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9 압실론 후작 에반스 (39/90)

 Chapter 9   압실론 후작 에반스

첸들러 백작의 반란을 큰 피해 없이 막아 낸 에반스는 가신들과 후작성의 영지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에반스는 일단 압실론 후작가의 임시 가주로써 후작령을 맡아서 통치했다.

그러면서 트렌시아 제국의 수도 바룬으로 사람을 보내 자신이 압실론 후작령의 제후가 되는 것을 윤허해 주십사 황제에게 청했다. 에반스는 귀족 명부에 압실론 후작가의 장남으로 올라 있는 상속 서열 1위였다.

때문에 에반스가 압실론 후작령의 제후가 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보다 빠른 일처리를 위해서 에반스는 루버첸에게서 획득한 마법검을 황제에게 진상했다.

그러자 다음 날, 바로 황제로부터 에반스를 새로운 압실론 후작령의 제후로 임명한다는 임명장이 나왔다. 마법검이 귀하다더니, 과연 효과가 확실했다.

그 임명장이 압실론 후작성에 도착하는 날, 에반스는 후작성의 신전에서 압실론 후작가의 가주로, 그리고 제후의 자리에 올랐다.

에반스는 후작령의 모든 영지민들이 축복하는 가운데 압실론 후작이 되었다.

그가 후작이 된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압실론 후작령에 속한 모든 영지에서 살인범을 제외한 모든 죄수들을 석방하는 일이었다.

또한 에반스는 엘렌을 불러서 자신의 보좌관으로 삼았다. 그리고 후작가의 가신들을 대부분 그대로 등용하면서, 후작가 총관의 자리에 메디슨 남작을 임명했다.

“후작령을 맡기에 저는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메디슨 남작이 거절했지만, 에반스는 제후로써 메디슨 남작의 작위를 자작으로 승작시키고 그를 압실론 후작가의 총관으로 삼았다. 그리고 기존 카라스 영지의 정보부를 압실론 후작령의 정보부로 승격시켰다.

그들의 역할은 압실론 후작령을 넘어 이제 트렌시아 제국 전역으로 정보망을 넓히는 일이 되었다.

당연히 칼과 라일라는 힘들어 죽겠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에반스는 엘렌과 함께 인재를 뽑아 그들에게 일을 나눠 맡겼다.

그러자 일이 많아서 신음하던 관리들이 한결 편안하게 영지 일을 꾸려 나가게 되었다.

에반스가 정식으로 제후가 된 지 한 달의 시간이 흐르고, 압실론 후작령이 어느 정도 초석을 갖췄을 무렵이었다.

압실론 후작령과 이웃하고 있는 두 후작령인 콘라드 후작령과 라미셀 후작령에서 사자를 보내왔다.

에반스는 후작령의 외교 담당관으로 하여금 그들을 맞게 했다. 압실론 후작령의 외교 담당관은 미테랑 자작으로, 전대 후작 시절부터 외교를 담당해 온 베테랑이었다.

미테랑 자작은 콘라드 후작령과 라미셀 후작령에서 보낸 사자들을 만난 후, 굳은 얼굴로 에반스를 찾았다.

“후작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라니 뭐가 말이요?”

문제의 발단은 두 후작령의 사자들이 가져온 두 장의 문서 때문이었다. 그 문서에는 각각 압실론 후작령의 서부와 동부 경계의 철광과 금광 개발권을 콘라드 후작령과 라미셀 후작령에 향후 20년 간 넘긴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그 문서를 채결한 자가 각각 테오르와 라오치였다. 두 후작령에서는 그 문서의 실효성을 두고 사자를 통해 압실론 후작의 뜻이 어떤지를 묻고 있었다.

“테오르와 라오치가 죽은 마당에 그 문서가 무슨 효력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 둘은 압실론 후작도 아니지 않는가? 후작의 둘째, 셋째 아들이 체결한 문서에 대해서 압실론 후작령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너무 억지스러운 일 아닌가?”

에반스의 말에 미테랑 자작이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우, 그야 저희 입장에서는 그렇지요. 하지만 상대측의 입장에서야 그 문서를 근거로 뭐라도 하나 더 뜯어내려 들겠지요.”

“제후가 되자마자 이웃 제후들이 신고식을 톡톡히 치르게 만들 모양이군. 그렇다면 그들에게 내가 어떤 존재인지 인식시켜 줄 필요가 있다. 가서 두 사자를 데려오라.”

에반스의 명령에 미테랑 자작이 콘라드 후작령의 사자와 라미셀 후작령의 사자를 후작의 집무실로 데리고 왔다.

“후작님을 뵙습니다. 카슬런 자작입니다.”

콘라드 후작령의 사자가 먼저 인사를 했다. 그러자 뒤이어 라미셀 후작령의 사자가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했다.

“나프런 자작입니다.”

“미테랑 자작에게서 두 사자가 가져온 문서에 대해 얘기를 들었소. 두 문서의 결재자가 하필 죽은 내 두 동생이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오. 그런 엉터리 문서를 작성해서 귀 영지에 넘기다니……. 내 동생들이 살아 있었다면 당장 사과를 했을 텐데 아쉽소.”

“그 말은 지금 그 문서가 아무런 효력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카슬런 자작의 말에 에반스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콘라드 후작령을 대표하는 자는 오직 제후인 콘라드 후작뿐이듯, 우리 압실론 후작령을 대표하는 자 역시 제후인 압실론 후작뿐이오. 그런데 귀 영지에서 가져온 문서의 결재자는 압실론 후작가의 둘째 아들 테오르요. 그가 결정한 일에 대해 압실론 후작령이 책임질 것은 없다는 것이 나 압실론 후작의 생각이오. 때문에 그 문서로 인해 우리 후작령이 휘둘리는 일은 없을 것이오.”

에반스가 문서의 효력이 전혀 없음을 콘라드 후작령의 사자에게 알렸다. 더불어 더 이상 그 문제 자체로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카슬런 자작은 기죽지 않고 말했다.

“후작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해 생기는 문제에 대해서는 모든 책임은 압실론 후작령과 후작님이 지셔야 하실 것입니다.”

사실상 거의 선전 포고와 같은 카슬런 자작의 말에 에반스의 얼굴이 굳었다. 에반스는 애써 담담하게 카슬런 자작에게 말했다.

“귀 영지에서 책임을 묻겠다면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다시 한 번 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면 책임은 오히려 콘라드 후작령이 져야 할 거라고 제후이신 콘라드 후작께 전해 주게.”

에반스가 선전 포고를 받아 주겠다는 강경한 발언을 하자 카슬런 자작이 굳은 얼굴로 집무실을 나갔다.

카슬런 자작과 에반스의 설전을 보고 라미셀 후작령의 나프런 자작이 말했다.

“결론은 이미 나 있는 것 같군요. 후작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저희 후작님께 그 뜻을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나프런 자작.”

카슬런 자작에 이어서 나프런 자작도 집무실을 나서려 할 때, 에반스가 그를 불러 세웠다.

“그대가 만나 줬으면 하는 자가 있네.”

“네? 제가요?”

“데려와라.”

에반스의 명에 잠시 후 덩치 좋은 젊은 남자가 집무실에 들어왔다. 그를 보고 에반스가 말했다.

“나프런 자작, 저 자는 귀 영지의 기사인 루크요.”

“네?”

루크를 소개시키자 나프런 자작이 그게 무슨 소리냐며 에반스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에반스를 루크를 보고 말했다.

“루크. 나프런 자작은 라미셀 후작령의 사자로 여기에 와 있다. 그에게 할 말이 많을 테니 대화를 나눠 봐라.”

에반스의 말에 루크가 나프런 자작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그에게 그간의 얘기를 했고, 그러자 나프런 자작이 깜짝 놀랐다. 루크와 나프런 자작은 좀 더 심각하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나프런 자작이 에반스에게 말했다.

“후작님. 이 일은 저 혼자 결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차후 다시 찾아뵈어도 될는지요?”

나프런 자작의 말에 에반스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 나브런 자작은 곧장 에반스의 집무실을 나섰다.

몇 시간 후, 나프런 자작은 다시 에반스 앞에 섰다.

“저희 라미셀 후작께서는 압실론 후작님께서 제후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양쪽 영지가 서로 우호 관계를 지속할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해서 이번 문서 사건은 없었던 일로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나프런 자작의 말에 에반스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라미셀 후작령과 돈독한 이웃으로 지내고 싶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라고 라미셀 후작께 전해 주게. 그리고 후작께서 보여 주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나도 간첩 혐의로 우리 영지에 잡혀 있는 델파일 백작과 그의 기사 루크를 라미셀 후작령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교환 시기는……?”

교환이란 라오치가 작성한 문서와 델파일 백작과의 교환을 말했다.

“그 시기는 라미셀 후작께서 정하시는 것이 좋겠군. 동생이 보고 싶으시다면 그만큼 빨리 교환을 원하실 테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바로 여쭤 보겠습니다.”

나프런 자작이 물러나 통신을 한 후, 다시 에반스와 대면했다.

라미셀 후작은 교환 시기를 바로 다음 날로 정했다.

에반스는 그 날, 델파일 백작과 루크를 넘기고 라오치가 작성한 문서를 받았다.

그 일로 인해 더 이상 라미셀 후작령과 압실론 후작령 사이의 분쟁거리는 사라졌다. 하지만 콘라드 후작령과의 분쟁이 본격화되었다.

에반스는 정치 또한 밀고 당기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특히 강경하게 밀어붙일 때는 인정사정 봐주지 말고 단숨에 밀어붙여야 한다는 것 정도는 정치의 기본이었다.

압실론 후작령의 경우, 군사력에 있어서 어느 대영지에 못지않았다. 그런 와중에 첸들러 백작과 에반스가 군대를 키워 내자, 압실론 후작령에는 군사가 넘쳐났다.

카라스 영지군과 라마스 영지군, 그리고 후작군까지.

모두 포함하면 그 병력이 5만을 훌쩍 넘었다. 게다가 그 병력은 모두 영지에서 징병해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다.

즉, 얼마든지 회전이 가능한 전투 부대인 셈이었다. 이것은 현재의 모든 병력을 소진해도, 압실론 후작령에 얼마간의 여력이 더 있다는 뜻이었다.

이 모든 것은 에반스가 후작령 내 전투를 유발시키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만약 전투가 벌어졌다면 압실론 후작령은 꽤 큰 손실을 입었을 것이고, 주위 대영지의 압박에도 어쩔 수 없이 굴복해야 했을지 몰랐다.

“라마스 영지군과 카라스 영지군을 해산시키지 않은 게 이럴 때 도움이 되는군.”

에반스는 프레드릭에게 5만의 병력을 이끌고 콘라드 후작령과 압실론 후작령의 경계 지역으로 갈 것을 명했다.

압실론 후작가의 제 1기사단장인 프레드릭이 이끄는 5만 병력이, 서부에 있는 콘라드 후작령과의 경계에 도착했다.

콘라드 후작령이 발칵 뒤집어졌다.

놀란 콘라드 후작이 즉시 사자를 보내왔다.

“이게 무슨 경우입니까?”

따지듯 말하는 사자를 보고 에반스가 말했다.

“문서 가져와. 아니면 싸우던지.”

에반스의 그 말에 사자는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찾아온 사자의 손에는 테오르가 결재한 문서가 쥐어져 있었다.

에반스는 그 문서를 받고 즉각 콘라드 후작령의 경계에 주둔 중이던 압실론 후작군 5만을 물러나게 했다.

대개 후작령의 경우, 기본적으로 2만 명 정도의 병력을 후작성에 주둔시켰다. 즉, 그 2만 명이 후작령에서는 최정예 부대인 것이다.

콘라드 후작령의 경우도 후작성에 2만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영지의 경우, 영주들이 자체적으로 병력을 운용했다.

그런데 갑자기 콘라드 후작령의 경계에 5만의 병력이 떡하니 나타난 것이다.

콘라드 후작이 당장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은 2만이었다.

5만의 병력이 공격을 가하게 되면 콘라드 후작령으로서는 막아 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물론 싸움의 승패는 직접 부딪친 후에야 결정될 것이다. 하지만 그 싸움이 끝난 후, 콘라드 후작령에 남는 것은 폐허가 된 영지와 전쟁으로 인해 들어간 막대한 재정 적자뿐이었다.

그 재정 적자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침략해 온 압실론 후작령으로 쳐들어가야 하는데, 문제는 그때 그 정도의 여력이 콘라드 후작령에 남아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결국, 5만이나 되는 병력의 압실론 후작군이 콘라드 후작령을 침공하면, 이기든 지든 콘라드 후작령은 엄청난 손해를 입는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그것을 면하기 위해서라도 콘라드 후작은 테오르가 결재한 문서를 순순히 에반스에게 내줄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은 수도와 제국 전체에 압실론 후작령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에반스의 강경책 이후, 콘라드 후작령과 압실론 후작령 사이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하지만 두 영지 모두 서로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면 서로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활발하게 사자를 주고받으며 두 영지는 빠르게 관계를 개선해 나갔다.

에반스는 카라스 영지를 라르손에게, 라마스 영지는 후작가의 제 1기사단장인 프레드릭에게 맡겼다.

라르손에게는 자작의 작위가 내려졌고 프레드릭에게는 백작의 작위가 내려졌다.

그리고 차기 후작가의 기사단장에는 프레드릭의 아들인 제레미언을 임명했다.

시간이 흐르며 압실론 후작성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에반스가 직접 해야 할 일들이 아직도 많았다. 에반스와 엘렌은 잠잘 시간도 없이 일에 매달렸다.

그러던 중, 수도의 국방 장관인 레이놀드 후작이 에반스에게 협조 공문을 보내왔다. 공문의 내용은 실종된 아카데미 기사학부의 학장, 카베인을 찾는데 협조해 달라는 것이었다. 에반스는 도울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회신했다.

그리고 그 일은 까마득히 잊고 다시 정신없이 일에 빠져들었다.

“누가 왔다고?”

“국방 장관이신 레이놀드 후작님의 아드님이신 앨빈 자작님과 베일리 후작님의 아드님이신 케이런 남작님, 그리고 아돌프 후작님의 아드님이신 페이슨 남작님, 도널드 후작님의 따님이신 데보라 아가씨, 그리고 실종되신 카베인 후작님의 아드님이신 테이거 님이십니다. 그분들께서 후작님을 뵙기를 청하고 계십니다.”

모두 렉터 공작의 제자들이 낳은 자식들이었다.

‘그들이 왜?’

에반스는 일단 그들을 만나겠다고 했다.

잠시 후 젊은 귀족 남자 네 명에 한 명의 귀족 영애가 에반스의 집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들 훤칠하니 잘생겼고, 귀족 영애는 나무랄 곳 없이 아름다웠다.

“압실론 후작령의 제후를 뵙습니다. 저는 앨빈, 이쪽은 케이런, 페이슨, 데보라, 테이거입니다.”

레이놀드 후작 자제인 앨빈이 너무도 간단히 서 있는 순서대로 자신들을 소개했다. 아마도 자신들처럼 젊은 에반스를 보고, 굳이 격식을 차린 인사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에반스의 입장에서는 이런 인사가 오히려 신선하고 좋았다.

“반갑습니다. 수도의 쟁쟁하신 가문의 자제분들께서 이곳에는 어쩐 일로 찾아 오셨을까요?”

에반스의 지위는 이 젊은 귀족들보다 높았다. 하지만 대놓고 반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에반스가 예의를 갖춰 하대를 하지 않자 그들도 호감 어린 표정으로 에반스를 보았다.

“저희 아버님께서 이미 협조를 구해 두셨다고 하셔서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만?”

앨빈의 말에 그제야 에반스는 레이놀드 후작의 협조 공문이 떠올랐다.

“아아! 이제야 생각이 나는군요. 제후가 된 후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사실 반쯤 정신이 없답니다. 그래, 내가 뭘 어떻게 도와주면 될까요?”

“저희는 실종되신 카베인 후작님을 찾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그분이 실종되신 것으로 알려진 압실론 후작령의 남쪽 숲에 갈 수 있게 도움을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유능한 관리를 보내도록 하지요.”

“고맙습니다.”

젊은 귀족들이 물러가자 에반스는 마법사 루크를 불렀다. 루크는 현재 마법사를 양성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왜 전에 사용했었던 그 종속 마법인가 하는 거 말이야. 지금 쓸 수 있지?”

“물론입니다. 누굴 감시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에반스는 루크에게 수도에서 온 다섯 명의 귀족들을 은밀히 감시해 달라고 했다.

“알겠습니다.”

루크는 일단 모기에게 종속 마법을 걸어서 후작 저택의 귀빈실에 있는 다섯 명의 귀족들을 감시하게 했다.

수도에서 온 다섯 손님이 다녀간 뒤, 에반스는 보좌관인 엘렌과 같이 영지 개혁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압실론 후작령 전체의 영지 개혁은 현 시점에서 이뤄지기 어려웠다. 적어도 몇 년간 암실론 후작령의 정치적, 경제적인 문제가 안정된 후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는 점에서, 에반스와 엘렌은 이미 그 뜻을 같이했다.

하지만 그 날이 오기 전에 그 사전 계획은 짜 두는 것이 좋겠다는 취지에서, 에반스와 엘렌은 시간이 날 때마다 영지 개혁에 대해 토론을 했다. 그때 에반스의 통신을 전담하는 마법사가 직접 찾아와서 말했다.

“후작님, 수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수도에서? 누군데?”

“안드레이 공작님이십니다.”

“뭐?”

에반스는 즉시 통신실로 향했다.

-오랜만이군.

“네. 공작님.”

-자네 소문을 수도에서 들었네. 대단하더군.

“별말씀을…….”

-압실론 후작령의 제후가 된 것을 축하하네.

“고맙습니다.”

-아버님은……. 꼭 껴안아 드렸나?

“네. 덕분에 아버지와 화해를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를 생각하니 울컥해진 에반스가 바로 화제를 돌렸다.

“제가 후작이 된 것을 축하해 주시려고 연락하신 건 아니시겠고,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하하하. 그럴까? 젊은 사람은 이래서 대화하기 편하다니까.

통신구에 보이는 안드레이 공작은 20대 초반이었다. 그런데 다 늙은이 같은 말을 하고 있으니, 보는 에반스도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내 제자를 찾는 건 어떻게 되어 가나 해서 말이야.

안드레이 공작의 말에 에반스는 정중히 사과부터 했다.

“죄송합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최근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 분을 찾는 일을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단서는 얻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직접 조사하지는 못했습니다.”

-단서? 그게 뭔가?

에반스는 사실대로 안드레이 공작의 제자가 파르미르 고원 너머로 간 것을 얘기했다. 그리고 그곳으로 안내했던 셰르파의 이야기를 기억나는 대로 안드레이 공작에게 이야기했다.

-그 셰르파를 만나 봐야겠네.

스팟!

그 말을 끝으로 안드레이 공작이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었다.

그때였다.

화아아악!

“헉!”

통신실의 통신 마법사가 기겁을 하며 놀랐다.

통신실 안이 온통 밝은 빛에 휩싸인 것이다. 빛이 사그라지자, 통신실 안엔 안드레이 공작이 서 있었다.

에반스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바로 오십니까?”

에반스의 말에 안드레이 공작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늙으면 별로 할 일이 없다네. 그리고 성격도 조금 급해지지.”

에반스는 안드레이 공작과 함께 통신실을 나섰다.

“참, 자네는 이제부터 나를 앙리라고 부르게.”

“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에반스가 안드레이 공작을 쳐다보다 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외모로 봤을 때 자네가 나보다 더 들어 보이는 게 사실이잖나? 그러니 사람들 앞에서는 나를 동생으로 부르란 말이지.”

안 그래도 안드레이 공작을 일일이 설명해야 하는 일이 귀찮았던 에반스는 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에반스는 안드레이 공작을 후작 저택의 귀빈실로 보내고 엘렌과 영지 개혁에 대한 토론을 마저 정리한 후, 제후로서 하루 일과를 마쳤다.

***

메디슨 자작은 수도에서 찾아온 특별한 손님들을 위해서 특별 저녁 만찬을 준비했다. 만찬에 대한 모든 준비는 총관의 딸이자 후작 저택의 시녀장인 에이미가 맡았다.

그런데 만찬이 조금 이상해지고 말았다. 만찬을 준비하는 에이미도 젊고 손님들도 모두 젊다 보니, 조금은 무거웠던 만찬장의 분위기가 웃고 떠드는 사교장 같이 되어 버렸다.

“하하하! 정말 재미있군.”

“호호호! 앙리는 너무 재미있는 것 같아.”

에반스가 만찬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웃음소리가 밖에까지 흘러나왔다. 에반스가 만찬장 안에 들어가니 에이미는 또래 영애인 데보라와 대화 중이었고, 젊은 남자 귀족들은 서로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잡담을 나누었다.

그런데 그때 안드레이 공작이 안쪽 방에서 우스꽝스런 옷을 입고 나타났다.

“호호호, 앙리! 제발 그만 웃겨!”

에이미와 데보라가 배를 잡고 자지러지게 웃었다. 4명의 젊은 귀족 남자들 역시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앙리는 정말 유쾌한 사람이군.”

그때 에반스가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러자 만찬장의 손님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예의를 갖췄다. 안드레이 공작도 따라 에반스에게 인사를 했다. 그때 시녀장인 에이미가 에반스에게 다가와서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후작님.”

“아니, 에이미가 그렇게 밝게 웃는 건 오랜만인 것 같아. 보기 좋았어.”

에반스가 만찬장을 보며 이어 말했다.

“오늘 만찬은 여러분이 주인공이니 편하게 즐기기 바랍니다.”

에반스의 말에 젊은 손님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그 중에는 안드레이 공작도 있었다.

그때 데보라가 에반스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후작님의 사촌 동생 분이 너무 귀여워요.”

“하하하! 우리가 별로 닮진 않았죠?”

어느새 다가온 안드레이 공작이 에반스의 어깨에 한손을 올리며 말했다. 졸지에 안드레이 공작의 사촌 형이 되어 버린 에반스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좀 많이 안 닮았지.”

그날 만찬에서 가장 신난 것은 안드레이 공작이었다. 그는 만찬이 끝날 때까지 에이미와 데보라 사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만찬이 끝나고, 수도에서 온 손님들은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

안드레이 공작이 에반스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차나 한잔하지.”

에반스는 곧 에이미에게 자신의 방으로 차를 가져 달라고 하고 안드레이 공작과 같이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여기가 자네 방인가? 생각보다 검소하군.”

에반스는 호화로운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의 방은 침대와 가구, 그리고 책장 밖에 없었다. 안드레이 공작이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그 애들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야?”

“아는 사이는 무슨, 국방 장관인 레이놀드 후작이 협조 공문을 보내와서 도와주겠다고 회신을 했더니 우르르 몰려온 겁니다.”

“그래? 나는 또 네가 렉터 공작과 아는 사이인 줄 알았지.”

“렉터 공작을 아십니까?”

“당연하지, 내 나이가 몇 살인데. 대단하신 분이신데 갑자기 실종되셨지. 그 아이들 애비가 렉터 공작이 말년에 거둔 제자들이잖아. 난 또 네가 소드 마스터인 게 렉터 공작의 진전을 이어서 그렇게 빨리 소드 마스터가 된 줄 알았지.”

안드레이 공작의 말이 딱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반스는 렉터 공작의 진전을 이었다기보다는 검공 라마스의 진전을 이었다고 봐야 했다.

“얘기를 들어 보니 저들은 남쪽 숲으로 간다면서?”

“네.”

“우리와 길은 달라도 어차피 파르미르 고원으로 가는 건 같군.”

“그런데 거기서 왜 우리라는 말을 쓰시는지요?‘

“그야 당연히 넌 나와 같이 가야하니까.”

“제가 왜 공작님을 따라가야 합니까?”

“그럼 그 먼 길을 나 혼자 가리?”

“왜 못갑니까? 여기에 오셨을 때처럼 단숨에 마법으로 파르미르 고원까지 가시면 되잖습니까?”

“에이, 그럼 재미가 없지.”

“안돼요. 전 여기서 할 일이 많아요.”

“그러지 말고 같이 좀 가자. 거기 가는데 며칠이나 걸린다고 그러냐?”

“싫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저번에 네가 보여 줬던 그 마법 문양에서 말이야. 가장 중요한 기능 하나를 너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더군. 뭐 같이 안 가겠다는데 알려 줄 필요도 없겠지.”

안드레이 공작의 말에 에반스가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바쁘긴 하지만 어르신께서 가신다는데 당연히 옆에서 말동무가 되어 드려야지요.”

“오오, 그래. 고맙구나. 그럼 우리도 내일 떠나자.”

“내일이요?”

“그 애들도 내일 바로 떠난다는데 가는 김에 같이 가지 뭐.”

에반스는 늦은 시간이지만 보좌관인 엘렌과 총관 메디슨 자작을 집무실로 불렀다.

“한 보름 정도 어디 좀 다녀올 테니 대신 영지를 부탁해. 매일 마법 통신으로 연락할 테지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알리고.”

“아니 갑자기 어딜 가신다고…….”

“그럴 일이 있어. 그럼 부탁해.”

황당한 표정을 짓는 엘렌과 메디슨 자작을 뒤로 하고, 에반스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에반스의 방에는 루크가 와 있었다.

루크는 종속 마법을 통해 살핀 다섯 귀족들에 대해 에반스에게 보고했다.

“제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그들은 카베인 후작을 찾는다는 이유로 뭔가를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뭔데?”

“그야 모르죠.”

“흐음, 아무래도 루크도 나를 따라가야 될 것 같아.”

“가다니, 어딜 말입니까?”

“파르미르 고원 너머.”

“미쳤습니까? 제가 거길 가게.”

“안드레이 공작이라고 알지?”

“당연히 알지요. 그분 모르면 그게 어디 마법사입니까?”

“안드레이 공작 만나게 해줄게.”

“네?”

루크가 뻥치지 말라는 눈으로 에반스를 쳐다보았다.

“정말이야. 내일 당장 만나게 해 줄게.”

“저, 정말이죠?”

“그럼 같이 가는 거지?”

“당연하지요. 오오, 그분을 뵐 수 있다니.”

“그렇게 좋아?”

“그럼요. 제가 가장 존경하는 마도사님이신데.”

“휴우, 직접 겪어 봐라. 그런 말이 나오나.”

“에?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야, 수고가 많다고. 내일부터 먼 길 가야할 텐데 그만 가서 쉬어.”

에반스는 루크를 내보내고 나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렉터 공작을 배신한 그 제자들에게 복수를 결심했는데 막상 그 후예들과 이렇게 엮이게 될 줄은 몰랐군. 어쩐다?’

고심하던 에반스는 직접 그들을 겪어 보고 그들을 어떻게 할지 결정하기로 했다.

“이 시간에 우린 왜 찾은 거예요?”

방문이 열린 적이 없건만, 두 사람이 에반스의 앞에 서 있었다. 바로 칼과 라일라였다. 트렌시아 제국 전역에 압실론 후작령의 정보 조직망을 구축하느라 불철주야 바쁜 두 사람이었다. 어쌔신 출신답게 그들은 기척도 없이 에반스의 방에 모습을 드러냈다.

에반스가 두 사람을 쳐다본 후 말했다.

“얼굴들이 많이 좋아졌군.”

“정보 조직이 이제 기초 단계는 갖춰졌습니다.”

칼의 말에 에반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됐네. 당분간 정보 조직은 칼이 이끌어 줘야겠어.”

에반스의 말에 칼과 라일라가 어리둥절해 하자 에반스가 계속 말했다.

“안드레이 공작과 같이 파르미르 고원을 넘어가야 할 것 같아. 라일라의 도움이 필요해.”

에반스의 말에 칼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라일라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보름만 고생해. 그 안에 돌아올 테니.”

“…….”

“야호!”

칼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고 반대로 라일라는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다. 그러다가 둘 모두 올 때처럼 소리도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에반스도 내일 후작성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약간 마음이 설레었다.

에반스가 안드레이 공작과의 동행을 허락한 것은 사실 마법검 때문만은 아니었다.

제후가 된 후, 집권 초반기 민심의 흐름을 파악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어차피 지방 순회에 나설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과 맞물려서 이렇게 후작성을 떠나게 된 것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후작이 된 후로 처음 떠나는 여행인가?”

에반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