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스가 마법 길드 사무실 밖으로 나가고 나서 얼마 후, 흰머리가 성성한 마법사가 나타났다.
“허허허, 이거 귀하신 분을 모셔 놓고 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별소릴 다하는군. 바쁜 것을 보니 오히려 보기 좋네.”
놀랍게도 에반스에게 마법 문양에 대해 설명했던 젊은 마법사가, 척 보기에도 자신의 아버지뻘 되어 보이는 노년의 마법사에게 반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노마법사는 그게 당연하다는 듯 오히려 허리를 굽실거리며 말했다.
“그렇게 얘기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은 없었습니까?”
“별일 없었네. 아! 조금 전 꽤 흥미로운 자가 왔었긴 하지. 자, 이제 주인도 왔고 나는 이만 가보겠네.”
젊은 마법사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노마법사가 물었다.
“수도로 돌아가실 겁니까?”
“그래야지.”
젊은 마법사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간단한 봇짐 하나만 챙겨 들고 마법 길드 사무실을 나섰다. 그런 젊은 마법사를 배웅하면서 노마법사가 존경 가득한 눈빛으로 그의 뒷모습을 보고는 훈훈하게 웃으며 말했다.
“허허허, 안드레이 공작께서 이런 촌구석에 무슨 일로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분과 보낸 십 일간은 내게는 결코 잊지 못할 소중한 기억이 될 것 같구나.”
노마법사는 베르턴 영지 마법 길드의 유일한 마법사, 3서클 마스터 클리베였다. 그리고 그가 말한 안드레이 공작은 트렌시아 제국의 전 재상으로 황궁 전속 마법사 중 한 명이었던 인물이었다.
“허어…… 백 살도 넘으셨는데 이십 대 청년의 모습을 하고 다니시다니. 역시 마도사란 건가!”
클리베는 부럽다는 시선으로 벌써 멀어진 안드레이 공작의 뒷모습을 한 번 보고서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길드 안으로 들어갔다.
안드레이 공작은 올해 정확히 102살의 마도사였다. 그는 트렌시아 제국의 몰락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서 천재 마법사로 불리며 50살의 나이에 5서클을 마스터해, 황궁 전속 마법사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리고 10년 뒤, 뛰어난 정치 감각을 인정받아 지금의 트렌시아 제국 황제인 레온 2세의 선 선황제가 되는 루이 2세의 총애를 받으며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20년간 트렌시아 제국의 재상으로 활약하던 그는 루이 2세가 죽고 레온 2세의 선황제, 레온 1세가 황제 위에 오르면서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후 마법에 전념하면서 10년 전, 그는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마도사의 경지에 올랐다.
마도사가 된 후 안드레이 공작은 매해 젊어졌다. 클리베도 그 소문을 들었지만 20대 초반으로 보일 정도로 젊어졌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10일 전 처음 안드레이 공작을 만났을 때, 자신을 정식으로 소개하는 소탈한 모습의 그를 보고 클리베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대뜸 클리베를 개구리로 만들었다.
클리베는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눈앞의 젊은 마법사가 정말 마도사 안드레이 공작임을 알게 되었다. 마법 길드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클리베는 사무실 문을 닫기 전 청소를 했다.
그때 에반스가 안드레이 공작에게 그려 보여 준 마법 문양이 그려진 종이가 그의 눈에 띄었다 .
“누가 이런 쓸데없는 낙서를 한 거야? 종이 아까운 줄 모르고 말이야.”
마법 문양을 보고도 클리베는 아무것도 모르는지 종이를 아무렇게나 구겨서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었다. 그리고 사무실을 밝히고 있던 마법 등잔의 불을 모두 끄고 나서 사무실 문을 잠갔다. 그때, 클리베 앞에 한 젊은 남자가 불쑥 나타났다.
“문을 닫는 겁니까?”
젊은 남자의 물음에 클리베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허허허, 시간이 늦었소. 마법 의뢰가 있다면 내일 아침에 다시 오시오.”
“의뢰는 아니고…… 혹시 이곳 마법 길드에 마법사가 두 명이 있습니까?”
젊은 남자의 물음에 클리베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허허허, 이런 작은 영지에 마법사가 두 명이나 있을 리 있겠소?”
“아, 네.”
젊은 남자는 클리베가 움직일 수 있게 그의 앞에서 비켜 주었다. 클리베는 웃는 낯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여 주고는 그를 지나쳐서 번화가 밖으로 나갔다.
남자는 멀어지는 클리베의 뒷모습을 말없이 눈으로 좇았다.
젊은 남자는 바로 에반스였다.
마법 길드에서 젊은 마법사를 통해 드워프의 검 검집에 새겨진 마법 문양에 대해 들은 에반스는 한동안 그 마법 문양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다가 정작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엘프의 마법 문양을 알 정도로 뛰어난 식견의 젊은 마법사였다. 그 정도 인물이면 이런 촌구석에서 마법 길드의 마법사나 하고 있기에는 아까운 인물이었다.
“우리 영지로 데려갈 수 있으면 좋을 텐…… 잠깐.”
에반스는 문득 그 젊은 마법사에게서 아무런 느낌도 받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5서클의 마법사인 루크에게서도 강렬한 마나의 느낌을 받았던 에반스다. 만약 젊은 마법사가 3서클의 마법사였다면 당연히 마법사 특유의 마나를 느꼈어야 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이것은 상대가 마법사가 아니거나, 자신과 비슷한 경지의 마법사란 얘기였다.
그리고 소드 마스터인 에반스와 비슷한 경지라는 말은 곧, 그가 마도사라는 뜻이었다.
“설마…… 그 젊은 마법사가 마도사란 말인가?”
에반스가 당시를 생각해 봤을 때 상대는 분명 마법사였다. 마도사에 비해 신체적인 기능이 더 발달한 소드 마스터는 기감도 조금 더 민감했다.
“맞군, 서로 힘이나 능력이 비슷했기에 아무런 느낌을 받지 않은 것이다.”
에반스는 젊은 마법사가 자신과 비등한 힘을 지닌 마도사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잠시 갈등하던 에반스는 그 젊은 마법사를 만나러 다시 마법 길드 사무실을 찾았다.
그런데 그곳에는 웬 다 늙은 마법사가 사무실 문을 닫고 있었다.
에반스가 물어 보니 마법 길드의 진짜 마법사는 노마법사인 것 같았다. 에반스는 젊은 마법사가 누군지 노마법사에게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인연이 있다면 또 만나겠지.”
멀어지는 노마법사에게서 등을 돌린 에반스는 그 길로 베르턴 영지의 영주관으로 움직였다. 시간이 자정을 훌쩍 넘은 시간이었는데 아직 베르턴 영지의 영주관은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에반스는 영주관으로 가는 길 건너 나무 뒤쪽에 숨어 귀를 쫑긋 세우고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경비병들의 말을 엿들었다.
“빌어먹을, 왜 안에서는 소식이 없는 거야.”
“그러게…… 벌써 출출해지는데 말이야.”
“크으으……! 두툼한 소시지에 맥주 한 잔이 간절하다.”
“어이, 저기 나온다.”
영주관 안에서 병사 하나가 밖으로 나왔다. 그 병사 주위로 영주관 바깥에서 경비를 서던 병사들이 모여들었다.
“이봐, 어떻게 됐어?”
“어쩌지? 영주가 잘 생각을 안 하는데?”
“뭐? 이런 젠장.”
“걱정 마. 조금 전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으니까 한 시간 뒤에 곯아떨어질 거야.”
“쳇, 한 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한다는 거야?”
“어쩌겠어. 힘없는 우리가 참아야지.”
‘한 시간이라.’
에반스는 한 시간을 기다렸다가 경비병들이 흩어지고 나면 영주관 안으로 들어갈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움직일지를 고심했다. 그때 그의 눈에 봇짐 하나를 손에 들고 영주관으로 다가가고 있는 젊은 마법사가 보였다.
에반스는 곧장 그 젊은 마법사 쪽으로 움직여서 그의 앞을 가로 막았다. 젊은 마법사가 멀뚱하니 에반스를 쳐다보았다.
“오오, 당신은…….”
젊은 마법사도 에반스를 알아보았다. 그때 젊은 마법사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영주관 쪽 경비병들이 에반스와 젊은 마법사가 서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그에 에반스는 젊은 마법사의 손을 덥석 잡고 영주관 반대쪽으로 걸었다.
“어어, 이거 왜 이러시오?”
젊은 마법사는 황당하다는 눈으로 에반스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잠시 후, 젊은 마법사가 놀란 눈으로 에반스를 보면서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누구냐?”
젊은 마법사, 즉, 안드레이 공작도 그제야 에반스가 소드 마스터라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이제 알았소?”
에반스가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에반스의 말에 안드레이 공작이 여전히 놀란 얼굴로 물었다.
“넌 이미 나를 알고 있었단 말로 들리는군.”
“그렇소. 처음엔 몰랐는데 잘 생각해 보니 당신이 마도사란 것을 알 수 있었소.”
“그럼 내가 누군지는 정확하게 모른단 말이로군?”
“내가 무슨 점쟁이도 아니고 당신이 누군지 어떻게 알겠소?”
“으음,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는데…… 아무튼 대단해. 그토록 젊은 나이에 소드 마스터라니…….”
안드레이 공작은 부럽다는 눈으로 에반스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에반스가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전 에반스라고 합니다. 압실론 후작가의 장남입니다.”
에반스의 말에 안드레이 공작이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나는 체스터라네. 내 이름을 말해 본 게 몇 십 년은 넘은 것 같군. 다들 나를 안드레이 공작이라 불렀으니 말이야.”
안드레이 공작이란 말에 에반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혹시 재상이셨던 안드레이 공작님이십니까?”
“하하하, 맞네. 재상이란 허울 좋은 자리에 있었지.”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에반스의 물음에 안드레이 공작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럴 만한 일이 있었네. 조용히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아무래도 무슨 비밀스러운 일로 이곳에 온 모양이었다. 불편한 얼굴의 안드레이 공작을 본 에반스는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묻지 않았다.
“영주관에 가시는 길이셨습니까?”
“그래. 막상 수도로 돌아가려고 했더니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더군. 이 시간에 돈 빌릴 곳도 없고 해서 이곳 영주를 찾아 가던 길이었네.”
아무래도 안드레이 공작이 영주관을 찾으면 영주관이 발칵 뒤집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에반스가 지하 감옥으로 들어가는 것도 그만큼 더 힘들어질 터였다.
에반스는 품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내서 그것을 안드레이 공작에게 건넸다.
“이 정도면 수도까지 가시는 여비로 충분할 겁니다.”
에반스의 돈주머니에는 30골드의 돈이 들어 있었다.
안드레이 공작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에반스를 쳐다보았다.
“왜 이 돈주머니를 내게 주는 건가?”
안드레이 공작의 물음에 에반스가 바로 대답했다.
“제게 마법 문양에 대해 알려 주시지 않았습니까?”
에반스의 말에 안드레이 공작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마법 문양에 대해서 입을 함구해 달란 말이군. 그리고 이 돈은 그 입막음 값이고?”
“맞습니다.”
“뭐, 그렇다면 받아도 상관없는 돈이군. 잘 쓰겠네.”
안드레이 공작은 에반스로부터 돈주머니를 받아 챙긴 뒤 돌아서서 번화가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중간에 발걸음을 멈추고 에반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름이 에반스라고 했던가? 머지않아 곧 다시 만나겠군. 그럼 그때 보세. 하하하!”
유쾌하게 웃은 안드레이 공작은 번화가 쪽 여관이 밀집되어 있는 곳으로 멀어져 갔다.
안드레이 공작과 헤어진 에반스는 다시 영주관 쪽으로 향했다. 그가 막 영주관 주변에 도착했을 때 경비병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한 채 번화가 쪽으로 오고 있었다.
“자, 어서 가서 목부터 축이자고.”
“새벽에 다시 가서 경비를 서야 하니 취하도록 마시면 안 돼.”
“알았네, 알았어. 하여간 그놈의 잔소리는…….”
이야기를 나누며 지나쳐가는 경비병들의 들뜬 뒷모습을 슬쩍 쳐다본 에반스가 다시 발걸음을 재촉해 영주관 앞에 섰다.
자정을 훨씬 넘긴 늦은 시간, 영주관 바깥에 서 있던 경비병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영주관 안에도 모든 불이 꺼진 상태였다.
에반스는 영주관 외곽에 처져 있던 울타리를 간단히 넘어 영주관 건물 쪽으로 소리 없이 뛰어갔다. 지하로 내려가는 길은 영주관 건물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출입구로 다가간 에반스는 굳게 닫힌 문틈으로 안쪽의 상황을 살폈다.
문 안쪽에는 보초를 서고 있는 경비병 두 명이 있었는데, 둘 다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자고 있었다. 출입문까지 잠그고 태평하게 잠을 청하는 모습이 꽤나 능숙해 보였다.
에반스는 조용히 검을 뽑았다. 그리고 문틈 사이로 검을 끼워 넣고 마나를 주입해서 출입문의 빗장을 조용히 잘라냈다.
소리 나지 않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에반스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내려갔다.
얼마간 내려가자 계단이 끝나고 철제문이 나타났다.
에반스는 가볍게 철제문을 두드렸다.
쿵쿵!
“헉! 누, 누구냐?”
철제문 안쪽에서 놀라 허둥대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아마 자다가 깨어난 모양이었다.
“나다. 문 열어.”
“나가 누구야?”
덜컥!
어눌하게 반문하는 목소리와 함께 철제문 중간의 작은 문이 열렸다. 그리고 뚫린 문을 통해 에반스의 모습을 확인한 경비병이 놀라서 막 소리를 지르려 할 때였다.
파직!
에반스의 손이 번개처럼 철제문을 뚫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철제문은 통짜 강철로 제작된 문이 아니었다. 사이에 두꺼운 나무를 두고 양쪽으로 철판을 덧댄 문이었는데, 에반스는 손끝에 오러를 집중시킴으로 간단하게 그 문을 뚫을 수 있었다.
문을 뚫고 들어간 에반스의 손이 철제문 안에 있던 경비병의 목을 움켜쥐었다.
“커억!”
목을 잡힌 경비병이 기겁을 하며 허리춤의 검을 뽑으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에반스가 빨랐다.
에반스는 철제문에 박힌 자신의 팔을 강하게 당겼다.
목이 잡혀 있던 경비병은 그대로 딸려오는 수밖에 없었다.
콰앙!
“끄윽!”
철제문에 얼굴을 처박은 경비병이 숨 막히는 소리를 내뱉으며 쌍코피와 함께 눈을 까뒤집었다.
털썩!
경비병이 쓰러지자 에반스가 철제문을 힘으로 뜯어냈다.
우두두둑! 쿵!
경비병이 철제문에 처박혔을 때의 소리와, 철제문이 뜯겨져 나가며 난 소리는 상당히 컸다. 하지만 지하에서 생긴 소음이 지상과 지하 아래까지는 들리지 않았는지 별다른 소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쓰러진 경비병을 옆으로 치운 에반스는 문 안쪽 정면의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갔다. 계단마다 석벽에 횃불이 하나씩 밝혀져 있었는데, 그 횃불을 10개나 보고 나서야 지하 석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벅저벅.
에반스는 큰 걸음으로 지하 통로를 걸었다. 온통 어두운 감방에도 밤은 있는지, 주위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그런데 에반스의 예상과 달리 지하 감옥은 그 규모가 제법 컸다. 감방을 하나하나 다 뒤지다가는 곧 날이 밝을 것 같았다.
‘아니, 굳이 전부 찾아볼 필요는 없겠지. 목적이 드워프의 검인 이상, 일반 죄수와 함께 가둬 놨을 리가 없다.’
에반스는 젝크의 부친이 아마도 감옥 내에서도 특별 대우를 받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슬며시 눈을 감은 에반스가 소드 마스터의 모든 기감을 개방하고는 감방 주위로 확장시켰다.
‘음?’
넓어지는 에반스의 기감에 한 가지 특이한 점이 포착 되었다. 다른 감방에는 죄수들이 한 명씩 갇혀 있는 반면, 유독 한 감방에만 두 명이 있었다. 둘 중 한 명은 감방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다른 방에 갇힌 죄수들은 움직임이 전혀 없는데 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고개를 주억거린 에반스가 곧장 그쪽으로 움직였다.
“크으!”
탁!
죄수와 같이 감방에 갇힌 신세가 된 간수는 술병을 내려놓고 마른 육포를 질겅질겅 씹었다.
“빌어먹을, 저 새끼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야.”
피 묻은 감방 석벽 아래, 쇠사슬에 묶인 죄수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저녁 식사 후, 치료사가 치료를 하면서 죄수에게 수면제를 좀 과하게 먹인 모양이었다. 그 이후로 죄수는 죽은 시체 마냥 늘어져서 자고 있었다.
“쳇, 잠도 안 오고 미치겠군.”
다른 간수들은 지금쯤 뜨끈한 침대에서 잠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죄수나 지키고 있어야 하니, 짜증이 안 날래야 안 날 수 없었다.
그나마 감방에 들어가기 전 동료 간수가 건네준 술 한 병과 짭짤한 육포라도 있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 짜증이 나서 미쳐 버렸을지 몰랐다.
그때였다.
저벅저벅.
누군가 통로를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지금 이 시간에 감방에 올 사람은 없다. 하지만 발걸음 소리는 점차 간수가 있는 감방 쪽으로 가까워졌다.
간수는 입이 바짝 마르고 점차 몸이 굳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가만히 있는 데도 숨이 가빠졌다. 웬일인지 발걸음 소리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심장이 죄어드는 것 같은 공포가 느껴졌다.
‘뭐, 뭐야?’
좁다란 지하 통로를 타고 소름끼치는 위압감이 밀려들었다.
꾸욱.
간수는 술병을 쥐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간수의 굵은 팔뚝에 힘줄이 불끈 솟아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발걸음 소리가 감방 바로 앞에서 멈췄다.
“웨, 웬 놈이냐?”
간수가 먼저 소리쳤다. 그러자 누군가가 감방의 철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생판 처음 보는 젊은 남자였다.
덜컹!
그때 석벽에 박혀 있던 감방 문이 바닥에 내려앉았다. 문짝이 통째로 뜯겨져 나간 것이다.
떨어진 문이 그대로 감방 안쪽으로 넘어졌다.
쿵!
저벅저벅.
넘어진 문을 밟고 남자가 감방 안으로 들어섰다. 간수가 괴성을 지르며 침입자에게 달려들었다.
“이야야앗!”
간수의 손에 들린 술병이 그대로 침입자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간수의 술병은 당초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침입자가 번개처럼 손을 뻗어 술병을 든 간수의 손목을 잡아챈 것이다.
“어어!”
간수는 그 자세로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침입자는 나머지 한 손으로 술병을 뺏어 들고 가볍게 깨트렸다. 그리고 깨진 술병 파편을 간수의 어깨에 그대로 박아 버렸다.
콰악!
“크아아악!”
어깨를 비집고 들어오는 이물감에 간수가 절규했다. 그런 간수의 머리채를 침입자가 움켜쥐었다.
“저 사람의 죄명이 뭔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간수는 순간 어깨의 고통도 잊고 바르르 몸을 떨면서 대답했다.
“저, 저도 모릅니다. 저는 단지 총관의 지시로 고문만 했을 뿐입니다.”
“총관?”
“네, 네. 이곳 총관인 쿠레일 준남작 님 말입니다.”
“그자가 오늘 무슨 말을 했지?”
“그 아들을 곧 잡을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럼 그 아들로 협박해서 자백을 받아 낼 거라 했습니다.”
간수의 말을 듣고 있던 침입자가 잡고 있던 간수의 손목을 놓았다. 손목이 자유를 되찾자 간수는 어깨에 박혀 있던 술병을 빼냈다. 하지만 자유도 잠시, 눈앞에 별이 번쩍 빛나는 것을 느끼며 간수는 그 자리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에반스는 젝크의 부친이 갇혀 있을 것으로 보이는 감방 문을 뜯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이 쓰러짐과 동시에 달려드는 간수를 간단히 제압했다.
소드 마스터인 에반스는 자신의 체내 마나로 상대의 신체 기능을 순간적으로 멈추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바로 검공 라마스가 검술서에 남긴 기술 중 하나였다.
간수를 통해 갇혀 있는 죄수가 젝크의 부친이라는 것을 확인한 에반스는, 간수의 손을 놓고 그의 펑퍼짐한 얼굴에 가볍게 주먹을 꽂아 넣었다.
퍽!
주먹 한 방에 정신을 잃은 간수가 제자리에 스르륵 허물어졌다. 그 모습을 흘끗 쳐다본 에반스는 감방 한쪽 석벽에 널브러져 있는 죄수에게 다가갔다.
“이봐요.”
에반스가 죄수를 흔들었지만 죄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죄수의 호흡과 맥박을 확인해보니 다행히 죽지는 않은 상태였다.
뿌드드득!
죄수의 몸에 채워진 쇠사슬을 간단히 뜯어낸 에반스가 죄수를 들쳐 메고 감방을 나섰다.
“나도, 나도 구해 주시오.”
감방에서 난 소음 때문에 깨어난 다른 감방의 죄수들이 에반스를 향해 살려 달라고 소리쳤다.
에반스는 죄수들의 외침을 묵인한 채, 그대로 지하 통로를 지나쳐서 계단을 통해 다시 지상으로 올라갔다.
지하 감옥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는데도 지상은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했다. 에반스는 죄수를 들쳐 맨 상태에서 소리 없이 조용히 영주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대로 자신이 묵고 있는 여관 쪽으로 움직였다.
에반스가 여관에 도착했을 때 루미나와 젝크는 잠든 상태였다. 에반스는 감옥에서 데려온 죄수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가 침대에 눕히고 대충 상태를 살폈다.
죄수, 젝크의 부친은 갖은 고문으로 온몸이 망가진 상태였다.
에반스는 만약을 위해 가지고 다니던 포션을 꺼내서 상처투성이의 몸에 발라 주었다. 그러자 곪은 상처가 터지고 새살이 돋아나면서 몸에 난 상처들이 아물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은 포션을 사내의 입에 털어 넣어 주었다. 포션의 효험 덕분인지 사내의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하더니 곧 의식을 되찾았다.
“크으으, 여, 여기는……?”
사내가 정신을 차리면서 처음 느낀 것은 주위 공기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그는 분명 감방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걱정 마시오. 여긴 안전한 곳이니.”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약간의 통증은 있었지만 몸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사내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걸레나 마찬가지였던 그의 몸이 거의 다 나아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제 총관이 보내 준 치료사는 자신에게 수면제만 먹이고 아무런 치료도 해 주지 않았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감방이 아닌 곳에서 끔찍했던 상처도 사라져 있었다.
“당신 아들이 젝크가 맞소?”
에반스의 물음에 사내가 흠칫 놀랐다. 순간 복잡해진 사내의 눈을 보고 에반스가 말했다.
“이곳에 당신 아들이 있소. 날이 밝으면 만날 수 있을 거요.”
에반스의 말에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것이 사실입니까?”
“그렇소. 아침이 되면 아들과 같이 여기를 떠날 수 있을 것이오.”
사내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에반스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에반스가 일어나며 말했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 시간이 있소. 힘들었을 텐데 좀 더 자 두시오.”
“고, 고맙습니다.”
죄수가 방문을 열고 나가는 에반스에게 말했다. 막 방문을 나서던 에반스가 멈칫하더니 죄수를 돌아보며 말했다.
“고맙다는 말은 아침에 당신 아들을 만나서 하시오. 당신을 살린 건 당신 아들, 젝크이니.”
그 말을 하고 에반스는 젝크의 부친이 쉴 수 있게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그런데, 문 옆에 누군가가 기대어 서 있었다.
“음!”
에반스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소드 마스터인 그의 이목을 속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오, 여기 여관에 묵고 있었나?”
에반스가 고개를 돌리자 그의 앞에 안드레이 공작이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말했지? 곧 보게 될 거라고 말이야.”
유들유들하게 웃는 안드레이 공작의 얼굴에는 에반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안다는, 그런 표정이 지어져 있었다.
“……나가서 얘기나 하죠.”
에반스의 말에 안드레이 공작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추운데 뭐하러? 그냥 내 방으로 가지.”
안드레이 공작은 능글맞게 웃으며 자신의 방으로 에반스를 안내했다. 에반스가 방에 들어서자 안드레이 공작이 주절댔다.
“자네도 나이를 먹어 보면 알 거야. 날이 추우면 노인들이 왜 뼈마디가 시리다고 하는지 말이야.”
얼굴과 몸은 멀쩡히 20대 초반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뼈가 시린다는 안드레이 공작의 말에, 에반스는 어이를 상실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아시는 겁니까?”
에반스의 물음에 안드레이 공작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뭘 말인가?”
정말 모르는 것인지, 알면서 모른 척하는 것인지, 에반스는 능구렁이 같은 안드레이 공작의 속내를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문 옆에서 기다리고 있을 정도라면, 에반스가 영주관에서 한 일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아니 알고 있을 것이다.
“제가 영주관 지하 감옥에서 죄수를 데리고 나온 것을 보셨잖습니까?”
“아하, 그 상처투성이 인간이 죄수였나?”
안드레이 공작이 에반스의 눈길을 피해 능청스럽게 딴 곳을 쳐다보며 말했다.
“제게 원하는 게 뭡니까?”
에반스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안드레이 공작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성급하긴……. 나는 내일 여길 떠날 사람이야. 그런데 오늘 처음 본 자네에게 뭘 원하겠나. 안 그래? 그저 사실대로 말만 해 주게. 모든 건 내가 자네 말을 듣고 판단하겠네.”
쉽게 말하는 안드레이 공작이지만, 그 사실대로 말해 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잠시 생각하던 에반스는 안드레이 공작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젝크에 관해서, 특히 드워프의 검에 대한 부분은 쏙 빠진 이야기였다.
“으음, 들어 보니 좋은 일을 했군. 하지만 자넨 명백히 법을 어겼어. 물론 그래봐야 베르턴 영지의 영주가 압실론 후작의 장남인 자네에게 감히 뭐라 말할 처지는 안 되겠지만 말이네.”
안드레이 공작의 말처럼, 이 사실이 알려진다 해도 베르턴 영주가 에반스를 어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압실론 후작 성에 에반스의 행적이 고스란히 노출될 수 있었다.
지금 에반스는 비밀리에 압실론 후작 성에 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계모와 램버튼 백작, 이복동생들의 심복들이 에반스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을 텐데, 이런 일로 자신의 위치가 알려진다면 아주 곤란했다.
에반스는 긴 한숨과 함께 안드레이 공작에게 자신이 처한 처지까지 설명해야 했다.
태어나면서 모친을 잃은 것, 그 이후 유년기 동안 겪어야 했던 부친의 냉대와 무관심, 그러다가 부친과 오해가 풀려 카라스 영지의 영주가 된 사정, 카라스의 영주로써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으며, 불과 며칠 전 부친인 압실론 후작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까지…… 에반스는 비교적 숨김없이 안드레이 공작에게 다 이야기했다. 그리고 가능한 이번 일은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했다.
에반스의 얘기를 들으며 안드레이 공작은 여러 차례 얼굴 표정이 변했다. 그렇게 에반스의 얘기가 모두 끝나고 나자 안드레이 공작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에반스를 향해 말했다.
“그러지, 비밀은 지켜 주도록 하겠네. 하지만 자네도 내 부탁 하나를 들어줘야겠어.”
“그게 뭡니까?”
에반스의 물음에 이번엔 안드레이 공작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드레이 공작은 50년 전에 3명의 제자를 거뒀다. 모두들 영특한 인재들로 그의 가르침을 받고 잘 성장해서 각자 마법사로써 자신의 길을 찾아갔다.
그들은 모두 5서클 마스터들로 제국 내에서 나름대로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러던 중 최근 한 제자로부터 다급한 연락을 받았다. 제자는 자신과 긴히 의논할 일이 있다고 했다.
“나는 제자 녀석이 불러 준 좌표대로 여기에 왔네. 그런데 그 녀석은 보이지 않았어. 그리고 지금까지 어떤 연락도 없었네.”
“……그래서 제게 원하는 게 뭡니까? 설마 그 제자를 찾아 달라는 겁니까?”
“맞네. 녀석은 항상 검은 로브를 입고 후드를 쓰고 다니네. 최근 한 달 사이 압실론 후작령에 검은 로브에 후드를 쓰고 다니던 자들만이라도 조사해 주게.”
‘검은 로브에 후드!’
에반스의 뇌리에 젝크의 부친에게 드워프의 검을 맡기고 간, 검은 로브에 후드를 쓴 남자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에반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안드레이 공작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조금이라도 단서가 잡히거든 내게 연락을 주게.”
“네. 그런데 제가 개인적으로 뭘 좀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뭘 말인가?”
“마법에 관한 겁니다.”
“마법? 자네처럼 강한 자가 뭐가 아쉬워서 마법에 관심을 갖는 건가?”
안드레이 공작에게 있어서 에반스란 존재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트렌시아 제국에서 자신만큼 강한 자가 있다는 것은 추후, 안드레이 공작의 마법 수련에 큰 자극제가 될 터였다.
“마법에 관심이 있다기보다 마법 아이템이 관심이 있다는 게 맞는 말일 것 같군요.”
“아, 오늘 보여 준 그 마법 문양들 말이군.”
“그 마법 문양의 기능들은 어떻게 사용하면 됩니까?”
에반스의 말에 안드레이 공작이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그 마법 문양이 새겨진 물건을 자네가 가지고 있는 것 같군.”
“…….”
에반스는 대답 대신 가볍게 웃어 보였다.
“좋아. 내 제자를 찾아 주겠다니 그 정도야 알려 줘야지.”
안드레이 공작이 에반스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 에반스에게 종이와 펜을 건네며 다시 그 마법 문양들을 그려 보라고 했다. 에반스가 그 마법 문양들을 그리자 안드레이 공작이 물었다.
“룬어를 아나?”
“네.”
에반스가 마법 문자인 룬어를 안다고 하자 안드레이 공작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럼 배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거야.”
안드레이 공작은 그 문양마다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지 에반스에게 자세하게 설명을 했다. 에반스는 그 마법 문양 옆에 그 설명을 일일이 기록하며 그 사용법을 확실하게 익혔다.
설명을 끝낸 안드레이 공작이 여전히 집중하며 마법 문양의 사용법을 복습하는 에반스를 보고 감탄했다.
“자넨 마법을 배웠어도 충분히 성공했을 거네. 비록 마법적 자질은 떨어지더라도 자네의 그 끈기와 노력이 자네를 결국에 성공으로 이끌었을 테니 말이야.”
“칭찬 고맙습니다.”
주거니 받거니 하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날이 밝아왔다. 안드레이 공작과 에반스는 방에서 나와 원래의 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가던 중, 이미 일어나 밖으로 나와 있던 젝크가 에반스를 발견하고 달려와 물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되었어요?”
걱정스런 물음에 고개를 살짝 에반스는 젝크를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아버지!”
침대에 잠들어 있는 부친을 보고 젝크가 소리쳤다. 누워 있던 젝크의 부친도 젝크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으음, 아……! 젝크야!”
“아버지!”
젝크는 달려가서 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흑흑흑, 아버지! 살아 계셨군요.”
“그래, 그래. 이 아비는 살았다, 살아 있어!”
두 부자의 상봉을 지켜보던 안드레이 공작이 가만히 에반스의 어깨에 한 손을 올렸다.
“좋은 일을 했네. 자네도 부디 아버지와 저런 해후를 하길 바라네.”
안드레이 공작의 말에 에반스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에반스는 압실론 후작을 만나기 위해 곧 후작 성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만나지도, 대화를 나누지도 못한 부친에게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답답하기만 했다.
안드레이 공작은 젝크의 부친에게 가서 그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마법을 시전 했다.
“리커버리!”
안드레이 공작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하얀 광채가 젝크 부친의 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하얀 광채가 사라지고 나자 젝크의 부친의 몸은 예전의 건강한 몸으로 돌아와 있었다.
젝크의 부친은 에반스에 이어서 웬 젊은 마법사가 자신을 치료해 주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왕 손댄 거 확실하게 뒷마무리까지 해 주지.”
안드레이 공작은 환영 마법으로 젝크 부친의 머리카락 색과 얼굴 형태를 확 바꿔 주었다. 죄수가 탈옥한 것을 알게 되면 베르턴 영주 성에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고 젝크 부친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면 얘기가 달랐다. 아버지의 모습이 달라지자 젝크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일주일은 괜찮을 거야.”
안드레이 공작이 에반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다분히 카라스 영지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에반스가 젝크의 부친과 젝크에게 다가갔다.
“카라스 영지의 로체스 자작 성을 찾아가도록. 그곳 총관에게 얘기해 두겠다.”
그 말에 젝크의 부친과 젝크가 감격어린 얼굴로 에반스를 쳐다보다가 서로를 껴안고 울었다.
“흐흐흑, 잘됐다! 정말 잘됐어!”
“아버지!”
그런 두 부자의 모습을 보고 에반스가 씁쓸하게 웃었다. 옆에서 에반스를 지켜보던 안드레이 공작이 약간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에반스는 아침에 각각 세 부류의 사람들과 작별을 했다.
우선 다른 여관에서 일찌감치 베르턴 영주 성을 떠나는 칼과 그 수하들을 눈짓으로 배웅했다. 그리고 아침 식사 후, 수도로 가는 안드레이 공작을 역마차에 태우며 작별 인사를 했다.
“제자에 대한 단서가 잡히면 바로 연락해 주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만나서 할 말이 없거든…… 그냥 한 번 안아 드리게.”
“네?”
“하하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의미심장한 말을 던져두고, 안드레이 공작을 태운 역마차도 그렇게 수도로 떠났다.
에반스는 곧장 여관으로 가서 루미나와 젝크와 그 부친을 데리고 여관을 나섰다. 그런데 영주 성이 갑자기 시끄러웠다.
영주 성내로 병사들이 급하게 뛰어다니고 길목마다 불시 검문검색이 이뤄졌다.
에반스와 일행도 곧 검문을 받았다. 에반스는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카라스 영지 평민들의 신분증을 몇 개씩 가지고 다녔다.
그 신분증 중 하나는 젝크의 부친이 가지고 있었다. 검문을 받으며 에반스가 병사에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밤사이 죄수가 탈옥했어. 그 죄수를 찾느라 이 난리야.”
“아, 네.”
에반스는 약간 긴장한 듯 보이는 젝크의 부친에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에반스에 이어서 젝크의 부친도 카라스 영지의 평민 신분증을 제시하며 검문을 통과했다. 루미나나 젝크와 같은 아이들은 검문도 하지 않고 통과시켰다. 병사들은 성인 남자들 위주로 검문했다.
그때, 영지관에서 나온 기사가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죄수는 고문을 당한 상태다. 그러니 몸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운 자들을 위주로 검문해라.”
기사의 외침에 병사들은 사람들의 몸 상태만 보고 대충 검문을 통과시켰다. 이후 에반스와 일행은 비교적 쉽게 베르턴 영주 성내 검문을 통과해서 성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베르턴 영주 성을 벗어나 안전한 곳에 이르자 에반스와 루미나는 젝크 부자와 작별했다.
“고맙습니다.”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젝크 부자에게 루미나가 돈주머니를 꺼내서 2골드를 건넸다.
“카라스 영지까지 경비로 쓰세요.”
“헉! 너무 많습니다.”
“맛있는 것도 많이 사 먹으면서 편히 가시라고 드리는 거예요.”
차마 손을 내밀어 받지 못하는 젝크의 부친에게 에반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받으라고 하자, 젝크의 부친은 눈물을 글썽이며 돈을 받았다.
두두두두.
에반스와 루미나가 말을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젝크 부자는 그들의 모습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야 발걸음을 카라스 영지 쪽으로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