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베인의 호위기사들은 각자 검술 테스트가 끝내면 항상 갈라스가 있는 술집에서 모이기로 되어 있었다.
그들의 검술 테스트는 짧게는 두 시간, 길어야 세 시간을 넘지 않았다.
한데 헤어진 지 세 시간이 훌쩍 넘었는데 술집에는 갈라스와 두 명의 호위기사뿐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장소를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냐?”
“아니, 여기서 모인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어.”
“그렇다면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는 건가?”
“이런 촌구석에서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 리 없잖아.”
“그럼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술집 안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타마렌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피 묻은 바닥에 넘어지지 않으려 최대한 조심하며 술병을 날랐다.
타마렌은 술 창고에 고이 간직해 왔던 최고급 와인들을 모두 꺼냈다. 그것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제아무리 비싼 와인인들 목숨 값만 하겠는가?
“이거 맛이 왜 이리 없어. 이봐, 보르도 14년산 더 없어?”
호위기사 중 하나가 도끼눈을 뜨고 타마렌을 쏘아보았다. 그러자 타마렌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보르도 14년산은 다 떨어져서…… 그것도 괜찮은 와인입니다. 귀족 분들이 좋아하시는 건데 입맛에 맞지 않으십니까?”
귀족들이 좋아한다는 말에 호위기사는 표정을 고치며 말했다.
“아아. 어쩐지. 뒷맛이 개운하더라니. 역시 고급스런 술은 달라.”
갈라스와 2명의 호위기사는 타마렌이 내놓은 새로운 와인을 계속해서 마셨다.
덜컥!
술집 문이 열리면서 검은 로브에 후드를 둘러쓴 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와인을 마시고 있던 갈라스가 흠칫 놀라며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굳은 얼굴로 검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나머지 두 호위기사도 갈라스의 행동에 놀라며 검을 들고 그의 양옆에 섰다.
술집 주인 타마렌은 후드를 깊숙이 눌러쓴 정체불명의 남자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 남자의 신장은 갈라스와 다른 호위기사들과 비슷했다.
한데 남자의 검은 로브 앞자락 사이로 검이 삐져나와 있었다.
갈라스와 두 명의 호위기사도 로브 사이로 보이는 검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갈라스가 검은 로브 남자의 등장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그자의 몸에서 풍겨 나온 짙은 피 냄새 때문이었다.
“여기 있었군.”
남자가 갈라스와 호위기사들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키며 말했다.
“우리를 찾았나?”
갈라스의 물음에 남자가 바로 대답했다.
“이곳도 엉망이군.”
남자가 온통 피 칠갑인 술집 안을 둘러보았다.
“네놈의 정체를 밝혀라.”
갈라스 옆에 있던 호위기사 하나가 소리쳤다. 그러자 남자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흥, 네놈들이나 감추고 있는 그 정체를 밝혀라. 이 살인마들아.”
갈라스와 두 호위기사의 얼굴에 잠시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들은 곧장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특히 갈라스는 더욱 냉철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네놈이 누군지 관심 없다. 단지 우리의 일에 방해 된다면 절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저 사람들은 방해가 되서 죽였나?”
남자가 술집 한쪽에 치워져 있는 시신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
갈라스와 호위기사들은 할 말이 없었다.
“너희들이 저들을 실컷 가지고 놀다 죽인 것처럼 나도 그래야겠다.”
그 말을 끝내자마자 남자가 움직였다.
타다닥!
쿵! 쿵!
남자가 다가오자 갈라스의 양옆에 있던 두 호위기사가 주위 테이블과 의자를 발로 걷어차며 공간을 만들었다. 이내 호위기사들이 만들어 놓은 공간으로 남자가 들어섰다.
갈라스가 남자를 향해 물었다.
“혹시 다섯 명의 기사들을 보지 못했나?”
남자는 다섯 걸음 정도 간격을 두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곤 갈라스의 물음에 대답했다.
“다섯 명의 기사는 보지 못했다. 아! 다섯 놈의 살인마들은 봤지.”
“그들을 어떻게 했나?”
갈라스가 으르렁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남자가 시신이 쌓여 있는 술집 구석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감히…….”
성격이 급한 갈라스가 먼저 움직였다. 양옆에 있던 두 호위기사도 몸을 날렸다.
파파파팟!
푸른 섬광이 남자를 덮쳤다. 갈라스와 호위기사들은 처음부터 검에 마나를 주입시켰다. 그들의 검이 남자의 몸을 향해 각기 다른 방향에서 날아갔다. 피하려면 뒤로 물러나야 하는데 그럴 경우, 뒤쪽의 테이블과 의자에 걸리게 되어 있었다.
정면에서 남자를 공격하던 갈라스의 눈에는 그자가 덮어쓰고 있던 후드 밑, 코와 입술이 선명히 보였다. 그런데 순간, 입술이 열리며 그자가 하얀 이를 드러내 보였다. 마치 이런 공격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말이다.
그리고 그자의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우우웅!
갈라스와 호위기사들의 검에 맺힌 마나와는 비교되지 않는 선명한 푸른빛의 오러가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놀랍게도 오러는 검신을 물들이는 것도 모자라 검봉을 타고 맹렬히 뿜어져 나왔다. 완성된 오러 블레이드였다.
순간 갈라스와 두 호위기사의 얼굴에 절망의 빛이 어렸다.
남자는 크게 호선을 그리며 검을 휘둘렀다.
세 방향에서 공격을 가하던 갈라스와 두 호위기사도 최선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촤차창!
검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술집 안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갈라스와 두 호위기사는 기겁하며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그들이 들고 있던 검은 절반가량 잘려 나간 상태였다.
투투툭!
그제야 잘려 나간 검의 파편이 바닥에 떨어졌다.
“맙소사! 소드 마스터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갈라스와 두 호위기사가 믿기지 않는 현실에 당혹스러워 하고 있을 때 남자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다.
“블링크다. 피해.”
갈라스가 몸을 뒤로 날리며 소리쳤다. 그러나 남은 두 호위기사가 몸을 움직이려 했을 때 이미 푸른 섬광이 그들의 다리를 훑고 지나간 뒤였다.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다리가 잘린 두 호위기사가 피로 물든 술집 바닥에 넘어졌다.
“안 돼!”
갈라스가 소리쳤다. 넘어진 두 호위기사를 향해 남자가 가차 없이 검을 휘둘렀던 것이다. 푸른 섬광이 번쩍였고 이어서 목 두 개가 허공 위로 솟구쳤다.
“미친……!”
갈라스가 반 토막 남은 검을 휘두르며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쨍!
맑은 소리와 함께 갈라스가 들고 있던 반 토막 난 검이 다시 두 토막으로 잘렸다.
순간, 갈라스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했다. 남자는 갈라스의 암울하게 젖어 든 눈동자를 차가운 눈으로 쏘아보며 검을 그의 가슴에 찔러 넣었다.
오러가 충만히 맺힌 검은 가볍게 갈라스의 심장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털썩!
생명이 사라진 갈라스의 몸이 힘없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모든 상황이 정리되자 남자는 술집 주인 타마렌을 보고 물었다.
“뒷문이 어디 있소?”
타마렌은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후문을 가리켰다. 그러자 남자는 모습을 감췄다.
***
콰쾅!
폭음과 함께 술집 문이 박살 나서 날아갔다. 곧 붉은 오러 블레이드가 맺힌 검을 든 카베인이 술집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갈라스, 휴렌, 자이롭.”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제자들을 확인한 카베인이 소리쳤다.
“누구냐?”
카베인이 유일한 생존자 타마렌을 향해 물었다. 소드 마스터의 살기를 고스란히 받은 타마렌은 숨 쉬기조차 힘들었다. 그러나 그는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후문 쪽을 가리켰다.
스르르르!
앞선 검은 로브 남자가 모습을 감추듯 카베인 역시 연기처럼 사라졌다.
잠시 후, 카베인이 검은 로브를 든 채 다시 술집에 나타났다. 동시에 술집 안으로 산체스와 후디치, 그리고 산체스의 호위무사들이 들어섰다.
“무슨 일입니까? 헉!”
산체스는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 있는 카베인의 호위기사들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옆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에반스가 서 있었다.
검은 로브를 들고 선 카베인의 눈에서 살광이 뿜어져 나왔다.
“어떤 놈인지 반드시 찾아내서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말 것이다.”
카베인은 바로 술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새벽 무렵, 카베인은 죽은 여덟 제자의 시신을 모두 찾아내서 한곳에 일렬로 늘어놓았다. 그러곤 눈에 불을 켜고 범인의 단서를 찾았다.
카베인이 알아낸 것은 상대가 하나이며 소드 마스터라는 것뿐이었다. 범인은 특별히 검술을 사용하지 않고 소드 마스터의 압도적인 힘으로 여덟 제자를 참혹하게 죽였다.
“일단 수도로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산체스가 걱정스런 얼굴로 카베인에게 말했다. 그러자 카베인이 딱 잘라 말했다.
“남쪽 숲으로 갑시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이대로 수도로 돌아가면 영영 놈을 잡을 수 없소. 놈이 노리는 것이 나라면 내 앞에 나타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 줘야 하지 않겠소?”
카베인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갈라스와 두 호위기사를 죽이고 달아난 검은 로브 남자는 바로 에반스였다.
에반스는 갈라스를 죽인 후, 술집으로 빠르게 달려오는 카베인의 기운을 느꼈다.
에반스는 카베인의 마나를 기억하는 반면, 카베인은 에반스가 마나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느낀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기운을 몰랐다.
그런 까닭에 술집에서 느꼈던 낯선 기운이 에반스의 기운인지 카베인은 알지 못했다.
‘지금은 카베인과 싸울 때가 아니다.’
소드 마스터와 소드 마스터 간의 싸움은 호위기사 때와 같이 조용히 끝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에반스는 카베인과의 싸움에서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가 들통 나게 되면 나머지 렉터 공작의 제자들을 상대하는 데 분명 지장이 있을 것이었다.
렉터 공작의 배은망덕한 제자들은 현재 트렌시아 제국의 최고 권력자들이었다. 그들이 그 권력을 휘두른다면 복수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에반스는 일단 카베인을 피하기로 결심했다.
에반스는 술집 후문으로 달아났다. 카베인이 뒤쫓았지만 검은 로브를 벗어던지며 골목으로 뛰어드는 바람에 결국 놓치고 말았다.
에반스는 카베인을 따돌리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새 옷으로 갈아입은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술집에 나타났다.
예상 밖으로 카베인은 남쪽 숲에 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카베인은 복수에 강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었다.
‘제자들을 죽인 자가 소드 마스터인 것을 알면서도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남쪽 숲으로 가겠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소드 마스터를 상대로 싸워도 이길 수 있는 필승의 카드가 있다는 것인가?’
에반스는 카베인이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이 있다고 확신했다.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 전에 섣불리 움직이는 것은 위험하다고 보고 당분간 몸을 사리기로 했다.
날이 밝자 카베인의 호위기사들과 헤산 마을 사람들이 무수히 죽은 사건으로 관리와 자경대가 본격적인 조사에 나섰다.
하지만 그들만으로 수도에서 온 손님들의 발목을 잡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젠장. 아카데미 기사학부 학장인 카베인과 루키아 상단 상단주를 아들로 두고 있는 산체스를 무슨 수로 잡아 둔단 말이냐?”
“그럼 수사는?”
“대충 의문사로 처리하고 덮어.”
관리의 지시에 하룻밤에 2백여 명의 사람들이, 그것도 시체가 온전한 이가 하나도 없는 참혹한 살인 사건이 은폐되어 조용히 묻혔다.
카베인은 여덟 구의 시신을 수도로 보내고 다시 사냥을 위해 남쪽 숲으로 움직였다.
오후 무렵, 일행은 길잡이의 안내를 받아 남쪽 숲의 입구에 도착했다.
“휴우. 엄청나군요.”
까마득히 멀리 보이는 파르미르 고원까지 숲이 펼쳐져 있었다.
“숲에서 자칫 길을 잃게 되면 낭패입니다. 그러니 저를 잘 따라 오십시오. 제가 여러분을 안내할 곳은 여기서 반나절 거리에 있는 자카로까지 입니다. 자카로는 숲의 부족이라 불리는 콥스 부족이 사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콥스 부족의 안내인을 만나 본격적으로 남쪽 숲을 둘러보게 될 것입니다.”
콥스 부족은 파르미르 고원에 사는 소수 부족 중 하나였다. 일찍이 트렌시아 제국과 교류했고 간혹 남쪽 숲을 찾는 제국 사람들의 안내인 역할을 맡아서 근근이 생계를 이어 가는 부족이었다.
길잡이의 설명이 있은 후, 일행은 곧장 숲으로 들어갔다. 울창한 숲으로 들어가자 공기부터가 달랐다.
“마나 양이 풍부하군. 봐라. 이런 곳에서 수련하면 그 효과가…… 빌어먹을.”
카베인은 아직 제자들이 모두 죽었다는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더 분노하고 더욱 화가 났다.
바드득!
카베인의 이가는 소리가 산체스와 에반스의 귀에도 선명히 들렸다.
“대체 누굴까?”
“뭐가 말입니까?”
“카베인의 호위기사를 다 죽인 그자 말이야.”
“호위기사 여덟 명을 간단히 해치운 것으로 봐서 상당한 실력자겠지요.”
“그야 당연하지. 카베인은 그자가 소드 마스터일 거라고 했어.”
“와우. 세상에 한 번 구경하기도 어렵다는 소드 마스터가 왜 이러 많아요?”
“후후, 그렇긴 하군. 나도 육십 평생 소드 마스터라고는 카베인이 처음이거든. 그런데 잘하면 또 한 명을 볼 수 있게 생겼어.”
“하지만 그 소드 마스터가 다시 나타날 거라는 보장은 없잖습니까?”
“카베인은 그자가 반드시 나타날 거라 믿고 있더군. 그래서 몬스터 사냥보다는 그자를 상대하는 데 더 신경을 쓰는 모양이야.”
“소드 마스터끼리의 대결이라…… 정말 볼만한 구경거리가 되겠군요.”
“아쉬운 점은 우리가 그 대결을 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야.”
“아니 왜요?”
“이 숲이 어떤 곳이냐? 이 넓은 숲 어디에서 싸울지 알 수 없지 않느냐?”
“그러니까 저희는 카베인의 뒤를 졸졸 따라다녀야지요.”
“쯧쯧. 사냥이 시작되면 카베인은 아마 독자적으로 움직일 거다. 그런 카베인을 우리가 무슨 수로 따라붙을 수 있단 말이냐?”
“뭐 그건 또 그렇군요.”
당연히 에반스 역시 카베인과의 싸움을 누가 지켜보는 것은 싫었다.
숲에 들어서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날이 저물었다. 길잡이는 숲에 사는 반딧불이들을 잡아 그것으로 능숙하게 숲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그가 말한 대로 반나절의 시간이 지났을 때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여기가 자카로입니다.”
길잡이는 먼저 마중 나온 자카로의 촌장에게 갔다. 미리 준비해 간 각가지 생필품들을 건네자 촌장은 일행이 자카로에 며칠 묵을 수 있게 집을 내어 주었다.
그리고 콥스 부족에서 가장 뛰어난 안내인을 소개해 주었다.
자카로까지 안내해 준 길잡이는 일행이 다시 제국으로 향할 때까지 이곳에서 묵기로 했다.
다음 날부터 남쪽 숲에서 본격적인 사냥이 시작되었다. 산체스의 말대로 카베인은 후디치와 둘이서 독자적으로 사냥에 나섰다.
산체스도 호위무사들을 대동하고 사냥에 나섰다.
첫날 사냥에서 카베인은 다양한 숲의 맹수들을 잡아 왔다. 그중에는 요즘에 구경하기도 힘들다는 사벨 타이거도 있었다.
“휴우, 정말 크군. 거의 황소만 해.”
뾰쪽하게 튀어나온 거대한 두 개의 이빨과 족히 한 뼘은 됨직한 날카로운 발톱은 왜 녀석이 숲의 제왕이라 불리는지 알게 했다.
“이런 녀석을 어떻게 잡은 거지?”
사람들은 카베인과 사냥에 나섰던 후디치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후디치가 목에 잔뜩 힘주며 말했다.
“스승님이 달리 소드 마스터인 줄 아셨소? 사벨 타이거가 그분을 등 뒤에서 덮쳤는데 그분이 손을 내뻗자 번개가 치면서 저 큰 녀석이 벌러덩 배를 뒤집고 쓰러지더라니까.”
“푸하하. 에이. 거짓말 좀 작작해라. 소드 마스터가 무슨 마법사냐? 번개를 치게?”
“그러게 말이야. 그냥 단칼에 사벨 타이거를 베어 죽였다고 하면 믿겠지만 그 말은 도저히 못 믿겠다.”
모두 후디치의 말을 허풍이라 생각했다.
“아니 정말이라니까.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이렇게 손을 뻗으니까 번개가 번쩍했다니까.”
후디치가 당시 상황을 다시 설명했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때 후디치의 얘기를 자세히 듣고 있던 에반스의 눈이 반짝였다.
‘그렇군. 그가 왼손 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가 마법 반지인 모양이야. 저렇게 큰 사벨 타이거를 단번에 죽게 만들 정도면 제아무리 소드 마스터라도 견뎌 내기 어렵겠군. 그렇다면 마도사 급 마법사가 만든 마법 아이템이란 말인가?’
소드 마스터라면 5서클 마법까지는 마나 실드로 방어가 가능했다. 그러나 6서클 이상의 마도사 급 마법은 달랐다.
최상급 소드 익스퍼트와 소드 마스터의 차이와 마찬가지로 5서클과 6서클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제아무리 소드 마스터라 하더라도 6서클 마도사 급 마법에 직격 당하면 위험했다.
만약 소드 마스터의 손에 그런 마법 아이템이 있다면 그 어떤 소드 마스터도 두려워하지 않을 터였다.
‘그것이었군. 카베인, 그자가 이곳까지 와서 나를 유인하려던 이유가.’
에반스는 드디어 카베인이 숨기고 있는 비장의 카드가 뭔지 알아냈다.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카베인을 제거하는 일만 남은 셈이었다.
하지만 에반스는 뭔가 찜찜했다.
‘사벨 타이거를 죽이는 데 굳이 마법 아이템을 사용해야 했을까?’
에반스가 소드 마스터가 아니었다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에반스였다.
소드 마스터의 시력과 청력은 일반인에 비해 몇 배는 더 발달되어 있다.
때문에 사벨 타이거가 접근할 때가지 카베인이 몰랐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또한 소드 마스터라면 당연히 사벨 타이거를 단칼에 베어 죽여야 옳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에반스를 끌어들이기 위한 카베인의 노림수일 수 있었다.
‘급할 것 없다. 어째든 카베인 그자가 이 숲에 있는 이상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테니 말이야.’
에반스는 일단 좀 더 시간을 두고 카베인을 지켜보기로 했다.
다음 날, 카베인이 사벨 타이거를 잡은 것에 고무되어 이번엔 산체스가 설쳤다.
“사벨 타이거가 있으면 웨어 베어도 있을 거야. 반드시 놈을 생포해야 해.”
“왜 저러는 겁니까?”
에반스가 산체스의 수행 비서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웨어 베어의 쓸개즙을 머리에 바르면 머리가 다시 자란다는 말이 있소.”
“끄응. 그래서 대머리 아저씨가 저렇게 흥분했군요.”
보통 산체스는 자카로에서 반나절 거리 이상 벗어나지 않았다. 최대한 안전하게 숲을 돌아다녔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담하게 숲 깊숙이 들어갔다.
산체스와 그 수행원 11명에 2명의 콥스 부족 안내인까지 합쳐 모두 14명이 울창한 숲을 헤치고 반나절 이상 숲 안으로 들어간 후, 근처 시냇물이 흐르는 공터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평소라면 지금쯤 방향을 돌려 다시 자카로 쪽으로 가고 있어야 정상인데 일행은 여전히 숲 안에 있었다.
“웨어 베어는 야행성이니 밤에 사냥해야 해. 그러니 오늘은 초저녁에 일찍 자고 밤이 깊어지면 일어나서 놈을 잡으러 가야 한다.”
자카로가 에반스를 비롯한 호위무사들을 쏘아보며 말했다. 마치 너희들이 드디어 밥값을 할 때가 왔다고 압박하듯 말이다.
30분 정도 휴식을 취하며 점심을 해결한 일행은 다시 숲 안쪽으로 움직였다.
콥스 부족의 안내인은 산체스가 그려 준 웨어 베어의 모습을 보고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자 산체스가 광분하며 날뛰었다.
“어서 가자. 어서.”
에반스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대머리 아저씨가 드디어…….”
그렇게 세 시간을 더 숲 안으로 들어가자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숲은 어둠이 빨리 찾아오니 일단 야영지부터 찾아야 합니다.”
콥스 부족 안내인의 충고에 따라 산체스와 그 일행은 근처에서 야영지를 찾았다.
일행이 천막을 치고 야영 준비를 마쳤을 때 숲은 어둠에 잠겼다.
“일찍 저녁 먹고 어서 자라.”
산체스의 압박에 에반스를 비롯한 호위무사들은 잠깐 눈을 붙였다.
“야, 어서 일어나.”
그렇게 세 시간쯤 지났을까?
산체스가 눈에 불을 켠 채 에반스와 호위무사들을 깨웠다.
“너희들 반드시 산 채로 웨어 베어를 잡아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 한 시간 안에 쓸개를 떼어 내게로 가져 와라. 알겠지?”
“네에.”
호위무사들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하지만 웨어 베어는 키가 2미터를 훌쩍 넘었다. 그리고 앞발의 힘은 사벨 타이거보다 더 강했다.
녀석의 앞발 공격 한 방에 콥스 부족 사람의 머리통이 박살 나 버렸다는 얘기를 듣고 호위무사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봐. 에반스. 너만 믿는다.”
산체스는 자신에게 근접해서 호위하던 에반스까지 웨어 베어를 잡는 데 투입시켰다.
에반스의 입장에서야 산체스를 지키나 숲속을 돌아다니나 다를 것이 없으니 시키는 대로 웨어 베어를 잡으러 나섰다.
“잠깐. 안 되겠어. 나도 따라가야지.”
“안 됩니다.”
산체스가 따라나서겠다고 하자 그의 수행 비서가 기겁하며 말렸다.
하지만 산체스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수행 비서만 야영지에 남고 일행 모두가 웨어 베어 사냥에 나섰다.
콥스 부족의 안내인은 웨어 베어를 보았던 곳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숲 안은 각종 맹수들이 득실거렸다. 그래서 일행은 손에 횃불을 챙겨 들고 있었다. 호위무사들은 활에 화살 시위를 먹이고 무기를 빼든 채 만약에 대비했다.
“우웁. 이게 무슨 냄새지?”
갑자기 피비린내가 진하게 풍겨 왔다.
선두의 콥스 부족 안내인이 즉시 걸음을 멈춘 채 주위를 살폈다.
그때 산체스의 눈에 나무 아래에 내동댕이쳐진 둥그런 물체가 들어왔다.
“저, 저게 뭐지?”
산체스가 손짓하자 에반스가 그쪽으로 다가갔다. 살펴보니 그것은 몸통에서 뽑혀 나온 사람의 머리통이었다. 에반스가 좀 더 불빛을 비추자 산체스가 그 머리통을 보고 외쳤다.
“후, 후디치!”
그동안 카베인을 따라다니며 수행 비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던 호위무사 후디치는 더 이상 산 사람이 아니었다.
“누가 이런 짓을…….”
산체스가 조심스럽게 머리통이 놓여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크게 뜬 후디치의 눈동자에는 경악과 공포가 가득했다.
거칠게 뜯긴 살점 아래로 척추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잘린 것이 아니라 숫제 통째로 뽑힌 것이었다.
그때 옆에 있던 에반스가 말했다.
“사람의 짓은 아닙니다. 또한 일반적인 맹수라면 물어뜯거나 발톱 자국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단숨에 목을 뽑았습니다. 엄청난 힘을 지닌 녀석의 짓입니다.”
“엄청난 힘을 지닌 녀석. 그게 뭔가?”
“손을 인간처럼 사용할 수 있는 존재 중 이런 힘을 지닌 녀석이라면…….”
“서, 설마 몬스터?”
그때 주위를 살피던 에반스의 눈이 빛났다.
“저기 후디치의 몸통이 있군요.”
에반스가 손짓으로 가리킨 곳을 바라본 산체스와 일행은 경악했다.
높은 나뭇가지에 후디치의 몸통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제법 시간이 흐른 듯 맥없이 늘어진 몸통에서는 더 이상 피도 흘러내리지 않았다.
“모, 몬스터의 짓이 분명합니다. 후디치의 목을 뽑은 뒤 나중에 먹기 위해 나무 위에 올려 둔 것 같습니다.”
호위무사 중 하나가 말했다.
“하지만 몬스터라니? 말도 안 되네.”
다른 호위무사가 그럴 리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카베인 님은 어디 있는 것일까요?”
“혹시 카베인 님이 몬스터를 발견하고 그 뒤를 쫓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오. 그렇다면 정말 몬스터를 볼 수도 있겠군.”
“무슨 소리야. 삼천 년 전에 멸족한 몬스터가 있을 리 없어.”
갖은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산체스가 에반스를 보고 말했다.
“시체부터 수습하게.”
“알겠습니다.”
에반스는 직접 나무 위로 올라가서 후디치의 몸통을 아래로 들고 내려왔다. 그러곤 뽑힌 머리통과 함께 그를 잘 묻어 주었다.
후디치를 묻어 주고 나자 산체스는 계속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까지 왔는데 웨어 베어를 잡지 않고 갈 수는 없어.”
일행도 그를 따라 숲속 깊숙이 움직였다.
그렇게 그들이 사라지고 얼마 후, 풀 속이 일렁이더니 거대한 실루엣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 실루엣은 4미터가 훌쩍 넘는 키에 적갈색 동체에서 우람한 근육이 꿈틀거리는 커다란 원숭이였다.
녀석은 덩치에 비해 현저히 작은 머리통을 가지고 있었지만 입안은 날카로운 이빨로 가득했다. 녀석은 후디치의 머리통과 나뭇가지에 걸어 둔 몸통이 보이지 않자 괴성을 내질렀다.
캬아아악!
녀석의 핏발 선 눈동자에서는 분노의 빛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사냥감이 사라져 버렸으니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한데 녀석의 앞가슴과 등 쪽에 핏물이 맺혀 있었다. 검에 베인 흔적이었다.
녀석은 평소라면 벌써 아물었어야 할 상처가 계속 쓰라리고 아프자,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지 나무를 타고 어디론가 움직였다.
웨에에엥!
녀석이 간 곳은 벌집이 있는 곳이었다. 거대 원숭이가 나타나자 벌들이 경고음을 보내며 벌집 주위를 맴돌았다. 거대 원숭이는 망설이지 않고 벌집에 다가가서 벌집의 한 귀퉁이를 뜯어내서는 냅다 도망쳤다.
애애애앵!
벌들이 거대 원숭이를 쫓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벌집으로 돌아갔다.
벌들이 사라지고 나자 거대 원숭이는 걸음을 멈추고 벌집을 짜서 그 안에 꿀을 앞가슴과 등 쪽의 상처에 발랐다.
“크르르르!”
그리고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두 명의 인간이 겁도 없이 거대 원숭이의 구역으로 들어왔다. 녀석들은 거대 원숭이와 같이 두 팔과 다리를 사용했는데 날카로운 이빨도, 발톱도 없었다.
그런데도 녀석들에게서 피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거대 원숭이는 거리를 두고 계속 녀석들을 살폈다. 그러던 중, 피 냄새가 강하게 나던 녀석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머지 한 녀석이 불을 피웠다.
거대 원숭이는 나무를 타고 조용히 불을 피우는 그 인간에게 접근했다.
“후욱후욱!”
콜록콜록 기침을 해 가며 그 인간은 불 피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거대 원숭이는 나뭇가지에 다리를 걸고 바로 아래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머뭇거림 없이 오른손을 뻗어 그 인간의 머리통을 쥐었다.
인간은 다급히 몸을 꿈틀거렸다. 거대 원숭이는 왼손으로 인간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곤 오른손으로 인간의 머리통을 감싸 쥔 상태로 근육에 힘을 주었다.
뚜두둑!
인간의 목에서 뭔가가 부러지고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뿌드득!
이어서 인간의 머리통이 허무하게 뽑혔다. 그때였다.
“이놈!”
푸른빛이 번쩍였다.
“캬아아악!”
비명과 함께 거대 원숭이는 들고 있던 인간의 머리통을 버리고 몸통만 챙겨 나뭇가지 위로 몸을 날렸다.
“서라.”
인간이 나무 위로 몸을 솟구쳤다.
자신보다 훨씬 작은 녀석이 날개도 없이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거대 원숭이는 들고 있던 인간의 몸통을 옆 가지에 던지고 도망쳤다.
“어딜!”
바우우웅!
섬뜩한 소리와 함께 다시 푸른빛이 거대 원숭이의 등판에 작렬했다. 등이 떨어져 나갈 듯 고통스러웠지만 거대 원숭이는 몸을 날렸다. 인간은 그런 거대 원숭이를 쫓아왔다.
거대 원숭이는 거의 한 시간 동안 그 인간에게 쫓겼다.
지능이 뛰어난 거대 원숭이는 인간을 근처 자이언트 스파이더가 있는 쪽으로 유인했다. 결국 자이언트 스파이더의 그물에 그 인간이 걸렸다.
스르르르!
자이언트 스파이더들이 몰려나왔고 인간과 자이언트 스파이더 간의 싸움이 벌어졌다.
거대 원숭이는 누가 이기든 상관없었다. 그래서 바로 그곳을 벗어나서 인간 먹잇감을 던져 둔 곳으로 돌아왔다.
한데 먹잇감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게다가 인간에게 당한 상처는 꿀을 발라도 잘 낫지 않았다. 하긴 오러 블레이드에 베인 상처가 잘 나을 리 없었다.
그때 거대 원숭이의 민감한 코에 인간의 냄새가 났다. 거대 원숭이는 곧장 그쪽으로 몸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