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스 영지의 로체스 자작 성으로 돌아온 라일라는 루크로부터 에반스의 전언을 전해 들었다.
“라코프 백작 성의 엘렌이란 여자요?”
“응. 그 여자에 대해 조사하고 빨리 연락 달라셨다.”
“쳇, 시키는 것도 많아요.”
안드레이 공작의 제자에 이어서 이번에 웬 여자까지, 라일라는 자신을 정신없이 부려 먹는 에반스가 못 미더운지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이미 그 일을 알아보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비교적 카라스 영지가 가까운 라코프 백작 성에는 정보 조직망이 잘 갖춰져 있었다. 라일라는 즉각 엘렌이란 여자에 대해 조사시켰다. 그러자 반나절 만에 그녀에 대한 정보가 라일라의 손에 쥐어졌다.
“호오, 이 여자…….”
엘렌에 대한 정보를 살펴보던 라일라가 얼굴에 이채를 띠었다.
“모든 게 놀랍지만 우리처럼 정보 조직망을 갖고 있다는 점이 놀랍군. 물론 우리에 비한다면 새발에 피에 불과하지만.”
라일라는 로체스 자작 성의 통신 마법사를 통해 에반스와 연락이 가능한 마법 길드 사무실로 연락을 취했다.
“라일라가 급히 연락 바란다고 전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에반스는 언제든 통신이 가능하게 마법 길드 사무실에 자신이 묵고 있는 여관을 알려 준 터였다.
마법 길드 사무실에서 곧 그 소식을 에반스에게 알리면, 소식을 들은 에반스가 바로 라일라에게 연락을 할 것이다. 에반스가 연락을 해 오기 전에 라일라는 라코프 백작 성의 정보 조직에 연락을 취했다.
“라코프 백작 성의 병력이 일 만이 넘는다는 것이 좀 수상해. 라사드 영지의 병력 현황을 살펴. 그리고 첸들러 백작과 그 주변 인물들도 감시하고.”
-네, 알겠습니다.
라일라가 통신을 끝내고 막 로체스 자작 성의 통신실을 나서려 할 때 마법사 루크가 나타났다.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닌가?”
“왜요? 부러우세요? 그럼 영주님께 말해서 제 일 좀 나눠 드릴까요?”
라일라의 말에 루크가 재빨리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됐어, 됐어. 나도 충분히 바쁘다고.”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뭐, 별건 아니고…… 국경 지대에 간 일은 어떻게 됐나 해서.”
루크의 말에 라일라가 어리둥절해 하며 말했다.
“그 일을 왜 루크가 궁금해 해요?”
라일라의 물음에 루크가 약간 당혹해 하며 대답했다.
“아, 아니. 마법사와 연관된 일이라 궁금해서 그랬어. 딱히 몰라도 상관없어.”
루크는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 루크의 뒷모습을 보며 라일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내가 루크에게 찾는 사람이 마법사라고 얘기했던가?”
라일라가 생각에 잠겼을 때, 통신 마법사가 통신실을 나와 말했다.
“여기 계셨군요. 어서 와 보십시오.”
“영주님께 연락 왔어요?”
“아니요. 라사드 영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라일라가 통신실에 들어가자 정보 조직원의 얼굴이 통신구에 보였다.
“무슨 일이지?”
조금 전 라일라가 연락하고 나서 바로 온 연락이니 다급한 일일 터였다.
-말씀하신대로 라사드 영지의 병력 현황을 살폈는데 심상치 않습니다.
“심상치 않다니?”
-완전히 전시 체제에 들어간 모습입니다.
“뭐?”
-조용히 진행되고 있지만 징병을 통해서 병사들을 끌어모아 훈련을 시키고 있습니다. 벌써 꽤 많은 영지 남자들이 병사 훈련을 받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끄응,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아무튼 알았어. 계속 살피고 정확히 그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 봐. 그리고 첸들러 백작과 그 측근들을 더 철저히 감시하도록.”
-알겠습니다.
통신이 끝나고 나자 라일라가 얼굴을 찌푸렸다.
“영주님께서 알아보라고 하는 일은 왜 이리 하나같이 대형 사고로 번지는 거지?”
라일라는 고개를 내저으며 통신실 밖으로 나갔다.
***
압실론 후작가의 저택 내부.
후작의 전속 치료사가 막 압실론 후작을 치료하고 후작의 방을 나섰다.
그런데 그가 향하는 곳은 다른 아닌 후작 부인의 방이었다. 후작 부인의 방문 앞에는 후작가의 총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게. 부인께서 기다리고 계시네.”
총관은 즉시 치료사를 데리고 후작 부인의 방으로 들어갔다.
“치료사가 왔습니다.”
“후작 부인을 뵙습니다.”
치료사가 후작 부인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 치료사를 보고 후작 부인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어떤가?”
“하루에 두세 번 의식이 돌아오시는데 그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습니다.”
그러자 후작 부인의 뒤에 서 있던 젊은 귀족 남자가 말했다.
“얼마나 더 살 것 같나?”
“글쎄요, 그건 저도 잘…….”
“치료사로서의 의견을 묻고 있는 것이다.”
“……저의 소견으로는 한 달은 넘기기 힘드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치료사가 조심스럽게 얘기하가 후작 부인이 바로 명했다.
“됐다. 그만 물러가라.”
총관이 치료사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자 젊은 귀족 남자가 후작 부인에게 말했다.
“어머니. 이대로 한 달이나 기다리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젊은 귀족 남자의 말에 후작 부인이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쉿! 말조심하거라.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누가 듣기는요. 아니, 들으면 또 어떻습니까? 이 저택의 주인은 저희들인데요.”
“테오르……. 너무 조급하게 굴지 말거라. 누가 뭐래도 압실론 후작가의 주인은 너이니 말이다.”
젊은 귀족의 정체는 바로 후작 부인이 낳은 첫째 아들, 테오르였다. 하지만 테오르는 귀족 명부에 압실론 후작가의 장남이 아닌 둘째로 기록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그렇다 쳐도 에반스, 그놈은 왜 없애지 못하는 겁니까?”
테오르의 말에 후작 부인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이 어미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다 해 보았다. 하지만 녀석의 생명줄이 이토록 질기니…….”
테오르는 화가 났지만 더 이상 화를 낼 수 없었다. 테오르 역시 후작 부인 몰래 수십 차례 에반스를 제거하려고 별의별 시도를 다했다.
하지만 결국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니 그도 답답한 후작 부인의 심정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테오르에게 후작 부인이 말했다.
“이제 어쩔 수 없다. 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네가 후작이 되어서 녀석을 카라스 영지에서 내쫓는 수밖에. 녀석도 발붙이고 살 곳이 없어지면 별 수 없을 거다.”
후작 부인의 말에 테오르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역시 그 방법 밖에 없겠어요.”
그때 방문이 열리고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를 보자 죽상을 하고 있던 테오르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오오……! 소피아.”
“여기 계셨군요. 어머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아가. 너는?”
“네. 저도 잘 잤어요. 그런데 당신은 아침부터 여긴 어쩐 일이세요?”
테오르는 아침에 소피아와 헤어질 때, 분명 정무로 바쁘다고 했었다. 그런데 후작 부인과 같이 있는 것이 소피아에게 들킨 것이다.
“아, 어머니와는 상의할 것이 좀 있어서……. 어머니 그럼 저는 이만…….”
테오르는 황급히 후작 부인의 방을 빠져나갔다.
그는 2년 전, 콘라드 후작가의 영애인 소피아와 결혼을 했다. 그 일로 테오르의 영향력은 더 커졌다. 사실상 압실론 후작가의 후계자로 자리를 굳힌 것이다.
후작 부인은 자신의 아들이 소피아에게 꼼짝도 못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압실론 후작을 꽉 틀어쥐었기에 지금의 그녀가 있을 수 있었다. 아들만 탓할 일이 아니었다.
테오르가 방문을 나서자 후작 부인이 인자한 얼굴로 소피아에게 말했다.
“소피아. 며칠 뒤면 램버튼 백작의 생일이란다.”
“어머, 그러세요?”
“그런데 테오르가 요즘 램버튼 백작과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있더구나?”
그 사실은 램버튼 백작과 테오르의 측근 인사들 밖에 몰랐다. 다들 쉬쉬하고 있었지만 후작 부인의 이목을 피하지는 못했다.
“그럴 리가요? 그이가 외삼촌을 얼마나 믿고 의지하는데요.”
“호호호! 그렇다니 정말 안심이구나. 하지만 오늘 너희 부부가 램버튼 백작가로 찾아가서 차라도 한잔 마시고 온다면 그런 소문은 나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떠니? 한번 다녀오지 않으련?”
후작 부인이 테오르에게 직접 말했다면 테오르는 단박에 거절했을 터였다. 그만큼 후작가의 후계자인 테오르와 램버튼 백작 사이는 좋지 않았다. 하지만 테오르를 꽉 쥐고 있는 소피아라면 달랐다.
다행히 소피아는 후작 부인의 말을 지금까지는 잘 따라 주었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고맙구나.”
후작 부인이 기뻐하며 소피아의 손을 잡았다. 자신의 동생인 램버튼 백작과 아들인 테오르가 사이가 좋지 않으면 그사이에서 가장 많이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역시 후작 부인 자신이었다.
그 둘이 다시 예전처럼 원만한 관계가 되는 것이 후작 부인이 바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권력 앞에서는 아버지와 아들도 등을 돌린다고 했다. 그 둘의 관계가 과연 개선될 수 있을지는, 후작 부인도 섣불리 자신할 수 없었다.
***
램버튼 백작가에서 보낸 마차는 생각보다 늦게 칼 파의 아지트에 도착했다.
칼은 수행원 한 명만을 대동하고 그 마차에 올랐다.
그의 수행원은 바로 에반스였다.
에반스는 염색으로 머리 색을 바꾸었다. 그리고 마법 길드에서 눈동자의 색까지 바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성장하면서 외모가 많이 변한 에반스였기 때문에, 유년 시절의 에반스를 아는 사람들이라도 한눈에 알아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차가 램버튼 백작가의 저택 입구에 도착하고 칼과 에반스가 마차에서 내리자, 총관인 모건 남작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따라와라.”
모건 남작이 앞장서고 그 뒤를 칼과 에반스가 뒤따랐다. 모건 남작은 그들을 램버튼 백작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집무실 앞에 도착하자 모건 남작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나와서는 집무실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기사들이 칼과 에반스의 몸을 수색해서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아무 이상이 없자, 기사들이 물러나고 모건 남작이 집무실 문을 열며 말했다.
“들어가게.”
칼과 에반스는 램버튼 백작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들어가고 나자 모건 남작이 따라 안으로 들어서며 집무실 문을 닫았다.
램버튼 백작의 집무실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넓었다. 화려한 것은 둘째 치고, 웬 집무실을 이렇게 크게 만들었는지 에반스는 이해가 안 됐다.
‘머리 크다고 공부 잘하는 것도 아니고, 집무실이 넓다고 일이 잘되는 건 아닐 텐데…….’
“이쪽으로.”
모건 남작이 다시 앞장서서 칼과 에반스를 집무실 안쪽으로 안내했다.
집무실의 한복판에 배치되어 있던 소파엔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칼도, 에반스도,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를 본 칼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부르르 몸을 떨자 뒤쪽에 있던 에반스가 슬쩍 그의 팔을 잡아 주었다. 에반스는 자신의 마나를 칼의 몸에 주입시켰다. 그러자 칼의 격한 감정이 점차 사그라졌다.
칼은 슬쩍 뒤쪽으로 고개를 돌려 에반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백작님, 그자가 왔습니다.”
“오오, 그래.”
램버튼 백작은 여전히 앉은 자세에서 고개를 들어 칼과 에반스를 쳐다보았다.
“어서 인사드리게. 램버튼 백작님이시네.”
모건 남작의 말에 칼과 에반스는 램버튼 백작에게 허리를 숙였다.
“하하하! 생각보다 훨씬 더 젊군. 이리 가까이 오라.”
램버튼 백작의 말에 모건 남작이 칼과 에반스를 가까이 데리고 갔다.
“고개 들고 있으려니 힘들군. 다들 앉지.”
모건 남작이 칼과 에반스를 소파에 앉게 하고 자신도 그 옆에 앉았다.
“얘기는 들었네. 하루 만에 붕괴된 꼴레오네 파를 재건했다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칼이 고개도 들지 않고 바닥만 보면서 대답했다. 마치 램버튼 백작을 두려워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램버튼 백작은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총관을 통해 말했다시피 그 조직을 내가 가져야겠어.”
램버튼 백작의 말에 칼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백작님께서 원하신다면 드려야지요.”
두말하지 않고 바로 대답하는 칼을 보며 램버튼 백작이 아주 흡족하게 웃으며 말했다.
“시원시원해서 좋군. 좋아, 앞으로 조직의 관리는 전적으로 너에게 맡기도록 하겠다.”
“맡겨 주신다니 최선을 다해 백작님께 충성하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그런데 옆의 친구는 누군가?”
램버튼 백작이 칼에게 옆에 있는 에반스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에반스가 대답했다.
“칼 님을 보좌하고 있는 애덤스라고 합니다.”
에반스가 적당이 이름을 지어내서 말하자 칼이 바로 말했다.
“저의 오른팔입니다.”
“오오, 그래. 나에게도 모건 남작이란 오른팔이 있지. 좋아, 칼을 도와 조직을 잘 이끌도록 해라. 그런데 인상이 참 좋군. 우리 어디서 본 적이 있었나?”
“처음 뵙습니다.”
에반스의 대답에 램버튼 백작도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식사는 했나?”
“아닙니다.”
“그럼 같이 식사나 하지.”
램버튼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 뒤를 따라 총관과 칼, 에반스가 순차적으로 일어났다.
램버튼 백작이 집무실을 나설 때 시종 하나가 뛰어와서 총관인 모건 남작에게 귓속말로 뭐라고 얘기했다. 그러자 총관이 램버튼 백작에게 가서 말했다.
“백작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오늘 저녁에 선약이 있었나?”
“아뇨,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온 손님입니다.”
“이 시간에 사전 약속도 없이 누가 찾아왔다는 건가?”
램버튼 백작이 불쾌함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
“그것이…… 테오르 도련님 내외라서.”
“뭐? 테오르가 왔다고?”
램버튼 백작의 얼굴이 더 험하게 일그러졌다.
최근 램버튼 백작은 테오르와 시시콜콜 부딪쳤다. 곧 있으면 후작이 될 테오르와 지금까지 후작 성에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램버튼 백작은 모든 면에서 서로 의견이 달랐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절충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의견은 극과 극을 달렸다. 그래서 테오르와 램버튼 백작은 만나면 서로 싸우기 바빴다.
그런 테오르가 램버튼 백작을 찾아왔으니 반가울 리 없었다. 하지만 테오르가 그의 아내와 같이 왔다는 말에 화를 삭이며 말했다.
“응접실로 안내하라고 해. 그리고 너희와의 식사는 다음으로 미루어야겠다.”
램버튼 백작이 칼과 에반스를 보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언제든지 불러 주시면 찾아오겠습니다.”
칼의 말에 램버튼 백작이 흡족해 하며 총관에게 말했다.
“이들은 총관이 직접 배웅해 주도록.”
“네.”
모건 남작은 시종에게 테오르 부부를 응접실로 안내하라고 하고 자신은 칼과 에반스를 데리고 저택의 현관 쪽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중간에 응접실로 가던 테오르 부부와 총관이 마주쳤다.
“모건 남작!”
“테오르 도련님!”
둘은 서로 반갑게 인사를 했다.
모건 남작은 후작이 될 것이 유력한 테오르에게 어릴 적부터 신경을 많이 썼다. 그 덕분이었을까? 테오르도 모건 남작을 좋게 보고 있었다.
“난 그대가 마중 나올 줄 알았는데?”
테오르가 서운하다는 듯 말하자 모건 남작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손님이 있어서요. 손님을 보내고 나서 제가 바로 가겠습니다.”
“그러게. 자네라도 있어야 나와 외삼촌이 싸우더라도 말릴 것 아닌가. 그런데 누군가?”
테오르가 모건 남작의 뒤에 서 있는 칼과 에반스를 보며 말했다. 칼과 에반스는 일단 테오르 앞에 머리를 숙였다.
“도련님께 소개할 만큼 중요한 자들은 아닙니다. 일 문제로 백작님께서 만난 자들입니다.”
“그래? 알았네.”
테오르는 그대로 모건 남작과 칼, 에반스의 곁을 스쳐 지났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테오르의 부인인 소피아도 무심결에 그들을 지나쳤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소피아가 갑자기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시오. 부인?”
테오르가 묻자 소피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니에요. 왠지 기분이 이상해서…….”
미소를 지은 소피아가 테오르에게 다가가서 그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전 괜찮으니 어서 가요.”
“정말 괜찮겠소?”
“네.”
테오르와 소피아가 다정하게 걸어갔다.
에반스는 램버튼 백작을 만나고 나오면서 테오르와 소피아를 만났다.
그들은 에반스를 알아보지 못했다. 옛날부터 에반스는 이복동생들에 대해 딱히 악감정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첫사랑이었던 소피아로 인해 에반스는 테오르 만큼은 싫어했다.
그런데 테오르가 소피아와 결혼해서 다정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에반스는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에 휩쓸렸다.
그때 칼이 에반스의 팔을 잡아 주었다. 정신을 차린 에반스는 칼을 따라 머리를 숙였다.
그렇게 테오르 부부와 스쳐 지나간 에반스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 마침 소피아도 멈춰 서서 뒤쪽을 쳐다보았다.
놀란 에반스는 급히 머리를 돌렸다. 다행히 소피아는 에반스가 뒤돌아본 것은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에반스는 코너를 돌면서 다시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걸어가는 테오르와 소피아를 보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자, 다음에 보지.”
현관을 지나자 저택 밖에 칼과 에반스를 타고 온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칼과 에반스는 총관인 모건 남작에게 인사를 하고 곧장 마차에 올랐다.
“어디 안 좋으십니까?”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에반스를 본 칼이 걱정이 되는지 물어 왔다.
“아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서 말이야.”
“나올 때 본 그 귀족 부부 때문입니까?”
“그래.”
에반스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들이 누군지 물어 봐도 되겠습니까?”
“내 이복동생과, 내 첫사랑.”
에반스가 망설이지도 않고 바로 대답했다. 그러자 칼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그럼 그분이 에반스 님의 동생이신 테오르 님이란 말입니까?”
에반스의 이복동생 중에 결혼한 사람은 테오르 하나뿐이었다.
“맞아. 그 녀석이 테오르야.”
잠시 마차 안에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을 먼저 깬 것은 에반스였다.
“배고프군. 바로 식사나 하러 가지?”
“네. 그러시지요.”
칼이 마차 문을 열려 하자 에반스가 말렸다.
“지금은 내가 너의 수하라고.”
에반스가 마차 문을 열고 마부에게 번화가에서 마차를 세워 달라고 했다.
잠시 후 번화가에 접어든 마차는 음식점이 즐비한 거리에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칼과 에반스는 곧장 근처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사를 하면서 칼이 에반스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칼의 물음에 에반스가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오늘 너를 따라간 건 좋은 선택이었다.”
“네?”
“아까 테오르가 왔다고 했을 때 램버튼 백작의 표정을 봤나?”
“네. 뭐, 썩 반기는 눈치는 아니더군요.”
“그럼 테오르가 총관에게 했던 말도 기억나나?”
“아! 그러고 보니…….”
테오르도 총관에게 램버튼 백작과 싸울지 모르니 꼭 자신이 백작을 만날 때 그 자리에 있으라고 했었다.
그 두 가지로 비추어 봤을 때, 램버튼 백작과 테오르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둘을 싸우게 만드실 생각이십니까?”
“음. 사이가 좋아도 서로 싸우게 만들어야 할 판에, 마침 사이가 좋지 않으니 싸우게 만드는 건 더 쉽겠지. 하지만 둘만 싸워서 해결 될 일은 아니야. 후작 성에 혼란을 일으키려면 그것으로는 모자라.”
후작 성에 도착한 에반스는 후작 저택에 심어 둔 첩자를 통해서 압실론 후작의 상태를 전해 들었다. 후작 저택 내에 감시가 워낙 철통같아서 에반스가 후작을 직접 만날 길이 요원했기 때문이다.
그 방도를 찾던 에반스는 칼과 같이 램버튼 백작을 만나러 갔고 그곳에서 테오르와 소피아를 만났다. 그리고 램버튼 백작과 테오르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테오르가 램버튼 백작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녀석이 후작 성의 일에 꽤나 깊게 관여하고 있다는 뜻이다. 테오르가 무슨 위치에 있는지, 그리고 테오르의 두 동생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 봐.”
“알겠습니다.”
에반스는 칼에게 지시를 내린 후, 루미나가 기다리는 여관으로 움직였다.
에반스가 여관에 도착하자 루미나가 툭 튀어나온 입으로 말했다.
“만날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는 거예요?”
“하하하! 저녁은 먹었나?”
“그럼 시간이 몇 신데 지금까지 식사를 안 해요.”
“미안, 요 며칠 좀 바빠서 그랬다. 여유가 생기면 후작 성을 구경시켜 주마.”
에반스의 말에 루미나가 폴짝 뛰며 말했다.
“정말이죠? 약속한 거예요.”
“그래. 약속한 거다.”
“참, 마법 길드에서 라일라가 찾는다고 스승님께 전하라던데요?”
“라일라가? 알았다. 넌 먼저 자라.”
“쳇, 또 혼자 어디를 가려고…….”
“너도 성인이 되면 혼자 마음껏 나다녀라.”
“안 그래도 그럴 거예요.”
루미나가 불만스런 얼굴로 여관방으로 들어가자 에반스는 바로 마법 길드로 향했다. 그리고 카라스 영지의 로체스 자작 성으로 마법 통신을 시도했다.
-영주님!
통신 마법사가 통신구에 나타난 에반스를 보고 바로 인사를 했다.
“라일라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얼마 뒤, 라일라가 통신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찾았다고?”
에반스의 물음에 라일라가 바로 대답했다.
-네. 안드레이 공작의 제자라는 그 마법사를 본 자가 있어 국경 지대로 가서 그자를 만나 보았는데…….
라일라는 실종된 마법사가 얼마 전, 파르미르 고원을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온 사실을 에반스에게 얘기했다.
“그럼 네 생각은 그 마법사가 파르미르 고원 너머에서 드워프의 검을 찾아냈을 거라는 건가?”
-제 판단으로는 그렇습니다. 어차피 자세한 것은 그곳에 가서 확인하지 않고는 알 수 없겠지만요.
“그 마법사를 찾진 못했지?”
-네.
“알았어. 일단 그 마법사는 계속 찾아. 파르미르 고원을 넘어가서 조사하는 건 잠시 뒤로 미뤄 두도록. 지금은 그보다 더 시급한 문제들이 있으니 말이야.”
에반스는 안드레이 공작과 그 제자의 일은 압실론 후작령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 돌보기로 결정했다. 물론 그사이 실종된 마법사는 계속 찾을 생각이었다.
-그럴게요. 그리고 라사드 영지 라코프 백작 성의 그 엘렌이란 여자 말인데요.
“그래. 알아낸 것이 있나?”
-조사해 보니 재미있는 여자더군요.
라일라는 중요한 부분만 간추려서 그동안 엘렌이 라코프 백작 성에서 무슨 일을 해 왔는지 에반스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듣고는 에반스도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더 흥미로운 건, 이 여자가 최근 정보 조직을 만들고 라사드 영지에 병력을 늘리고 있다는 점이에요.
“뭐?”
정보 조직을 만들고 병력을 키우는 것을 심심풀이로 할 리가 없었다. 에반스 역시 압실론 후작의 사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정보 조직망을 확대시키고 병력을 늘리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첸들러 백작이 잘 지원해 주지 않는지, 지금으로서는 저희에게 별로 위협적이지는 않아요. 우린 그 정보 조직을 파악했지만 그들은 아직 우리의 정체를 모르니 말이에요.
“병사는 얼마나 끌어모았지?”
-현재 알려진 것은 일 만인데 영지 곳곳에서 몰래 병사를 조련 중이라는 소식이에요. 정확한 수는 며칠 더 있어야 알 수 있어요.
이렇게 되면 첸들러 백작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일단 압실론 후작 성과 가까운 라사드 영지에 1만이나 되는 병력이 있다는 것 자체가 위협적인 것은 사실이었다.
“첸들러 백작에 대해서 낱낱이 조사해서 다시 보고해.”
-안 그래도 지시해 뒀어요. 그때 다시 말씀드릴게요.
통신을 끝내고 나서 에반스는 마법 길드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여관으로 돌아가면서 생각했다.
‘이렇게 되면 내가 생각해 둔 판세에 첸들러 백작도 집어넣어야겠군.’
에반스는 압실론 후작령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 구도 속에 첸들러 백작도 추가시켰다.
엘렌은 압실론 후작 성에 도착하고 나서 그 다음날이면 에반스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에반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자가 설마 후작가의 저택이라도 들어간 건가?”
하지만 후작 부인과 이복동생들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데 에반스를 순순히 후작 저택에 들여보냈을 리 없었다. 그때 정보 조직원이 기쁜 소식을 전해 왔다.
“찾았습니다.”
“그래?”
엘렌은 즉각 에반스를 찾아 나섰다.
에반스는 칼 파의 아지트에 들어갔다가 램버튼 백작이 보낸 마차에 오르고 있었다. 변장을 했지만 최근 에반스를 접한 엘렌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거리를 두고 마차의 뒤를 쫓았다. 한적한 길에서와 달리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소드 마스터인 에반스도 엘렌이 자신을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 에반스를 태운 마차가 램버튼 백작가의 저택으로 가는 것을 본 엘렌이 추격을 멈췄다.
“대체 저기는 뭐하러 들어간 거야?”
램버튼 백작은 후작 부인의 남동생으로 에반스에게 있어서는 적이다. 어째서 적의 소굴로 들어가는지, 엘렌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엘렌은 얼마 후, 에반스가 탄 마차가 다시 나오자 조용히 그 뒤를 쫓았다.
에반스는 번화가의 식당가에서 내려서 마차에 같이 타고 있던 자와 식사를 하러 들어갔다. 식사를 마친 에반스는 여관으로 갔고, 엘렌은 에반스와 루미나가 묵고 있는 여관의 위치를 알게 되었다.
“내가 다시 접근을 시도할게.”
엘렌은 정보 조직의 수하들은 두고 혼자서 에반스와 루미나가 있는 여관 쪽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그때 에반스가 밖으로 나왔다.
엘렌은 일단 모습을 숨기고 에반스를 뒤쫓았다.
에반스는 여관에서 멀지 않은 마법 길드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것을 본 엘렌은 루미나가 있는 여관으로 움직였다.
“차라리 잘됐어. 루미나부터 만나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알아보자.”
엘렌은 여관 주인에게 루미나와 가까운 방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우연을 가장해 방을 나온 루미나에게 먼저 아는 척을 했다.
“어머, 아가씨는?”
“어! 야영 때 그 언니네.”
바쁜 에반스가 상대해 주지 않아서 안 그래도 입이 근질근질했던 루미나는 엘렌을 만나자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엘렌은 주로 얘기를 들어주다가 가끔 자신에게 필요한 질문을 우회적으로 루미나에게 했다.
“나도 여기에 온지 이틀짼데, 그동안 아가씨는 본 적이 없어요. 어떻게 된 거죠?”
“휴우, 어떻게 되긴요. 그동안 여관방에 푹 썩고 있었으니 그렇죠.”
“여관방에만 있었다는 거예요? 이곳 후작 성에 구경할 게 얼마나 많은데요.”
“그렇죠? 저도 구경을 다니고 싶은데 스승님께서 허락을 안 해 주셨어요.”
“스승님? 그럼 같이 다니던 그 젊은 남자분이 스승님이셨어요?”
“네. 뭐, 바쁜 거 빼면 괜찮은 스승님이죠.”
“그런데 그분은 어디 계시죠?”
“또 일이 있어서 나갔어요. 요 앞 마법 길드에 갔으니 곧 돌아올 거예요.”
루미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에반스가 여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스승님!”
루미나가 에반스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에반스는 고개를 들어 2층에 있던 루미나를 보았다. 그러다 그 옆에 엘렌이 같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위층 계단으로 움직였다.
계단을 오르던 에반스는 작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1층에 있던 칼의 수하가 에반스에게 다가왔다. 에반스가 그자에게 빠르게 말했다.
“근처에 수상쩍은 자들이 있을 거다. 다 잡아라.”
“네!”
칼의 수하는 짧게 대답하고 에반스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에반스는 그대로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스승님. 저번 야영지에서 만났던 그 언니에요.”
“저번에는 고마웠어요. 아침에 먼저 떠나셔서 신세를 갚지 못했는데 이렇게 만나네요. 아! 오늘 그 답례를 하고 싶은데, 어떠세요?”
“답례라……. 좋소. 따라오시오.”
에반스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루미나가 엘렌에게 손짓을 했다.
“어서 들어가요.”
엘렌은 웃으며 루미나와 같이 에반스의 방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