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스는 바로 칼 파의 아지트로 갔다. 그리고 치료사를 불러서 먼저 레어폴 자작을 치료했다. 출혈이 심했던 레어폴 자작은 얼굴이 파리했지만 치료가 늦지 않아 살아날 수 있었다. 치료사가 치료를 할 동안 에반스와 칼은 루크로부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전부 들을 수 있었다.
라미셀 후작은 압실론 후작령의 후계자로 유력한 테오르가 콘라드 후작가의 영애인 소피아와 결혼하자 혹시 두 영지가 손을 잡고 라미셀 후작령을 노리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심했다고 했다.
그래서 테오르의 동생인 라오치와 라미셀 후작가의 영애와 결혼을 시키려 했는데, 라오치가 싫다고 고집을 피운 탓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 압실론 후작이 갑자기 병석에 드러눕자, 라미셀 후작은 어떻게든 테오르가 압실론 후작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동생인 델파일 백작을 압실론 후작령으로 보내서 레어폴 자작으로 행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테오르를 견제하기 위한 세력을 만들면서 줄곧 라오치를 도와 온 것이다.
“라미셀 후작에게 델파일 백작은 어떤 동생이지?”
에반스의 물음에 루크가 바로 대답했다.
“델파일 백작님은 후작님의 친동생이시다. 그쪽이 원하는 게 뭐든, 후작님께서는 델파일 백작님을 살리기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하실 것이다.”
“그렇군. 소중한 동생이란 말이지?”
에반스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당분간 둘은 잘 가둬 놔. 후일 쓸 데가 있을지 모르니.”
***
레어폴 자작은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식은 라오치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라오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즉시 칼을 불렀다. 칼은 에반스와 헤어져서 라오치의 저택으로 갔고, 에반스 역시 램버튼 백작의 저택으로 움직였다.
에반스가 램버튼 백작의 저택에 도착했을 때, 램버튼 백작은 이미 애덤스를 찾으며 난리를 치고 있었다. 에반스는 즉시 램버튼 백작에게 달려갔다.
“오! 애덤스, 네가 어떻게 된 줄 알고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아느냐?”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의 램버튼 백작을 보고 에반스가 감격 어린 얼굴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에반스를 감시하던 자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백작님께 큰 걱정을 끼쳐 드렸습니다.”
“그래서 그 감시자는 찾았느냐?”
“그게……. 찾긴 찾았는데 이미 죽은 상태였습니다.”
에반스는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뭐? 그래서?”
“다행히 그 감시자가 죽어서도 증거를 남겼습니다.”
“증거?”
“네. 성내 에반스의 조력자를 알아낸 것 같습니다.”
“그게 누구냐?”
“아직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좀 더 알아보고 나서 말씀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에반스가 대답하는 것을 주저하자 램버튼 백작이 괜찮으니 어서 말하라고 다그쳤다. 에반스는 못이기는 척하며 거짓으로 조력자를 밝혔다.
“추측컨대, 에반스의 조력자는 테오르 님의 부인이신 소피아 님이 아닐까 싶습니다.”
“뭐? 소피아?”
황당한 표정의 램버튼 백작을 보고 에반스가 말했다.
“아직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 소피아가 왜? 서, 설마 혹시 소피아와 에반스가?”
“백작님. 어떻게…… 계속 조사를 할까요?”
“어? 아, 그래. 조사해서 에반스를 도운 자가 누군지 확실히 밝혀내.”
말을 하면서 램버튼 백작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만약 이게 사실이면 테오르는 완전히 누님의 눈 밖에 나게 될 거다. 그럼 레이언을 제후로 만드는 것이 더 수월해 질 테지. 흐흐흐……. 일이 술술 풀리는구나.’
램버튼 백작은 에반스를 거두고 나서 모든 일이 잘 풀리자 그가 더 없이 고맙고 소중하게 여겨졌다.
***
후작 부인은 자신의 장남인 테오르와 며느리인 소피아를 후작 저택에서 살게 했다. 그러다 보니 소피아도 후작 저택의 안살림에 이래저래 관여를 하게 되었다. 후작 부인은 영특한 소피아에게 의지하면서 안살림의 대부분을 소피아가 관장하게 했다.
후작가에서 다른 물품은 몰라도 후추와 커피에 대해서는 소피아가 직접 챙겼다.
워낙 귀한 물품들이다 보니 그 양도 많지 않았다. 비싼 만큼 품질이 좋은 상품을 사는 것이, 귀족가에서 안주인이 하는 중요한 역할 중 하나였다.
소피아는 콘라드 후작가에서 살 때부터 좋은 후추와 커피를 잘 구분해 냈다. 때문에 후작 부인도 후추와 커피를 구입하는 일은 소피아에게 모두 일임한 상태였다.
평소처럼 수도에서 좋은 후추와 커피를 들여왔다는 소리를 들은 소피아는 직접 상단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 물건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어떻게 최상질의 후추와 커피란 말이냐?”
“부인, 왜 이러십니까? 이건 정말 좋은 후추와 커피입니다. 저희도 정말 어렵게 구해서 가져온 겁니다.”
“흥, 마르테스는 어디 있느냐?”
마르테스는 소피아가 주로 거래하는 상단의 주인이었다.
“상단주께서는 바쁘셔서…….”
“어디 있냐는데도?”
소피아도 화가 나면 성격이 괄괄했다.
“저기 뒤쪽 창고에…….”
상인의 말에 소피아가 곧장 뒤쪽 창고로 움직였다. 네 명의 호위 기사와 그녀의 시녀 두 명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상점의 뒤쪽에는 꽤 커 보이는 창고가 있었다.
“여기인가 보군. 문을 열어라.”
“네.”
소피아의 명령에 호위 기사 두 명이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창고 문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안쪽은 어두침침해서 뭐가 있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마르테스! 당신이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죠?”
소피아가 화를 내며 겁도 없이 어두운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호위 기사들이 황급히 그녀의 주위를 에워쌌다. 두 시녀 역시 소피아 옆에 나란히 서서 걸었다.
그때였다.
피슝!
“컥!”
그녀를 에워싸고 있던 네 명의 기사들이 일제히 목을 잡고 쓰러졌다. 쓰러진 기사들의 목에는 전부 바늘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아악!”
소피아의 양옆에 서 있던 두 시녀가 비명을 질렀다.
끼이이익!
동시에 창고 문이 닫혔다.
창고 내부가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화르르르!
그때 창고 한쪽에서 횃불이 밝혀졌다.
화륵, 화르륵!
횃불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그러면서 어둡던 창고가 어느 정도 밝아졌다.
“아, 아니! 당신은?”
소피아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발견한 사람은 바로 압실론 후작가의 가신 중 하나인 지네단 남작이었다.
“하하하! 소피아 님! 이런 곳에서 뵙게 되는군요.”
능청스럽게 웃는 지네단 남작의 옆에는 상단주인 마르테스가 있었다.
그런데 마르테스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한쪽 눈이 퉁퉁 부어 있었고, 다리도 심하게 절었다.
“당신 짓인가요?”
소피아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지네단 남작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러자 지네단 남작이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확실히 소피아 님은 대범하시군요.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런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신다고 뭐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이게 다 운명이겠거니 하고 생각하십시오.”
지네단 남작이 뒤쪽으로 손짓을 하자 창고 안쪽에서 밧줄에 묵인 젊은 남자 네 명이 끌려 나왔다.
“풀어 줘.”
지네단 남작의 명령에 주위 사람들이 젊은 네 남자를 묵고 있던 밧줄을 풀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짧게 명령했다.
“벗어!”
“헉! 왜, 왜들 이러십니까?”
네 남자들이 잔뜩 겁에 질려 떨고만 있자 스릉 소리와 함께 주위에서 단검을 빼 들었다.
화들짝 놀란 네 명의 남자가 황급히 옷을 벗었다.
지네단 남작이 비릿하게 웃으며 자신의 수하들에게 명했다.
“시작해!”
지네단 남작의 명령이 떨어지자 주위에 있던 수하들이 소피아의 양옆에 서 있던 두 시녀를 낚아챘다.
쫘아아악!
“아악!”
“안 돼!”
옷 찢는 소리와 함께 두 시녀의 비명 소리가 창고 안을 가득 메웠다.
콘라드 후작이 테오르와 소피아의 결혼을 허락한 것은 테오르가 압실론 후작이 될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그런데 압실론 후작성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따르면 압실론 후작이 깨어나지도 못하고 드러누워 있는데, 유력한 후계자인 테오르는 멍청하게도 제구실도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콘라드 후작은 후작가가 자랑하는 암살 조직을 소피아에게 보냈다. 그들은 콘라드 후작가에서 보낸 요리사와 시녀와 시종으로 위장되서 소피아에게 보내졌다.
콘라드 후작의 뜻은 강경하면서도 확실한 것이었다.
바로 테오르를 제외한, 후작성에서 영향력을 가진 자들은 모두 제거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 대상은 후작 부인부터 시작해서 램버튼 백작, 둘째인 라오치, 셋째 레이언까지 해당되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하지만 소피아는 그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은 가족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후작이 되겠다고 가족을 다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소피아는 어떻게든 콘라드 후작을 설득하려 했다. 그런데 일어나선 안 될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소피아의 경호는 압실론 후작가의 기사들이 도맡았다. 하지만 콘라드 후작이 보낸 암살 조직에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녀를 지켰다.
암살 조직원들은 소피아가 창고에 들어가고 나서 창고 문이 닫히자 뭔가 이상하다고 여겼다. 그들은 창고의 열려진 창문을 통해서 간단히 내부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가 막힌 장면을 보았다.
웬 자들이 소피아의 두 시녀를 겁탈하고는 목을 졸라 죽이는 것이 아닌가?
두 시녀가 죽는 것을 보고 소피아가 분노해서 소리쳤다.
“지네단 남작!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고 있나요?”
소피아가 큰소리로 말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공포에 떨리고 있었다.
“하하하!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수하들이 볼일을 마치면 고통 없이 죽여 드릴 테니 말입니다.”
지네단 남작은 첸들러 백작이 시킨 대로 그의 조카며느리인 소피아를 겁탈해서 죽이고 그 죄를 라오치의 수하들에게 덮어씌울 생각이었다. 그래서 라오치의 수하 4명을 발가벗겨서 준비해 두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시작해라.”
지네단 남작의 명령에 소피아의 두 시녀를 겁탈하고 죽인 자들이 소피아를 덮치려 하는 찰나였다.
퍽! 퍽! 퍽!
“컥!”
소피아의 몸에 손을 대려던 자들이 가슴과 목에 단검을 맞고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누, 누구냐?”
지네단 남작과 그 수하들은 횃불을 사방으로 비추며 단검을 던진 자들을 찾았다.
서걱!
“컥!”
언제 나타났는지, 지네단 남작의 수하들 등 뒤에 불쑥 나타난 자들이 단검으로 수하들의 목을 그었다.
피슈욱!
벌어진 목에서 피가 사방으로 뿜어졌다.
“감히 아가씨를 노리다니! 다 죽여!”
어둠 속에서 즉결 처분의 명령이 내려졌다. 암살자들은 가차 없이 살수를 펼쳤다.
“으아아악!”
창고 안이 삽시간에 지옥으로 변했다. 상황이 이상하게 변하자 지네단 남작은 수하들과 함께 창고 입구 쪽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창고 문을 열고 바깥으로 도망쳤다.
“잡아라!”
암살자들이 추격을 하려 할 때 소피아가 소리쳤다.
“멈춰요!”
소피아의 외침에 암살자들이 살행을 멈췄다.
“으으으으, 사, 살려 주십시오.”
창고 안에 살아있는 자들은 발가벗은 네 명의 남자뿐이었다. 나머지는 암살자들에 의해 모두 죽거나 지네단 남작과 같이 달아났다.
그때, 창고 밖이 소란해졌다.
“가세요.”
소피아의 말에 암살자들이 어둠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잠시 후, 후작가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창고 안으로 들이 닥쳤다.
창고 안에서 발가벗은 네 명의 남자는 곧 후작가의 기사들에게 끌려갔고, 소피아도 안전하게 후작가로 돌아갔다.
“라오치, 이 새끼가……!”
테오르는 분노했다.
유력한 용의자로 잡힌 4명의 남자들이 모두 라오치의 수하였기 때문이다.
“죽이려거든 나를 죽일 것이지 연약한 소피아를……!”
테오르는 즉시 후작가의 기사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라오치를 잡으러 갔다. 하지만 소식을 들은 라오치는 자경대 병력으로 후작가의 기사들과 병사들을 막았다.
“내가 형수를 해치려 했다니? 별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나를 없애려 드는군. 내가 그런 잔꾀에 넘어갈 것 같아?”
“뭐라고? 저 새끼가 그래도 반성할 줄 모르고! 뭣들 하는 것이냐? 어서 저놈을 잡아라.”
“와아아아!”
“막아라!”
차차차창!
테오르의 세력과 라오치의 세력이 정면으로 맞붙었다.
그런 가운데 소피아의 소식을 들은 콘라드 후작은 직접 암살단에 명령을 내렸다.
“라오치, 그놈부터 제거해. 그리고 후작 부인부터 시작해서 테오르가 후작이 되는데 방해가 되는 자들은 모두 죽여.”
콘라드 후작의 명령이 떨어지자 소피아의 주위에 있던 요리사와 시녀, 시종들이 모습을 감췄다. 소피아 주위의 인물들을 감시하던 카라스의 정보 조직원은 즉시 그 사실을 에반스에게 알렸다.
한편 후작가의 기사들과 병사들을 피해 달아난 지네단 남작은, 숨어서 테오르와 라오치가 피터지게 싸우는 것을 보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됐다! 이제 나는 성을 빠져나가 첸들러 백작에게 가면 된다.”
지네단 남작은 테오르와 라오치가 싸우는 틈을 이용해서 후작성을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후작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지네단 남작은 들키지 않기 위해서 음지로만 움직였다. 그러다 보니 수상쩍은 그의 행적이 칼 파에 노출되었고, 소식을 들은 칼이 조직원들을 풀어서 도망치려던 지네단 남작을 사로잡은 것이다.
“당신이 지네단 남작인가?”
칼의 물음에 지네단 남작이 순순히 대답했다.
“그렇다.”
“이거, 고맙다고 해야 하나?”
“뭐?”
“으음……. 나도 테오르와 라오치를 서로 싸우게 만들 생각이었는데 덕분에 일이 수월해져서 말이야.”
칼의 말에 지네단 남작이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넌 누구냐?”
“그건 알 거 없고. 누구 지시지?”
“누구 지시라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나는 압실론 후작가의 가신이다. 나를 잡고 있으면 후작가에서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하하하! 그래서 지금 후작가로 보내 달라는 건가? 정말 그래도 되나?”
칼의 말에 지네단 남작이 흠칫거렸다. 지금 후작가로 가게 되면 테오르가 그를 찢어 죽이려 들 터였다.
“아, 아니다. 내게 그 짓을 시킨 자가 누군지 생각이 났다. 말할 테니 나를 살려 다오.”
“그러지.”
칼이 살려 주겠다고 하자 지네단 남작이 자신에게 그 일을 시킨 배후를 불었다.
“첸들러 백작이 시켜서 한 일이다.”
“첸들러 백작이?”
칼은 잠시 어이없어하다가 이 사실을 에반스에게 전했다. 테오르와 라오치, 레이언을 싸우게 해서 압실론 후작성을 발칵 뒤집어 놓은 뒤 후작성을 장악하려 했던 에반스는, 자신이 나서지 않았는데도 테오르와 라오치가 피터지게 싸우자 약간 당혹스러웠다.
“일이 너무 급작스럽게 진행되는구나.”
하지만 칼의 소식을 듣고 이 모든 게 첸들러 백작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그자 때문에 결국 일이 틀어졌군.”
그런 가운데 소피아의 곁에 있던 자들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소식도 들었다.
에반스는 왠지 의구심이 일었다.
소피아가 사고를 당할 당시, 후작가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범인들은 죽거나 달아난 뒤였다고 했다. 에반스는 당시 검시관을 찾아갔다.
“죽은 자들 모두 단숨에 절명했습니다. 솜씨로 봐서 전문 암살자들이 분명합니다.”
“암살자?”
암살자들의 소행일 거라는 검시관의 말에 에반스는 칼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 얘기를 하자 칼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 일은 콘라드 후작가의 암살 조직이 한 짓이겠군요.”
“콘라드 후작가에 암살 조직이 있단 말인가?”
“네. 꽤 유명한데 영주님께서는 모르셨나 보군요.”
칼의 말에 따르면 콘라드 후작은 자신의 반대 세력을 숙청하는데 이용하기 위해서 전문 암살자 집단을 만들어 해마다 암살자들을 키워 내고 있다고 했다.
칼의 말을 들어 보니, 아무래도 창고에서 소피아를 구하고 지네단 남작의 수하들을 죽인 것은 콘라드 후작의 암살 조직일 가능성이 높았다.
“소피아의 주위에 있던 수상쩍은 인물들이 모두 사라졌다. 그들은 콘라드 후작이 소피아에게 붙여 놓은 암살조직인 게 분명해.”
“사라졌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콘라드 후작이 라오치를 제거하라고 명령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건 안 돼. 지금 라오치가 죽으면 모든 게 테오르 쪽으로 기울고 말 거야. 레이언으로는 테오르의 힘을 막을 수 없어.”
“네, 그래서는 안 되지요. 제가 가서 막겠습니다.”
칼은 즉시 수하들을 이끌고 라오치의 저택으로 달려갔다.
에반스의 예상대로 암살 조직의 습격을 받은 라오치의 저택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 가운데 저택 안에서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칼은 즉시 라오치를 찾아 나섰다.
빠각!
칼은 쓰러진 기사의 목에 검을 찔러 넣으려는 암살자의 목을 잡아 돌려 버렸다.
혀를 길게 빼문 암살자가 옆으로 널브러지는 것을 보고 기사가 쳐다보자 칼이 한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은 기사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칼이 기사에게 물었다.
“라오치 님은 어디 계신가?”
“라오치 님은 4층…… 컥!”
칼 덕분에 살았던 기사는 결국 다른 암살자가 던진 단검에 가슴에 꿰뚫려 죽고 말았다.
휙!
흠칫 놀란 칼이 몸을 틀었다. 그러자 단검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볼을 스쳐 문에 박혔다.
칼은 재빨리 문에 박힌 단검을 빼서 들었다. 그리고 계단 쪽으로 몸을 날렸다.
팍! 파박!
칼이 지나간 자리에 단검과 표창이 날아와 박혔다. 칼은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그때 계단 난간에서 거꾸로 매달린 암살자 하나가 대롱을 입에 물고 불었다.
훅!
‘독침!’
티잉!
빗나간 독침이 벽에 맞아 맑은 소리를 냈다.
칼은 독침을 피하기 위해서 몸을 낮추고 입에 단검을 문 채 두 팔과 다리로 기듯이 계단을 올랐다.
팅! 팅! 팅!
독침이 계속 벽에 맞고 튕겨 나왔다.
계단참에 오른 칼이 입에 물고 있던 단검을 들어 계단 난간에 매달려서 독침을 쏘는 암살자를 향해 던졌다.
휘릭!
푹!
단검은 거꾸로 매달려 있던 암살자의 가슴에 정확히 박혔다. 입에 물고 있던 대롱을 떨어트린 암살자가 곧 힘을 잃고 계단 아래로 떨어졌다.
독침을 쏘는 암살자를 제거한 칼은 뛰어서 계단을 올랐다.
스릉!
순식간에 4층에 올라간 칼은 비로소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그리고 암살자들과 라오치의 호위 기사들이 한창 싸우고 있는 라오치의 방으로 뛰어 들었다.
암살자들은 검은 위장복에 복면을 쓰고 있었다. 때문에 구분하기기 수월했다.
칼은 방 안에 뛰어들자마자 등지고 서 있는 검은 위장복의 암살자 둘을 베며 외쳤다.
“힘들 내시오! 내가 수하들을 이끌고 왔소!”
“와아아아!”
칼의 외침에 라오치의 호위 기사들은 환호했고 암살자들은 당황해서 우왕좌왕거렸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암살자들 사이로 파고든 칼이 검을 휘둘렀다.
“아아아악!”
암살자 둘의 팔이 잘리고, 또 둘이 가슴과 배를 잡고 쓰러졌다. 칼이 순식간에 암살자 4명을 싸움이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자 암살자들이 품속의 단검과 표창을 던지며 도망을 쳤다.
“잡아라!”
호위 기사들이 암살자들을 쫓으려 하자 칼이 소리쳤다.
“멈추시오! 지금은 저들을 쫓을 때가 아니오! 라오치 님을 안전한 곳으로 모셔야 하오!”
칼의 말에 호위 기사들이 즉각 추격을 멈추고 돌아왔다.
“칼!”
그때 호위 기사들과 함께 라오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칼이 한걸음에 달려가서 라오치의 몸을 여기저기 살피며 물었다.
“라오치 님!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나는 괜찮아. 네가 나를 구하러 와 주었구나!”
라오치가 감격에 겨워 말하자 칼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왠지 아무래도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 와 보니 저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지 뭡니까?”
“하하하! 그래! 넌 하늘이 나를 구하기 위해 내려 준 사람인 것 같구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어서 안전한 곳으로 옮기시지요.”
“그래, 일단 자경대 본부로 가자.”
라오치는 호위 기사들에 겹겹이 에워싸인 채 자경대 본부로 향했다.
자경대 본부에 도착해서 안정을 되찾은 라오치는 테오르를 욕했다.
“이제 외부 세력까지 끌어들이다니……. 완전히 미쳤어.”
라오치도 자신을 죽이려 한 암살자들이 콘라드 후작의 암살 조직이라는 것을 아는 모양이었다.
“좋아, 이렇게 된 거 어디 끝장을 보자.”
라오치는 후작성 외성의 성문을 모두 닫게 하고 자경대를 규합해서 후작 저택으로 움직였다.
***
압실론 후작가의 제 1기사단장 프레드릭은 에반스를 만난 후 변했다.
우선 그의 주군 압실론 후작이 그토록 만나기를 바랐던 장남 에반스를 만나면서 그 역시 큰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다.
그리고 후작이 의식이 깨어나지 않으면서, 그는 더 이상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후작에게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남는 시간에 검술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소드 마스터란 검과 내가 하나요, 내가 곧 검이요 검이 곧 자신인 그런 경지입니다. 애초부터 그 차원이 다른 경지지요. 그러니 이제 그 선을 넘으십시오.
에반스가 남긴 말이 계속 프레드릭의 뇌리에 맴돌았다.
‘그래 나와 검을 하나로 여기자.’
프레드릭은 마음을 비웠다.
그렇게 아무런 생각 없이 청정한 가운데 프레드릭은 단 하나, 검만을 생각했다.
그리고, 에반스의 말을 깨달을 수 있었다.
파앗!
선을 넘자 프레드릭의 몸에서 하얀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광채 속에서 그의 몸이 꿈틀거렸다.
우두두두둑!
뼈가 뒤틀리고 머리가 다 빠졌다가 다시 자랐다.
피부 역시 뱀이 허물을 벗듯, 스르륵 벗겨졌다. 모든 감각이 예전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하고 몸이 한층 가벼웠다. 무엇보다, 마나 홀에서 마나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이것이었군. 소드 마스터란 것이…….’
오러 블레이드를 만들어 내려면 막대한 양의 마나가 필요했다. 마나 홀에서 끊임없이 마나를 공급해 줄 수 없다면, 애초에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프레드릭은 검을 뽑았다. 그리고 검에 오러를 주입시켰다.
우우우웅!
짙푸른 오러 블레이드가 그의 검에서 솟아 나왔다. 찬란하게 빛나는 오러 블레이드에 프레드릭은 반쯤 넋이 나갔다. 그런 가운데 그의 마나 홀에서는 끊임없이 마나가 공급되었다.
프레드릭은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마나 홀의 마나 공급을 중단시켰다. 그러자 검에 맺혔던 푸른빛의 오러 블레이드가 서서히 사라졌다.
프레드릭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눈에서 두 줄기의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프레드릭은 침대에 누워서 언제 깨어날 줄 모르는 그의 주군 압실론 후작 앞으로 다가갔다.
“제가 드디어 해냈습니다. 후작님께서 그토록 보고 싶어 하셨던 그 오러 블레이드를, 제가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소드 마스터가 되고 나니 너무도 공허합니다.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프레드릭의 물음에 압실론 후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힘없이 어깨를 떨어트리고 막 돌아서려던 프레드릭에게, 압실론 후작의 손끝이 살짝 움직이는 게 보였다.
“……!”
놀란 프레드릭이 자세히 살피자, 압실론 후작이 분명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후작님!”
프레드릭의 외침에 압실론 후작이 천천히 눈을 떴다.
“맙소사! 오오…… 주군……!”
기쁜 나머지 프레드릭이 압실론 후작의 몸을 껴안았다. 그때 압실론 후작의 입이 달싹 거렸다.
“추, 축하…… 해냈…….”
그 소리를 듣고 프레드릭이 크게 기뻐했다.
그 후, 압실론 후작은 프레드릭과 한 시간가량 대화를 나누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것을 끝으로, 압실론 후작은 죽을 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테오르는 라오치가 후작성의 외성 성문을 봉쇄하고 자경대를 이끌고 후작 저택을 향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했다.
“그래, 어디 끝장을 보자!”
이를 바드득 간 테오르는 저택의 기사와 병사들을 죄다 이끌고 라오치를 상대하기 위해 나섰다.
바로 그때였다.
몰래 후작 저택으로 숨어 들어온 콘라드 후작의 암살 조직이 순식간에 후작가를 장악했다.
후작 부인을 지키던 호위 기사들이 분전했지만 수적으로 훨씬 많은 암살 조직에 결국 모두 죽고 말았다.
“안 된다! 이분을 해치려거든 나부터 죽여라!”
소피아가 후작 부인의 앞으로 가로막고 버텼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소피아 님을 모셔라.”
암살자들이 소피아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안 돼! 그러지 마! 그분을 해쳐선 안 돼!”
소피아가 간절히 애원했지만 암살자들에게 먹힐 리 없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씀이 있으시면 하십시오.”
암살 조직원의 말에 후작 부인이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끝날 줄 알았으며 그리 아등바등 살지 않았을 것을…….”
씁쓸하게 웃는 후작 부인은 이미 생에 미련을 모두 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죽여라.”
후작 부인이 두 눈을 감으려 말하자 암살자가 날카로운 단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후작 부인의 가슴에 그 단검을 찔러 넣으려 했다.
피슈욱!
그 순간, 뭔가 뜨거운 액체가 후작 부인의 얼굴을 적셨다. 비릿한 향에 후작 부인이 감았던 눈을 뜨자, 암살자들이 한 사람을 향해 집중적으로 공격을 퍼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파앗!
“아악!”
“크아악!”
그의 검에서 푸른 섬광이 뿜어졌다. 처절한 비명과 함께 암살자 십여 명의 몸이 분리되고, 피와 내장, 잘려 나간 팔 다리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터터터턱!
후작 부인의 방은 전쟁터의 한복판을 보는 듯, 참혹하게 죽은 시신들로 가득했다. 그때 암살자들을 혼자서 다 도륙한 사람이 후작 부인 앞으로 걸어왔다.
그가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후작 부인은 자신의 얼굴에 묻은 피를 치마로 닦아 내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대는 누구지요?”
후작 부인의 물음에 그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그의 웃는 모습과 목소리는 분명 어디서 보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후작 부인은 여전히 그가 누군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먼저 자신을 밝혔다.
“프레드릭입니다.”
“프레드릭! 그, 그대가 정녕 프레드릭이란 말인가요?”
후작 부인이 놀란 얼굴로 프레드릭을 쳐다보았다.
‘그 번쩍이던 푸른 섬광이 그럼?’
영리한 후작 부인은 프레드릭이 드디어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음을 알 수 있었다.
“축하해요. 후작께서 보셨다면 크게 기뻐했을 텐데…….”
후작 부인의 말에 프레드릭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후작님께서도 제게 축하해 주셨습니다.”
“그이가요?”
“네.”
“그런데 왜 나를 구해 준거죠? 내가 밉지도 않았나요?”
후작 부인의 물음에 프레드릭이 말했다.
“후작님께서 제게 부탁하셨습니다. 부인을 지켜 달라고 말입니다. 자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누구보다 행복한 가정을 꾸렸을 현명한 여자였다고, 죽기 전에 꼭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은데 직접 전하지 못해 아쉽다고 하셨습니다.”
“그, 그이가 정말 그렇게 말했다고요?”
“네, 그리고 부인께 마지막으로 이 말을 전하셨습니다. 그만 내려놓으라고.”
“그만 내려놓으라? 호호호! 그렇군요. 호호호호! 그까짓 게 뭐라고 그토록 내려놓지 못한 걸까요?”
후작 부인이 오랜만에 환한 얼굴로 웃었다. 그런 후작 부인을 보는 프레드릭의 얼굴에도 절로 미소가 어렸다.
***
테오르와 라오치로 인해 후작성은 피와 살육이 난무하는 무법 지대로 변했다. 벌써 수천 명이 죽고 다쳤지만 싸움을 끝날 줄 몰랐다.
그때 램버튼 백작이 중재에 나섰다. 그는 두 사람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내서 일단 휴전할 것을 제안했다.
그 제안을 테오르와 라오치가 받아들임으로써 후작성에 피바람은 일단 멎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싸움이 중단된 것일 뿐, 끝난 것이 아니었다.
램버튼 백작이 중재 하에 테오르와 라오치는 1차 협상을 가졌다. 하지만 첫 번째 협상은 서로 욕만 하다가 결렬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2차 협상을 위해 세 사람이 다시 만났다.
전날에 비해 협상은 욕설로 시작해서 욕설로 끝나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2차 협상 뒤, 테오르와 라오치는 후작 부인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후작 부인은 더 이상 형제가 싸우는 것은 보고 싶지 않으니 당장 화해하라고 했다.
후작 부인의 영향 탓인지 3차 협상에서 둘은 어느 정도 합의점을 찾았다. 그들은 공동의 적인 에반스를 제거한 후 누가 제후가 될지 정하자는데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서로 협상안에 서명만 하면 되는 날, 셋째인 레이언이 램버튼 백작을 찾았다.
“저도 그 자리에 있고 싶은데 괜찮겠죠?”
“물론이다.”
램버튼 백작은 레이언을 마지막 협상 자리에 참석시켰다. 테오르와 라오치는 서로 합의를 본 협상안에 서명을 했다. 그때 레이언이 들고 있던 바구니에서 와인과 술잔 4개를 꺼냈다.
“이런 좋은 날 축배가 빠질 수는 없지. 안 그래?”
레이언은 보란 듯이 와인을 따고 잔에 와인을 따라서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테오르와 라오치, 그리로 램버튼 백작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잔에 다시 와인을 따른 레이언이 잔을 높이 들며 외쳤다.
“압실론 후작가를 위하여.”
막내의 치기 어린 행동에 테오르와 라오치가 피식 웃으며 서로 잔을 부딪치고 와인을 마셨다. 테오르와 라오치가 와인을 마시는 것을 보고 램버튼 백작도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향도 좋고 맛도 감미로운 최고급 와인이었다.
그때 세 사람이 와인을 마시는 것을 지켜보던 레이언이 다시 와인 잔을 높이 치켜들며 외쳤다.
“압실론 후작가는 내가 잘 지킬게. 잘 가.”
레이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테오르와 라오치가 어리둥절할 때였다.
“우욱!”
갑자기 램버튼 백작이 입에서 피를 내뿜었다.
“커으윽!”
뒤이어 테오르와 라오치가 목과 가슴을 잡고 고통스러워하다 이내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세 사람이 피를 쏟으며 쓰러지고 레이언만 혼자 남았을 때였다. 후작 부인과 프레드릭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작 부인은 피를 토하고 있는 자신의 남동생 램버튼 백작과 두 아들, 테오르와 라오치를 보고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프레드릭이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우리가 한발 늦은 모양입니다.”
프레드릭의 말에 후작 부인이 레이언을 보고 말했다.
“막내야, 어서 해약을 다오. 너의 외삼촌과 두 형이 저토록 고통스러워하고 있지 않니?”
후작 부인의 말에 레이언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미쳤어요? 내가 해약을 내놓게. 저들이 죽으면 내가 제후가 되는데 말이에요.”
레이언의 말에 후작 부인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자식을 잘못 키웠군요.”
그때 그들 앞으로 누군가 걸어왔다.
바로 에반스였다.
에반스는 많이 변했지만 후작 부인은 한눈에 그를 알아봤다.
“에반스!”
에반스란 말에 레이언이 흠칫 놀랐다. 에반스는 후작 부인의 옆에 서 있던 프레드릭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그러자 살짝 고개를 숙인 프레드릭이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 레이언이 나섰다.
“당신이 큰 형인 에반스로군요. 반가워요.”
레이언이 에반스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그러자 에반스도 가볍게 그 인사를 받았다.
“반갑다.”
“좋아요. 해약을 드리죠. 자요.”
레이언이 불쑥 에반스에게 약병 하나를 건넸다.
잠시 레이언의 눈을 보던 에반스가 그 약병을 받으려 하자, 레이언이 품속에 단검을 꺼내 에반스를 찔렀다.
푹!
레이언의 단검이 에반스의 배를 파고 들어갔다.
“악!”
그것을 보고 후작 부인이 비명을 질렀다.
레이언이 희열에 찬 얼굴로 웃었다.
“하하하! 됐어! 단검에도 독을 묻혔으니까! 해약? 그딴 게 있을 리 없지. 해약이 있는 독은 독이라고 할 수도 없잖아? 안 그래요, 어머니? 하하하!”
레이언의 말에 후작 부인은 할 말을 잊었다. 그때 배에 단검을 맞고 허리를 구부리고 있던 에반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익!”
그런 에반스를 보면서 레이언이 단검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레이언이 잡고 있는 검은 뭔가에 단단히 끼인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에반스는 레이언의 광기어린 모습을 직접 봤다. 때문에 녀석이 어떤 짓을 할지 몰라 경각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해약을 주겠다면서 레이언은 에반스의 배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그때 에반스는 미리 준비 중이었던 마나를 복부 쪽에 집중시켰다. 그렇게 유형화된 마나가 쿠션 역할을 하면서 레이언의 단검을 막아 낸 것이다.
“헉!”
에반스가 몸을 펴자 마나 쿠션에 밀린 단검에 강한 반발력이 생겼다. 레이언의 힘으로는 그 반발력을 견뎌 내지 못했다.
단검은 위로 튕겨 오르지 않고 땅으로 내리꽂혔다. 그런데 하필 그 곳에 레이언의 발이 있었다.
푹!
“큭!”
단검이 발등에 꽂힌 레이언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레이언은 황급히 발등에 박힌 독검을 뽑았다. 하지만 독검에 묻은 독이 이미 그의 몸에 퍼지기 시작했다.
“아, 안 돼! 나는 이대로 죽을 수 없어!”
하지만 해약이 없는 것은 그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사, 살려줘! 어머니, 저 죽고 싶지 않아요. 제발 살……! 커윽!”
레이언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얼마 후 입에서 피를 내뿜었다.
이미 램버튼 백작과 테오르, 라오치는 숨이 끊긴 상태였다.
죽어 가는 아들을 보며, 주르르 눈물을 흘리던 후작 부인이 레이언이 떨어트린 단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에반스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이제 홀가분하게 네 아버지를 보러 갈 수 있을 것 같다. 사랑해 주지 못해 미안했다.”
푹!
후작 부인은 단검을 가슴 깊숙이 박아 넣었다. 독 기운이 바로 퍼지면서 후작 부인의 입에서도 검은 피가 주르륵 흘렀다.
하지만 독이 퍼지기 전에 후작 부인은 이미 심장이 뚫려 즉사한 뒤였다. 독의 고통 없이 바로 죽은 것이다.
에반스는 쓰러지는 후작 부인을 부축했다. 그때 프레드릭이 소리쳤다.
“압실론 후작가의 적통 후계자, 에반스 님이시다.”
프레드릭의 외침에 제 1기사단이 우르르 에반스 앞으로 몰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후작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그러고 보니 후작 부인을 비롯해서 후작가의 일족이 다 죽은 상태였다. 이제 누가 뭐래도 후작가의 후계자는 에반스뿐이었다.
제 1기사단에 이어서 눈치 빠른 가신들이 하나둘씩 에반스의 앞에 나와 무릎을 꿇었다. 대세가 에반스에게 기운 것이다.
곧 모든 가신과 기사 병사들이 에반스 앞에 머리를 숙였다.
“끝났군.”
콘라드 후작가의 암살 조직원 중, 살아남은 자들은 소피아를 데리고 조용히 후작성을 빠져나가 콘라드 후작령으로 넘어갔다. 후작 부인을 비롯해서 그 일족이 모두 죽는 것을 본 소피아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