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스는 유스펜이 도망치는 것을 보고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도망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자신을 찾고 있는 기사들 쪽으로 움직였다. 당연히 얼마 못가 기사들의 눈에 에반스가 띠었다.
에반스는 흠칫 놀라는 시늉을 하며 무작정 뛰었다. 그러자 에반스를 발견한 기사가 소리쳤다.
“저기다! 쫓아라!”
5명의 기사가 에반스를 쫓았다.
에반스는 기사들이 미끼를 물자 싱긋 웃으며 막다른 골목이 있는 쪽으로 들어갔다.
에반스가 먼저 골목으로 들어가고 다섯 기사가 그 뒤를 쫓아 골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에반스가 우뚝 멈춰 섰다. 5명의 기사들이 재빨리 에반스를 에워쌌다.
“헉헉! 잡았다!”
“개새끼, 너 오늘 뒈진 줄 알아!”
“야 이 새끼야. 검 안 버려?”
“아니야, 우선 그 덮어쓰고 있는 것부터 벗어!”
기사들의 다양한 요구에 에반스가 피씩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이 나를 쫓아온 걸까? 아니면 내가 너희들 여기로 데려온 걸까?”
“뭐라는 거야. 저 새끼?”
“몰라, 빨리 조져 버리자고.”
“맞아. 어서 처리하자. 내가 먼저 공격하지.”
기사 중 하나가 힘으로 에반스를 제압할 요량으로 힘껏 검을 내려쳤다.
스릉.
검을 비스듬히 기울인 에반스가 그 기사의 검을 다른 기사가 있는 방향으로 흘려 버렸다.
“힉!”
에반스의 뒤에서 몰래 기습을 가하려던 기사는 자신에게 날아드는 동료 기사의 검에 혼비백산해서 얼른 들고 있던 방패로 막았다.
터엉!
“아이쿠!”
“어어?”
쿵!
두 기사는 그대로 앞으로 몸이 쏠려 서로 뒤엉키며 쓰러졌다.
슈욱!
에반스는 뒤엉켜 쓰러진 두 기사를 향에 검을 찔러 넣었다.
푸푹!
검은 엎어진 기사의 등을 뚫고 들어가서 깔린 기사의 가슴을 꿰뚫었다. 졸지에 꼬치가 된 두 기사는 두 눈을 부릅뜨고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죽었다.
두 기사를 단숨에 제거한 에반스는 바로 근처 기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이런!”
카앙!
에반스는 놀라 뒷걸음질 치는 기사의 방패를 그대로 가격했다. 거친 충격과 함께 방패 모서리가 날카롭게 잘려 나갔다. 요행인지 목숨을 건진 기사가 뒤로 벌렁 자빠졌다.
“죽어!”
그때 에반스의 옆으로 기사 하나가 달려들었다.
쉬익, 쩌억!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한 에반스가 검을 휘둘러 기습을 감행한 기사의 머리를 쪼개 버렸다.
에반스는 그 여세를 몰아 엉거주춤 서 있는 기사의 견갑을 베었다. 피부처럼 갈라진 견갑이 피를 뿜어냈다.
“크윽!”
가볍지 않은 부상을 입은 기사가 비명과 함께 어깨를 감싸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머리 위로 에반스의 검이 날아갔다.
“컥!”
에반스의 검은 주저앉은 기사의 뒤에 서 있던 기사의 목을 갈랐다.
피슈욱!
핏줄기가 뿜어지고, 뒤에 서 있다 졸지에 목이 베인 기사가 고목 쓰러지듯 쓰러졌다.
“저기다!”
그때, 싸우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기사들이 에반스를 발견했다.
탓!
에반스는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잡아라!”
이번에는 여섯 명의 기사가 에반스를 쫓았다.
잠시 뛰던 에반스가 다시 막다른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여섯 명의 기사들은 그게 유인인 줄도 모르고 골목 안으로 뛰어 들었다.
잠시 후, 처절한 여섯 개의 비명 소리가 울리고 피 묻은 검을 든 에반스가 골목 안에서 걸어 나왔다.
그때, 소드 마스터의 예민한 기감이 세 필의 말이 근처로 다가오는 소리를 감지해 냈다.
누군가 말을 타고 에반스가 있는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온 건가?”
에반스는 유스펜이 루버첸을 데려왔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럼 마중이라도 나가 볼까?”
이미 70명의 기사 중 절반을 처리한 에반스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루버첸을 만나기 위해 움직였다.
“이, 이럴 수가!”
현장에 도착한 루버첸은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 있는 기사들을 보고 할 말을 잊었다.
유스펜과 루버첸의 부관은 한쪽에 물러나서 굳은 얼굴로 루버첸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머지 기사들은?”
정신을 추스른 루버첸이 유스펜에게 물었다. 그러자 유스펜이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그, 그게…… 아마 지금도 그 자를 쫓고 있을 겁니다.”
“뭐? 그럼 희생자가 더 많을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닌가? 바보 같은! 이럴 경우는 기사들을 한곳에 모아 뒀어야지! 부관! 어서 기사들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해!”
루버첸의 명령에 부관이 목에 걸고 있던 호각을 불려고 입으로 가져갔다.
그때였다.
휘리리릭!
뭔가가 빠르게 부관에게 날아갔다.
“부관! 엎드려!”
루버첸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 외침은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퍼억!
그 소리를 듣고 루버첸을 향해 고개를 돌리던 부관의 머리에 도끼가 박혔다.
부관은 도끼에 실린 힘에 몸이 붕하고 떠올랐다가 그대로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머리통이 박살 나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즉사한 것이다.
루버첸이 이를 악물고 도끼가 날아온 방향으로 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으로 검은 로브에 후드를 덮어 쓴 자가 보였다. 그 자의 오른손에는 피 묻은 검이 들려 있었다. 검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으로 봐서 불과 얼마 전에 사람을 죽인 듯 보였다.
“저, 저놈입니다.”
유스펜이 손가락으로 에반스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러자 루버첸이 에반스를 향해 서늘하게 물었다.
“몇 명이나 죽였나?”
그러자 에반스가 손짓으로 죽은 부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놈까지 서른여섯 명 째로군.”
에반스의 대답에 루버첸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저놈에게 제 이 기사단의 기사 절반이 죽었단 말인가?’
분노한 루버첸이 에반스를 죽일 듯이 쏘아보며 말했다.
“왜 죽였지?”
그러자 에반스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군. 왜 나를 죽이려 하지? 난 단지 살기 위해 죽였을 뿐이다.”
에반스의 말인즉, 자신을 죽이려 하기에 기사들을 죽였다는 소리였다. 에반스의 대답에 루버첸과 유스펜은 둘 다 할 말을 잊었다.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린 루버첸이 이를 악물고 에반스를 향해 물었다.
“그렇다면 네 놈은 아무 죄가 없단 말이냐?”
루버첸의 물음에 에반스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서른여섯 명이나 되는 기사를 죽여 놨으니 죄가 없다고 볼 수 없겠군.”
“아니까 다행이군.”
챙!
루버첸이 검을 뽑았다.
루버첸은 소드 익스퍼트 상급으로 부단한 자기 관리와 끊임없는 노력으로 검술을 수련해서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의 경지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루버첸이 최상급의 경지에 오르면 압실론 후작가는 프레드릭에 이어 두 번째로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에 오른 기사를 보유하게 된다.
현재 프레드릭에겐 미운 털이 박혀 있었다. 따라서 경지에만 오른다면 루버첸이 제 1기사단장의 자리를 노릴 수도 있었다.
그런 루버첸이었기에, 자신이 눈앞에 서 있는 검은 로브의 남자에게 당할 거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중상급? 아니, 상급인가? 하지만 경시해선 안 돼. 그래. 이번 기회에 이 검을 시험해 보는 것도 좋겠군.’
루버첸은 상대가 소드 익스퍼트 상급 정도의 실력을 갖췄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온 자인지 모르지만 이런 일만 없었다면 우리 기사단의 기사로 추천했을 텐데, 아쉽군.”
아쉽다고 말은 했지만, 루버첸은 자신이 아끼는 기사 36명을 죽인 자를 살려 줄 생각이 없었다. 루버첸은 말을 마치자마자 에반스를 향해 짓쳐 들었다.
스팟!
그리고 검을 들어 에반스의 몸통을 후려쳤다.
바우우웅!
에반스는 검을 비스듬히 들어 루버첸의 검을 흘려보냈다.
채챙!
자신의 검이 너무도 간단히 튕겨 나오자, 루버첸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실상 루버첸은 검에 마나를 충분히 집어넣어 공격을 했다. 그런데 상대가 그 검을 여유 있게 받아넘기자 깜짝 놀랐던 것이다.
‘제법이군. 어쩌면 상급 이상이다.’
경각심이 든 루버첸은 이번엔 전력을 다해 에반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차차차창! 채앵!
그러나 에반스는 이번에도 한 치의 밀림 없이 검격을 받아 냈다.
루버첸과 검을 교환하면서, 에반스는 그가 곧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의 경지에 오를 것을 알 수 있었다.
‘아까운 인물이군. 하지만 내 앞에 걸림돌이 될 자이니 처치할 수밖에.’
수비 위주로 루버첸의 공격을 막던 에반스가 반격에 나섰다.
쉬릭!
“헉!”
너무나도 빠른 일격이었다.
루버첸은 너무 놀라 헛바람과 함께 뒤로 회피했다. 에반스의 검이 간발의 차이로 루버첸의 머리가 있던 자리를 그어 내려갔다.
루버첸의 얼굴에 이채가 서렸다.
생각보다 에반스는 훨씬 몸놀림이 빨랐다. 입술을 잘근 깨문 루버첸이 검을 쓰다듬으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화륵!
그러자 그의 검에서 붉은 불꽃이 일렁이며 타올랐다.
“마법검!”
에반스가 놀라 소리쳤다.
루버첸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마법검을 알아보다니…… 식견이 높은 자로군. 그렇다면 마법검의 위력이 얼마나 강한지도 알겠지? 하앗!”
말을 마친 루버첸은 곧바로 에반스에게 달려들었다.
루버첸이 마법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마법검은 제후도 탐낼 정도로 귀한 물건이었다. 때문에 루버첸은 자신이 마법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자는 살려 두지 않았다.
루버첸이 에반스에게 마법검을 선보였다는 것은 즉, 에반스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타앗!”
괴성과 함께 루버첸이 일방적으로 에반스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루버첸의 표정은 몰아붙이는 자의 표정이 아니었다.
검과 검이 부딪칠 때마다 불똥이 튀기며 불길이 에반스의 얼굴을 지졌다. 그런 공격에 익숙하지 않은 에반스는 본신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을 뿐, 눈은 여전히 초롱초롱하게 살아 있었다.
지칠 줄 모르고 계속해서 이어진 격돌에도 에반스는 물러서지 않고 루버첸에게 공격을 가했다.
에반스의 반격은 밋밋하니 별 대수로울 것 없어 보였으나 그 안엔 무궁한 변화가 있었다. 때문에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 이상의 실력이 아니면 막기 어려웠다.
휘릭!
“헉!”
그 변화를 느꼈는지, 루버첸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다급히 검을 세워 가로막았다. 하지만 검의 방향은 이미 예상한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막은 그의 몸이 휘청하자 에반스의 검이 루버첸의 어깨를 찔렀다.
푹!
“크윽!”
찔리는 순간 바로 몸을 틀었기 때문에 어깨가 꿰뚫리지는 않았다. 루버첸의 어깨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이를 악문 루버첸이 마법검으로 에반스의 가슴을 강하게 찔렀다.
몸을 빙글 돌려서 검을 피한 에반스가 그대로 검신을 타고 구르며 루버첸의 몸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화르르르!
마법검의 불길에 옷이 그을렸지만, 에반스는 아랑곳 하지 않고 몸을 돌리며 루버첸의 얼굴에 팔꿈치를 꽂아 넣었다.
빠악!
“컥!”
통렬한 타격음과 함께 루버첸의 코뼈가 주저앉았다.
얼굴이 통째로 내려앉는 고통에 루버첸이 비명을 지르자, 에반스는 연이어 그의 허벅지를 무릎으로 찍어 버렸다.
“크아아악!”
허벅지는 의외로 통증이 심한 부분이다.
통증으로 인해 얼굴이 일그러진 루버첸이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휘릭.
에반스는 돌려차기로 주저앉은 루버첸의 관자놀이를 노렸다. 하지만 루버첸도 쉽게 급소를 허락하진 않았다.
“이익!”
루버첸이 몸을 뒤로 눕히자 종이 한 장 차이로 에반스의 발이 그 위를 지나갔다.
하지만 에반스의 공격은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루버첸이 다시 몸을 일으키며 자세를 잡으려 할 때, 에반스의 검이 번쩍였다.
루버첸 후작의 검이 마법검이라면, 에반스의 검 역시 마법검이었다.
에반스는 검의 헤이스트 마법을 사용했다. 그러자 안 그래도 빠른 검이 2배는 빨라졌다.
서걱.
“크아악!”
루버첸 후작이 막고 자시고 할 틈도 없이 에반스의 검이 그의 오른팔을 잘랐다.
핏줄기가 솟구치며 바닥으로 검을 쥔 팔 한 짝이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마법검은 서서히 불꽃을 잃고 싸늘히 식어갔다.
루버첸은 피가 솟구치는 어깨를 움켜쥐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에반스를 쳐다보았다.
“어, 어떻게…….”
루버첸은 채 말을 마치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극심한 출혈에 의식이 몽롱해진 것이다.
“아악!”
몽롱한 루버첸의 귓가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루버첸이 패하자 몰래 도망치던 유스펜에게 에반스가 루버첸의 그 마법검을 던진 것이다.
등을 뚫고 들어간 검은 유스펜의 심장을 헤집어 놓았다.
털썩!
에반스는 비명과 함께 유스펜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나서 루버첸 앞에 다가섰다.
그리고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허억!”
의식이 흐려지던 루버첸이 에반스를 보고 두 눈을 크게 치떴다.
“에, 에반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에반스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루버첸이 남은 왼손으로 에반스를 잡으려 허공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루버첸의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털썩!
루버첸의 손이 허공을 휘젓다 힘없이 떨어졌다. 과다 출혈로 인해 죽고 만 것이다. 죽은 루버첸을 보며 에반스가 싸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제부터 재미있어지겠군. 후작 부인…… 당신의 그 탐욕이 어떤 화를 불러일으키게 될지는, 곧 깨닫게 될 것이오.”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에반스가 유스펜에게 다가가 마법검을 회수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사람의 기척이 없는 조용한 골목으로 움직였다.
***
다음 날, 압실론 후작가는 발칵 뒤집어졌다. 후작 부인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고, 그녀의 세 아들은 모두 굳은 얼굴로 그녀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누님!”
벌컥 문이 열리고 램버튼 백작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램버튼 백작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후작 부인의 곁에 앉았다.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다. 하지만 앞으로 후작가가 걱정이로구나.”
“대체 어떤 자들이 그런 짓을…….”
“자경대가 조사에 나섰지만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목격자들의 말에 의하면 한 놈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는데…….”
라오치의 말에 테오르가 발끈하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자그마치 기사가 서른여덟 명이다! 그 중에는 클리먼도 있고, 제 이 기사단장인 루버첸도 있다! 그런 그들을 혼자서 죽였다고? 흥! 소드 마스터가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이다! 아마 우리에게 혼선을 주기 위해서 검은 로브에 후드를 덮어쓴 거겠지.”
“그럼 형의 생각은 다른 세력이 있단 소리군요?”
셋째 레이언의 말에 테오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누군가 우리 영지 일에 개입되어 있어. 아마도 외부 세력일 가능성이 높아.”
“외부 세력?”
외부 세력이란 말에 후작 부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램버튼 백작이 나섰다.
“외부 세력이라면 우리 영지와 가장 가까운 콘라드 후작령이나 라미셀 후작령이 유력하겠군. 아니면 수도에 있는 유력 귀족이거나.”
그렇게 말하면서 램버튼 백작이 테오르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테오르가 다시 발끈하며 말했다.
“콘라드 후작령은 아닙니다.”
“그렇겠지. 네 처가니까. 하지만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콘라드 후작령을 배제시키는 것은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누님?”
램버튼 백작이 교묘하게 후작 부인에게 말을 돌렸다. 그러자 후작 부인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누구도 용의 선상에서 배제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 짓인지 반드시 밝혀내서 그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만들 것이다. 가신들은 다 모였느냐?”
후작 부인의 물음에 옆에 시립해 있던 총관이 잠시 방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보고했다.
“가신들이 모두 모였다고 합니다.”
“알았다, 가자.”
후작 부인은 세 아들과 램버튼 백작을 데리고 압실론 후작가의 대회의실로 움직였다.
회의실 안에는 가신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후작 부인은 압실론 후작을 대신해서 회의실 중앙 제후의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가신들도 자신의 자리에 착석했다.
“이렇게 다급히 여러 가신들을 부른 것은 후작가에 큰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에요.”
후작 부인은 어제 있었던 루버첸의 죽음과 기사들의 죽음을 알렸다.
“허어……! 제이 기사단의 기사가 절반이 넘게 죽다니.”
“그런 일이 어찌 성내에서 일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쾅쾅!
“다들 조용히들 하시오.”
웅성대는 회의장을 램버튼 백작이 나서서 조용히 만들었다.
“자자, 후작 부인의 말씀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모두 듣고 나서 얘기해도 늦지 않소. 누님, 계속 하시지요.”
“……제후이신 후작님께서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지금과 같은 암울한 시기에 이런 일이 발생하니 걱정이 앞서는 군요. 지금의 후작령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 구심점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그 구심점이 없어요. 해서 나는 새로운 제후를 추대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후작님께서 아직 살아 계시거늘, 어찌 그런 황망한…….”
“밖에 오셨나요? 들어오시지요.”
후작 부인이 미리 불러 놓은 후작의 전속 치료사를 불렀다. 그리고 전속 치료사로부터 후작이 다시 깨어나기 힘들어졌다는 절망적인 소식을 가신들에게 전했다. 그러자 가신들의 마음도 하나둘 바뀌었다.
후작 부인의 말처럼 후작령에는 그 주인인 후작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누구를 제후에 올릴지에 대해서는 가신들도 일단 입을 함구했다.
그때 후작 부인이 말했다.
“이런 일을 대비해서 후작님께서 유언장을 작성해 두셨어요. 그 유언장에 따라 누가 제후가 될지 결정될 것입니다.”
유언장이 있다는 말에 가신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압실론 후작의 유지가 있다면 후계자 문제로 후작령이 시끄러워질 일은 없었다. 가신들은 다행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 유언장은 바로 공개되지 않았다.
“유언 공개는 정확히 일주일 뒤에 이곳에서 행해질 거예요.”
후작 부인이 그렇게 하겠다니 가신들도 더 할 말은 없었다.
회의가 끝나자 후작 부인은 다시 세 아들과 램버튼 백작을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가족만 남기고 총관까지 모두 방 밖으로 내보냈다.
“누님, 유언장이라니요? 정말 그런 게 있습니까?”
램버튼 백작의 물음에 후작 부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헉! 그럼 그런 말은 왜 하신 겁니까?”
“그래야 가신들이 조용하다. 그깟 유언장이야 지금 만들면 그만이지 않느냐?”
후작 부인의 말에 그녀의 세 아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 세 아들을 쳐다보며 후작 부인이 말했다.
“차기 제후는 장남인 테오르가 되어야 할 것이다.”
후작 부인의 말에 테오르가 활짝 웃었다. 그러나 라오치의 얼굴이 일그러졌으며, 레이언이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때 후작 부인이 테오르를 보며 말했다.
“단, 일주일 안에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그게 뭡니까. 어머님?”
“그건 에반스를 잡아 내 앞에 끌고 오는 일이다.”
“네?”
놀라는 테오르에게 후작 부인이 확실하게 얘기했다.
“제압이 힘들다면 머리라도 가지고 오너라. 만약 일주일 내 에반스를 처단하지 못한다면, 넌 제후가 될 그릇이 못 된다고 판단하겠다. 대신 그 자리는 네 동생 중 하나가 차지하게 될 것이다.”
후작 부인의 말에 테오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신 라오치와 레이언의 얼굴이 밝아졌다.
“명심해라. 누구든 에반스, 그 녀석을 찾거나 죽이는 쪽이 제후가 될 기회를 쥐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머님…….”
장남인 테오르가 무슨 말을 하려 해도 후작 부인은 들어주지 않았다.
“내 얘기는 끝났다. 이제 너희들과는 일주일 후에 만나겠다. 그만들 나가라.”
후작 부인의 축객령에 세 아들은 그녀의 방을 나가야 했다.
“누님, 어째서 조카들에게 그런 제안을 하신 겁니까?”
램버튼 백작의 물음에 후작 부인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에반스, 그놈이 살아 있는 한 내 핏줄 중 누구도 제후가 될 수 없다. 세 아들 중 누가 제후가 될지는 오로지 그 녀석이 죽은 이후에 정해질 것이야.”
후작 부인은 결심이 확고한 것처럼 보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누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램버튼 백작의 말에 후작 부인이 갑자기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고마워, 동생. 내가 믿고 의지할 사람은 동생뿐이야.”
“네, 누님. 저는 믿으셔도 됩니다.”
램버튼 백작은 후작 부인을 안심시키고 그녀의 방을 나섰다. 그리고 곧장 자신의 저택으로 가기 위해 후작가의 입구에 대기 중인 자신의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마차 안에 있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다.
“애덤스, 네 말대로 나는 누님 앞에서 전혀 제후가 되는데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잘하셨습니다.”
램버튼 백작과 에반스가 탄 마차는 조용히 후작 저택을 나왔다.
마차 안에서 램버튼 백작은 에반스에게 후작 부인과의 일을 죄다 얘기했다. 그러자 에반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후작 부인께서는 역시 후작령의 장남인 에반스를 가장 염려하고 계시군요.”
“흥. 그런 녀석을 왜 두려워하는지 이해가 안 돼. 그냥 죽여 버리면 간단한데 말이야.”
“그래서 그걸 알면서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단 말입니까?”
에반스의 물음에 램버튼 백작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후작 부인과 자신이 그동안 에반스를 죽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램버튼 백작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빌어먹을, 그래. 암살은 계속 실패했다. 하지만 내가 후작이 되면 군대를 보내서라도 놈을 죽일 것이다.”
램버튼 백작의 말에 에반스가 차분하게 얘기했다.
“하지만 지금은 후작 부인의 선택이 옳은 것 같습니다. 제국에서 인정한 후계자인 에반스가 제거되는 것이 제일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셋째 도련님인 레이언님께서 해내셔야 하고 말입니다.”
“크음, 그렇지. 그래야…… 흐흐흐흐!”
그 다음 수순은 외삼촌인 자신이 레이언 대신 섭정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제후의 자리를 넘겨받으면 됐다. 그것이 에반스와 렘버튼 백작이 꾸민 계획이었다.
잠시 후 마차가 멈췄다.
“다 왔습니다.”
에반스가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램버튼 백작의 마차 이외에 다른 마차가 한 대 더 있었다. 에반스는 그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마차 문을 열리자 그 안에서 후작 부인의 셋째 아들인 레이언이 보였다.
에반스는 손을 내밀어 레이언이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왔다. 그것을 지켜보던 램버튼 백작도 마차에서 내려 레이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를 보고 마주섰다.
먼저 얘기를 시작한 것은 램버튼 백작이었다.
“레이언, 내 제의를 받아들이겠느냐?”
“네, 외삼촌.”
레이언이 바로 대답했다. 그러자 램버튼 백작이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좋아. 내가 반드시 너를 제후로 만들어 주마.”
램버튼 백작이 손을 내밀자 그 손을 레이언이 잡았다.
“두 분께서 이렇게 손을 잡으셨으니 이제 압실론 후작령은 두 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에반스의 말에 램버튼 백작과 레이언이 서로 웃었다.
두 사람 다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정작 그 속내는 달랐다. 그것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는 에반스는 모두 알고 있었다.
애덤스로 변신한 에반스는 며칠 전, 램버튼 백작에게 한 제의를 성사시키기 위해 레이언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에반스는 전혀 다른 레이언을 보았다.
에반스가 아는 레이언은 두 형에 비해 그나마 성격이 차분하고 착했다. 에반스가 어린 시절 주로 당한 것은 테오르와 라오치였기 때문에 레이언에 대해서는 그렇게 나쁜 기억은 없었다.
그런데 에반스는 그날, 셋 중에서 가장 후작 부인을 닮은 것이 막내인 레이언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에반스가 처음 레이언의 저택을 찾았을 때, 레이언은 친절하게 에반스를 맞았다.
“어서 오세요. 외삼촌께서 보내셨다지요?”
“네. 램버튼 백작님께서 은밀히 도련님께 제안할 것이 있다고 하셔서 저를 보내셨습니다.”
“제안이요?”
“네. 중요한 일이니 주위를 물려 주십시오.”
에반스의 말에 레이언은 주위를 물렸다.
에반스는 자신이 레이언을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그런데 에반스의 말을 듣고서도 레이언은 별반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아직 어려서인가? 아니면 멍청한 것일까? 그도 아니면…….’
레이언의 반응에 고심에 빠진 에반스를 보고 레이언이 말했다.
“외삼촌께서 굳이 그렇게 하고 싶으시다면…… 뭐,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한번 생각해 보죠.”
마치 본인은 관심이 없는데 램버튼 백작이 제안하니 생각이라도 해 보겠다는 식이었다.
“압실론 후작령의 주인이 되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좋은 답변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때, 레이언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훗, 절호의 기회? 내가 제후가 되면 외삼촌이 얻는 건 뭐지?”
그 소리가 워낙 작아서 보통 사람이라면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에반스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일반인에 비해 신체 감각이 몇 배는 발달되어 있는 에반스는 레이언이 중얼거린 것을 전부 알아들었다.
“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괜히 못 알아들은 척, 에반스가 묻자 레이언이 적잖이 놀란 얼굴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별말 아닙니다. 그냥 혼자서 중얼거려 본 겁니다. 혹시 들렸나요?”
“아닙니다. 그냥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혹시 제게 뭐라도 말씀하신 줄 알고 여쭤 본 겁니다.”
“하하하! 그랬군요. 중얼거리는 게 버릇이 돼서……. 아무 말 아니니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그렇게 레이언과 대화를 나눈 후, 에반스가 그 저택을 나설 때였다.
저택의 입구에서 에반스를 저택까지 안내했던 시종이 보이지 않았다. 에반스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저택을 빠져나왔다.
저택을 나온 에반스는 번화가로 가서 잠시 칼 파의 아지트에서 루미나를 만났다. 그리고 그 후, 램버튼 백작 저택으로 가려 하는데 급하게 마차가 달려와서는 치료소에 멈춰 섰다.
멈춰 선 마차에서 피투성이가 된 환자가 내렸다. 그런데 그 환자가 에반스의 눈에 익었다.
‘저 사람은 레이언의 저택에서 나를 안내해 준 그 시종이 아닌가?’
에반스는 은밀하게 치료소로 접근했다. 그때 그의 귀에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 사람을 어떻게 저렇게까지…….”
“쉬잇! 말조심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젠장! 들으라고 해! 레이언, 그 새끼는 인간도 아니야.”
“어허! 이 사람이 정말 큰일 날 소릴…….”
“사람들은 몰라. 착하고 사람 좋게 생긴 레이언이 실은 미친 새끼란 사실을 말이야.”
“하긴 심하긴 해. 찾아온 손님이 신발을 신고 자기 방에 들어왔다고 웨질을 저렇게 만들다니 말이야…….”
“아니, 대문에서 저택 현관 앞까지 손님을 안내한 웨질이 무슨 잘못이란 말이야! 손님을 방까지 안내한 총관의 잘못이지!”
“총관이 자기 살려고 또 거짓말을 한 거지.”
“휴, 그 미친 새끼 비위 맞추느라 고생하는 총관을 생각하면……. 에휴.”
“걱정이야, 우리도 웨질처럼 되지 말란 법은 없잖아?”
“맞아. 살려면 어쨌든 그 저택을 나와야 돼.”
“그런데 그 얘기 들었어?”
“무슨 얘기?”
“저번에 저택을 나간 토마스 말이야.”
“토마스가 왜?”
“며칠 전, 시체로 발견 됐다더라.”
“뭐, 뭐라고? 그, 그럼…….”
“아무래도 그 미친 새끼가…….”
덜컥!
그때 치료소 안의 치료사가 문을 열고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아니, 다 죽은 사람을 데려와서 나보고 어쩌란 거야?”
“헉! 그럼 웨질은?”
“죽었어.”
‘……맙소사.’
웨질이란 시종이 죽었단 말에 에반스도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고작 작은 실수 하나로 시종을 죽일 정도로 심하게 매질을 가했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써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레이언, 정말 미친놈인가?’
아무래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에반스는 그날 밤 몰래 레이언의 저택을 다시 찾았다. 낮에는 정문으로 걸어 들어갔지만, 밤에는 담을 넘어 열린 창문을 통해 저택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레이언의 방은 낮에 한 번 갔던 터라 비교적 쉽게 찾아냈다.
‘3층 중앙에서 좌측 방.’
저택 내부의 경계도 그리 심하지 않아서 에반스는 저택에 침입한 지 10분도 되지 않아 레이언의 방문 앞에 섰다. 그런데 에반스의 기감은 방 안에 살아 있는 생명체가 없다고 알려 주고 있었다.
‘어디 갔나?’
에반스는 일단 방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방 주위를 살폈지만 별다른 점은 찾지 못했다.
바로 그때였다.
“아악!”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들렸다.
‘뭐지?’
비명 소리는 벽 뒤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뒤이어 음산한 남자의 목소리와 여자의 애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벽 쪽으로 다가가 살핀 에반스는 회전문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벽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소리였다. 에반스가 집중해 보니, 일단 벽 안쪽 공간에는 아무도 없었다.
끼릭!
벽의 한쪽이 쑥 밀리면서 약간의 소음이 났다.
‘…….’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움찔한 에반스가 잠시 가만히 기다렸다.
“아아악……!”
하지만 잠시 후, 다시 여자의 비명 소리가 흘러나왔다. 에반스는 소음이 나지 않게 조심스레 회전문을 열고 벽 안으로 들어갔다.
회전문의 안쪽에는 성인 10명은 서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는데, 그 공간 위쪽으로 계단이 있었다.
레이언의 저택은 3층 건물이다. 레이언이 지금 쓰는 방이 3층이니, 그 위층이라면 아무래도 지붕 아래 천장의 공간을 개조해서 밀실로 만든 모양이었다.
에반스는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끝에는 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에반스가 그 덮개를 조심스레 들고 내부를 살폈다.
“흑흑흑, 도련님. 제발 살려 주세요.”
처음 눈에 띤 것은 한 젊은 여자가 나체로 쇠사슬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여자 옆 채찍을 들고 있는 남자는 바로 레이언이었다.
“흐흐흐흐, 오늘 온 그놈하고 눈 마주치니 좋았어?”
“그런 적 없어요. 전 명령하신대로 차를 내어 주었을 뿐이에요.”
그러고 보니 쇠사슬에 매달려 있는 여자는 에반스가 레이언의 방에서 대화를 나눌 때 차를 내어 왔던 바로 그 시녀였다.
“그래, 좋았겠지. 그놈이 나보다 덩치도 더 크고 힘도 좋게 생겼으니 말이야. 이 더러운 년!”
“꺄아악!”
레이언이 화를 내며 미친 듯이 채찍질을 해 댔다. 그때마다 여자는 죽어라 비명을 내질렀다.
결국 채찍질을 견디지 못한 여인이 정신을 잃었다. 레이언도 지쳤는지, 채찍질을 멈추고 씩씩거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잠시 후, 레이언은 여자의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어푸!”
찬물에 정신을 차린 여자는 이내 상황을 인식하고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하아!”
레이언이 입김을 소리 나게 불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겁에 질린 여자를 보고서 희열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레이언은 여자에게 다가가서 잠시 동안 황홀한 시선으로 여자의 몸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히죽 웃으며 여자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저거 완전 미친놈이잖아.’
지켜보던 에반스가 속으로 혀를 찼다.
레이언의 행동은 점점 대담해졌다.
시녀는 몸을 뒤틀며 저항했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꿈틀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레이언은 그녀의 그런 저항에 더더욱 희열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시녀의 몸을 탐하던 레이언이 결국 그녀를 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쾌락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내뱉는 말은 에반스를 놀라게 했다.
“후욱, 후욱…… 그래! 후작성도 내거고! 후작령도 내거야! 누구라도 내 것을 건드리는 놈들은 다 찢어 죽일 거야! 램버튼 백작? 하하하! 나를 이용해 먹을 심산인 모양인데 그렇게는 안 될 걸? 내가 제후가 되면 제일 먼저 그 작자의 배부터 갈라 봐야겠어. 아마도 그 안에는 새까만 오물들이 가득할 거야! 하하, 하하하!”
에반스는 레이언이 미친 녀석일망정 머리는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밖으로 나온 에반스는 서둘러 방을 뒤졌다.
그리고 그의 방에서 발견한 문서 중에 레이언이 포섭한 가신들이 꽤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수가 둘째인 라오치보다 더 많았다.
에반스는 자료를 보며 치를 떨었다. 이쯤 되면 완벽한 이중인격이었다.
3형제 중에서 레이언이 제일 무서운 녀석이었다. 하지만 하필 그 사실을 에반스가 알게 된 것이 레이언에게는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레이언의 저택을 빠져나오는 에반스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