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방에 들어간 에반스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풀어 침대 위에 던졌다. 그리고 뒤따라 들어온 루미나와 엘렌에게 테이블 옆 의자에 앉으라고 했다. 에반스는 루미나와 엘렌이 의자에 앉는 것을 지켜보다가 자신도 그 맞은편 침대에 앉았다.
“이름이?”
에반스의 물음에 엘렌이 바로 대답했다.
“엘렌이에요.”
“반갑소. 나는 에반스고 저 아인…….”
“알아요. 루미나잖아요.”
엘렌과 루미나는 에반스보다 먼저 만났으니, 서로 이름을 묻는 인사 정도는 했을 터였다. 고개를 끄덕인 에반스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때 일의 답례로 한 가지 부탁을 하고자 하는데 들어주시겠소?”
“네.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거라면요.”
그렇게 말하면서 엘렌은 침대 위에 올려져 있는 에반스의 검을 살폈다. 그러나 에반스의 검은 어딜 보나 평범한 검이었다. 엘렌은 눈치껏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어디에도 드워프의 검처럼 보이는 물건은 없었다.
그때였다.
똑똑!
에반스의 방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에반스가 외쳤다.
“들어와.”
덜컹!
문이 열리고 칼의 수하들이 엘렌의 수하 정보 조직원들을 잡아끌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칼이 데려온 카라스 영지의 정보 조직원들은 성인 남자 두세 명은 가볍게 제압할 수 있는 실력을 갖췄다. 특히 언제든 암살까지 할 수 있도록 실전 능력을 갖춘 자들이었다.
그에 비해 라사드 영지의 정보 조직원들은 감시나 정보 수집 능력은 갖추고 있었지만 싸움에는 그리 능하지 못했다.
그러니 싸움은 해보나 마나였고, 카라스 영지의 정보 조직원에 의해 라사드 영지의 정보 조직원들이 모두 잡혀 끌려온 것이다.
자신의 수하들이 끌려오는 것을 본 엘렌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에반스가 카라스 영지의 정보 조직원들에게 말했다.
“다시 끌고 나가.”
“네.”
라사드 영지의 정보 조직원들이 다시 밖으로 끌려 나가자 엘렌이 굳은 얼굴로 에반스를 쏘아보며 말했다.
“내게 원하는 게 뭐죠?”
에반스는 대답 대신 루미나에게 말했다.
“루미나, 넌 네 방으로 가 있어라.”
뭐라고 말하려던 루미나는 에반스와 엘렌 사이의 공기가 심상치 않자 입술을 깨물고는 곧 일어나서 그 방을 나갔다. 루미나가 나가고 나자 에반스가 엘렌에게 말했다.
“답례로 앞으로의 대화에 진실만을 얘기해 주면 좋겠소.”
“…….”
엘렌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에반스만 노려보았다. 그런 엘렌을 향해 에반스가 말했다.
“당신에 대해서는 이미 다 알고 있소. 첸들러 백작에게 있기엔 아까운 인재더군.”
“고맙군요. 하지만 그건 당신에게 들을 칭찬은 아닌 것 같네요.”
쌀쌀한 엘렌의 반응에도 에반스는 별로 개의치 않고 말했다.
“당신이 라사드 영지에서 한 개혁은 정말 대단했소. 하지만 그 개혁을 뒷받침해 줄 든든한 조력자가 있다면 개혁의 성과는 훨씬 더 컸을 것이오. 나는 당신에게 그런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줄 수 있소.”
에반스의 말에 엘렌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 저를 포섭하시겠다는 건가요?”
“포섭이 아니라 영지 개혁을 위한 나의 조력자가 되어 달라는 거요.”
에반스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엘렌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왜 제게 그런 제의를 하시는 거죠? 당신 같은 분이라면 주위에 인재도 많을 텐데요?”
“인재들은 많소. 하지만 개혁을 추진해 나갈 수 있는 깨어 있는 사고를 가진 인재는 그리 흔치 않지.”
“제가 그런 인재란 건가요?”
에반스의 말에 엘렌이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그렇소.”
이후 에반스는 엘렌과 허심탄회하게 개혁에 대해 얘기했다. 그 과정에서 엘렌은 그동안 에반스가 카라스 영지에서 벌여 왔던 개혁들에 대해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단해요. 그야말로 현실적인 개혁들이군요.”
“당신이 라사드 영지에서 한 개혁들도 영지에 필요한, 그야말로 시기적절한 개혁들이었소.”
두 사람은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대화를 나눴다.
“휴우, 그사이 날이 밝았군요.”
엘렌이 아쉬운 듯 말했다.
“그렇군. 정말 유익한 시간이었소.”
에반스도 아쉬워하며 엘렌에게 다시 한 번 청했다.
“나를 도와주지 않겠소?”
“…….”
하지만 엘렌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에반스가 보기에, 그녀도 자신과 함께 영지 개혁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뭔가가 엘렌의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에반스는 이런 식으로는 그녀를 설득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좋소. 하루의 시간을 주겠소. 그때까지 생각해 보시오. 단, 당신의 선택 여하에 따라 당신과 당신 수하들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오.”
그것은 에반스의 제의를 거절하면 그녀도, 그녀의 수하들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사실상 협박에 가까운 발언이었다.
“…….”
에반스의 말에 엘렌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엘렌 또한 에반스와 입장이 바뀌었더라도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이니, 에반스의 지금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에반스의 말에 전혀 서운해 하지 않았다.
에반스는 카라스 영지의 정보 조직원들을 불러서 엘렌을 그녀가 묵는 방에 가두고 감시하게 했다.
방에 혼자 남게 된 에반스는 곰곰이 생각했다.
‘고작 첸들러 백작의 아래에 있기엔 아깝다. 그녀를 포섭하면 분명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밤새 엘렌과 대화를 나누면서 에반스는 그녀를 반드시 얻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에반스가 루미나와 함께 아침 식사를 끝냈을 때, 마법 길드로부터 라일라가 찾는다는 소식이 왔다.
에반스는 즉시 마법 길드로 가서 카라스 영지의 로체스 자작 성에 마법 통신을 시도했다. 통신구의 불이 밝혀지며 바로 라일라의 모습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지?”
에반스의 물음에 라일라가 말했다.
-어제 말씀하신대로 첸들러 백작을 조사하다가 특이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그게 뭔가?”
-첸들러 백작에게 꽤 많은 자식들이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바로 엘렌입니다.
“뭐?”
라일라의 말이 사실이라면 엘렌은 에반스의 사촌이 되는 셈이었다.
-그런데 첸들러 백작은 자신의 아들인 피터와 엘렌을 결혼시키려 한다는 소문입니다.
라일라의 말에 에반스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배는 다르지만 남매가 아닌가? 그런데 무슨 결혼을…….”
-그 피터란 자가 완전 개망나니랍니다. 이미 정식 부인도 있고 첩도 몇 명이나 되는데, 또 엘렌을 첩으로 삼겠다고 난리인 모양입니다.
라일라의 말에 에반스는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라일라가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바로 그 시점에서 엘렌이 정보 조직을 만들고 라사드 영지 내 병력을 증강시키기 시작했더군요.
“엘렌이 피터의 첩이 되지 않으려고 첸들러 백작과 거래라도 했다는 말인가?”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여요.
라일라의 말을 듣고 보니 에반스는 엘렌이 처한 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그녀가 섣불리 에반스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아마 이런 문제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모자랐다. 피터가 그렇게 싫다면 도망치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때 라일라가 재차 말했다.
-또 엘렌의 모친이 첸들러 백작에게 붙잡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허어, 그럼 첸들러 백작이 엘렌의 모친을 인질로 붙잡아 두고 있단 건가?”
-정황으로 봐서는 그런 것 같습니다.
에반스는 엘렌이 처한 처지는 전혀 고려치 않고 밤새 그녀를 설득하며 괴롭힌 것이 못내 미안해졌다.
“진작 알았더라면…….”
에반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라일라에게 말했다.
“당장 엘렌의 모친을 구해서 그 신병부터 확보해. 그리고 피터, 그 자식에 대해서도 알아봐. 가능하면 엘렌에 대해 다시는 관심을 가지지 못하게 만드는 것도 좋겠지. 도움이 필요하면 영지 기사단장인 라르손의 도움을 받도록.”
-알겠어요. 바로 조치를 취할게요.
라일라와 마법 통신을 마친 에반스는 곧장 여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엘렌의 방으로 가서 그녀를 만났다.
“제게 하루의 생각할 시간을 준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엘렌이 힘없이 에반스에게 말했다. 그런 엘렌에게 에반스가 허리를 숙였다.
“미안하오. 내가 당신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 내 위주로 이야기했소.”
에반스의 사과에 엘렌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귀족들 중에 당신 같은 사고를 가지고 계신 분이 있다는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어제 밤은 더없이 좋은 시간들이었어요.”
그런 엘렌을 보고 에반스가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의 고민은 내가 모두 해결해 주겠소.”
에반스의 말에 엘렌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일단 당신의 어머님부터 구할 것이오. 그리고 당신에게 찝쩍대는 그 짐승 또한 더 이상 당신을 귀찮게 하지 못할 테니 걱정 마시오.”
“그, 그것을 어떻게?”
놀란 얼굴의 엘렌을 보고 에반스가 자신 있게 말했다.
“내가 있는 한, 앞으로 그 누구도 당신을 괴롭힐 수는 없을 것이오.”
에반스의 다소 격앙된 말을 듣고 엘렌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
에반스의 명령을 받은 라일라는 곧장 라코프 백작 성의 정보 조직에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카라스 영지의 기사단장인 라르손과 함께 라사드 영지로 움직였다.
카라스 영지의 정보 조직원들은 라코프 백작 성의 모처에 갇혀 있는 엘렌의 모친의 행방을 찾아냈고, 또 첸들러 백작의 후계자인 개망나니 피터에 대한 정보도 모두 조사해 라일라가 도착하자 즉시 보고했다.
“수고했다. 엘렌의 모친을 구하고 피터를 손보는 것은 바로 오늘 밤 시행할 것이다.”
에반스는 가능한 빨리 이번 일을 마무리하라고 했다. 그래서 카라스 영지에서 에반스를 제외하고는 가장 강한 기사단장 라르손까지 동원했다.
“내가 뭘 어떻게 도우면 되겠소?”
라르손의 물음에 엘렌이 한 장의 지도를 펼쳐 놓으며 말했다.
“엘렌의 모친도, 피터란 그 개망나니도 바로 여기 백작가의 저택에 있어요. 우린 오늘 이 저택으로 들어가야 해요.”
라코프 백작 성내에서 가장 경비가 삼엄한 곳은 두 말할 것 없이 첸들러 백작이 살고 있는 저택이었다.
“오늘 밤 첸들러 백작 내외는 저택을 나와 백작 부인의 친정으로 갈 거예요.”
“어떻게 그런 걸 알고 있소?”
“안 갈 수가 없을 걸요. 오늘 밤 백작 부인의 부친인 루웨인 백작이 갑자기 죽을 테니까요.”
“서, 설마?”
“걱정 마세요. 그건 거짓이니까. 아무튼 백작 내외가 저택을 나서게 되면 많은 수의 기사와 병사들도 그들을 따라가게 될 거에요. 그렇게 되면 저택의 경계는 느슨해 질 테고, 우리가 침투하기는 한결 수월해지겠지요.”
“하지만 피터도 백작 부부를 따라간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라르손의 물음에 라일라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거예요.”
“백작에게 장인이라면 피터에게는 외조부가 아니오? 당연히 따라가는 것이 정상일 텐데……,”
“정상일 경우는 그렇겠지요. 하지만 상대는 개망나니 피터에요. 자신의 여동생을 첩으로 삼겠다는 미친놈에게 그런 생각 따위가 있을 리 없어요.”
단언하는 라일라를 보고 라르손이 눈빛을 빛냈다.
“뭐, 들어 보니 어려운 일도 아닌데 우리 둘이서 해치우는 게 어떻겠소?”
“우리 둘이서요?”
“그렇소.”
“하긴, 사람이 많이 움직인다고 빨리 일을 해치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라르손의 말에 라일라도 괜찮은 생각 같다며 그렇게 하자고 했다. 라일라가 승낙하자 라르손이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지금 뭐하신 거죠?”
“아, 아니 별거 아닙니다. 하하하.”
라르손이 어색하게 웃으며 두 손을 등 뒤로 숨겼다.
라일라는 라르손이 그의 주군인 에반스만큼이나 괴짜라는 생각을 했다.
첸들러 백작은 다른 사람은 다 무시해도 그의 처가만큼은 무시하지 못했다.
그의 처가인 루웨인 백작가는 압실론 후작가의 가신들 중에서 최고로 명망 높은 가문이었다. 첸들러 백작이 라코프 백작 성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처가인 루웨인 백작가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날이 저물 무렵, 다급한 소식이 라코프 백작 성에 전해졌다. 루웨인 백작가의 가주이자 그의 장인인 루웨인 백작이 곧 죽을 것 같다는 소식이었다.
첸들러 백작은 서둘러 부인과 같이 루웨인 백작가로 움직였다.
첸들러 백작과 백작 부인을 따라 많은 수의 기사와 병사들이 저택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병력은 남아서 저택을 지켰다.
“저곳이군요?”
기사 복장의 라르손이 손짓으로 저택을 가리키자, 역시 기사 복장을 한 라일라가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저택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첸들러 백작의 저택은 로체스 성에 있는 에반스의 저택에 비해 현저히 컸다. 라일라는 별과 달의 위치를 살펴 대충 시간을 가늠했다.
“자정이네요. 지금 가죠.”
라일라는 라르손과 함께 저택의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검도 뽑지 않은 채, 둘은 산책을 하듯 여유롭게 걸어서 정문으로 접근했다. 당연히 경비병들은 이런 라일라와 라르손의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저 두 사람은 누구지?”
“그러게. 왼쪽에 있는 자는 완전 호리호리한데. 꼭 여자 같아.”
“어이, 말조심해. 복장으로 봐서 둘 다 기사인 것 같은데 듣기라고 하면 어쩌려고 그래?”
경비병들은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고 라일라와 라르손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들의 눈에는 라일라와 라르손이 첸들러 백작가의 기사들로 보였던 것이다.
경비병들은 기사들이 오면 차렷 자세로 대기하고 있다가 정중하게 용건을 물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라일라는 저택의 정문 좌우에 있는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문 옆쪽의 담 앞에 가서 섰다. 그리고 라르손을 돌아보며 말했다.
“좀 받쳐 줘요.”
“그러죠.”
라르손은 두 손을 깍지 끼고 허리와 무릎을 굽혔다.
“타앗!”
라일라가 그 손을 밟고 뛰어오르는 것과 동시에 라르손도 하체에 힘을 주고 힘껏 라일라를 위로 들어 올렸다.
휘익!
8미터나 되는 첸들러 백작 저택 담장을 넘은 라일라가 그 안쪽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앗! 뭐하는 짓이냐?”
경비병들은 그때까지 멍한 표정으로 기사들이 무엇을 하는가 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라일라가 담을 넘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기사들이 수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창을 겨누며 소리쳤다.
“하하하하!”
그것을 보고 라르손이 웃었다. 그러면서도 허리에서 검을 뽑아 들어 경비병들에게 달려들었다.
“헉!”
놀란 경비병들이 반사적으로 창을 찌르는 것을 슬쩍 피한 라르손은 건틀렛을 끼고 있는 주먹으로 경비병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퍽!
“커억!”
경비병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머리에서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이놈!”
그것을 본 다른 경비병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라르손의 옆구리에 창을 찔러 넣었다.
라르손이 슬쩍 허리를 비틀었다. 경비병의 창은 그대로 라르손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척!
그때 라르손이 병사의 창대를 한 손에 움켜쥐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 쪽으로 당기자 두 손으로 창을 잡고 있던 병사가 맥없이 그 앞으로 끌려왔다.
“히익!”
놀란 표정이 역력한 병사의 얼굴에 라르손의 피 묻은 건틀렛이 날아가 박혔다.
콰직! 털썩!
경비명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카르르릉.
라르손이 경비병 둘을 처리했을 때 안쪽에서 쇠사슬 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들어와요.”
문 안에서 라일라가 손짓을 했다. 라르손이 얼른 안으로 들어가니 경비견 4마리와 경비병 둘이 땅에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라일라가 담을 넘자마자 이들을 제압한 모양이었다.
“휘유, 대단한데요?”
라르손은 해맑게 웃으면서 라일라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어서 처리하고 안으로 들어가죠.”
저택의 현관을 가리키며 라일라가 말했다. 저택의 구조를 미리 숙지하고 있는 라일라의 행동엔 망설임이 없었다.
“누구냐?”
현관 앞 경비병이 라일라를 발견했지만 그때는 이미 라일라가 그들의 등 뒤로 돌아서고 있었다.
퍽! 퍽!
라일라가 수도로 경비병들의 뒷목을 쳤다. 현관문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마치 잠들듯이 스르르 옆으로 쓰러졌다.
“무슨 일이냐?”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기사가 튀어나왔다. 그러자 라르손이 그 정면을 가로막고 건틀렛을 낀 주먹으로 기사의 얼굴을 가격했다.
퍽!
기사의 몸이 한차례 움찔하더니 그대로 맥없이 주저앉았다. 기사의 코와 이마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쓰러져 정신을 잃은 기사를 뒤로 하고, 라일라와 라르손은 현관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정보 조직원의 말에 따르면, 엘렌의 모친은 4층에 있고 2층엔 피터의 방이 있다고 했다.
라르손이 저택 안으로 뛰어들면서 손가락 4개를 펴 보이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라일라도 2층으로 몸을 움직였다.
라일라가 2층에 막 올랐을 때 방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라일라는 한 손으로 그 남자의 머리채를 잡고 다른 손으로 문을 잡은 후, 강하게 문을 닫았다.
쾅!
닫히는 문 사이에 낀 남자는 충격에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라일라는 곧장 피터의 방으로 달려갔다.
콰앙.
방문을 거칠게 열자 안쪽에 피터와 두 명의 기사가 보였다.
“누구냐?”
두 명의 기사는 상당한 실력자인 듯, 라일라를 발견하자마자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앞으로 찔렀다.
슈슉!
라일라는 그대로 뛰어올라 천장에 거의 붙을 듯 날아 그 기사들의 검을 피했다. 그리고 라일라의 오른손에 들린 검이 기사들의 목 옆쪽을 훑고 지나갔다.
휘익, 파팟!
“크윽!”
피슈우!
두 기사가 목에서 피를 내뿜으며 비틀거리다가 쓰러져 죽었다. 다른 자들과 달리 실력이 월등한 기사들을 라일라가 제압하는 것은 힘들었다. 그래서 둘 다 제거해 버린 것이다.
척!
라일라가 검을 피터의 목에 갖다 댔다.
“네가 피터인가?”
“헉! 너, 넌 누구냐?”
놀란 피터를 보고 라일라가 잔인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통은 느낄 수 없을 거다.”
라일라가 피터의 머리를 잡고 강하게 벽으로 처박았다.
쿵!
“컥!”
그 충격에 피터는 바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라일라의 눈에 피터의 가랑이가 보였다.
“다시는 여자를 괴롭히지 못할 거다.”
라일라의 검이 번쩍였다. 그리고 피터의 아랫도리에서 피가 솟구쳤다.
4층으로 올라간 라르손은 병사든 기사든 눈에 띄는 대로 다 때려 눕혔다.
퍽!
휘익!
“허억!”
라르손의 주먹에 맞은 기사가 뒤로 날아가서 다른 기사들의 몸을 덮쳤다.
우당탕탕!
“으아아악!”
라르손은 쓰러진 기사들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정신을 잃고 쓰러질 때까지 주먹질을 했다.
퍽! 퍽! 퍽! 퍽!
기사들의 의식이 전부 날아간 것을 확인한 라르손은 여유 있게 엘렌의 모친이 갇혀 있다는 방으로 갔다.
퍽!
쿵!
라르손의 발길질 한 번에 잠겨 있던 문이 떨어져 나갔다.
방 안쪽에는 중년의 여인 한 명이 있었다. 라르손이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떨고 있는 중년 여인에게 물었다.
“혹시 따님의 이름이 엘렌입니까?”
“엘, 엘렌이요?”
“엘렌의 모친이 맞으시면 저를 따라가시지요. 따님을 만나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중년의 여인이 불안해 하면서도 라르손을 따라나섰다. 그때 아래층에서 라일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긴 끝났어요.”
그 말에 라르손도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여기도 구했습니다.”
“그럼 나가요.”
“네.”
라르손은 엘렌의 모친을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2층에서 라일라와 만나 1층으로 내려갔다.
“침입자다!”
각 층에서 기사들과 병사들이 1층으로 우르르 쏟아져 내려왔다. 하지만 그때 엘렌의 모친을 업은 라르손과 라일라는 빠르게 저택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저기 도망간다! 잡아라!”
저택이 온통 시끄러운 가운데, 의식을 잃었던 피터가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마치 오줌이라도 지린 듯, 아랫도리가 뭔가로 흥건했다.
피터는 상체를 일으켜 자신의 하체 쪽을 내려다보았다.
“뭐지? 허억!”
그리고 온통 피로 물든 자신의 바지를 보고 경악했다.
피터는 조심스럽게 바지를 벗었다.
그런데 마땅히 있어야 할 게 없었다.
“안 돼!”
피터가 절규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미 잘린 물건이 다시 붙지는 않았다.
“치, 치료사! 치료사를 불러!”
그 외침에 달려온 기사들과 병사들이 아랫도리가 잘린 피터를 보고 질겁했다. 허겁지겁 달려온 치료사가 와서 잘린 피터의 물건을 어떻게든 봉합하려 했지만 상처 부위가 감염됐는지 잘 붙지 않았다.
결국, 피터는 다시는 아랫도리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으아아아악!”
피터의 처절한 울부짖음을 뒤로하고, 라르손과 라일라는 빠르게 저택에서 멀어졌다.
***
에반스가 후작 성에 온 것은 순전히 부친인 압실론 후작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에반스는 며칠이나 후작 성에서 시간을 소비했다. 후작 저택의 경비가 워낙 삼엄해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들어갈 방법은 전무했다.
에반스는 저택에 심어 둔 첩자를 통해서 기사단장 프레드릭과의 연락을 시도했다. 이럴 때 저택 내부에서 누가 돕는다면 에반스가 저택에 들어갈 방법이 생길지도 몰랐다.
프레드릭은 압실론 후작이 쓰러져서 드러눕고 나서, 단 한시도 압실론 후작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누구도 프레드릭의 허락 없이는 압실론 후작을 만날 수 없었다.
압실론 후작은 하루에 두세 차례 온전한 정신이 돌아왔다.
“오늘도 그 아이에겐 소식이 없는가?”
오전에 한 차례 정신을 차린 압실론 후작은 저녁 무렵에야 다시 정신이 돌아왔다.
“네.”
프레드릭이 힘없이 대답했다.
“제레미언은?”
압실론 후작의 물음에 프레드릭이 고개를 내저었다.
“나 때문에 자네 아들이…….”
“그런 말씀 마십시오. 기사가 주군을 위해 죽는 것은 더없이 영광스런 일입니다. 제 아들 역시 후작님의 기사가 아닙니까? 단지 그 아이가 에반스 님께 후작님의 소식을 전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은 것이 아닐지, 그것이 걱정입니다.”
“후작가는 요즘 어떤가?”
“별일 없습니다.”
프레드릭은 압실론 후작이 걱정하지 않게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 게다가 프레드릭 역시 요즘 후작가의 상황은 잘 몰랐다. 한시도 압실론 후작의 곁을 떠나지 않은 프레드릭이다. 누가 그에게 후작가의 근황을 말해 주지 않는 한, 그도 알 길이 없었다.
제레미언의 일 이후 후작 부인은 치료사를 제외한 그 누구도 압실론 후작을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프레드릭은 치료사에게 간간이 바깥 근황을 물었지만 후작 부인이 도대체 무슨 협박을 했는지, 치료사는 후작의 치료가 끝나면 입도 뻥긋하지 않고 방을 후다닥 빠져나갔다. 그러니 프레드릭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디 불편하신 데는 없으십니까?”
“…….”
압실론 후작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프레드릭이 살피자 압실론 후작의 동공이 풀린 상태였다.
“휴우, 큰일이다. 이제 정상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채 10분도 되지 않으니…….”
이런 식이면 며칠 후면 압실론 후작은 영영 제 정신을 찾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 상태가 되면 에반스가 나타나도 압실론 후작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서 에반스 님께서 오셔야 하는데…….”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후작의 방을 뛰쳐나가 카라스 영지로 달려가고 싶은 프레드릭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후작을 지킬 사람이 없었다. 프레드릭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시녀 하나가 먹을 것을 가지고 나타났다. 그녀는 혀가 없이 태어나서 말하지 못하는 시녀였다. 때문에 프레드릭이 그 시녀에게 뭘 물어도 대답할 처지가 못 됐다.
시녀가 음식을 내려놓자, 프레드릭이 먼저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부터 살폈다. 프레드릭은 먼저 은수저로 음식을 감별한 후, 후작에게 먹일 음식을 자신이 먼저 조금 먹었다. 그리고 10여 분쯤 뒤, 음식에 아무런 이상이 없을 때 그 음식을 후작에게 먹였다.
평소처럼 음식을 감별한 프레드릭이 그 음식을 후작의 입에 조금 넣었을 때였다. 시녀가 갑자기 입속에서 뭔가를 꺼내 그것을 프레드릭에게 건넸다. 프레드릭은 시녀의 침이 잔뜩 묻은 그것을 받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건 기름종이?”
프레드릭이 기름종이를 벗겨 내자 그 안에는 작은 쪽지가 있었다. 쪽지는 돌돌 말아져 있었는데, 그것을 펴자 제법 긴 장문의 글이 기록되어 있었다. 쪽지를 적어 보낸 사람은 바로 에반스였다.
“아! 드디어…….”
프레드릭은 쪽지의 내용을 살폈다. 쪽지에는 먼저 제레미언이 무사하다고 적혀 있었다.
“오오! 신이시여……! 정말 감사합니다.”
제레미언이 살아 있다는 말에 프레드릭은 감격에 겨워 잠시 쪽지를 읽지 못했다. 다시 호흡을 고른 프레드릭은 쪽지에 적힌 나머지 내용을 보았다.
쪽지에는 며칠 전 에반스가 후작 성에 도착했지만 후작가의 경계가 워낙 삼엄해 저택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안에서 그 방도를 강구해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따로 전할 말이 있거든 쪽지에 적어서 기름종이에 싼 후, 시녀의 입에 넣어 주라고 되어 있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프레드릭이 쪽지에 뭔가를 열심히 적어 그것을 기름종이에 싼 후 시녀의 입속에 넣어 주었다.
시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음식을 들고 밖으로 나가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에서 그녀를 기다리던 카라스 영지의 첩자는 그녀의 입에서 기름종이에 싼 쪽지를 챙겨 호주머니에 넣었다.
첩자는 시녀를 포섭하기 위해 꽤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노력의 결과, 시녀는 그에게 마음을 열었고 이런식으로 쪽지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수고했어.”
카라스 영지의 첩자는 인자한 얼굴로 시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음 날, 그 쪽지는 에반스의 손에 쥐어졌다. 쪽지를 보고 에반스가 낮게 중얼거렸다.
“좋아.”
쪽지에는 후작 저택 내부로 들어가는 비밀 통로가 어디에 있는지 적혀 있었다.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그 비밀 통로가 후작의 방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 비밀 통로의 시작은 바로 후작 성의 한 공동 우물이었다. 쪽지에는 정확히 자정에 그 우물로 뛰어 들라고 쓰여 있었다.
에반스는 날이 어두워지고 자정이 되자 그 공동 우물로 들어갔다.
우물은 그 깊이만 10미터가 넘었다. 그리고 그 아래 지하 수로는 얼마나 더 깊은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에반스는 쪽지에 적힌 대로 우물에 빠진 채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처음엔 밑으로 가라앉기만 하던 몸이 갑자기 물살에 밀려 어디론가 빠르게 흘러갔다. 그리고 얼마 후, 밝은 불빛이 보였다. 그 불빛을 보고 에반스는 수면 위로 올라갔다.
“푸하!”
에반스는 호흡을 고르며 일단 물 밖으로 나갔다.
“하아, 하아. 여기는…….”
에반스가 나온 곳은 작은 동굴 안이었다. 동굴 벽에 설치되어 있는 마법 등이 내부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동굴에 마법 등이 있다는 것은 누군가 인위적인 용도로 이곳을 사용했거나, 사용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동굴은 다 막혀 있었고 오직 하나의 길만 열려 있었다. 에반스는 선택할 것도 없이 그 길로 무작정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