랍게도 여자인 데보라 역시 다른 남자 귀족들에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능력을 숨긴 것이 소드 익스퍼트 상급이면, 대체 저들의 본 실력은…….’
“그, 그럼 저들이 모두 소드 마스터!”
에반스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그때 안드레이 공작이 에반스의 등을 퍽하고 쳤다.
“뭘 그리 놀라나? 너만 그 나이에 소드 마스터가 되란 법이라도 있다더냐?”
안드레이 공작의 그 말에 강하게 에반스의 뇌리를 강타했다.
‘나는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던가?’
에반스는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자만했는지 깨달았다.
검공 라마스의 검술을 계승했다고 해서 마치 자신이 검공이 된 것처럼 거만하게 굴어왔다. 그러고 보니 에반스는 아직 검공이 이뤄 낸 경지의 절반도 채 이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자괴감에 빠질 필요는 없어. 저 아이들은 아직 너만 못하니까. 하지만 두세 명이 한꺼번에 덤비면 위험은 하겠지.”
에반스는 스스로 마나를 제어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같은 소드 마스터라도 에반스가 그들보다는 아직 한 단계 위의 경지에 있었다.
안드레이 공작의 위로 같지 않은 위로가 에반스에게는 약간의 위안이 됐다. 에반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공작님은 저들 몇 명이 덤비면 위험합니까?”
“다 덤벼도 내가 이겨.”
“소드 마스터를 너무 우습게 보는 것 아닙니까?”
“사실이니까. 애들이 흉기를 들었다고 애들이 아닌 건 아니지. 하지만 저 애비들은 달라. 무서운 자들이지. 다섯째인 카베인과 그들은 실력 차이가 많이 난다고 알려져 있어. 첫째인 레이놀드는 나도 상대하기 버거운 존재지.”
안드레이 공작의 말에 에반스는, 자신이 수도로 가면 당연히 제거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렉터 공작의 제자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긴…… 그 자식들이 벌써 소드 마스터인데 그들은 얼마나 강하겠는가?’
에반스는 요즘 소홀했던 검술 수련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반스도 비장의 무기는 있었다.
바로 드워프의 검이 그것이었다. 에반스가 드워프의 검을 사용한다면 승부가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드워프 검의 마지막 기능을 묻지 않았군.’
“그런데 마법 문양의 마지막 기능은 언제 가르쳐 주실 겁니까?”
에반스의 물음에 안드레이 공작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건 말이야, 신성력이야.”
“네?”
안드레이 공작이 갑자기 신성력 얘기를 하지 에반스도 어리둥절해졌다.
“왜, 그 문양에 라이트 마법이 걸려 있다고 했잖아?”
“네.”
“그 라이트 마법과 연계되어서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있어. 그러니까 그 세부적인 내용은…….”
안드레이 공작이 설명했고, 에반스는 그 말을 집중해서 들었다. 에반스는 모르는 부분은 수시로 안드레이 공작에게 질문을 했고, 그 설명이 끝났을 때, 다 이해가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신성력을 꼭 라이트 마법과 연계해서만 사용할 수 있는 겁니까?”
“그렇지 않아. 신성력은 그 이외에도 사용할 수 있어. 예를 들어 체력을 회복시킨다거나, 체내에 퍼진 독을 해독한다든가 하는 기능으로 말이야. 그 사용법은…….”
안드레이 공작은 마법 문양에서 신성력을 따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세세히 에반스에게 설명했다.
압실론 후작성을 나선 일행은 북쪽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해질 녘까지 이동한 일행은 목적지인 세르든 마을에 도착해서 그곳 관리의 집에서 하루 신세를 졌다.
그때 남쪽 숲까지 안내를 맡은 관리가 일정을 조정해서 모두에게 알려 주었다.
“카라스 영지까지 같이 동행하셨다가 그곳에서 헤어지면 되겠습니다.”
카라스 영지까지는 대략 열흘의 시간이 걸렸다.
그말은 10일 동안 다섯 귀족 일행과 같이 움직여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들이 전부 소드 마스터란 것을 몰랐을 때는 전혀 부담이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정말 위험한 동행이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들을 먼저 보내는 건데……. 이게 다 안드레이 공작 때문이다.’
에반스는 안드레이 공작과 루크가 같이 쓰는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방 안에 들어가니 루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개골개골!”
어디선가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리자 침대 위에 개구리 한 마리가 보였다.
“루크를 또 개구리로 만든 겁니까?”
“시끄러워서.”
“…….”
“무슨 일이야?”
“궁금해서 찾아왔습니다. 저들과 동행한 이유가 뭡니까?”
에반스의 물음에 안드레이 공작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재미있잖아.”
“재미요? 소드 마스터 다섯과 같이 다니는 게 재미있다고요?”
“그럼. 혹시 알아? 너와 녀석들이 싸우는 걸 구경할 수 있을지.”
“지금 저보고 저들과 싸우라는 겁니까?”
“소드 마스터끼리 싸우는 걸 본 지가 오래돼서 말이야. 그래 주면 내가 고맙게 구경해 주마.”
“행여나요. 저들이 왜 마나 제어기를 끼고 있겠습니까? 또 제후인 저와 싸워서 무슨 덕이 있다고 저들이 저와 싸우겠습니까?”
에반스의 말에 안드레이 공작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쩝, 그렇겠지?”
“당연하지요. 그보다 저들을 감시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겠습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열흘 후면 헤어질 텐데 뭘…….”
“도와줄 겁니까? 말겁니까?”
“젊은 녀석이 고집하고는……. 알았다. 하지만 공짜는 안 돼.”
“알았습니다. 제가 신세 지는 걸로 하죠.”
“후후, 종속 마법이라고 다 같은 마법은 아니지. 마도사의 종속 마법은 그 차원이 다른 법이니까.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알아차리기 힘들지. 우선 녀석들이 워낙 눈치가 빠르니 여러 개에 종속 마법을 걸 필요가 있어. 우선 말과 녀석들의 옷에 이를 붙여 두자고. 자, 가서 이를 잡아와.”
“네?”
“싫어? 그럼 말고.”
“……아닙니다.”
에반스는 밖으로 나가서 길거리에서 자고 있던 거지를 깨웠다. 그리고 빗으로 머리를 빗기자 이가 우수수 떨어졌다. 에반스는 손에 이를 챙겨 들고 안드레이 공작의 방으로 향했다.
“여기 가져왔습니다.”
“오오! 제법 토실토실하게 살이 오른 놈들이구나.”
안드레이 공작이 즉시 이들에게 마법을 걸었다. 그러자 잠시 후, 톡톡거리던 이들이 사라졌다.
“어디 보자……. 으음, 다들 자는데?”
에반스는 결국 아무것도 건진 것 없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날이 밝자 일행은 다시 북쪽을 향해서 움직였다. 그들의 두 번째 목적지는 바로 라마스 영지의 라코프 백작성이었다. 그곳에는 압실론 후작가의 제 1기사단장이었던 프레드릭 백작이 있었다.
에반스는 자신은 소드 마스터인 것을 알리지 않고 프레드릭 백작이 소드 마스터임을 제국 전역에 알렸다. 소드 마스터를 보유한 대영지와 그렇지 않은 대영지는 미세하긴 했지만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다른 제후들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압실론 후작령에 소드 마스터가 탄생했다는 소식에 나머지 아홉 제후들이 축하 사절을 보내왔다. 반명 황제와 중앙 정부에서는 침묵을 지켰다.
제후 휘하의 기사가 소드 마스터가 되면 아무래도 지방 세력이 더 강해지는 것이니, 황제나 중앙 정부에서는 반가워할 일은 아니었다.
다음 목적지가 압실론 후작령의 소드 마스터인 프레드릭 백작이 있는 라코프 백작성임을 알아서인지 수도에서 온 다섯 귀족들은 하루 종일 들뜬 표정들이었다.
안드레이 공작 역시 말에 붙은 이를 통해서 들은 내용이 죄다 프레드릭 백작에 대한 내용뿐이라고 에반스에게 말했다.
“녀석들이 프레드릭 백작과 대련해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구나.”
안드레이 공작의 말에 에반스는 이번 기회에 저들의 실력을 가늠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프레드릭 역시 이번 기회에 안계를 넓힐 수 있을 테고 말이야.’
에반스는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할 때, 전체 일행은 라코프 백작성에 도착했다.
에반스가 온다는 소식에 라코프 백작성의 영주인 프레드릭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후작님.”
일행은 프레드릭의 환대를 받으며 백작 저택으로 바로 움직였다.
“만찬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일행은 각자 배정받은 귀빈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프레드릭이 마련한 만찬에 참석했다.
만찬장에서 에반스는 프레드릭에게 수도에서 온 다섯 귀족들을 소개했다. 그들은 모두 잔뜩 열망 어린 얼굴로 프레드릭을 쳐다보았다.
에반스는 이미 만찬이 열리기 전에 프레드릭을 따로 만났다. 그리고 자신이 데려온 다섯 귀족이 전부 소드 마스터임을 프레드릭에게 알렸다. 당연히 그 말에 프레드릭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젊은이들이 정말 모두 소드 마스터란 말입니까?”
“마나 제어기를 차고 있어서 티가 나지 않지만 확실합니다.”
“놀라운 일이군요. 한꺼번에 다섯 명의 소드 마스터라니…….”
“그래서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부탁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저들이 백작님과 대련을 원하는 모양인데 상대해 주시겠습니까?”
“그렇습니까? 저야 좋지요. 안 그래도 요즘 몸이 근질근질했는데, 붙여만 주십시오.”
호탕한 프레드릭의 말에 에반스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모두 상대하기는 어려울 테고, 둘만 상대해 보기로 하지요.”
“하하하! 둘을 상대하려면 몸을 확실히 풀어 둬야겠습니다.”
프레드릭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만찬이 시작되고, 수도에서 온 다섯 귀족들은 여전히 프레드릭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프레드릭과 같이 앉아 있던 에반스가 다섯 귀족을 보고 말했다.
“여러분들의 부친들께서는 모두 제국의 소드 마스터 인 것으로 압니다. 여기 있는 프레드릭 역시 얼마 전 소드 마스터가 되었지요.”
“소드 마스터가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앨빈을 비롯한 네 명의 귀족들이 일제히 눈빛을 빛내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하하하!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부친들에 비한다면 나는 이제 햇병아리나 진배없소. 내가 보기에 여러분들 역시 그 실력이 대단해 보이시는구려. 과연 명문가의 자제, 영애 분들답소.”
프레드릭이 다섯 귀족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다섯 귀족을 대표해서 앨빈이 말했다.
“칭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해서 말인데, 여러분들의 실력이 출중하다니 오늘 이 자리에서 프레드릭 백작과 대련을 한번 벌여 봄이 어떻겠소?”
갑작스런 에반스의 제안에 다섯 귀족 모두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때 에반스의 옆에 있던 프레드릭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하! 그것 참 좋은 생각이십니다. 하지만 저 같은 자가 귀하신 자제분들과 검을 섞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겠군요.”
프레드릭의 말에 다섯 귀족들이 모두 눈빛을 빛냈다.
앨빈이 나서 말했다.
“겸손하신 말씀이십니다. 소드 마스터이신 백작님께서 저희를 상대해 주신다면 오히려 영광스런 일일 것입니다.”
“저들도 원하는 것 같은데, 한번 실력을 보여 주시지요.”
에반스의 말에 프레드릭이 못내 승낙을 했다.
“하지만 모두를 다 상대하기는 어렵겠고 두 사람과 대련을 하도록 하겠소.”
프레드릭의 말에 다섯 귀족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다섯 귀족 모두 프레드릭과 대련해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들 사이에 팽팽하게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때 다시 앨빈이 나섰다.
“후작님과 백작님께 외람되오나 누가 백작님을 상대로 대련할지, 저희들끼리 정할 수 있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앨빈의 말에 에반스는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러자 다섯 귀족들이 만찬장을 나갔다.
에반스가 슬쩍 안드레이 공작의 곁으로 다가갔다.
밖으로 나간 다섯 귀족 중 한 명의 옷에는 어젯밤, 힘들게 구한 이가 붙어 있었다. 에반스는 안드레이 공작의 옆에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만찬장 밖으로 나간 다섯 귀족들은 서로 프레드릭과 대련하겠다고 우겼다.
“다들 양보해. 내가 싸울 거다.”
“무슨 소리! 이번은 절대 양보 못해.”
이럴 때가 아니면 다른 소드 마스터와 겨뤄 보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다섯 귀족들 모두 양보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앨빈이 제안했다.
“지금 이 상태로는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 우선 한 자리는 테이거에게 양보했으면 한다. 실종되신 카베인 후작님을 생각해서라도 말이다.”
앨빈의 말에 세 명의 귀족들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럼 나머지 한 자리는 데보라에게 넘기자. 난 여자와 신경전을 벌이고 싶지 않아.”
케이런의 말에 데보라가 발끈했다.
“뭐? 이 자식이……!”
그러자 그 옆에 있던 페이슨이 데보라를 보고 말했다.
“싫어? 그럼 나에게 양보하던지.”
“누가 싫다고 했어?”
“그럼 정해졌군. 프레드릭 백작을 상대할 사람은 테이거와 데보라다.”
결정을 내린 다섯 귀족들은 다시 만찬장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나타나자 에반스가 태연하게 물었다.
“그래, 프레드릭 백작과 대련할 사람을 정해졌습니까?”
“그렇습니다. 미흡하지만 여기 테이거와 데보라가 프레드릭 백작님께 한 수 배우기로 했습니다.”
“자, 그럼 대련 상대도 정해졌으니 대련장으로 이동합시다.”
프레드릭이 앞장섰다. 그런 그를 따라 만찬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모두 대련장으로 이동했다.
“하하하! 소드 마스터끼리의 싸움을 이렇게 빨리 볼 줄은 몰랐군.”
누구보다 신이 난 것은 안드레이 공작이었다. 프레드릭은 상대가 소드 마스터임을 의식해서인지 대련장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대련장 주위는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 주위로 많은 화롯불이 피워져 있었다.
프레드릭이 먼저 대련장 한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그러자 다섯 귀족 중 테이거가 나섰다.
“자, 시작해 볼까?”
프레드릭이 여유 있게 웃으며 먼저 검을 뽑았다. 그러자 테이거도 이어서 검을 뽑았다. 그때 프레드릭이 불쾌하다는 듯, 테이거를 향해 말했다.
“자네 정말 이대로 싸울 건가?”
“네?”
프레드릭의 말에 테이거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프레드릭이 들고 있던 검으로 테이거의 발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나 제어기는 떼어 내고 싸우는 게 좋겠는데.”
테이거가 깜짝 놀랐다.
“헉! 어떻게 그걸…….”
“그럼 내가 정말 상대도 안 될 애송이들과 대련을 할 줄 알았나?”
프레드릭의 신랄한 말에 테이거가 본심을 드러냈다.
“으음……. 이미 알고 계셨다니 어쩔 수 없군요. 원하시는 대로 상대해 드릴 수밖에.”
테이거는 발목에 차고 있던 마나 제어기를 풀었다. 그것을 보고 나머지 네 명의 귀족들이 흠칫 놀랐다.
마나 제어기를 대련장 한쪽에 던진 테이거가 검을 고쳐 들었다. 그리고 프레드릭을 향해 웃었다.
프레드릭은 웃고 있는 테이거의 눈이 냉철하게 빛나는 것을 보며, 에반스의 말대로 그가 정말 소드 마스터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프레드릭 백작도 음험하게 웃었다.
프레드릭이 먼저 검을 겨누자 테이거도 주저하지 않고 검을 들었다.
테이거의 검이 화롯불 빛에 반사되어 주황색 빛을 뿜었다.
프레드릭은 폭발하는 듯 붉게 흔들리는 오러 블레이드에 감탄했다.
‘시작부터 오러 블레이드로 시작하는 건가? 좋군.’
테이거의 오러 블레이드를 보면서 프레드릭도 자신의 검에 오러를 주입시켰다.
처어엉!
테이거의 검과 프레드릭의 검이 맞부딪쳤다.
파츠츠츠!
두 오러 블레이드가 충돌하면서 각양각색의 불꽃이 튀었다. 둘은 한 치도 물러나지 않고 팽팽하게 맞섰다.
채앵!
다시 한 번 검과 검이 마주쳤다. 그때, 테이거의 검이 변화를 일으켰다.
“오오!”
프레드릭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서걱!
테이거의 오러 블레이드에 프레드릭의 옷자락이 베어져 휘날렸다. 머리카락도 몇 가닥 끊겨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프레드릭 역시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프레드릭의 오러 블레이드가 테이거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헉!”
테이거의 입에서 헛바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테이거가 입고 있던 옷의 앞섶이 길게 잘려 나갔다. 서로 피해가 서로에게 피해를 입힌 둘은 일단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좋군.”
먼저 프레드릭이 말했다. 그러자 테이거가 자신의 앞가슴 쪽 옷에 새겨진 검의 흔적을 보고 피식 웃었다.
“이번엔 막기가 쉽진 않을 겁니다.”
“좋을 대로.”
테이거의 오러 블레이드가 순식간에 프레드릭 앞으로 다가왔다.
바우우웅!
뭐든지 베어 버리는 오러 블레이드가 공간을 찢으며 단숨에 짓쳐 들었다. 붉은 광채가 프레드릭의 숨통을 끊어 놓을 듯 거칠게 휘몰아쳤다. 프레드릭이 서둘러 몸을 피하려 했지만 그럴 틈도 없었다.
찌직!
프레드릭의 가슴에서 화끈한 통증이 일어났다. 프레드릭은 재빨리 오러 블레이드로 테이거의 오러 블레이드를 막았다.
터엉!
프레드릭이 생각보다 간단히 오러 블레이드를 튕겨 내자 테이거의 얼굴에 순간 당혹감이 어렸다.
하지만 프레드릭 또한 당황하고 있었다.
‘위험했다.’
프레드릭은 지금 공격하지 않으면 테이거를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과 동시에 그의 몸과 검이 동시에 움직였다.
‘검과 내가 하나가 된다.’
소드 마스터의 싸움은 집중력의 싸움이었다.
누가 더 집중해서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하고, 또 집중해서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가.
그것이 승패를 가늠하게 될 터였다.
스팟!
프레드릭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그 공격은 테이거의 예상보다 한 템포 빨랐다.
그 차이가 컸다. 테이거의 집중력이 떨어진 틈을 이용해서 프레드릭은 집중력을 최대한 발휘, 테이거에게 결정적인 일격을 선사한 것이다.
“헉!”
테이거의 눈이 커졌다.
그의 눈앞에서 들고 있던 검이 소리 없이 잘려 나갔다. 오러 블레이드가 채 맺히지 못한 테이거의 검은, 잔뜩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프레드릭의 검을 막아 내지 못했다.
찰그랑!
테이거의 잘린 검날이 반원을 그리며 땅바닥으로 굴렀다.
“……졌소.”
테이거가 반 토막 난 검을 바라보며 패배를 시인했다.
고개를 푹 숙인 테이거의 뒤로 데보라가 대련장의 한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강철영주 5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