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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야심가 첸들러 백작 (25/90)

Chapter 5   야심가 첸들러 백작

에반스는 드워프 검의 기능을 언제든 사용할 수 있게 주문을 외웠다.

“스승님, 며칠 전부터 뭘 그렇게 구시렁거려요?”

“뭐?”

“전 스승님께서 혼자 떠드는 취미가 있으신 줄 몰랐어요.”

루미나의 입이 제법 튀어나와 있었다. 드워프의 검에 깃든 마법 주문을 외우느라 말을 타고 가면서 말상대를 안 해줬으니, 아주 단단히 삐친 모양이었다. 그런 루미나를 보고 에반스가 피식 웃었다.

“저번에 익혔던 검술에서 말이야. 연결 동작이 잘 안 된다고 했었지?”

“네!”

검술 얘기만 나오면 눈빛이 초롱초롱해지는 루미나였다. 에반스는 말 위에서 검을 뽑아 루미나가 어렵다고 한 검술 동작을 천천히 펼쳐 보였다.

“휴우, 전 멍청한가 봐요. 스승님의 시범 동작을 보고도 바로 이해하지 못하겠으니 말이에요.”

실망한 표정의 루미나를 보고 에반스가 말했다.

“나도 수천, 수만 번의 검을 휘둘러 보고 깨우친 검술이다. 한 번 보고 깨우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넌 나 같은 훌륭한 스승이 있으니 고마운 줄 알아.”

에반스는 루미나가 이해할 때까지 천천히 검술 동작을 반복했다. 그렇게 십여 차례 반복하자 루미나도 그제야 알겠다고 했다. 그 뒤 루미나는 말 위에서 검술을 펼치느라 바빴고 에반스는 여유 있게 마법 주문을 외웠다.

에반스가 마법 주문을 거꾸로도 외울 정도로 드워프 검의 기능에 익숙해질 무렵, 라사드 영지의 중심인 라코프 백작 성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라코프 백작 성은 북쪽에 있는 로체스 자작 성에 비해 성곽의 높이는 높지 않았으나 그 크기는 더 컸다.

북방의 로체스 자작 성이 완전히 군사적 성향이 두드러지게 성곽이 높고 견고하게 지어졌다면, 라코프 백작 성은 군사적인 기능에 화려함까지 더해진 큰 규모의 성이었다.

“우와! 저 성 좀 봐요. 로체스 자작 성보다 더 큰 것 같아요.”

루미나의 말에 에반스가 웃으며 말했다.

“저곳은 라코프 백작 성이니 말이다. 로체스 자작보다 작위가 더 높으니 당연하지.”

에반스의 계획은 라코프 백작 성을 통과해서 바로 압실론 후작 성으로 가는 것이었다. 날이 저물어도 가는 만큼 가서 야영을 하고 아침 일찍 움직이면, 아마도 내일 해가 질 무렵 압실론 후작 성에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에반스는 루미나와 같이 라코프 백작 성으로 들어갔다. 시간은 늦은 오후였지만 아직은 해가 많이 남아 있었다. 에반스는 서둘러 라코프 백작 성의 후문 쪽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푸륵, 푸르륵!”

잔뜩 화가 난 듯 보이는 한 마리 거구의 말이 백작 성의 번화가를 빠르게 질주했다.

다그닥, 다그닥.

말을 탄 사람들이 그 뒤를 쫓고 있었다.

두두두두!

그런데 하필 그때 한 아이가 공을 떨어트려서 그것을 주우러 길 한복판으로 걸어 나왔다. 서둘러 말에서 내린 에반스가 번개처럼 뛰어나갔다.

“아악!”

아이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말이 아이를 덮쳤다.

퍼억!

“히이이이이잉!”

사람들의 시선이 허공으로 향했다.

거대한 말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충돌 지점에선 아이를 안은 에반스가 어깨를 앞으로 내밀고 날아가는 말을 쳐다보고 있었다.

말이 아이를 덮칠 때 곧장 뛰어든 에반스가 자신의 몸으로 말의 몸통을 들이받은 것이다.

인간 대 말이 부딪치면 당연히 인간이 튕겨 나가야 정상이지만, 에반스는 소드 마스터다. 아무리 거대하다고 해도 말인 이상, 역으로 튕겨나가 맞은편 담벼락에 처박히는 건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었다.

말은 덩치만큼 튼튼한 녀석인지 넘어지자마자 바로 몸을 일으켰다.

“푸드드드득!”

거칠게 투레질하는 말을 잠시 바라본 에반스가 아이를 내려놨다. 그 뒤쪽으로 말을 쫓던 사람들이 뒤늦게 도착하고 있었다.

“루니!”

아이 엄마가 뛰어나와 아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아이가 다친 곳이 없는지 살폈다.

아이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에반스가 곧바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였다.

“거기 서라!”

말을 쫓아온 사람 중 한 명이 소리쳤다. 그 소리에 에반스가 뒤로 돌자 갑자기 주위 사람들이 모두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영주님이시다. 당장 무릎을 꿇지 못할까?”

말에 타고 있던 사람 중 하나가 에반스를 향해 호통을 쳤다. 그러자 에반스의 걸음을 멈춰 세운 중년의 귀족 남자가 말했다.

“됐다. 저자는 내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이니까.”

“네?”

말을 타고 있던 사람들이 그게 무슨 소리냐며 중년의 귀족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중년의 귀족 남자가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에반스. 오랜 만이로구나.”

중년의 귀족 남자는 말을 끝내자 바로 말에서 내렸다. 그런 그를 본 에반스도 그에게 볼일이라도 있다는 듯 그를 향해 마주 걸어갔다.

“멈춰라.”

호위 기사들이 황급히 에반스의 앞을 가로 막았다. 그러자 중년 귀족 남자가 버럭 화를 냈다.

“이놈들! 비켜라. 너희들이 막아설 상대가 아니다.”

중년 남자의 말에 호위 기사들이 분분이 물러서자 에반스가 곧장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숙부님.”

“쯧, 카라스 영지에 뭐 재미있는 일이 있다고 처박혀서는……. 이 숙부를 찾아오지도 않고 말이야. 괘씸한 녀석.”

덥석!

중년 남자와 에반스가 서로 껴안았다.

중년 귀족의 정체는 바로 에반스의 숙부, 첸들러 백작이었다.

“가자. 조카가 찾아왔는데 이 숙부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말을 가져와라.”

첸들러 백작의 말에 에반스가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저 말을 타고 가겠습니다.”

에반스가 가리킨 말은 바로 아이를 칠 뻔했던, 그 미쳐 날뛰던 말이었다.

“저 말은…….”

말을 타고 있던 다른 사람들이 놀라 뭐라고 말을 하려 할 때 첸들러 백작이 손을 들어 그들이 말하는 것을 막았다.

“저 말이 마음에 드느냐?”

첸들러 백작의 말에 에반스가 말했다.

“네, 마음에 듭니다.”

“하하하! 그렇다면 이제부터 저 말은 네 말이다. 어서 타 보아라.”

첸들러 백작이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숙부님의 호의는 고맙게 받도록 하겠습니다.”

에반스는 바로 거구의 말에게 다가갔다. 에반스가 다가오자 말은 투레질을 하면서 연신 콧김을 내뿜었다. 하지만 에반스의 걸음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검붉은 몸의 거대한 말은 그 눈빛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에반스는 왠지 녀석에게 끌렸다. 녀석도 푸드득거리며 고개를 내젓고 있었지만 에반스를 피해 달아나지는 않았다.

녀석과 지근거리까지 간 에반스는 조심스럽게 한 손을 내밀어 녀석의 콧잔등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잔뜩 흥분해서 벌렁거리던 녀석의 코가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이미 첫 기 싸움에서 녀석은 에반스에게 졌다. 녀석도 에반스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만지는 것과 등에 올라타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말이 에반스를 태운다는 것은 곧 복종을 의미했다. 야생의 말이 인간에게 그리 쉽게 길들여질 리 없었다.

사실 에반스는 소드 마스터의 살기를 이용해 얼마든지 녀석을 꼼짝 못하게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녀석을 강제로 복종은 시킬 수 있을 지라도, 진심으로 그를 받아들이게 만들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다. 에반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와 친구가 되지 않으련?”

진심은 통한다고 했던가? 에반스의 온화한 눈빛에 녀석의 경계 어린 눈빛이 점차 풀렸다. 에반스가 재차 말했다.

“네 등에 올라 탈 수 있을까?”

“히히힝!”

녀석이 앞발을 번쩍 치켜들었다.

“저, 저, 저런……!”

주위 사람들이 놀라 소리쳤다. 그 가운데 첸들러 백작이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말이 날뛰었지만 에반스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 거구의 말도 에반스 바로 앞에서 앞발을 치켜들기만 할 뿐, 그 발로 에반스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녀석은 몇 차례나 더 앞발을 쳐들었지만 에반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말은 그때마다 에반스가 서 있던 땅 바로 옆을 앞발로 내려찍었다.

퍽! 퍽!

구경하던 사람 중 많은 사람들이 차마 에반스가 앞발에 채이는 것을 볼 수 없다며 눈길을 돌렸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런 가운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을 보고 서 있는 에반스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히이이잉!”

그때 거구의 말이 발광을 멈추고 야성의 눈빛으로 에반스를 노려보았다. 에반스도 침착하게 녀석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잠깐 시간이 지나자 말이 먼저 움직였다. 그리고 몸을 돌려 에반스가 자신의 등에 올라탈 수 있게 자세를 잡았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소리쳤다.

“와아아아!”

에반스는 말갈기를 잡고 가볍게 녀석의 등에 올라탔다.

그것을 보고 조금 전까지 미소를 짓고 있던 첸들러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에반스가 말을 몰아 다가오자 다시 사람 좋은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과연 압실론 후작가의 장남답구나. 역시 기개부터가 남달라.”

에반스는 첸들러 백작과 함께 백작의 저택으로 움직였다. 그때 군중 사이에서 말 두 필의 고삐를 잡고 있던 루미나와 에반스의 눈빛이 마주쳤다.

에반스가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에게 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루미나도 그 눈빛을 알아봤다. 그녀는 에반스가 여정 중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혹시 여행 중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넌 그곳의 가장 유명한 장소에서 나를 기다리면 된다.’

루미나가 말에서 내려서 옆에 있던 사람에게 물었다.

“이곳에서 제일 유명한 장소가 어딘지 아세요?”

루미나의 물음에 풍채 좋은 아저씨가 대답했다.

“우리 라코프 백작 성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는 당연히 중앙 광장이지. 그곳의 분수대에 동전을 던지고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뤄지기로 유명하니 말이야.”

루미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중앙 광장 쪽으로 움직였다.

첸들러 백작과 어쩔 수 없이 동행하고 있었지만 에반스는 저택까지 따라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랬다가는 만찬이니 뭐니 하면서 하루는 꼼짝없이 이곳에서 허비해야 할 테니 말이다.

첸들러 백작의 저택이 보이자, 에반스가 그 옆에 있던 숙부에게 말했다.

“숙부님, 초대는 고맙지만 저는 지금 급히 가야 할 곳이 있어서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에반스의 말에 첸들러 백작이 바로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게 무슨 말이냐? 얼마 만에 만났는데 차도 한잔 마시지 않고 떠나겠다는 거냐?”

“죄송합니다. 저도 숙부님과 좀 더 시간을 갖고 싶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말입니다.”

에반스가 정중히 말하자 첸들러 백작도 섭섭해 하던 표정을 풀고 말했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이 숙부를 위해서 한 시간 만이라도 시간을 내 줄 수 없겠니?”

첸들러 백작의 부탁에 에반스도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차 한 잔 마시고 가지요.”

“하하하! 그래, 고맙구나.”

화려한 저택으로 들어선 에반스는 곧장 첸들러 백작과 함께 응접실로 향했다. 백작은 총관에게 차를 내어 오라하고 에반스에게 자리를 권했다.

“급하게 가야 할 곳이 어딘지 물어도 되겠니?”

백작의 물음에 에반스가 잠시 백작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누가 봐도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는 첸들러 백작이었지만 에반스는 전생에서 정치라는 것을 하면서 저런 착한 얼굴을 하고 있는 자들이 뒤통수를 치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하지만 굳이 숙부인 첸들러 백작에게 거짓말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에반스의 판단이었다. 첸들러 백작 역시 후작 부인과 그녀의 자식들과는 그리 친하지 않다는 것을 정보 조직을 통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후작 성에 갑니다.”

“후작 성? 네 새어머니가 널 부르지는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형님이 부른 것이니?”

첸들러 백작도 에반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에반스가 압실론 후작이 직접 부르지 않으면 카라스 영지에서 결코 움직이지 않았을 거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네. 아버님께서 사람을 보내셨더군요.”

에반스는 그 얘기만 하고 자신에게 압실론 후작의 전언을 전한 제레미언에 대해서는 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렇구나. 형님께서 요즘 건강상태가 좋지 않다고 하시더니……. 으음, 혹시 후계자 문제로 널 부른 것이니?”

첸들러 백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에반스가 부담 없이 바로 대답했다.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빨리 오라고 하셔서 이렇게 서두르고 있습니다.”

“으음……. 알겠다. 그렇다는데 너를 더 붙잡고 있을 수는 없지.”

잠시 뒤 나온 차를 급히 마신 에반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라스 영지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들르겠습니다. 그때는 차 대신 술을 마시지요.”

에반스의 말에 첸들러 백작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래, 그렇게 하자꾸나.”

첸들러 백작은 에반스를 저택 입구까지 배웅을 했다. 그리고 에반스가 거구의 말에 오르는 것을 보고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하지만 에반스가 답례로 인사를 하고 말머리를 돌려 저택을 빠져나가자 첸들러 백작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때 그의 옆으로 젊은 여자가 다가왔다. 그녀는 바로 마법 길드 사무실에서 에반스에게 마법 스크롤을 판 여자 상담원이었다.

여자는 조용히 첸들러 백작의 옆에 섰다. 그러자 첸들러 백작이 옆을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입을 열었다.

“녀석은 지금 후작 성으로 가고 있다. 계속 뒤쫓아. 그리고 후작의 근황이 어떤지 정확히 알아 봤나?”

“네. 후작 저택에 침투 시켜 둔 고정 첩자로부터 방금 연락이 왔습니다.”

“뭐라고 하던가?”

“후작의 건강 상태가 많이 악화되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첸들러 백작이 처음 옆을 돌아보았다.

“그래? 역시 그랬군. 슬슬 준비를 할 때가 온 것인가?”

“후작이 죽고 나면 후작 부인은 분명 자신이 낳은 아들 중 하나를 압실론 후작으로 세우려 들 것입니다.”

“흐흐흐,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되지. 엘렌, 나는 너를 믿고 있다. 이번에 너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보아라. 만약 실망스런 결과를 보인다면 나는 너를 즉시 피터의 첩으로 줄 것이다.”

첸들러 백작의 말에 엘렌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런 엘렌을 보며 첸들러 백작이 비릿하게 웃으며 명령했다.

“그럼 어서 쫓아가 봐라.”

엘렌이 사라지고 나자 첸들러 백작은 곧장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아니, 뭐 그런 숙부가 다 있어?”

루미나는 중앙광장에서 에반스를 기다리며 분통을 터트리는 중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조금 전 상황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저 말은 야생마야. 저 녀석을 길들이려다가 벌써 3명이나 다쳤다고. 영주님도 이젠 안 되겠다며 죽이라고 했던 말을 왜 저 사람에게 준다는 건지 몰라.”

“그러게 말이야. 크게 다칠게 분명한데 말이야.”

첸들러 백작과 함께 말을 타고 온 사람들이 서로 나누는 대화였다.

루미나는 기가 막혔다. 그래서 그렇게 위험한 말을 에반스에게 내준 첸들러 백작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리고 주위의 걱정스러운 시선과는 다른, 희열에 찬 웃음을 그의 얼굴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에반스가 말을 길들이자 흉하게 일그러지는 표정도 확인할 수 있었다.

루미나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나 참, 스승님도 불쌍하다니까.”

“누가 불쌍하다는 거냐?”

“앗! 스승님!”

위에서 들려오는 말에 루미나가 반갑게 에반스의 이름을 불렀다. 에반스는 타고 있던 거구의 말에서 내려 루미나로부터 자신의 말을 건네받아 그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거구의 말을 이끌고 라코프 백작 성의 후문 쪽으로 움직였다.

루미나는 에반스에게 자신이 본 첸들러 백작에 대해 모두 이야기했다.

“무슨 숙부라는 사람이 그래요? 위험해서 없애려던 말을 조카에게 주다니 말이에요.”

씩씩대는 루미나를 보고 에반스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이렇게 무사하지 않느냐? 그럼 됐다.”

본인이 됐다고 하니 루미나도 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 에반스의 눈빛은 차갑게 변하고 있었다.

‘첸들러 백작…….’

에반스는 왠지 그가 자신의 앞길에 걸림돌이 될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라일라에게 첸들러 백작을 감시하라고 해야겠군.’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에반스는 정보 조직을 통해 조금이라도 위험 요소가 있다면 사전에 모두 조사해 둘 생각이었다.

예정보다 두 시간 정도 늦게 라코프 백작 성의 후문을 통과한 에반스와 루미나는 빠르게 말을 몰았다.

그러나 어느새 해가 지기 시작했고, 에반스와 루미나는 야영하기 좋은 공터를 발견하고 그곳에 말을 멈춰 세웠다.

“넌 이제 가 봐라.”

에반스는 야생마에게 채워진 재갈을 풀고 고삐를 벗긴 후, 야생으로 풀어 주었다.

히히히힝!

야생마는 에반스에게 고맙다는 듯, 앞발을 들어보이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왜 그냥 풀어 줬어요?”

어리둥절해 하며 묻는 루미나에게 에반스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녀석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자유일 테니까.”

“하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 잡힐지도 모르잖아요.”

“적어도 그때까지는 자유롭게 뛰어 다닐 수 있지 않겠느냐?”

에반스의 말에 루미나도 그 기분을 이해하겠다는 듯 말했다.

“뭐, 스승님 말이니까 스승님이 어떻게 하든 그건 스승님 자유죠.”

“녀석, 말장난은 그만하고 어서 야영 준비나 해.”

“이크, 알았어요.”

루미나는 서둘러 주위에 마른 나뭇가지들을 줍기 시작했다.

***

칼은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꼴레오네 파의 간부들을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꼴레오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그들은 서로가 꼴레오네 파의 총두목이 되겠다며 싸우고 있었다.

“칼. 네놈이 감히…….”

간부 중 하나가 칼을 쏘아보며 말했다.

“이 새끼 어디다 눈을 째려보는 거야.”

퍽!

중간 간부 중 하나가 사정없이 간부의 얼굴을 걷어찼다. 좀 과한 행동이었지만 칼은 그 중간 간부를 나무라지 않았다.

“조직이 어떻게 될지 모를 상황에서 누가 총두목이 될지 싸우고 있다니……. 정말 한심한 노릇이다.”

칼의 말에 무릎 꿇고 있던 간부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때 한 간부가 말했다.

“칼, 자네는 꼴레오네 총두목님이 가장 아끼던 수하였다. 총두목은 항상 아들인 마이크에게 꼴레오네 파를 넘길 생각이라고 하셨고. 그러니 그 분의 유지를 받든다면 당연히 마이크가 꼴레오네 파의 총두목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그 말에 주위 간부들이 웅성거렸다. 그때 칼이 간부의 얼굴을 걷어찼던 중간 간부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중간 간부가 나서서 외쳤다.

“조용히 못해? 이것들을 그냥……!”

퍽퍽!

중간 간부가 몇몇 간부에게 발길질을 해대자 주위가 곧 조용해졌다. 칼은 자신에게 꼴레오네의 아들인 마이크를 총두목으로 삼자고 말한 간부에게 다가갔다.

“워너, 당신 딸과 마이크가 결혼했다는 건 여기 있는 간부들도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마이크를 내세워서 조직을 장악할 심산인가?”

“그, 그건 오해다!”

두 손을 내밀며 강력하게 부정하는 간부에게서 등을 돌린 칼이 주위 조직원들에게 말했다.

“이제 꼴레오네 파는 없다. 조직은 나로 인해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칼의 말에 무릎 꿇고 있던 간부들의 얼굴이 절망적으로 변했다. 하지만 주위 중간 간부들과 조직원들은 모두 기뻐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잠시 후 조직원들이 간부들을 끌고 건물 지하로 내려갔다.

“칼! 제발 살려주게!”

“살려만 주면 뭐든 다 하겠네!”

간부들이 소리를 쳤지만 칼의 뇌리에서 그들은 이미 지워진 존재들이었다. 칼은 건물 밖으로 나와 데이지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데이지는 칼이 있으라고 한 곳에 등을 벽에 기댄 체 서 있었다.

칼이 나타나자 데이지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데이지의 물음에 칼이 바로 대답했다.

“칼. 이미 말했을 텐데?”

“당신도 꼴레오네 파였나요?”

데이지가 경멸 어린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칼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한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오.”

칼의 대답에 데이지가 화난 얼굴로 골목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런 데이지의 팔을 칼이 잡아챘다.

“이거 놔요!”

데이지가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팔을 잡은 칼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자 칼이 말했다.

“당신 오라비를 찾고 싶지 않소?”

그 말에 데이지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뒤돌아 칼을 보며 다급히 물었다.

“오라버니가 어디 있는지 알아요?”

“알아보라고 지시를 내렸소. 곧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요.”

칼의 말에 데이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칼 님!”

그때였다. 중간 간부 중 하나가 칼에게 뛰어왔다.

“무슨 일인가?”

“병사들이 철수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칼은 즉시 번화가 쪽으로 움직였다. 과연 번화가의 길목을 차단하고 있던 병사들이 길목을 막고 있던 방책을 치우고 물러나고 있었다. 그런데 병사들이 물러나고 나자 바로 자경대가 번화가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것을 보고 칼이 중간 간부에게 명령했다.

“조직원들에게 모두 피하라고 해. 절대 자경대와 부딪쳐서는 안 된다. 알겠나?”

“네.”

자경대는 술에 취해 폭도로 변한 술꾼들을 강경 진압했다. 그 가운데 많은 용병들과 취객들이 자경대에 잡혀갔다. 그러나 그들 중에 꼴레오네 파 조직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에반스와 루미나가 라코프 백작 성을 벗어나고 난 후, 해질 무렵에 베르턴 영지의 영주인 루글리 남작이 라코프 백작 성을 방문했다. 첸들러 백작은 총관을 보내 루글리 남작을 맞았고 그를 위해 저녁 만찬을 열어 주었다.

“하하하, 이렇게 환대해 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가까운 이웃인데 서로 자주 만나지도 못하고, 백작인 내가 자주 초대를 했어야 했는데 미안하게 되었소.”

첸들러 백작은 여전히 사람 좋은 얼굴로 루글리 남작을 상대했다. 그때 루글리 남작이 조용히 말했다.

“혹시 조카 분께서 여길 지나가지 않으셨습니까?”

“조카? 누구 말이요?”

첸들러 백작이 시치미를 떼며 말하자 루글리 남작이 그럴 줄 알았다며 얼굴을 붉히며 성토를 했다.

“실은 카라스 영지의 영주께서 며칠 전 저희 영지를 찾아왔었습니다.”

“카라스 영지의 영주라면 에반스를 말하는 모양이군요.”

“네. 그런데 그분이 저희 영지의 중죄인을 몰래 탈옥시켰지 뭡니까?”

“뭐라고요? 아니, 어찌 그런 짓을……. 다른 영지의 영주의 권한을 침범해선 안 된다고 영지법에서 명시하고 있거늘…….”

“하지만 카라스 영지의 영주는 제후이신 압실론 후작님의 장남이 아니십니까? 그런 분께 뭐라 말할 수도 없고…….”

그렇게 말하면서 루글리 남작이 슬쩍 첸들러 백작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첸들러 백작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영지법을 어겼으면 설사 제후라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법이지요. 당장 압실론 후작님을 찾아뵙고 이 일을 따져야겠군요.”

“아이고! 그래 주신다면야 저야 고맙지요.”

“그런데 그 아이가 왜 죄수를 탈옥시켰을까요?”

첸들러 백작이 궁금해 하며 묻자 루글리 남작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 얘기를 하려면 좀 긴데…….”

루글리 남작이 주위 눈치를 살피는 것을 본 첸들러 백작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찬이야 이만하면 됐고, 조용한 곳으로 가실까요?”

첸들러 백작의 말에 루글리 남작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만찬이 끝나고, 첸들러 백작과 루글리 남작은 만찬장의 옆방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그리고 두 시간 후, 루글리 남작이 먼저 그 방에서 나왔다. 루글리 남작은 곧장 첸들러 백작이 내어 준 귀빈실로 향했다.

첸들러 백작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총관을 급히 찾았다.

“루글리 남작의 말에 의하면 에반스가 드워프의 검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군.”

“드워프의 검이라니요?”

“드워프가 만든 검. 거기에 엘프의 마법 문양까지 새겨져 있다더군.”

“헉! 그렇다면 부르는 게 값이지 않습니까?”

“쯧쯧, 진작 가르쳐 주던지……. 녀석이 떠나고 난 뒤 나타나서는…….”

첸들러 백작은 루글리 남작을 욕하면서 에반스를 그냥 보낸 것에 대해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엘렌에게 소식이 오면 에반스가 드워프의 검을 가지고 있는지부터 알아봐.”

“네.”

총관이 집무실을 나가고 나자 첸들러 백작은 천천히 창가로 걸어갔다. 칠흑 같은 어둠에 창밖의 정경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잠시 멍하니 서서 밖을 바라봤다.

“엘렌, 그 아이가 남자로만 태어났어도 훨씬 더 유용하게 이용해 먹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엘렌은 첸들러 백작이 평민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그런데 첸들러 백작의 자식들 중 엘렌이 제일 영특했다.

첸들러 백작은 백작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 외에도 많은 자식들이 있었지만 첸들러 백작은 그들을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즉, 첸들러 백작에게는 아들 피터가 유일한 후계자인 셈이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보통 개망나니가 아니었다.

특히 고집이 어찌나 센지, 일단 한번 고집을 피우면 첸들러 백작과 백작 부인도 말리지 못했다.

게다가 녀석은 호색한으로도 유명했다. 올해 22살인 피터는 결혼도 했고 첩도 다섯 명이나 두었다. 그런데도 녀석은 하루가 멀다 하고 성 밖으로 나가서 사고를 쳤다. 매달 아이를 업고 찾아오는 평민 여자들로 첸들러 백작은 골머리가 다 아팠다.

그런데 하필 그녀석이 엘렌을 좋아했다. 하지만 이번만은 첸들러 백작도 양보하지 않았다. 녀석이 엘렌을 첩으로 삼겠다고 고집을 피우자 첸들러 백작은 피터를 아예 감옥에 가둬 버렸다.

엘렌은 이미 16살 때부터 첸들러 백작을 위해 일했다. 4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첸들러 백작은 엘렌의 의견을 들으며 영지를 개혁했다. 그러자 라사드 영지의 재정이 예전보다 2배나 늘어났다. 게다가 엘렌은 영지 치안은 물론, 군까지 개혁해서 영지 병력을 1만으로 늘려 놓았다.

압실론 후작 성 주위에 주둔한 후작 군의 규모가 2만인 점을 감안한다면, 단일 영지로서 라코프 백작 성은 가장 많은 병력을 가진 셈이었다.

첸들러 백작은 원래부터가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항상 자신이 압실론 후작령의 제후가 되었어야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는 결국 제후인 압실론 후작의 가신일 뿐이었다.

그런 첸들러 백작에게 다시 제후의 꿈을 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엘렌이 그의 야심에 불을 붙인 것이다.

첸들러 백작이 피터의 고집에 져서 결국 엘렌을 피터와 강제로 결혼시키려 하자, 엘렌이 첸들러 백작에게 말했다. 자신의 요구만 들어 준다면 압실론 후작령을 첸들러 백작이 차지하게 해 주겠다고.

“요구 사항이 뭐냐?”

첸들러 백작의 물음에 엘렌은 자신의 요구 사항을 밝혔다. 그녀로부터 그 요구 사항을 듣고 첸들러 백작이 웃으며 말했다.

“좋다. 하지만 실패하면 넌 피터의 첩이 되어야 한다.”

엘렌의 요구 사항은 간단했다.

피터의 첩이 되는 것은 취소하고 라사드 영지를 떠나 어머니와 같이 다른 영지에 가서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피터와 엘렌은 다 같은 첸들러 백작의 자식이었다. 첸들러 백작은 그 점을 강조하며 피터를 설득했지만, 개망나니 피터는 그런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첸들러 백작도 어떻게든 엘렌을 계속 그의 곁에 두고 이용해 먹을 심산이었다. 때문에 엘렌으로 인해 목적한 바를 이루더라도, 그는 엘렌을 놓아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물론 그 사실을 엘렌이 알 리 없었다.

엘렌은 첸들러 백작이 허락하자 바로 정보 조직을 만들었다. 압실론 후작령을 차지하기 위해서 그녀는 무엇보다 정보망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많은 자금과 인원이 들어가는 정보 조직을 꾸려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 첸들러 백작은 제대로 재정적인 지원도 해 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엘렌은 직접 정보 조직을 이끌며 자신도 조직원으로 활동했다.

마법 길드 사무실에서 사무원으로 위장해서 처음 에반스를 만난 엘렌은 부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사실 에반스와 엘렌은 사촌 지간이었다. 하지만 첸들러 백작은 피터가 아닌 다른 자식들은 그의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누구는 대영주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큰 영지의 영주가 되어 있는데, 누구는 변태 새끼의 첩이 되지 않으려고 이러고 있으니…….’

엘렌은 처량한 생각이 절로 들었다. 평민인 엄마로부터 자신이 누군지 알게 된 후 엘렌은 언제나 부친인 첸들러 백작을 만나려 했다. 그리고 그 꿈은 12살 때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처음 본 부친 첸들러 백작은 그녀를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상처를 입은 엘렌은 부친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 영특했던 그녀는 영지에 보탬이 되기 위해 행정에 관한 공부를 했고 16살로 성인이 되었을 때 그녀는 첸들러 백작을 찾아가서 자신이 영지를 위해 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그렇게 그녀는 부친인 첸들러 백작의 인정을 받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영지를 위해 일했다. 그렇게 4년 만에 그녀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 영지 재정이 2배로 늘어났다.

그런데 그 노력의 결과가 너무도 참담했다. 첸들러 백작이 그녀를 개망나니 피터의 첩으로 내주려 했던 것이다.

“어떻게 같은 남매끼리 그런 짓을…….”

엘렌의 말에 첸들러 백작이 싸늘하게 말했다.

“남매라니? 누가 누구와 남매란 말이냐?”

그 순간 엘렌은 결코 자신이 첸들러 백작으로부터 자식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엘렌은 오직 살기 위해서 첸들러 백작에게 압실론 후작령의 주인이 되게 해 주겠다고 말했다.

엘렌은 첸들러 백작이 얼마나 제후가 되고 싶어 하는지 잘 알았다. 해서 바로 그 점을 역이용해 첸들러 백작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그녀가 내세운 요구 사항을 들은 첸들러 백작은 너무도 쉽게 그것을 허락했다.

엘렌은 그런 첸들러 백작이 미덥지 않았지만 별수 없이 그를 제후로 만들기 위해 정보 조직을 만들고 조용히 영지군의 병력을 늘려 나갔다. 그러던 중 압실론 후작 성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누군가 후작 저택에서 나와 후작 성을 몰래 빠져나왔고, 그런 그를 또 누군가가 뒤쫓았다. 그런데 후작 저택을 나온 자가 카라스의 영주인 에반스와 만났다는 얘기를 듣고 엘렌은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녀가 직접 나섰던 것이다.

그렇게 에반스와 첫 만남을 가진 그녀는 다음 날, 첸들러 백작 저택에서 다시 에반스를 볼 수 있었다.

물론 에반스는 그녀를 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녀는 첸들러 백작의 명령으로 직접 에반스의 뒤를 쫓았다.

“저기에 야영하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정보 조직원이 엘렌에게 말했다.

엘렌은 자신이 정보 조직을 만들었지만 그들 중 첸들러 백작의 첩자가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첩자는 엘렌의 주위에서 그녀를 꾸준히 감시했다.

하지만 엘렌은 당장 첸들러 백작을 배신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의 어머니의 신변을 첸들러 백작이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녀가 배신이라도 하게 된다면, 그녀의 어머니는 첸들러 백작의 손에 죽음을 면키 어려웠다.

그러나 엘렌은 자유를 얻기 위해서라면 언제고 첸들러 백작과 싸울 각오를 하고 있었다.

“내가 가겠다.”

엘렌이 나서자 정보 조직원들이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너무 위험합니다.”

“저들은 내일이면 압실론 후작 성으로 들어갈 테고, 그렇게 되면 저들에게 더 이상 접근할 기회가 없어질지도 몰라.”

에반스는 압실론 후작 성에서 태어나서 성장했다. 그런 그라면 후작 성내에 그의 세력이 있을지도 몰랐다.

성으로 들어간 에반스가 그 세력과 조우하게 된다면 엘렌의 정보 조직이 에반스를 감시하는 게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

“…….”

그녀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기 때문에 정보 조직원들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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