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 부인이 대화 중 일방적으로 마법 통신을 끊자 첸들러 백작이 발끈했다.
“이런 빌어먹을 년! 감히 내 말을 끊어?”
퍽! 와장창!
첸들러 백작은 통신실에서 가장 비싼 통신구를 제외하고 나머지 것들을 닥치는 대로 바닥에 패대기를 치며 부쉈다.
그렇게 부수는 것으로 화를 푼 첸들러 백작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통신실을 나섰다. 그리고 총관을 불러서 라마스 영지의 정보 조직원들이 갇혀 있는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화르르르!
석벽에 매달려 있는 횃불 아래 드러난 계단을 따라, 첸들러 백작과 총관은 거침없는 걸음으로 지하로 내려갔다. 그들이 만들어 낸 그림자가 지하 석실의 벽에 음산하게 드리우자, 지하 감옥의 간수가 황급히 뛰어나와 그들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영주님.”
“이곳 간수장입니다.”
총관이 그 간수를 첸들러 백작에게 소개했다.
첸들러 백작은 간수장이 누군지 관심도 없다는 듯, 가볍게 한손을 들어 보이고는 고개를 감방 복도 쪽으로 돌렸다.
기름 타는 냄새와 죄수들이 만들어 낸 악취들이 복도 쪽에서 스멀스멀 풍겨 오자, 첸들러 백작이 코를 잡고 눈살을 찌푸렸다.
“곧 냄새에 익숙해지실 겁니다.”
총관의 말에 첸들러 백작이 코를 잡았던 손을 놓았다. 과연 총관의 말대로 그사이 코가 냄새에 적응을 했는지 별로 냄새가 나지 않았다.
총관이 간수장에게 말했다.
“오늘 여기 온 자들은 지금 어디 있나?”
“그자들이라면 지금 취조실에 있습니다.”
“안내해라.”
“네. 이쪽으로…….”
간수장이 안내하는 감방 복도로 들어서자 감방 안에 있던 죄수들이 감옥문의 작은 철창을 통해 밖을 내다봤다.
“영주다.”
죄수 중 하나가 첸들러 백작을 알아봤다. 그때부터 감옥 안이 시끄러워졌다.
“영주님,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저는 죄가 없습니다. 부디 가족에게 돌려보내 주십시오.”
죄수들이 전부 소리를 질러 대자 감방 복도가 죄수들의 목소리로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첸들러 백작이 아예 걸음을 멈추자, 총관이 간수장의 허벅지를 걷어찼다.
퍽!
“뭐하는 게야! 어서 조용히 못 시켜?”
총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육중한 덩치의 대머리 간수장은 총관의 발길질에 화들짝 놀라며 감방의 죄수들을 향해 고함을 쳤다.
“이 새끼들, 조용히 못해? 어떤 놈이 떠들어. 고문실에 끌려가고 싶어?”
고문실이란 말이 나오자 시끄럽던 감방 죄수들이 바로 입을 다물었다.
거짓말처럼 죄수들이 조용해지자 첸들러 백작은 다시 앞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긴 감방 복도를 지나 코너를 돌자 고문실과 취조실이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자륵, 자륵.
“으으으…….”
“크큭, 크크큭…….”
그때 고문실에서 쇠사슬에 묶인 죄수들의 신음 소리와 그들을 고문하는 간수들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복도 밖으로 들려왔다.
이곳 지하 감옥에 오게 되면 가장 먼저 취조실로 끌려가서 조사를 받는다.
성실하게 답변을 하면 고문실로 끌려가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그 성실한 대답이란 것이 바로 자신의 모든 죄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죄를 짓지 않은 죄수라면 당연히 성실한 답변을 할 리 없었다.
그러면 그때부터 고문실로 끌려가서 가혹한 고문을 받는다. 죄수는 결국 고문실에서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전부 인정했다.
촤악!
“크아아악!”
채찍질 소리와 함께 비명 소리가 고문실 밖으로 흘러나왔다. 간수장이 취조실의 문을 열자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간수장은 바로 고문실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 몇 명의 죄수들이 간수로부터 고문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 죄수들은 바로 라마스 영지의 정보 조직원들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첸들러 백작이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그러자 고문을 가하던 간수들이 영주인 첸들러 백작을 알아보고 황급히 고문 도구를 치우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때 첸들러 백작의 옆에 있던 총관이 큰소리로 외쳤다.
“간수장!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그러자 간수장이 총관 앞에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 그것이……. 저는 취조만 하라고 했는데 아랫것들이 그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간수장의 궁색한 변명에 총관은 혀를 차며 간수들에게 명령했다.
“당장 풀어 주지 못할까?”
간수들이 벌떡 일어나서 묶여 고문을 받고 있던 정보 조직원들을 모두 풀어 주었다.
지하 감옥으로 끌려가서 아무 죄도 없이 고문을 받던 정보 조직원들은 다시 취조실로 옮겨졌다. 그들은 취조실에서 황급히 불려 온 치료사로부터 상처를 치료받았다.
“간수들은 엄중히 처벌하라 지시했다. 몸은 괜찮으냐?”
첸들러 백작이 다정한 목소리로 정보 조직원들을 달랬다. 그러자 정보 조직원들이 다들 감격 어린 얼굴로 첸들러 백작에게 괜찮다고 말했다.
“다행히 심한 고문이 자행되기 전에 멈춰서 외상 이외에 큰 부상은 없습니다.”
치료사의 말에 첸들러 백작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오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구나. 나와 우리 라마스 영지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너희들에게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를 뻔했어.”
너무나도 따뜻하고 배려 깊은 첸들러 백작의 말에 정보 조직원들은 황송해서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때 첸들러 백작이 총관을 힐끗 쳐다봤다.
총관이 계속하라는 듯, 첸들러 백작에게 손짓을 보냈다. 그러자 첸들러 백작이 화난 얼굴로 총관에게 명했다.
“설혹 저들이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그간 세운 공이 있는데 어찌 여기로 데려온 것이냐? 어서 이들을 영주관의 귀빈실로 데려가라!”
첸들러 백작의 명에 총관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저는 간단히 취조만 할 생각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지금 즉시 저들을 영주관의 귀빈실로 데려가겠습니다.”
대충 상처 치료가 끝나자 첸들러 백작은 직접 정보 조직원들을 데리고 지하 감옥을 나섰다. 그리고 영주관으로 데려가서 영지의 귀한 손님들이 묵는 귀빈실을 아낌없이 정보 조직원들에게 내주었다.
“여기서 상처가 아물 때까지 편히 쉬도록 해라.”
“고,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정보 조직원들은 감격의 눈물까지 흘리며 자신들의 영주인 첸들러 백작에 더욱 더 충성해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때 귀빈실을 나서며 첸들러 백작이 총관에게 물었다.
“내 연기 어땠나?”
“아주 훌륭하셨습니다.”
“오늘은 푹 쉬게 하고 내일부터 압실론 후작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아 봐. 특히 엘렌에 대해서는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어.”
“걱정 마십시오. 저들은 엘렌과 줄곧 같이 있었습니다. 저들만 조사하면 그녀의 모든 행적이 백일하에 드러날 것입니다.”
총관은 첸들러 백작의 지시대로 정보 조직원들에게 하루 동안 휴식을 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 개별적으로 한명씩 만나서 압실론 후작성에서의 일을 물어보았다.
그 결과, 엘렌의 말이 모두 사실임이 밝혀졌다.
총관은 그 사실을 첸들러 백작에게 보고했다.
“그럼 엘렌은 아직 믿을 수 있단 소리군.”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가 계속 제 어미를 만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불러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네.”
안 그래도 귀찮았는데 영주인 첸들러 백작이 처리하겠다고 하자, 총관은 기뻐하며 바로 대답했다.
잠시 후, 총관이 엘렌을 데리고 첸들러 백작의 집무실에 나타났다.
“하하하, 어서 와라. 이리 가까이 오렴.”
엘렌은 다정한 표정의 첸들러 백작을 보고 그가 자신에 대한 의심을 풀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정보 조직원들을 취조해서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모양이었다.
엘렌은 첸들러 백작 가까이 다가가서 그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첸들러 백작이 총관에게 나가 보라고 고갯짓을 보냈다.
예를 표한 총관이 집무실을 나가고 둘만 남게 되자, 첸들러 백작이 갑자기 일어나 엘렌의 손을 덥석 잡았다.
흠칫 놀란 엘렌이 첸들러 백작을 쳐다보자 첸들러 백작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그동안 너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은 것은 너를 더 강하게 키우기 위해서였다. 너도 알다시피 내 뒤를 이을 피터는 여자만 밝히지 영지 일에는 관심이 없지 않느냐? 나는 네가 피터를 대신해서 라마스 영지를 잘 이끌어 주기를 바랐다. 해서 그동안 너에게 박정하게 대한 것이다.”
첸들러 백작은 진심 어린 눈빛으로 엘렌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엘렌이 감격 어린 얼굴로 두 눈엔 눈물을 글썽였다.
그런 엘렌의 눈물을 첸들러 백작이 닦아 주며 말했다.
“울지 말거라. 이제 이 아비가 네 옆에서 너를 지켜 주마.”
“아버님.”
엘렌이 울먹이며 첸들러 백작의 품에 안겼다.
첸들러 백작이 그런 엘렌의 등을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그런 첸들러 백작의 얼굴은 비릿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첸들러 백작 또한 품에 안겨 흐느끼고 있는 엘렌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음을 알지 못했다.
에반스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그녀는 첸들러 백작의 연기에 속아 넘어 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엘렌은 더 이상 예전, 첸들러 백작이 이용해 먹기 편하던 그 엘렌이 아니었다.
그녀에게도 이제 현실적인 꿈이 생겼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이런 연기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얼마 후, 우는 엘렌을 달랬다고 생각한 첸들러 백작은 그녀에게 전시 체제로 들어간 라마스 영지군을 맡겼다.
“내가 믿고 병력을 맡길 사람이 너 밖에 없구나.”
“걱정 마세요. 제가 사흘 안에 영지군 전 병력을 라코프 백작 성 앞에 집결시킬게요.”
확답을 받고 몇 마디인가를 더 나눈 첸들러 백작은 나가는 엘렌을 집무실 입구까지 배웅했다.
그리고 그녀가 나가고 나자 피식 웃었다.
“미친년, 내가 정말 자기를 친딸로 생각한다고 생각한 모양이군. 뭐, 나야 사흘 뒤 그년이 차려 놓은 밥상만 받으면 그만이니까. 하하하!”
첸들러 백작은 엘렌이 영지군을 집결시켜 놓으면 그때 그 병력을 이끌고 압실론 후작성으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흐흐흐……. 내 병사가 자그마치 이 만이나 된다. 그 병력이면 압실론 후작성을 점령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야심에 물든 첸들러 백작의 눈이 오늘 따라 유난히 더 번들거렸다.
***
공식적으로 압실론 후작가의 삼남이며 후작성의 자경대장을 맡고 있는 라오치는, 전날 레어폴 자작의 저택을 방문하러 후작성 밖으로 나갔다.
그는 압실론 후작가의 가신들 중 유일하게 라오치를 지지하는 귀족이었다.
라오치는 레어폴 자작의 저택에서 그를 지지하는 다른 가신들을 은밀히 만났다. 라오치가 만난 가신들 중에는 그의 형인 테오르의 측근도 몇 명 보였다.
“어떠셨습니까?”
자신을 지지하는 가신들과의 만남 후, 레어폴 자작이 라오치에게 물었다.
“글세, 기분이 좀 묘하군. 하지만 그리 나쁘진 않아.”
“지금 성은 램버튼 백작님과 테오르 님 사이에 힘겨루기가 진행 되고 있습니다. 그 둘이 싸우는 사이 우린 힘을 길러야 합니다.”
“나도 알아. 하지만 지금 이대로는 힘들어. 조직과 자금에서 난 외삼촌과 형의 상대가 되지 못해.”
“그 문제라면 저도 알아보고 있습니다. 조직은 어떻게든 제가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러니 라오치 님께서는 자금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라오치는 레어폴 자작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시간은 훌쩍 흘러 라오치는 다음 날 오후까지 레어폴 자작의 저택에 머물게 되었다. 자경대장이 이틀이나 자리를 비울 수는 없는 일이라, 라오치는 서둘러 후작성으로 움직였다.
“후우, 춥구나.”
라오치의 호위 기사 올렌은 고삐를 쥔 손 위에 차갑게 내려앉은 밤기운을 털어 내며 주변을 살폈다.
라오치를 태운 마차는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깜깜한 숲을 지나고 있었다. 달빛은 어느 때보다 푸르렀지만, 깔린 어둠은 기분 나쁘도록 짙었다.
라오치는 어떻게든 해가 지기 전에 후작성으로 들어가려 지름길을 선택했다. 그런데 그만 중간에 마차 바퀴가 말썽을 부려 반나절 가까이를 허비한 탓에, 결국 한밤중에도 숲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젠장, 앞도 안 보이고……. 여기서 날이 밝기를 기다려야 하는가?”
올렌은 마차 쪽으로 다가갔다. 아무래도 더 이상 움직이는 것은 위험하니 야영이라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라오치에게 말할 생각이었다. 마차 옆으로 말을 몰아 간 올렌이 마차 문을 살짝 두드렸다.
똑똑!
곧 마차 창문이 열리고 라오치가 말했다.
“뭔가?”
“라오치 님. 아무래도 여기서…… 음! 저건!?”
올렌은 라오치에게 말을 하던 중에 왼쪽 비탈 위에서 번뜩이는 광채를 보았다.
분명 철기의 반사광이었다.
“주의하라!”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마들이 불쑥불쑥 나타나 비탈을 미끄러지듯 달려 내려왔다.
두두두두!
마차를 노리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적이다! 마차를 보호하라!”
크게 소리친 올렌이 즉시 타고 있던 말에서 활을 챙기고 전갑에서 화살을 빼내 시위에 걸었다.
그때였다.
쉬웅!
“컥!”
단말마가 그의 옆에서 들려왔다.
한 발 먼저 날아든 적의 화살이 그의 옆에 있던 기사의 목에 틀어박혔다.
어두운 밤에, 그것도 기사의 갑옷을 피해 목에 정확히 화살을 꽂아 넣을 정도면 예사로운 자들이 아니었다.
올렌은 재빨리 활시위를 당기며 비통하게 소리쳤다.
“루페이!”
동료 기사가 당하자 격분한 올렌은 즉시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활을 겨냥하고 시위를 놓았다.
“크윽!”
다행히 그가 활을 쏜 화살에 덤불에 숨어 있던 적 궁수가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동시에 그의 옆에 있던 기사 루페이도 말에서 떨어졌다.
“루페이……!”
올렌이 비통하게 소리치며 접전 중인 적을 겨누어 계속 시위를 당겼다. 그의 화살에 맞고 비틀거리는 적은 동료 기사가 장검을 휘둘러 머리통을 날려 버렸다.
라오치의 호위는 기사 3명에 병사 10명이 전부였다.
그 중 기사 한 명이 목에 화살을 맞고 낙마했으니, 두 명의 호위기사가 10명의 병사들과 습격한 자들을 상대하는 셈이었다.
습격한 자들 중 다섯 명은 말을 타고 공격했고 나머지는 덤불 속에 숨어서 화살을 쐈다. 한 번에 날아오는 화살의 숫자로 봐서 대략 10여 명이 덤불 속에 숨어 있는 모양이었다.
습격한 자들은 모두 검은 야행복에 복면을 쓰고 있었다. 정체를 숨겼다는 것은 단순히 도적들은 아닌 무슨 목적이 있는 자들이란 소리였다.
그때 말을 탄 적들 중 하나가 올렌을 향해 돌진해 왔다. 올렌은 들고 있던 활을 내던지고 장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말에 박차를 가했고 곧장 복면을 쓴 자와 맞닥트렸다.
“타합!”
올렌이 고함과 함께 토해 내는 검격을, 복면을 쓴 자가 머리에 떨어지기 직전에 발검해서 받아쳤다.
챙! 챙! 챙! 챙!
“누구냐? 누군데 감히 자경대장의 마차를 습격한 것이냐?”
“……마차를 두고 물러가라. 귀한 목숨을 이런 곳에서 버리면 쓰나.”
복면을 쓴 자가 제법 정중한 어투로 말했다.
그자의 말처럼 말을 탄 나머지 4명의 습격자들이 마차 앞을 지키던 동료 기사와 병사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마차를 지키던 10명의 병사 중 6명이나 화살에 맞아 쓰러진 상태였다.
기사 한 명과 병사 4명이 남은 습격자들을 막아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으아아악!”
두 명의 병사가 복면인 둘이 휘두른 검에 맞고 쓰러졌다. 올렌의 동료 기사는 혼자서 복면인 둘을 상대하고 있었다.
‘마차가 위험하다.’
지금은 적과 싸우는 것보다 마차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 마차 주위가 위태로워지자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올렌이 막 말 머리를 돌리려 했다. 그때 그의 앞을 복면을 쓴 자가 가로막았다.
“어딜 가려고. 너의 상대는 나다.”
올렌은 불러냈던 복면인이 올렌의 머리를 향해 강하게 장검을 내려쳤다. 올렌은 다급히 검을 들어 공격을 막았다.
챙! 챙!
올렌이 복면인과 치열하게 검격을 주고받고 있을 때 덤불에 숨어 있는 적들이 밖으로 뛰어나와 마차 쪽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들고 있던 화살로 마차 주위에 남은 기사와 병사를 쐈다. 근거리에서 쏘는 화살은 정확도가 높았다.
퍼퍼퍽!
“크윽!”
동료 기사의 등판에 3개의 화살이 박혔다. 기사가 비틀거리자 그와 말 위에서 싸우던 두 복면인이 기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퍽!
“컥!”
검에 얼굴이 가격당한 기사는 단말마와 함께 통나무가 쓰러지듯, 말 위에서 그대로 꼬꾸라졌다. 남은 두 명의 병사는 이미 다른 두 복면인의 말에 짓밟혀 죽은 상태였다.
“마차 문을 열어라.”
우두머리로 보이는 복면인의 말에 다른 습격자들이 막 마차 문을 열려 할 때였다.
휘르르!
캄캄한 숲길 맞은편에서 일직선으로 불꽃들이 날아왔다.
촤악!
우두머리 복면인은 화살을 검으로 쳐 냈고, 마차에 접근했던 복면인들은 마차에 숨어서 피했다. 그때 불화살이 날아온 방향에서 누군가 빠르게 말을 몰아 마차 쪽으로 달려왔다.
그러자 말을 타고 있던 복면인 중 하나가 소리쳤다.
“물러난다.”
그의 명령에 마차를 둘러쌌던 복면인들이 일제히 숲 속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마지막으로 올렌과 대치중이던 복면인도 올렌의 공격을 뿌리치고 달아났다.
잠시 후, 불화살을 쏜 방향에서 단기로 달려온 자가 마차에 도착했다. 말에서 내린 그가 마차 문에 노크를 하며 말했다.
“괜찮습니까?”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때 올렌이 말을 몰아 마차 쪽으로 와서 큰소리로 외쳤다.
“라오치 님! 괜찮으십니까?”
올렌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마차의 창문이 열렸다. 그리고 잔뜩 겁을 집어 먹은 라오치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소리쳤다.
“올렌 경!”
“네, 라오치 님. 저 여기 있습니다.”
올렌이 황급히 말에서 내려 마차로 뛰어갔다. 그때 라오치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노, 놈들은?”
“달아났습니다.”
올렌의 달아났다는 말에 라오치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일단의 사람들이 마차 주위를 에워쌌다. 이에 라오치가 흠칫 놀라자 올렌이 말했다.
“우릴 구해 준 자들입니다.”
곧 마차 주위에 횃불이 밝혀졌다. 그리고 마차를 구하기 위해 단기로 말을 달려 마차로 달려들었던 자가 앞으로 나섰다.
“괜찮으십니까?”
그자의 물음에 라오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괜찮다. 나는 압실론 후작성의 자경대장이다. 너희는 누구냐?”
라오치의 말을 듣고 그자가 바로 허리를 숙였다.
“자경대장님이셨군요. 저는 칼이라고 합니다.”
“칼?”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자칫 큰일 날 뻔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늦은 시간에 자경대장님께서 이런 숲에는 왜 오신 겁니까?”
칼의 물음에 라오치는 서두르다가 오히려 도중에 발이 묶이는 신세가 되었다며 사실대로 얘기했다.
“그런데 그자들이 왜 자경대장님을 해치려 한 겁니까?”
“그, 그건…….”
그 이유는 라오치도 몰랐다.
그때 습격한 자들 중 죽은 자들의 소지품을 뒤지던 올렌이 힘없이 돌아와서 라오치에게 말했다.
“단서가 될 만한 물건이나 증거는 찾지 못했습니다.”
“뭘 찾으시나 본데, 저희가 돕도록 하겠습니다.”
칼은 휘하 조직원들을 풀어서 마차 주위를 샅샅이 뒤지게 했다. 하지만, 역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라오치가 칼에게 말했다.
“도와줘서 고맙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자경대장님을 도울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라오치는 올렌을 제외한 두 명의 기사와 10명의 병사가 모두 죽어 많이 의기소침해 있었다. 그런 라오치에게 칼이 말했다.
“언제고 한번 시간이 되면 꼭 라오치 님을 만나 뵈려 했었는데, 이것도 인연이면 인연이니 지금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군요.”
“나를 만나려 했다고?‘
“네. 혹시 꼴레오네 파를 아십니까?”
칼의 물음에 라오치가 간단히 대답했다.
“잘 알지. 나도 전에 그놈들의 덕을 본 적이 있으니 말이야. 하지만 그들은 얼마 전 조직 자체가 풍비박산이 났다고 알고 있네.”
“맞습니다. 잘 아시는군요. 저는 그 꼴레오네 파를 흡수해서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가만……. 아하, 이제 기억났다! 어째 칼이란 그 이름이 귀에 익더라니. 그대가 압실론 후작령의 새로운 조직 칼 파의 수장이로군.”
“역시 영민하시군요.”
“그런데 그대는 왜 여기 있는 것인가?”
라오치가 묻자 칼이 바로 대답했다.
“이 숲에 저희 조직의 수련장이 있습니다. 여기서 조직원들과 수련을 하고 있었지요. 참. 이러고 계실 것이 아니라 저희 수련장으로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혹시 그 자들이 또 라오치 님을 노릴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 그럴까?”
칼의 말에 흠칫한 라오치는 잠시 망설이다 칼 파의 수련장으로 향했다.
라오치와 칼과 그 일행들이 모두 떠나고 나서 얼마 뒤, 숲에서 라오치를 습격했던 자들이 나타났다.
“죽은 자들의 시신은 잘 수습해.”
라오치를 습격한 자들은 바로 칼을 따르던 카라스 영지의 정보 조직원들이었다. 그들은 수도의 낭인들을 끌어 모아서 활 쏘는 훈련을 시킨 뒤, 이곳 숲에서 예행 연습까지 거쳐 라오치를 노렸다.
그 과정에서 낭인들 몇 명이 죽었는데, 지금 그 시신을 수습하고 있는 것이다.
“칼 님이 잘하셔야 할 텐데.”
정보 조직원들은 주위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그곳을 떠났다.
***
칼 파의 수련장은 보통 통나무집이었다.
집 내부는 꽤나 널찍했다. 특히 난로가 커서 불을 지피자 금방 집 안이 훈훈해 졌다.
“일단 여기서 밤이슬을 피하시고 날이 밝으면 후작성으로 가십시오.”
칼이 통나무집을 통째로 라오치에게 양보하고 밖으로 나가려 할 때 라오치가 칼을 불러 세웠다.
“잠깐, 칼.”
“네.”
“이리와 보게.”
라오치의 손짓에 통나무집을 나가려던 칼이 즉시 몸을 돌렸다. 칼이 근처까지 다가오자 유일하게 라오치의 곁에 남은 올렌이 칼의 앞을 가로막았다.
“올렌, 그냥 둬.”
“…….”
고개를 숙여 보인 올렌이 옆으로 비켜서자, 칼이 라오치 옆으로 성큼 다가섰다.
“앉아.”
라오치가 자리를 권하자 칼은 라오치 바로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자 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알기로 내 외삼촌인 램버튼 백작이 꼴레오네 파의 배후에 있었다고 하더군. 꼴레오네 파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이 꽤 많았다고 하던데 어떤가? 그 말이 사실인가?”
라오치의 말에 칼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때는 그랬을지 모르지요. 하지만 지금 저희 칼 파는 그만한 배후를 가지지 못해서 많은 돈은 벌지 못하고 있습니다.”
칼의 말에 라오치가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그 말은 누가 자네 뒤만 봐주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단 소리로 들리는군?”
“하하하, 그렇게 들으셨습니까? 모자란 자가 내뱉은 넋두리에 불과합니다. 그냥 흘려들으십시오.”
칼이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자 라오치가 진지한 눈빛으로 칼을 쳐다보며 물었다.
“꼴레오네 파는 다 장악했나?”
“네.”
“으음, 그럼 쓸 만하겠군. 자네, 내일 밤 내 집으로 와 줄 수 있는가?”
“절 지금 초대하신 겁니까?”
칼이 놀라워하자 라오치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나를 구해 줬는데 그냥 넘어갈 수 없지. 어떤가? 와 주겠나?”
“가겠습니다.”
“후후, 그럼 내일 보지.”
“네, 밖은 제 수하들이 지킬 테니 편안히 쉬십시오. 그리고 내일 수도까지도 제 수하들이 지켜 드릴 것입니다.”
칼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통나무 집 밖으로 나갔다.
라오치가 올렌에게 물었다.
“올렌 경, 경이 보기에 저 칼이란 자가 어때 보이나?”
“꼴레오네 파가 무너지고 나서 단숨에 그 조직을 장악한 자입니다. 그 점만으로도 능력은 있다고 봐야겠지요. 하지만 정확한 정체를 알 때까지 경계할 필요가 있는 인물입니다.”
“흐음, 내일 자경대로 돌아가면 칼이란 자에 대해 더 조사해.”
“알겠습니다.”
“으음……. 피곤하군.”
라오치는 난롯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올렌은 그런 라오치를 등지고 서서 밤새도록 그를 지켰다.
날이 밝자 라오치는 다시 마차를 타고 압실론 후작성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그를 호위하는 자들은 병사들이 아니라 칼 파의 조직원들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마차 안에 자경대장인 라오치가 타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칼은 무사히 라오치를 자경대 본부에 내려 주고 조직 아지트로 돌아갔다. 그리고 은밀히 에반스를 만났다.
“시키신 대로 라오치와 접촉하는 것에는 성공했습니다. 오늘 밤에 그의 저택에서 그와 만나기로 했습니다.”
“전에 말했듯이 라오치를 이번 일에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뭔지 잘 파악해서 그를 압실론 후작가의 진흙탕 싸움에 반드시 끌어들여야 할 것이다.”
“맡겨 주십시오.”
에반스와 헤어진 칼은 날이 저물자 라오치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가 저택 정문에 도착하자 라오치 저택의 집사가 그를 마중 나와 있었다.
“따라오게.”
집사와 같이 저택의 현관으로 간 칼은 현관 입구의 기사들에게 몸에 지니고 있던 무기를 모두 맡긴 후, 집사와 같이 안으로 들어갔다.
집사는 칼을 데리고 라오치의 집무실로 향했다.
“어쌔신 출신이란 말인가? 하하하! 이거 재미있는 걸?”
집무실 안에서는 라오치가 자경대 정보망을 통해 칼에 대한 모든 자료를 받아서 살펴보고 있었다.
라오치는 칼이 귀족 출신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교육도 받은 만큼, 칼이라면 라오치의 측근이 될 수도 있었다.
‘사용하기에 따라 내게 큰 도움이 될 자다.’
라오치는 칼을 자신이 거두기로 결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사가 칼을 데리고 집무실에 들어왔다.
“어서 오게.”
라오치는 반가운 얼굴로 칼을 맞았다.
“저녁 만찬이 준비되기 전에 나와 얘기나 잠깐 나누도록 하지.”
“네. 그렇게 하시지요.”
라오치는 손짓으로 집사를 집무실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칼과 단둘이서 얘기를 나누었다.
“어제 내가 한 말은 아직 기억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만약 내가 너희 조직의 뒤를 봐주겠다면 그것을 받아들이겠나?”
라오치의 물음에 칼이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죄송합니다. 그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겠습니다.”
단번에 거절하는 칼을 보고 라오치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지?”
“라오치 님께서 자경대장이기는 하시지만 후작성에서 그 영향력은 너무 미미합니다. 지금의 라오치 님께서는 저희 조직을 담을 만한 그릇이 못 되십니다.”
“뭐, 뭐라고? 네깟 놈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런 망발을 내뱉는 것이냐?”
라오치가 발끈해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자 칼이 말했다.
“그럼 하나만 여쭤 보겠습니다. 라오치 님께서는 지금 자경대장의 자리에 만족하고 계십니까?”
“흥! 넌 내가 고작 후작성의 자경대장 자리에 만족할 그릇으로 보았더냐?”
“그게 아니라면 후작성의 주인이 되실 생각이라도 있으십니까?”
“뭐? 그, 그건…….”
얼굴이 벌겋게 변해서 대답을 하지 못하는 라오치를 향해 칼이 말했다.
“거 보십시오. 램버튼 백작님이나 테오르 님 같았다면 과연 지금 저의 질문에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을까요?”
“…….”
칼의 말에 라오치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우, 네 말이 맞다. 난 외삼촌과 테오르 형님처럼 자신감이 부족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후작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그들보다 적은 것은 아니다. 단지 그 기회가 내게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라오치의 말에 칼이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그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번 싸워 보실 생각은 있으십니까?”
“그렇다. 나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난 절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라오치의 말에 칼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라오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라오치 님. 미력한 힘이나마 제가 라오치 님을 돕겠습니다. 대신 저와 저의 조직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십시오.”
“고맙네. 앞으로 날 좀 잘 도와주게.”
라오치는 무릎을 꿇은 칼을 직접 두 팔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나란히 저녁 만찬을 즐기러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