램버튼 백작은 테오르 부부의 방문 후, 테오르와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테오르도 나름대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서, 램버튼 백작은 테오르 부부를 생일 초대 명부 제일 상단에 기록해서 모건 남작에게 건넸다.
“이번 내 생일 연회는 그 어느 때보다 크고 화려해야 할 것이다. 내가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 줄 수 있도록 말이야.”
“네. 그러셔야지요. 전부 말씀대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마 올해 압실론 후작령에서 가장 큰 연회가 될 것입니다.”
“하하하! 그래야지.”
흡족해 하는 램버튼 백작을 집무실에 남겨 두고 모건 남작이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차를 가져와라, 아니, 이럴 때는 축배를 들어야지. 술을 가져와라.”
기분이 좋아진 램버튼 백작이 술을 가져오라고 명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시종이 술을 가지고 나타났다. 그때 시종이 램버튼 백작에게 다가와서 뭔가를 건넸다.
“백작님. 이것을…….”
시종이 쪽지를 건네자 램버튼 백작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그게 뭐냐?”
“칼 님께서 전하라고…….”
“칼? 그자가 지금 지휘 체계를 무시하겠다는 건가?”
칼 파는 램버튼 백작의 명령에 의해 움직여야 하지만 그 모든 보고는 모건 남작을 거쳐서 램버튼 백작에게 전해져야 했다.
그런데 칼이 지금 월권을 한 것이다. 램버튼 백작이 역정을 내자 시종이 바로 말했다.
“총관께서 알아서는 안 될 일이라고 전하면 아실 거라 하셨습니다.”
“뭐?”
모건 남작이 알아선 안 될 일이라니? 순간 램버튼 백작은 등골에 식은땀이 맺혔다.
시종은 쪽지를 술병 옆에 두고 물러났다. 램버튼 백작은 잠시 쪽지를 쏘아보다가 결국 쪽지를 펼쳐 내용을 살폈다.
쪽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모건 남작이 테오르 님과 내통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서명에는 칼이 아닌 그의 오른팔이라고 했었던 애덤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부르르!
모건 남작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제보에 램버튼 백작이 한차례 몸을 떨었다. 그리고 술병을 들어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그럴 리가 없어. 모건 남작이 나를 배신할 리 없잖아.”
램버튼 백작은 모건 남작의 배신을 강하게 부정했다. 하지만 모건 남작이 테오르와 유독 친했던 것은 램버튼 백작도 잘 알았다.
이전에도 이런 소문이 있긴 했지만 그 소문의 출처가 확실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제보자도 확실하고, 무엇보다 증거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밖에 누구 없느냐?”
램버튼 백작의 부름에 호위 기사가 들어와서 말했다.
“총관님을 부를까요?”
“아니. 총관 말고, 너 이리 와 봐.”
램버튼 백작이 호위 기사를 곁으로 불렀다.
“네. 백작님.”
호위 기사가 자기 곁에 와서 서자 램버튼 백작이 손짓을 보냈다. 그러자 호위 기사가 허리를 숙여 귀를 램버튼 백작 가까이 가져갔다. 그러자 램버튼 백작이 속삭이듯 그 호위 기사에게 말했다.
“총관 몰래 칼 파의 아지트로 가서 애덤스란 자를 데려와라. 단, 절대 총관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네.”
호위 기사가 황급히 집무실을 나서자 램버튼 백작은 술병을 들어 한 모금 마신 후,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칼은 램버튼 백작이 보낸 호위 기사로부터 백작이 애덤스를 찾는다는 말을 전해 듣고 즉시 에반스에게 전했다.
“램버튼 백작이 급하긴 급했군.”
에반스는 즉시 칼 파의 아지트로 가서 램버튼 백작이 보낸 호위 기사와 함께 램버튼 백작 저택으로 향했다.
“정문으로 가면 총관과 그의 측근들에게 걸릴 수 있으니 후문으로 갈 것이다.”
호위 기사는 총관에게 들키지 않으려 꽤나 노력 중이었다. 에반스는 그냥 말없이 그 호위 기사가 시키는 대로 따라 움직였다.
후문을 통해 저택 내부로 들어간 호위 기사는 에반스를 데리고 은밀히 집무실 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집무실 주위 기사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보낸 뒤, 에반스를 램버튼 백작의 집무실 안에 밀어 넣었다. 그 후 호위 기사는 혼자 집무실 입구를 지켰다.
에반스가 집무실 안에 들어가자 램버튼 백작이 두 명의 호위 기사들과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램버튼 백작은 에반스가 보낸 쪽지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네 말이 사실이 아닐 경우, 넌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다.”
램버튼 백작이 사납게 말하자 에반스는 가볍게 허리를 숙여 보이며 대답했다.
“그렇게 하시지요. 하지만 제 말이 맞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뭐?”
램버튼 백작의 얼굴이 당혹감이 역력했다. 그는 아직 총관인 모건 남작이 자신을 배신했을 거라 믿고 있지 않는 눈치였다.
“제 말을 들어주시겠습니까?”
말 정도 들어주는 거야 돈 드는 것도 아니니 램버튼 백작은 별생각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모건 남작이 나를 배신했다는 증거는 어디 있지?”
램버튼 백작의 물음에 에반스가 대답했다.
“그건 직접 가셔서 보시면 아실 겁니다.”
“가다니 어딜 말이냐?”
“총관과 테오르 님이 지금 은밀히 만나고 있습니다. 그곳에 가셔서…….”
“하하하하! 어리석은 놈, 감히 나를 속이려 하다니! 총관은 어딜 가든 반드시 내게 보고를 한다. 그런데 총관은 내게 아무 말도 없었지. 총관은 지금 이곳에 있다. 자, 저놈을 잡아라!”
램버튼 백작의 말에 두 호위 기사가 움직이자 에반스가 차분히 말했다.
“그건 당장 알아보시면 될 일이 아닙니까?”
“……잠깐, 나가서 알아봐.”
램버튼 백작의 명령에 기사가 밖에 대기 중이던 기사에게 당장 총관을 불러오라고 했다. 그런데 얼마 후 돌아온 기사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총관님께서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없는 것이, 아마도 밖에 나가신 듯합니다.”
“뭐?”
램버튼 백작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에반스는 램버튼 백작에게서 술 냄새를 맡고 빙그레 웃었다.
잠시 후, 램버튼 백작을 태운 마차가 조용히 백작가를 빠져나갔다. 에반스는 마차 안에서 위치를 알려 주었고, 마차는 그곳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마차가 도착한 곳은 후작 성내의 술 창고가 있는 곳이었다.
“마차는 숨겨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에반스의 말에 램버튼 백작은 호위 기사들에게 마차를 보이지 않는 쪽으로 치워 두게 했다. 에반스는 많은 창고들 중 한 창고로 램버튼 백작과 기사들을 안내했다. 그때 호위 기사 중 하나가 그 창고 근처에 서 있던 마차 한 대를 발견하고 말했다.
“총관님의 마차입니다.”
그 말에 램버튼 백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런 램버튼 백작을 보면서 에반스가 말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저들에게 들키지 않고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에반스의 안내를 받으며 램버튼 백작과 호위 기사들이 술 창고 뒤쪽으로 돌아갔다.
모건 남작도 나름대로 야망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2인자로서의 야망이지, 자신이 제후가 되어야겠다는, 그런 황당한 꿈은 아니었다. 물론 그의 주군인 램버튼 백작이 후작이 되겠다면 그도 최선을 다해 그 일을 돕겠지만 말이다.
그는 그저 지금의 램버튼 백작을 잘 보필하며 지금처럼 편안하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압실론 후작가의 유력한 후작 후계자, 테오르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허어, 이걸 어쩐다?”
모건 남작은 테오르가 보낸 서신을 받고 고심했다. 테오르가 모건 남작에게 자신을 따르면 램버튼 백작가의 총관이 아닌, 압실론 후작가의 총관이 되게 해 주겠다고 제의한 것이다. 귀가 솔깃한 제의였지만, 모건 남작은 자신의 분수를 잘 알았다.
“압실론 후작가의 총관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다.”
모건 남작은 가늘어도 길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테오르의 제의는 램버튼 백작을 배신하라는 전제가 뒤따랐다. 램버튼 백작을 배신한 자신이 후일, 압실론 후작가의 총관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답은 의외로 쉽게 나왔다.
한 번 배신한 자는 신뢰하기 어려웠다. 테오르는 아니라고 해도 그 역시 인간이고, 그가 제후가 되면 그 측근들이 그를 설득할 터였다.
모건 남작은 배신자라고 말이다.
그럼 그는 권력구도에서 밀려날 것이고, 몰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해서 모건 남작은 테오르의 제의를 깨끗이 거절하기로 결심했다.
테오르는 무슨 이유에선지 오늘 꼭 모건 남작을 만나야겠다고 했다. 때문에 모건 남작은 테오르를 직접 만나서 그의 제의를 거절하기로 하고, 램버튼 백작 몰래 백작의 저택을 빠져나와 약속 장소로 향했다.
램버튼 백작에게 알리지 않고 나온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렇다고 테오르를 만나러 간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는가?
“괜찮아. 빨리 거절하고 돌아가면 돼.”
약속 장소에 도착한 모건 남작은 술 창고 안에 들어가 테오르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테오르가 호위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나타났다.
“오오, 모건 남작. 벌써 와 있었군.”
“네, 도련님.”
둘은 서로 인사를 나눴다. 그때 테오르가 먼저 말했다.
“그래, 내게 줄 거란 것이 뭔가?”
“네?”
“램버튼 백작의 비밀 장부를 내게 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 그게 무슨…….”
그때였다.
창고 내 공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램버튼 백작이 나타났다.
“헉!”
램버튼 백작을 발견한 테오르가 놀라며 기사들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총관……. 내 너를 믿었거늘.”
“…….”
모건 남작은 눈만 끔벅거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변명조차 하지 않는 총관을 본 램버튼 백작은 더 화가 났다.
“잡아라!”
램버튼 백작의 명령에 모건 남작의 두 호위 기사들이 바로 옆에 있던 총관을 잡았다.
그때 총관이 기사 중 한 명의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서는 그대로 자신의 목을 그었다.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기사들도 어떻게 대처할 수 없었다.
검으로 자신의 목을 그은 모건 남작은 테오르를 향해 애틋한 눈빛과 함께 손짓을 하면서 쓰러졌다.
마치 자신은 테오르를 위해 죽음을 선택했다는 듯 말이다.
“저, 저런…….”
램버튼 백작은 그 모습에 더 분노했다. 그래서 테오르를 죽일 듯 쏘아보았다. 그런 램버튼 백작에게 어느새 다가온 에반스가 말했다.
“참으십시오. 테오르 님은 압실론 후작가의 후계자가 아닙니까?”
에반스의 말에 램버튼 백작이 겨우 정신을 차렸다. 테오르는 그의 외종질이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피붙이를 해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외삼촌,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나에게 먼저 접근한 건 모건 남작이었다고요.”
테오르를 위해 기꺼이 죽은 모건 남작과 달리, 테오르는 모건 남작 자체를 부정했다. 램버튼 백작은 굳은 얼굴로 죽은 모건 남작을 보고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이렇게 개죽음이나 당하려고 나를 배신한 것인가?”
램버튼 백작은 길게 한숨을 내쉰 후, 테오르를 보고 말했다.
“너 때문에 죽었으니 모건 남작의 시체는 네가 거둬라. 가자.”
말을 마친 램버튼 백작은 에반스와 호위 기사들을 데리고 술 창고 밖으로 나갔다.
테오르는 모건 남작이 보낸 서신을 보고 군침을 삼켰다.
“흐흐흐, 램버튼 백작의 비밀 장부라니. 그것만 내 손에 들어오면…….”
자신이 차기 후작이 될 것은 확실했지만, 그가 후작이 되는 것과 램버튼 백작과는 별 상관이 없었다. 후작 부인이 있는 한, 테오르가 후작이 된다 해도 램버튼 백작가는 계속 지금과 같은 힘을 지니게 될 터였다.
문제는 램버튼 백작가가 가진 힘이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테오르는 후작이 되어도 제대로 대영주로서의 힘을 쓸 수 없었다.
램버튼 백작가가 있는 한 말이다.
하지만 램버튼 백작가의 비밀 장부를 그가 수중에 넣는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것으로 램버튼 백작을 협박해서 그의 수하로 만들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테오르는 제후로서 강력한 힘을 휘두를 수 있었다.
그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테오르가 아니었다. 테오르는 모건 남작을 만나기로 한 장소로 움직였다.
술 창고에 도착하니 모건 남작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의심 많은 테오르는 먼저 호위 기사들로 하여금 주위를 살피게 했다.
“모건 남작과 기사 두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테오르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모건 남작과 만나기로 한 술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서로 인사까지 한 것은 좋았다. 문제는 테오르가 모건 남작에게 비밀 장부를 달라고 했을 때부터였다.
모건 남작은 그게 무슨 소리냐며 테오르를 쳐다보았고, 바로 그때 램버튼 백작과 그의 기사들이 창고 내 공실에서 튀어나왔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건 그 다음이었다. 갑자기 모건 남작이 그를 잡은 기사의 검을 뽑아서 자결해 버린 것이다. 그것도 테오르를 보면서 애절하게 말이다. 누가 봐도 테오르를 위해 죽는다는, 그런 모습이었다.
테오르는 램버튼 백작에게 강력하게 부인했다. 하지만 램버튼 백작은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램버튼 백작은 모건 남작의 시신을 두고 떠났다.
“어떻게 할까요?”
테오르의 호위 기사 중 하나가 물었다. 보아하니 호위 기사들도 테오르가 모건 남작의 시체를 치워 주는 것이 도리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테오르만 환장할 지경이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고개를 내젓던 테오르가 힘없이 말했다.
“모건 남작의 시신을 잘 수습해서 장례를 치러 주도록 해.”
이렇게 되자 모건 남작이 테오르를 위해 죽었다는 것을 본인도 인정하는 꼴이 되었다. 테오르는 힘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에반스는 술 창고 뒤쪽으로 램버튼 백작을 데려갔다. 그리고 외부에서 술 창고 내부 공실로 들어가는 입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공실 안에서는 창고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창고 안에 호위 기사 두 명과 함께 서 있는 총관 모건 남작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얼마 후, 호위 기사들에 둘러싸인 테오르가 나타났다.
테오르는 바로 모건 남작에게 램버튼 백작의 비밀 장부를 달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램버튼 백작은 이성을 잃었다.
“저, 저놈이 정말 배신을…….”
바로 그때 에반스의 모습이 사라졌다.
램버튼 백작도, 그의 기사들도, 에반스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사라진 것은 알지 못했다.
이때 에반스는 드워프의 검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바로 검의 투명화 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에반스는 먼저 공실을 나와 모건 남작에게 접근했다. 모건 남작은 테오르가 비밀 장부 운운하며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내뱉자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막 말을 하려는 데 뭔가가 그의 입을 가로 막았다. 바로 에반스가 모건 남작의 등 뒤로 돌아가서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은 것이다. 그리고 에반스의 손을 통해 마나가 주입되면서 모건 남작은 꼼짝도 못한 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때 램버튼 백작과 기사들이 창고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놀란 테오르와 그 주위 호위 기사들이 뒤로 물러나고 램버튼 백작이 모건 남작에게 왜 배신을 했는지 물었다.
‘아닙니다! 전 배신하지 않았어요!’
모건 남작이 간절한 눈빛으로 램버튼 백작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모건 남작은 에반스 때문에 아무 말도,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분노한 램버튼 백작이 기사들에게 모건 남작을 잡으라고 했다.
그러자 모건 남작의 두 호위 기사가 모건 남작을 잡았다. 바로 그때 투명화 마법으로 모건 남작을 통제하고 있던 에반스가 모건 남작의 손을 잡고 옆에 있던 기사의 검을 뽑았다. 그리고 그 검으로 모건 남작의 목을 그었다.
츄에엑!
모건 남작의 목에서 피 분수가 뿌려졌다. 그때 에반스는 모건 남작의 시선을 테오르에게 향하게 하고, 그의 손을 조정해서 테오르를 가리키게 했다. 모건 남작은 죽는 그 순간까지 에반스의 꼭두각시로 연기를 했던 것이다.
털썩!
모건 남작이 쓰러지자 에반스는 즉각 램버튼 백작의 뒤로 갔다. 그리고 드워프 검의 투명화 마법을 해제했다.
모건 남작의 죽음으로 격분한 램버튼 백작을 다독인 에반스는 램버튼 백작과 호위 기사들과 함께 술 창고를 나섰다.
마차를 타고 램버튼 백작 저택으로 돌아가던 길에, 램버튼 백작은 모건 남작의 배신과 그의 죽음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램버튼 백작에게 에반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렇게 테오르 님께서 후작가의 주인이 되신다면 문제가 있지 않겠습니까?”
에반스의 말에 램버튼 백작이 흠칫 놀라며 말했다.
“지, 지금 뭐라고 했지?”
“아니, 자신을 위해 죽은 모건 남작까지 부정하시는 분께 과연 이곳 압실론 후작령을 맡길 수 있을까 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닥쳐라, 이놈! 천한 것이 어디서 감히……!”
“죄,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에반스는 바로 머리를 조아렸다.
램버튼 백작은 버럭 화는 냈지만 애덤스란 자의 말도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직 후작도 되지 않은 녀석이 벌써부터 램버튼 백작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후작이 된다고 생각해 보면…….
‘이거 이대로 있다가는…….’
램버튼 백작가가 위험했다. 누님인 후작 부인이 있을 때는 몰라도, 그 버팀목이 사라지고 나면 테오르는 분명 램버튼 백작가를 없애 버리려 들 터였다.
“어쩌지?”
이럴 때 모건 남작이라면 분명 좋은 계획을 말했을 터였다. 램버튼 백작은 모건 남작의 빈자리가 더없이 아쉬웠다. 그때 그의 옆에 풀죽어 앉아 있는 애덤스란 자가 백작의 눈에 띄었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 아닌가?’
램버튼 백작이 에반스에게 물었다.
“그래서, 네놈은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램버튼 백작의 물음에 에반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 의견을 물으신 것입니까?”
“그래.”
“하지만 또 말하시면 역정을 내실 텐데…….”
“화내지 않을 테니 어서 말해 봐라.”
“정말이시죠?”
“그렇대도.”
발끈하는 램버튼 백작에게 에반스가 말했다.
“……제 생각에는 백작님께서 후작이 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뭐?”
램버튼 백작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이런 미친 놈,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이냐?”
램버튼 백작의 호통에 에반스가 말했다.
“왜 불가능합니까?”
“뭐라고? 이놈이 그래도……!”
“그게 싫으시면 다른 조카 분을 후작으로 만드시면 되시잖습니까?”
에반스의 말에 화를 내려던 램버튼 백작이 갑자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다, 다른 조카?”
“네. 후작 부인께서 낳은 자식이 테오르 님만 계신 건 아니잖습니까?”
“그렇지! 누님이 낳은 자식이 테오르만 있는 건 아니지. 맞아. 하하하하!”
갑자기 램버튼 백작이 웃었다.
“너 제법 쓸 만한 녀석이구나. 내일부터 칼이 아닌 나를 보좌해라.”
“네?”
에반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게 램버튼 백작은 중간에 애덤스를 칼 파의 아지트에 내려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저택으로 향했다.
엘렌은 자신이 만든 정보 조직에 첸들러 백작이 심어 둔 첩자가 있다는 것을 역이용하기로 했다.
“준비 됐니?”
엘렌의 물음에 루미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엘렌이 포크를 들고 루미나의 등 뒤로 돌아가서 그녀의 목에 포크를 겨눴다. 그때 주위로 카라스 영지의 정보 조직원들이 에워쌌다.
모든 연기 준비가 끝나자 정보 조직원들 맨 앞에 서 있던 에반스가 신호를 보냈고 엘렌이 바로 크게 소리쳤다.
“물러나! 안 그러면 이 아이는 죽는다.”
엘렌은 루미나를 인질로 삼아 라사드 영지의 정보 조직원들이 갇혀 있는 여관 방 쪽으로 이동했다.
“문 열어! 어서!”
엘렌의 협박에 에반스가 외쳤다.
“어서 열어줘!”
에반스의 명령에 카라스 영지의 정보 조직원들이 방문을 열자, 엘렌이 루미나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 갇혀 있던 라사드 영지의 정보 조직원들의 결박도 풀어 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자신에게 질문하는 정보 조직원에게 엘렌이 소리쳤다.
“시끄러! 보면 몰라? 어서 여길 빠져나가야 해.”
엘렌은 루미나를 인질로 잡고 라사드 영지의 정보 조직원들을 이끌고 여관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때 엘렌이 슬쩍 문턱에 걸려 비틀거리자 루미나가 그 틈을 이용해서 엘렌을 밀쳐 내고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젠장! 어서 뛰어!”
인질을 놓친 엘렌이 소리치자 그녀의 수하들이 일제히 달렸다. 그런 수하들을 따라 엘렌도 달렸다. 그때 여관에서 에반스와 그 수하들이 나왔다.
“저기 있다! 잡아라!”
에반스의 외침에 카라스 영지의 정보 조직원들이 엘렌과 그 수하들을 쫓았다. 물론, 애초부터 잡을 생각도 없는 추격이었다.
“헉헉헉!”
압실론 후작 성의 번화가 주위를 돌면서 엘렌과 그 수하들은 마침내 집요했던 카라스 영지 정보 조직원들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정보 조직원의 말에 엘렌이 대답했다.
“일단 첸들러 백작님께 연락하고 라코프 백작 성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 아무래도 우리 힘만으로는 중과부적이야.”
엘렌의 말이 맞았다. 엘렌과 라사드 영지의 정보 조직원들은 무력에서 카라스 영지 정보 조직원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백작님께 기사들이라도 지원해 달라고 하십시오.”
“맞습니다. 저희도 어느 정도 신병이 보장되야 안심하고 정보를 모을 것 아니겠습니까?”
정보 조직원들의 불만을 듣고 엘렌이 차분히 말했다.
“알았다. 내 백작님께 그 점도 상의해 보겠다.”
엘렌은 근처 마법 길드로 가서 라코프 백작 성으로 연락을 취했다. 그러자 총관이 왜 어제 연락이 되지 않았는지 추궁을 했다. 엘렌은 자신과 정보 조직원들이 에반스와 그 수하들에게 잡힌 것을 얘기했다.
그 진위를 의심하는 총관에게 엘렌은 정보 조직원들로 하여금 증언하게까지 했다. 그제야 총관도 엘렌의 말을 믿는 눈치였다. 엘렌은 바로 라코프 백작 성으로 가겠다고 말하고 마법 통신을 끝냈다.
그리고 바로 압실론 후작 성을 나서 라사드 영지의 라코프 백작 성으로 움직였다.
다음 날 오후, 엘렌과 라사드 영지의 정보 조직원들은 라코프 백작 성에 도착했다. 총관은 그들을 인솔해서 백작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런데 엘렌을 제외한 정보 조직원들이 모두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다.
“아니, 왜 이러십니까?”
“우리가 무슨 죄가 있다고 감옥으로 데려가는 겁니까?”
병사들에게 저항하는 정보 조직원들을 보고 총관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서 형식적인 취조가 있을 것이다. 묻는 대로 대답하고 나오면 되니 걱정할 것 없다.”
총관의 말에 그제야 정보 조직원들이 순순히 병사들과 함께 지하 감옥으로 들어갔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총관이 엘렌에게 말했다.
“엘렌은 나를 따라와라.”
엘렌은 바로 총관과 함께 첸들러 백작의 집무실로 움직였다. 집무실 안에 들어가자 첸들러 백작이 단단히 화난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첸들러 백작의 물음에 엘렌은 에반스에게 걸려 수하들과 잡힌 과정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에반스의 제자인 루미나를 인질로 삼아, 에반스와 그 수하들로부터 탈출하게 된 연유를 모두 이야기했다.
엘렌의 얘기를 모두 듣고 난 첸들러 백작이 엘렌을 똑바로 쏘아보며 말했다.
“수고했다. 당분간 쉬면서 영지 일이나 돌봐라.”
영지에서 비밀리에 진행 중인 징병된 병사들의 군사 훈련이 거의 끝나갈 시점이니 그 문제부터 해결하라는 그런 소리였다. 그때 엘렌이 말했다.
“저택이 누군가의 습격을 받았다면서요? 혹시 저의 어머니께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요?”
엘렌의 말에 첸들러 백작과 총관이 동시에 흠칫 놀랐다. 하지만 첸들러 백작이 능청맞게 말했다.
“네 어미는 무사하다. 괜한 걱정 말고 네 할 일이나 똑바로 해. 다시 한 번 이번 같은 일이 벌어지면 그땐 피터에게 바로 줘 버릴 테다.”
강경한 첸들러 백작의 발언에 엘렌이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어서 물러가서 일해.”
첸들러 백작의 호통에 엘렌은 고개를 숙인 채, 맥없이 돌아섰다. 그러나 이때 첸들러 백작도 총관도 보지 못했다. 엘렌의 입가에 조소가 어려 있는 것을 말이다. 엘렌이 집무실 밖으로 나가고 나자 첸들러 백작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총관에게 말했다.
“에반스, 그 자식이 시시콜콜 내 일에 끼어드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아. 무슨 좋은 수가 없겠나?”
“그거야 쉬운 일 아닙니까? 후작 부인에게 녀석의 위치를 알려 주는 거지요.”
“응? 뭐야, 왜 그런 기막힌 방법을 이제 얘기하는 거야? 이런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알려 버리는 건데.”
총관은 첸들러 백작으로부터 한참 동안 잔소리를 듣고 집무실을 나섰다. 그때 집무실 문이 열리며 첸들러 백작이 총관에게 외쳤다.
“기다려, 내가 직접 연락하겠다.”
“백작님께서 직접 말입니까?”
“그래, 그 얘기를 전하면 그 뻔뻔한 여자가 얼마나 놀랄지, 그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
첸들러 백작은 바로 라코프 백작 성의 통신실로 움직였다.
후작 부인은 요 며칠 기분이 이상했다.
꿈속에서도 매일 같이 압실론 후작이 나타나고, 동생인 램버튼 백작과 아들 테오르도 요즘 뭔가 이상했다.
후작 부인은 압실론 후작의 전속 치료사를 불러 후작의 상태가 어떤지 물었다.
“별로 좋지 않으십니다. 요즘은 하루에 한 번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영영 깨어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압실론 후작이 곧 죽을 거라는 얘기는 후작 부인에게 그리 나쁜 소식은 아니었다.
“후작이 죽기 전에 발악이라도 하는 건가?”
후작 부인은 압실론 후작이 계속 자신의 꿈에 나타나는 것을 그런 식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도저히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뭐지? 분명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데.”
무서운 것이 여자의 직감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 후작 부인은 곧 후작 성에 무슨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사람을 시켜 알아봐도 그 원인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그녀에게 긴급한 연락이 전해졌다.
“라코프 백작 성에서 부인께 급히 알릴 것이 있다고 합니다.”
“라코프 백작 성에서?”
후작 부인은 즉시 통신실로 향했다.
-오랜만입니다, 형수님.
첸들러 백작의 형수님이란 말에 후작 부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놈, 테오르가 후작이 되면 네놈부터 없애 주마.’
후작 부인은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정작 표정은 웃는 얼굴로 첸들러 백작에게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첸들러 백작님. 그런데 내게 급히 알릴 것이란 게 뭐죠?”
-하하하. 여전히 성격 하나는 급하시군요. 뭐, 저야 모른 척 해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형수님이 아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지요.
실실거리는 첸들러 백작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후작 부인이 통신구에서 물러나며 말했다.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그만 끊지요.”
후작 부인이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으려 하자, 첸들러 백작이 다급히 외쳤다.
-끊으시면 후회하실 겁니다. 에반스의 이야기니까요.
에반스란 말에 후작 부인이 깜짝 놀라며 통신구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외쳤다.
“에반스가 뭘 어쨌다는 거죠?”
첸들러 백작은 놀라는 후작 부인의 모습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 녀석이 글쎄 후작 성에 있다지 뭡니까?
“뭐, 뭐라고요? 그게 사실인가요?”
-그렇소. 그 녀석을 직접 봤다는…….
후작 부인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마법 통신을 끊어 버렸다. 그 사실이야 후작 성을 이 잡듯 뒤져 보면 알 일이었다. 후작 부인이 살기 어린 얼굴로 소리쳤다.
“쥐새끼 같은 놈! 여기가 어디라고……!”
후작 부인은 자신의 느낀 불안감의 원인을 마침내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후작의 전처소생, 에반스였던 것이다. 후작 부인은 즉시 후작가의 전 기사들을 소집시켰다. 그리고 제 2기사단장인 루버첸에게 소리쳤다.
“에반스, 그놈이 여기에 있어요. 당장 놈을 찾아요! 그리고 내 앞에 끌고 와요! 내 말 알아들었나요?”
“네, 부인!”
루버첸은 자신의 휘하 제 2기사단의 기사 전원을 이끌고 즉각 에반스를 잡으러 나섰다.
(강철영주 4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