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르르르. 부스스스.
숲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리에 홀로 야영장을 지키던 산체스의 수행 비서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젠장. 혼자서 야영장을 지키라니.”
산체스는 기껏 자신을 걱정해 준 수행 비서를 사냥에 데리고 다니면 거추장스럽다며 야영장에 혼자 있으라고 했다.
이럴 때 잠이라도 오면 눈 딱 감고 자련만 두려움은 잠마저 저 멀리 내쫓은 상태였다.
부스럭!
순간 뭔가 야영장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수행 비서는 기겁하며 모닥불을 더 활활 타오르게 했다. 맹수들도 불은 무서워하는 법이었다.
그런데 소용없었다.
부스럭! 부스럭!
오히려 불이 밝아지자 그것은 더 빨리 야영장으로 접근했다.
“누, 누구냐?”
그때 거대한 실루엣이 수행 비서 앞에 나타났다.
“히익!”
놀란 수행 비서가 놀라 도망치려 했지만 실루엣이 빠르게 움직였다.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가 숲속에 울렸다. 거대 원숭이에 의해 수행 비서의 목이 허무하게 뽑혔고 그의 몸통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 피로 전신이 피범벅이 된 거대 원숭이는 수행 비서의 몸통을 집어 들고 그의 몸에 걸친 옷을 마구 찢어발겼다.
“크릭!”
거대 원숭이는 이번에는 아예 사냥감을 이 자리에서 먹어 치울 생각이었다. 배가 고팠던 녀석은 날카로운 손톱으로 수행 비서의 배를 갈랐다. 그리고 그 안의 내장을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슈웅!
그때 뭔가가 날아왔다. 거대 원숭이는 몸을 숙였다.
휙!
나무로 만든 창이 거대 원숭이의 머리 위를 스쳐 숲 속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놈. 어디 또 도망가 봐라.”
거대 원숭이의 앞가슴과 등 쪽에 상처를 남긴, 날아다니는 인간이 나타났다. 그 인간은 바로 카베인이었다.
카베인은 거대 원숭이를 쫓다가 커다란 거미들의 공격을 받았다.
거미들을 다 죽이고 보니 거대 원숭이는 멀리 달아난 뒤였다. 하지만 카베인은 소드 마스터였다. 그는 거대 원숭이의 기운을 감지해 내고 추격했다.
결국 거대 원숭이로서는 엮인 것 자체가 운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다시 도망치려고 등을 보이면 인간의 푸른빛이 또 뒤를 공격할 터였다. 두 번은 운이 좋아서 크게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인간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거대 원숭이를 쏘아보고 있었다. 어디 도망치려면 도망쳐 보라는 듯 입가에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거대 원숭이는 어떻게 이 난관을 극복해 낼지 머리를 굴렸다.
그때 카베인이 말했다.
“아쉽게 몬스터는 아니로군. 하지만 너처럼 큰 원숭이는 처음이다. 박제해 놓으면 볼만할 것 같군.”
거대 원숭이는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머리가 좋은 녀석이야. 나를 거미에게 유인도 할 줄 알고 말이야. 하지만 소용없다. 넌 오늘 내 사냥감에 불과해.”
카베인이 웃으며 한 걸음 거대 원숭이 쪽으로 내디뎠다.
그때 거대 원숭이는 자신의 발치에 굴러다니는 수행 비서의 머리통을 보았다. 수행 비서가 핏발 선 눈으로 거대 원숭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거대 원숭이는 들고 있던 수행 비서의 시신을 카베인에게 던졌다.
카베인은 이미 예상하고 있던 터라 살짝 옆으로 몸을 피했다. 그때 다시 뭔가가 불쑥 카베인에게 날아왔다. 카베인은 즉시 검으로 그것을 잘랐다.
서걱!
수행 비서의 머리통이 둘로 갈라졌다. 피와 뇌수가 튀었다.
카베인은 뒤로 물러서며 그것을 피했다.
휘릭!
바로 그 순간, 거대 원숭이가 도망쳤다.
“어딜!”
카베인은 도망치는 거대 원숭이를 향해 오러 블레이드를 쏘아 보냈다.
바우우웅!
푸른빛이 날아가서 거대 원숭이를 덮쳤다.
그러나 거대 원숭이도 카베인의 이런 공격을 예상하고 있었다. 녀석은 파공성이 울리자 바로 나무 위로 몸을 솟구쳤다.
스륵!
그때 푸른빛 무리가 거대 원숭이의 발밑을 스쳐 나무로 스며들었다.
쩌억!
나무가 바로 갈라졌다. 거대 원숭이는 서둘러 그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몸을 날렸다.
“젠장.”
거대 원숭이를 잡지 못한 카베인은 소리를 지르며 다시 쫓았다.
거대 원숭이는 뒤를 바짝 쫓아오는 카베인을 힐끗 뒤돌아보며 연방 나무로 몸을 날렸다.
카베인도 나무 위를 뛰어다니는 것이 익숙해진 듯 능숙하게 거대 원숭이의 뒤를 쫓았다.
거대 원숭이는 이러다가 인간에게 잡힐 것 같았다. 그래서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녀석이 향한 곳은 바로 벌집이 있는 곳이었다. 숲에는 다양한 곤충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독침을 지니고 있는 벌의 벌집으로 움직였다.
녀석의 독침은 치명적이지만 거대 원숭이의 두꺼운 가죽은 뚫지 못했다.
반면 인간의 부드러운 피부라면 충분히 뚫을 수 있었다. 거대 원숭이는 바로 그 점을 노리고 카베인을 유인한 것이다.
하지만 카베인도 거대 원숭이가 뛰어난 지능을 갖추고 있음을 이제는 알기 때문에 녀석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자,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더욱 조심스럽게 거대 원숭이를 쫓았다.
웨애애애앵!
독벌들은 거대 원숭이가 나타나자 바로 벌집 밖으로 나와서 경고음을 보냈다.
그 소리를 듣고 카베인은 거대 원숭이가 또 자신을 유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순순히 당할 카베인이 아니었다.
“저것으로 나를 어쩔 수는 없다.”
카베인이 왼손을 내밀자 그의 반지 주위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번쩍하고 빛이 나더니 번개가 벌집에 작렬했다.
파지지직!
벌집과 그 주위로 강렬한 전류가 흘렀다.
부스스스!
벌집 주위의 독벌들이 바짝 마른 낙엽 떨어지듯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거대 원숭이가 놀란 눈으로 카베인을 쳐다보았다.
***
산체스와 웨어 베어를 찾던 에반스는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그러곤 숲에서 카베인의 기운을 찾았다. 카베인은 분명 몬스터로 보이는 존재를 추격하고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그는 지금 혼자였다. 그를 지켜보기에 딱 적당한 때인 셈이었다.
‘야영장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에반스는 카베인의 기운을 감지하고 그쪽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에반스가 야영장에 막 도착했을 때, 거대 원숭이가 야영장에 홀로 남았던 수행 비서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 먹고 있었다.
얼마 뒤 카베인이 나타났다. 한데 거대 원숭이는 놀라운 임기응변으로 카베인을 따돌리고 도망쳤다. 그때 에반스는 카베인이 오러 블레이드를 쏘아 보내는 것을 목격했다.
오러 블레이드를 마나 탄처럼 쏘아 보내는 저 기술을 사람들은 검탄이라 불렀다.
검탄은 소드 마스터 중에서도 펼칠 수 있는 자가 몇 명 되지 않았다.
‘카베인이 숨기고 있는 진짜 비장의 카드가 저것이었군.’
카베인은 마도사의 마법 아이템을 미끼로 에반스를 끌어내서 검탄으로 제거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검탄은 아직 나도 습득하지 못한 기술이다. 하지만 그것을 알고 있다면 당하지 않을 자신은 있다.’
만약 카베인이 검탄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큰 화를 입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안 이상 에반스도 더 이상 카베인을 두고 볼 이유가 없었다.
에반스는 거대 원숭이를 쫓아 사라진 카베인의 뒤를 쫓았다.
***
시퍼런 오러 블레이드가 거대 원숭이의 몸을 향해 무자비하게 파고들어 왔다.
거대 원숭이는 일단 피하려 했다. 그런데 미처 몸을 피하기 전에 서늘한 감각이 팔뚝에 전해졌다. 카베인이 쏘아 보낸 푸른빛이 거대 원숭이의 팔을 스쳐 지나간 것이다.
슈각!
미세하게 살과 뼈가 갈리는 소리가 울리며 우람한 팔이 나무 아래로 떨어졌다. 한쪽 팔이 별안간 허전해지는 바람에 거대 원숭이는 잠시 얼떨떨해 했다. 일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뒤이어 강렬한 통증이 거대 원숭이의 척추를 관통했다. 잘린 팔에서 선혈이 뿜어진 것은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이었다.
“쿼어어어어!”
괴성을 지르며 거대 원숭이는 잘린 팔을 붙들고 몸을 웅크렸다. 녀석은 완전히 두려움에 질린 눈빛을 하고 있었다. 녀석은 미친 듯이 도망치려 했다.
한데 다른 나무로 몸을 날리던 녀석의 몸이 기우뚱하더니 비스듬히 옆으로 나가 떨어졌다.
콰당!
나무에서 떨어진 거대 원숭이의 눈에 큼지막한 두 다리가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허벅지 아래쪽에서 곧 엄청난 통증이 절해졌다.
“쿼어억!”
전신을 관통하는 통증에 거대 원숭이는 몸부림을 쳤다. 팔 하나와 다리가 모두 잘린 거대 원숭이는 더 이상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때 녀석의 앞에 카베인이 나타났다.
“어디 더 달아나 봐라.”
카베인은 녀석으로 인해 숲을 헤맨 것을 생각하니 화가 났다. 그래서 단번에 녀석의 목을 날려 버리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몬스터가 아니라 그냥 덩치 큰 원숭이였군.”
카베인이 흠칫 놀라며 검을 거두고 뒤돌아섰다. 카베인의 앞에는 에반스가 서 있었다.
“역시 네 녀석이었군.”
카베인이 거대 원숭이에게서 물러나며 말했다. 한 팔과 두 다리가 잘린 거대 원숭이는 그냥 내버려 두어도 죽을 터였다.
“벌들을 죽이느라 마법 아이템을 사용해 버려서 어쩐다?”
에반스가 카베인이 왼손에 차고 있는 반지를 눈짓하며 말했다. 보통 마법 아이템은 한 번 사용하고 나면 짧아도 한 시간 정도 시간이 흘러야 다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 싸우게 된다면 카베인은 마법 아이템을 사용할 수 없는 셈이었다.
“이딴 마법 반지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너 정도는 얼마든지 나 혼자 처리할 수 있다.”
카베인이 자신 있게 말했다.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카베인은 이미 검을 손에 쥐고 있었다. 에반스도 검을 뽑아 들었다. 에반스가 검을 뽑는 것을 지켜보던 카베인이 물었다.
“내 제자들을 그렇게 처참하게 죽인 이유가 뭐지?”
“그건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로군. 사람들을 그렇게 처참하게 죽인 이유가 뭐지?”
에반스의 반문에 카베인이 실룩 웃었다.
“이거 정의의 사도가 나타나셨군. 하찮은 벌레들과 내 소중한 제자들이 어떻게 같을 수 있나? 내 제자들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린 것뿐이다.”
“너도 네 제자들과 다를 것이 없군. 강자니 약자는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말이지?”
“당연하지 않나? 나는 이렇게 강해지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다.”
“웃기고 있군. 그래서 스승을 해치는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 것인가?”
카베인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헉! 그, 그것을 어떻게 네가? 그 일은 스승님과 우리 다섯밖에 모르는 일이거늘.”
“렉터 공작님께서 알려 주셨다.”
“스승님께서? 그렇다면…….”
갑자기 카베인의 눈이 탐욕으로 물들었다.
“흐흐흐. 네놈이었군. 어쩐지 아무리 찾아도 없더라니. 스승님께서 그것을 네놈에게 넘긴 거야. 검공 라마스가 남긴 검술서는 어디 있나?”
“왜? 그것이 탐나나? 그럼 가져가 봐라.”
에반스의 도발에 카베인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디 잠시 뒤에도 그렇게 여유 있는 얼굴일지 두고 보자.”
말을 끝내자마자 카베인이 모습을 감췄다. 에반스도 사라졌다.
촤창!
두 사람은 허공에서 검을 맞부딪친 채 모습을 드러냈다.
파팟!
서로를 밀어내고 나서 텀블링으로 안정되게 지면에 착지한 두 사람은 다시 동시에 모습을 감췄다. 이번에는 땅 위에서 서로 맞부딪쳤다.
차차차창!
카베인의 검은 빠르면서도 현란했다. 힘보다는 스피드에 주안점을 둔 검술이었다. 때문에 그가 사용하는 오러 블레이드의 위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에반스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카베인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었다.
두 소드 마스터의 접전은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카베인은 가능하면 렉터 공작이 남긴 검술은 사용하지 않았다. 에반스가 거기에 대한 대비책을 가지고 있을 거라 여겼던 모양이었다.
카베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에반스는 가차 없이 역습을 가해 카베인을 궁지로 내몰았을 터였다.
카베인은 에반스가 모르는 전혀 생소한 검술로 에반스를 상대했다.
‘역시 대단하군.’
카베인을 상대하며 에반스는 그의 노련함에 감탄했다. 에반스가 검술의 천재라면 카베인도 천재였던 것이다.
이때 카베인은 음흉한 눈빛으로 에반스가 검공 라마스의 검술을 사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반스가 진짜 검술서를 가지고 있으면 검공 라마스의 검술을 펼칠 테니 말이다. 그래서 카베인은 그것을 에반스로 하여금 확인하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에반스도 함부로 검공 라마스의 검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카베인의 변칙 공격이 조금 위협적이긴 했지만 에반스는 추호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그 공격을 받아넘겼다.
둘 사이의 싸움은 계속 팽팽하게 진행되었다.
‘검공의 검술을 사용하지 않겠단 말이군.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되지.’
카베인은 팽팽하게 공방을 나누면서 은근슬쩍 검에 힘을 더 불어넣었다. 현재 카베인은 자신의 마나 양의 절반밖에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카베인은 비장의 수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서 카베인은 오히려 에반스에 검격을 허용하며 바짝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에반스는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팽팽하던 공세가 조금 느슨해진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검탄을 사용할 생각인 모양이군.’
에반스는 내색하지 않고 침착하게 카베인의 공격을 그냥 받아넘겼다. 에반스 역시 카베인의 검탄에 대비해서 생각해 둔 한 수가 있었던 것이다.
차차차창!
그렇게 둘 사이에 몇 십 합이 교차되었다.
어느 한 순간 카베인이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를 포착했다.
“타앗!”
바짝 붙어서 에반스를 공격하던 카베인이 강하게 에반스의 검을 밀어내고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카베인은 잡고 있던 검에 마나를 집중시켰다.
바우우웅!
그러자 검에서 푸른빛의 오러 블레이드가 강렬하게 빛을 내뿜었다. 카베인은 그대로 그 검 끝을 에반스를 향해 가리켰다. 그러자 푸른빛이 에반스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갑작스런 검탄에 에반스는 적잖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피하기는 늦었다. 어서 검공의 검술을 사용해라.’
카베인은 에반스가 검탄을 피하면 바로 그 다음 공격을 가하기 위해 벌써 에반스를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카베인은 검탄으로 에반스를 어쩔 수 있다고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갑자기 검탄의 공격을 받게 되면 에반스가 흔들릴 것이고 빈틈이 생길 것이었다.
때문에 검탄에 이어 공격하는 지금의 공격이 사실상 카베인의 필살 일격인 셈이었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탄을 보고 에반스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곤 들고 있던 검으로 커다랗게 원을 그렸다. 곧 검에 맺힌 오러 블레이드가 에반스를 보호하는 오러 방패를 만들었다.
검탄이 맹렬한 기세로 에반스가 만든 오러 방패에 부딪쳤다.
쾅!
놀랍게도 카베인의 검탄이 오러 방패에 부딪혀서 모두 소멸되었다.
에반스는 검탄은 만들어 내지 못했지만 검탄을 막을 수 있는 검막은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비장의 한 수가 바로 검막이었던 것이다.
“헉!”
에반스가 검막으로 검탄을 막아 내자 오히려 카베인이 놀라 두 눈을 부릅떴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 에반스의 맹공이 시작되었다. 앞 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에반스의 공격은 거칠었다.
창! 차창! 창!
에반스의 검이 대기를 맹렬히 쪼개며 퍼부어졌다. 검의 묘용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공격이었다. 제대로 식별하기 힘들 정도로 현란했다.
차창! 창!
카베인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에반스의 공격을 필사적으로 막아 냈다.
마침내 에반스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차앙!
에반스의 검과 카베인의 검이 서로 부딪칠 때 갑자기 에반스의 검이 변화를 일으키며 휘어졌다.
타앙!
“크윽!”
금속음이 크게 울리며 동시에 카베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카베인이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나며 낭패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카베인은 검을 쥐고 있던 자신의 손을 쳐다보며 외쳤다.
“오러 블레이드로 브레이크 소드라니…….”
검을 들고 있는 카베인의 손은 심하게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에반스의 브레이크 소드에 완벽하게 당한 카베인은 제대로 검을 쥐고 있을 수 없었다. 그런 카베인을 에반스가 그냥 둘 리 없었다.
‘큰일이다.’
검의 반발력에 두 팔이 마비되어 버린 카베인은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한 번이다. 이것으로 승부를 내지 못한다면…….’
카베인이 이를 악물고 체내 모든 마나를 검에 주입시켰다. 그리고 검과 하나가 되어 에반스를 향해 몸을 날렸다. 바로 렉터 공작이 남긴 검술이었다.
쐐애애애액!
카베인의 오러 블레이드가 대기를 갈가리 찢어 놓았다. 카베인의 혼신을 다한 일격을 보고 에반스는 처음으로 검공 라마스의 검술을 사용했다. 오러가 잔뜩 맺힌 카베인의 검과 달리 에반스의 검은 오러가 전혀 깃들어 있지 않았다.
쩡!
맑은 소리와 함께 오러 블레이드가 맺혀 있던 카베인의 검이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 하늘 높이 치솟았다. 이어 카베인이 핼쑥해진 얼굴로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검을 쥐고 있던 카베인의 손아귀가 찢어져서 손을 타고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러나 카베인은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조금 전 그것이 검공 라마스의 검술인가?”
카베인이 에반스에게 물었다.
에반스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컥!”
카베인이 비틀거리며 입에서 피를 토했다. 그러다가 거대 원숭이의 잘린 팔에 걸려 뒤로 넘어졌다.
털썩!
“크윽!”
심하게 내상을 입은 카베인이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막 일어서려 할 때였다.
덥석!
큼지막한 손이 카베인의 머리통을 거머쥐었다. 바로 카베인에 의해 팔 하나와 두 다리가 잘린 거대 원숭이의 손이었다.
“아, 안 돼!”
카베인이 소리쳤다. 거대 원숭이가 그대로 카베인을 당겼다. 심하게 내상을 입은 카베인은 힘없이 거대 원숭이에게 끌려갔다. 거대 원숭이는 잘린 두 다리로 카베인의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 남은 한 팔에 마지막으로 힘을 주었다.
카베인은 목덜미에서 끔찍한 통증이 전해지자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거대 원숭이의 힘이 결국 인간의 목을 지탱하는 뼈와 근육을 간단히 끊어 버렸다.
뿌드득!
카베인의 머리통이 너무도 허무하게 뽑혔다.
털썩!
동시에 거대 원숭이도 최후를 맞았다. 머리 잃은 카베인의 몸통이 핏줄기를 간헐적으로 내뿜으며 쓰러지는 것을 보며 에반스도 몸을 돌렸다.
“크르르르.”
잠시 후 어둠 속에서 숲의 청소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
웨어 베어는 숲속에서도 쉽사리 천적을 찾을 수 없는 맹수였다. 특히 다 자란 수컷 웨어 베어는 사벨 타이거도 건드리지 않았다.
“워어어어!”
“이런 빌어먹을…….”
대머리 산체스는 머리에 땀 나도록 달렸다. 그토록 찾아 마지않던 웨어 베어를 찾았는데 막상 마주하고 보니 너무 컸다. 녀석이 몸을 일으키자 그 키가 5미터는 됐다. 한마디로 괴물이었다.
호위무사들이 화살을 쏘고 창을 던졌지만 녀석의 두꺼운 가죽을 뚫지 못했다. 오히려 녀석의 흉성만 자극시킨 꼴이었다.
녀석이 미친 듯이 날뛰자 산체스와 일행은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쳤다.
다행히 녀석의 덩치가 워낙 크다 보니 움직임이 약간 둔했다. 그래서 호위무사들은 민첩한 몸동작으로 녀석을 피했다. 하지만 치료사와 산체스는 달랐다.
퍽!
녀석이 휘두르는 앞발 공격에 어른 장딴지만 한 나무들이 그대로 꺾여 넘어졌다.
“헉!”
콥스 부족 안내인의 말처럼 녀석의 앞발에 맞았다가는 머리통이 박살 날 게 분명했다. 그런데다 하필 녀석이 고른 상대가 산체스였다. 놈은 죽어라 산체스만 쫓았다. 녀석이 봐도 산체스가 제일 느려 터지게 생긴 모양이었다.
“이놈들아. 뭣들 하는 게야. 어서 저놈을 막아.”
산체스가 고래고래 소리쳤지만 호위무사들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저 괴물을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호위무사들도 목숨이 여벌로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때였다.
“이쪽으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산체스는 그쪽으로 방향을 틀고 죽어라 내달렸다.
쿵!
“꿱!”
그때 산체스의 뒤쪽에서 강력한 충돌음과 함께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렸다.
산체스가 고개를 돌리자 웨어 베어가 그의 뒤쪽에 대자로 뻗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웨어 베어 머리통만 한 바위가 있었다.
순간 나무 위에서 누군가 뛰어내렸다.
“너, 너는 에반스!”
에반스가 싱긋 웃으며 한 손을 들어 보였다. 바위를 들고 나무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웨어 베어가 지나가자 바위를 떨어트린 모양이었다.
아무튼 에반스는 검을 뽑아서 기절해 있는 웨어 베어의 눈에 검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검은 눈을 뚫고 웨어 베어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쿼어어어어!”
쓰러져 있던 웨어 베어가 벌떡 일어나서 무작정 앞으로 내달렸다. 그러다가 나무에 부딪쳐서 쓰러졌다. 씩씩대던 녀석은 얼마 가지 못해 쓰러졌다.
웨어 베어가 죽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 에반스는 녀석의 배를 갈라 간과 쓸개를 떼어 냈다. 그리고 그것을 산체스에게 건넸다.
“어디 갔었어?”
산체스가 버럭 화내며 에반스에게 소리쳤다.
“잠깐 오줌 누는 사이 길을 잃어버렸더라고요.”
“빌어먹을 녀석. 걱정했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산체스는 에반스가 건네는 쓸개를 받아 챙겼다.
산체스는 치료사의 도움을 받아서 웨어 울프의 쓸개즙을 머리에 발랐다. 그런 후에야 웨어 베어의 껍질을 벗겨서 야영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야영장에는 머리가 뜯겨져 나간 수행 비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여기서 나가자.”
질린 얼굴로 산체스가 명령했다. 산체스 일행은 바로 짐을 챙겨서 그곳을 떠났다.
다음 날 정오 무렵, 산체스와 일행은 자카로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어제 카베인 님이 돌아오지 않았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후디치가 죽은 것을 확인한 뒤라 산체스는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콥스 부족 사람들을 풀어 카베인을 찾게 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자 콥스 부족 사람들 중 하나가 카베인의 피 묻은 옷과 그의 검을 찾아왔다.
“맙소사. 그렇다면 소드 마스터 카베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단 말인가?”
산체스와 일행은 곧 충격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숲에 계속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산체스는 숲을 빠져나가기로 결정했다. 대기 중이던 길잡이가 다시 산체스와 그 일행을 남쪽 숲 밖까지 안내했다.
곧장 헤산 마을로 간 산체스는 그곳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 날 바로 수도로 가기로 했다.
그때 에반스가 산체스를 찾았다.
“그러니까 지금 고향에 가겠다는 거냐?”
웨어 베어의 쓸개가 효과가 있었는지 산체스의 머리에 머리카락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산체스는 그것이 좋은지 연방 손으로 머리카락을 만지며 물었다.
“고향에 가던 길에 하란 마을에서 영감님한테 잡혔잖습니까? 이대로 수도로 가면 언제 또 고향에 갈지 모르겠고, 이번 기회에 가 봐야겠습니다.”
“그래라. 대신 수도에 오면 반드시 나부터 찾고.”
“알았습니다.”
다음 날 산체스와 그 일행은 수도로 향하고 에반스는 로체스 자작성으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