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 소매치기, 어새신, 마법사, 양아치Ⅳ
에반스는 마치 사랑하는 연인처럼 불타는 눈빛으로 뚫어져라 바라보는 레널드를 향해 다소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고작 열 대에 놀라다니. 역시 콘라드 후작령의 체비스 영지로 갔어야 했어.”
에반스의 말에 놀란 레널드가 다급히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모두 해서 삼십 대가 있소.”
에반스가 손가락 3개를 펼쳐 보였다.
“그, 그 말은 이십 대가 더 있단 말인가?”
“그렇소. 우리가 거래할 무기 양은 총 삼십 대 분량이요.”
레널드와 부르터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이, 이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분량이다.’
보통 제국의 상거래상 선금은 50퍼센트를 걸어야 물건을 받을 수 있었다. 30대면 3만 골드로 그 절반이면 1만 5천 골드가 필요했다.
루키아 상단에게 받을 돈 1천 골드까지 합쳐야 6천 골드밖에 되지 않는 레널드로서는 거래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 정도 자금력을 갖춘 자를 끌어들이는 것 말이다.
‘쳇, 그자를 만나야겠군.’
루키아 상단은 상단으로도 제국에서 손꼽히지만 대부사업, 즉 사채업으로도 유명했다.
오늘날 루키아 상단이 있기까지 산체스라는 대부업계의 큰손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상계 인물들은 없었다. 레널드는 루키아 상단으로부터 1만 골드를 빌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1만 골드를 빌려도 남는 게 얼마인데. 이건 무조건 내가 성사시켜야 한다.’
이렇게 되면 4만 천 골드가 아니라 그 세 배가 넘는 돈을 더 벌 수 있었다. 그 돈이면 꼴레오네파와 같은 조직을 몇 개는 더 만들 수 있었다.
“보아하니 자금도 없어 보이는데 우리 물량을 모두 소화해 낼 수 있겠소? 삼십 대면 무기 대금이 3만 골드란 것 정도는 알겠지요?”
레널드가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젊은 사람이 억측이 심하군. 그 정도 물량은 우리도 충분히 감당해 낼 수 있네. 3만 골드 가지고 뭘 그러나?”
레널드가 허세 좋게 말했다.
그제야 에반스는 안심이 된다는 듯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로군요. 나는 또 혹시 거래가 안 되면 어쩌나 걱정했소. 여기서 거래가 이뤄지지 못하면 번거롭게 다시 콘라드 후작령의 체비스 영지로 가야 해서 말이요.”
“체비스 영지라니. 그럴 필요 없네. 그 물건은 우리가 모두 구입할 것이니 말이야.”
“좋소. 그럼 물건은 언제 인도하면 되오?”
물건을 인도한다는 말은 곧 대금이 준비되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내일 시장이 열리고 그 이틀 뒤에 무기 거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니 나흘 뒤가 좋겠군.”
나흘 뒤라면 어떻게든 선금 1만 5천 골드를 구할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나머지 잔금도 그날 야만족으로부터 받은 말들을 싼 가격에 제국 상단에 처분한다면 얼마든지 지급이 가능했다.
“그럼 나흘 뒤에 봅시다. 참 대금 지불은 어떤 식으로 할 것이요?”
“나흘 뒤, 물건을 받을 때 선금으로 1만 5천 골드를 주고 그날 저녁에 나머지 잔금 1만 5천 골드를 지불하겠네.”
에반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든 나흘 뒤 3만 골드를 모두 지불한다는 소리로군요. 뭐 좋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에반스와 레널드는 일사천리로 계약 조건을 상의하고 계약서까지 작성했다.
“그럼 나는 이만 레지스트 철광촌으로 가서 물건들을 준비해서 다시 이곳으로 오도록 하겠소.”
“나흘 뒤에 보세.”
에반스는 레널드와 부르터와 악수까지 하고 유유히 꼴레오네파의 아지트를 빠져나왔다. 그러곤 호주머니 속에 넣어 둔 칼의 쪽지를 읽었다.
나는 사연이 있어서 현재 꼴레오네파에 머물고 있소.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그대 주인이 얼마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가요. 나는 반드시 복수해야 할 자가 있소. 그자를 내 손으로 죽일 수 있다면 나는 나의 영혼까지 그대의 주인에게 내줄 각오가 되어 있소. 이 점을 그대 주인께 잘 말해 주시오. 그래도 이런 나에게 관심이 있다면 연락 바라오.
“쯧쯧. 그자도 꽤 기구한 사연이 있나 보군.”
에반스는 레널드와 작성한 계약서와 함께 칼의 쪽지를 찢어 바람에 흩날려 버렸다.
그러곤 유유히 자신이 기거하고 있던 하란 마을의 관리 집으로 움직였다.
에반스는 양아치들과 작성한 계약 따위를 지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레널드의 예상대로 레지스트 철광촌의 대장간에서는 주로 연장이나 농기구를 만들었지 무기는 그리 많이 생산하지 않았다. 때문에 실제로는 30대 분량의 무기가 아니라 3대 분량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3대 분량으로 30대 분량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은 가능했다. 수레 안은 다른 물건으로 채우고 그 위에 무기를 덮어 마치 무기가 꽉 찬 수레처럼 만들면 되니 말이다.
에반스는 레지스트 철광촌의 관리에게 연락할 때, 영주가 30여 곳의 대장간과 철광산을 판 것처럼 소문을 흘리라고 명령했다. 또한 수레 30대에 3대 분량의 무기를 나눠서 마치 무기가 가득 찬 것처럼 보이게 싣도록 조치를 취해 두었다.
때문에 의심이 많은 레널드가 두 번째로 확인 차, 레지스트 철광촌에 사람을 보냈지만, 30대의 수레에 실린 무기들이 너무도 확실히 확인되었다.
이제는 부르터와 마찬가지로 레널드 역시 에반스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레널드는 그날 밤 약속대로 루키아 상단에 사람을 보내서 번외로 거래될 무기 양이 수레 30대라고 사실대로 밝혔다.
“뭐, 뭐라고?”
깜짝 놀란 곤잘레스가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레널드가 묵고 있는 여관을 찾았다.
레널드의 말이 사실일 경우, 곤잘레스 상단이 가져온 100대 분량의 무기들이 자칫 제값을 받지 못할 수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레널드는 30대 분량의 무기를 싼 가격에 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또 거래대금으로 받은 말들을 헐값에 다른 상단에게 팔려고 했다.
그럴 경우 곤잘레스가 생각하고 있었던 10배 가격에 팔려 했던 말의 가격대가 붕괴될 것이 분명했다.
“내가 그 삼십 대 분량의 무기를 10만 골드에 사도록 하겠소.”
레널드의 입장에서는 30대 분량의 무기를 직접 거래할 경우, 에반스란 자에게 줄 3만 골드를 제외하고 나서 대략 12만 골드를 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계산상의 결과에 불과했다. 중간에 어떤 돌발적인 변수가 발생할지 몰랐다. 때문에 10만 골드를 주겠다는 곤잘레스의 현실적인 제안은 거절하기 힘들었다.
“대신 선금으로 3만 골드를 주고 나머지 7만 골드는 추후 지급하도록 하겠소.”
제국 최고 상단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루키아 상단의 신용은 믿을 만했다.
“좋소.”
레널드는 전격적으로 30대 분량의 무기를 루키아 상단에 넘기기로 곤잘레스와 계약했다.
“하하하. 이거 에반스란 자 때문에 거저 7만 골드를 벌게 되었군.”
레널드는 크게 기뻐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칼이 레널드를 찾아왔다.
“찾으셨습니까?”
레널드는 홀렌스란 자와 계약서를 작성한 순간부터 부르터를 어떻게 할지 결정했다. 레널드가 내린 결정은 부르터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부르터는 이 일에 너무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다.
꼴레오네의 최측근인 부르터는 분명 이 일을 꼴레오네에게 알릴 것이 분명했다. 레널드는 이 사실을 꼴레오네가 아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다만 걸리는 것이 있다면 며칠 후 도착할 랄트족 장사꾼들과의 거래였다. 만약 부르터가 없으면 자칫 거래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었다.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네. 혹시 랄트족 장사꾼들을 잘 아는가?”
부르터는 칼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항상 어려운 일은 칼을 통해 해결해 왔다. 그렇다면 칼 역시 랄트족 장사꾼들에 대해 알 수 있다는 것이 레널드의 생각이었다.
“랄트족 장사꾼들이라면 잘 압니다. 그들과 밀무역을 성사시킨 게 바로 저이니 말입니다.”
“오오, 그래? 하하하.”
레널드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부르터는 쓸모가 없었다.
‘됐어. 그럼 생각대로 일을 처리해도 되겠군.’
레널드는 부르터를 제거하고 7만 골드를 자신이 몽땅 다 차지할 생각을 굳혔다.
레널드가 은밀하게 칼을 부른 것은 이 일을 바로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칼의 실력은 레널드도 잘 알았다. 칼이라면 일체의 잡음 없이 부르터를 제거하고 이곳 조직도 잘 통제할 수 있을 것이었다.
“칼. 그동안 이런 곳에서 고생 많았다. 내가 너를 이렇게 부른 것은 기회를 주기 위함이다.”
“기회요?”
“그래.”
레널드가 싱긋 웃으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칼은 굳은 얼굴로 레널드가 묵고 있는 여관을 빠져나왔다.
레널드는 칼에게 오늘 밤중 부르터를 제거하라고 명했다. 그러면서 여기에 남기를 원하면 이곳 조직을 맡길 것이고, 압실론 후작성으로 가기를 원하면 그렇게 해 주겠다고 했다.
압실론 후작성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에 칼은 잠시 갈등했다. 그곳에는 그의 철천지원수가 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처지로는 원수의 그림자도 밟을 수 없었다. 그곳으로 간다고 해도 원수를 갚을 방법은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지금 처지로 압실론 후작성으로 돌아가는 것은 그가 원하는바가 아니었다. 그래서 칼은 일단 레널드에게 여기에 남겠다고 했다.
‘어차피 부르터 그자는 내 손에 죽어야 할 자다.’
그동안 부르터가 저질러 온 온갖 패악한 짓은 다 알고 있는 칼이었다.
칼은 일단 부르터를 제거하고 자신이 이곳 하란 마을을 장악해서 힘을 키우기로 했다. 물론 그래 봐야 원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래도 이대로 복수를 포기한다면 칼의 삶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칼은 부르터를 제거하고 꼴레오네파의 조직을 장악하기 위해 비밀 아지트로 움직였다.
***
거처로 돌아온 에반스는 잠을 자려고 누웠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무래도 당장 칼을 만나야겠어.”
에반스는 외출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조용히 거처를 빠져나와 꼴레오네파의 아지트로 향했다. 에반스가 이토록 급히 움직인 이유는 아무래도 정보조직을 한시라도 빨리 정비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에반스는 오늘 칼을 거두어 내일이라도 당장 라일라와 칼을 영주성으로 보내 한시라도 빨리 정보조직을 구축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라일라와 칼이라면 잘 어울릴 것이다.”
최진철의 기억 속에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었다. 같은 무리끼리 서로 내왕하고 사귄다는 뜻인데 어새신인 그 둘이라면 분명 통하는 것이 있을 터였다.
그렇게 에반스가 막 꼴레오네파의 비밀 아지트로 들어가려고 할 때, 칼이 불쑥 나타났다. 에반스는 칼이 어딘가 나갔다가 돌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어이!”
에반스가 먼저 칼에게 아는 척을 했다.
“당신은?”
에반스를 발견한 칼이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에반스가 그런 칼을 보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너를 데리러 왔다.”
칼이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당신의 주인이 나를 찾은 것이요?”
“뭐 그런 셈이지.”
그 주인이 에반스 본인이니 에반스의 대답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반스의 애매모호한 대답에 칼이 눈살을 찌푸렸다.
“난 지금 당신과 장난칠 기분이 아니요.”
“장난은 무슨. 너를 데리러 왔다고 하지 않았나?”
“그대 주인이 나를 찾은 게 확실한 거요?”
“그렇다니까. 뭐 사실은 그 주인이 바로 나지만.”
“뭐, 뭐라고요?”
“내가 바로 에반스다. 그리고 카라스의 영주이기도 하지.”
“헉!”
에반스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칼이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 그럼 당신이 바로 철혈영주!”
“그래, 내가 바로 너희들이 철혈영주로 부르는 카라스의 영주, 에반스다.”
칼은 잠시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에반스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기억 속에 철혈영주에 대한 정보가 떠올랐다. 생각하면 할수록 정확히 카라스 영주와 일치하는 에반스의 모습을 보고 그가 정말 철혈영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왜 몰랐을까? 길고 검은 머리, 그리고 출중한 검술 실력에 잔인한 손속, 저자는 틀림없는 철혈영주다.’
털썩!
칼이 에반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가 미천하여 영주님을 몰라 뵈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너의 원수가 누군지 모르지만 네가 원수를 갚을 수 있게 내가 도울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돕도록 하지.”
에반스가 진심 어린 어투로 칼에게 말했다. 그러자 칼이 에반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의 원수는 램버튼 백작입니다.”
“뭐? 램버튼 백작이라고?”
램버튼 백작이라면 에반스도 너무도 잘 알았다. 바로 현 압실론 후작 부인의 오라비였던 것이다. 깜짝 놀라는 에반스를 보고 칼이 비장한 어투로 말했다.
“왜 제가 원수를 갚기가 어렵다고 했는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비록 계모이지만 어째든 램버튼 백작은 레너드에게 외삼촌이었다. 물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었지만 말이다.
“램버튼 백작이 왜 너와 원수가 된 것인가?”
에반스의 물음에 칼은 비교적 짧게 대답했다.
“램버튼 백작이 젊은 시절 제 모친을 좋아한 모양입니다. 우연히 모친과 마주친 그자는 단지 자신이 한때 좋아했던 여자가 다른 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산다는 이유로 제 부모님을 참혹히 죽였습니다. 그리고 제 여동생을 잡아가서 실컷 능욕하고 사창가로 보냈습니다. 그때 전 기사 수련을 받느라 집에 없어서 참변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으음.”
에반스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램버튼 백작의 평소 품성이 좋지 못하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런 참담한 짓까지 저질렀다니.’
“제 여동생은 그를 저주하다가 죽었습니다. 제 이 손을 잡고 램버튼 백작을 죽여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때부터 전 램버튼 백작을 죽이기 위해 살아왔습니다.”
“어새신이 된 것도 그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 혼자 힘으로 램버튼 백작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평소 원한이 많았던 그자의 곁에는 항시 기사들이 붙어 다녔습니다. 한 번은 혼자서 그를 암살하려 했다가 실패하고 오히려 크게 부상을 입었지요. 그때 도망치던 저를 구해 준 것이 꼴레오네란 자였습니다.”
“그래서 꼴레오네파에 있었던 거로군.”
“네, 당시 꼴레오네는 제 사정을 듣고 그를 도와주면 그도 저를 돕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를 도와 그의 조직을 압실론 후작령의 최고 조직으로 키워 주었지만 그는 제 부탁을 들어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랬겠지. 압실론 후작령에서 누가 감히 램버튼 백작을 해칠 수 있단 말이냐?”
“영주님, 제가 과연 복수를 할 수 있겠습니까?”
칼의 물음에 에반스가 바로 대답했다.
“램버튼 백작이 그런 짓을 저질렀다면 그가 후작 부인의 오라비라 하더라도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를 단죄하는 것은 네가 아니다. 법에 의해 처벌 받게 해야 할 것이다.”
다분히 원칙적인 에반스의 대답에 칼이 발끈해서 말했다.
“그는 여동생을 후작 부인으로 두고 있는 고위 귀족입니다. 설혹 처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곧 풀려 날 것이 분명합니다.”
칼의 말에 에반스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되지 않게 네가 만들어야겠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에게 내 정보조직을 이끌게 할 것이다. 내 힘을 이용해서 램버튼 백작이 절대 빠져나가지 못할 올가미를 씌우도록 해라.”
“허나 후작님께서 나서시면.”
압실론 후작령에서 압실론 후작의 명령은 곧 법이었다. 압실론 후작이 램버튼 백작을 살려 주고자 한다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후작님은 내가 맡겠다.”
에반스가 아는 부친, 압실론 후작은 자신에게는 몰라도 공명정대한 인물이었다. 램버튼 백작이 저지른 참담한 죄를 안다면 결코 이를 좌시하지 않을 터였다.
그때 칼이 에반스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만약 그 전에 후작님께서 돌아가신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뭐, 뭐라고?”
에반스는 꽤 놀란 듯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런 에반스에게 칼이 다시 물었다.
“영주님께서는 압실론 후작가의 장남으로 장차 후작님이 되셔야 할 분이십니다. 허나 영주님께서 후작이 되지 못하고 이복동생 분 중 한 분이 후작이 된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에반스는 지금껏 자신이 아닌, 이복동생이 압실론 후작가의 주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압실론 후작이 될 것이라는 야심도 없었다. 그는 오직 카라스 영지의 좋은 영주가 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칼의 말대로 압실론 후작이 죽고 그의 이복동생들 중 하나가 압실론 후작이 된다면 에반스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에반스의 스승이었던 홀렌스는 유언으로 에반스에게 훌륭한 제후가 되라고 했다. 그리고 집사인 올란도와 시녀장 엘렌 역시 에반스가 압실론 후작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문득 에반스의 기억 속에 압실론 후작이 카라스 영지로 떠나기 전, 그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압실론 후작은 에반스에게 영지민들을 잘 다스리라고 했다. 그러면 자신이 곧 다시 부를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아버님께서는 왜 나를 부르지 않는 것이지?’
그때 에반스는 압실론 후작이 현재 병석이 누워 있다는 것이 문득 생각났다.
‘아버님께서 나를 부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 부르고 있는 것이라면.’
부친에 대한 원망으로 인해 에반스는 부친의 처지에 대해 전해 생각하지 못했다.
에반스는 아무래도 압실론 후작성에 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복동생 중 하나가 압실론 후작령의 주인이 되는 문제는 절대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엇보다 현재 그가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 에반스는 반드시 압실론 후작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장남이고 내가 압실론 후작령의 적통이다. 그러니 내가 아닌, 이복동생 중 하나가 후작이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에반스가 강경한 어조로 칼에게 말했다. 그러자 칼이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제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습니다. 앞으로 영주님을 주인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저의 복수 역시 영주님의 말씀대로 법의 심판을 받게 하겠습니다. 영주님께서는 부디 공정하게 처결해 주십시오.”
“알았다. 그렇게 하마. 그런데 이 늦은 시간에 어딜 다녀오는 것이냐?”
에반스의 물음에 칼은 레널드의 일을 상세히 설명했다.
“레널드 그자가 부르터를 지금 당장 제거하라고 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으흠.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그래서 넌 어떻게 하기로 했지?”
“부르터 그자는 살아 있으면 패악한 짓만 더 저지를 놈입니다. 오늘 제 손으로 제거할까 합니다.”
“그렇게 해. 대신 죽이기 전에 내가 그자에게 잠깐 물을 것이 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를 따라오십시오. 혹시 영주님을 알아보는 자가 있을 수 있으니 일단 이것으로 위장을 하십시오.”
칼은 자신이 입고 있던 후드 달린 검은 로브를 에반스에게 벗어 주었다.
에반스는 그렇게 칼과 함께 꼴레오네파의 비밀 아지트 안으로 들어갔다.
칼이 모습만 드러내도 꼴레오네파의 입구 문은 알아서 열렸다. 그 정도로 꼴레오네파에서 칼의 영향력은 컸다.
“옆에 있는 분은?”
간혹 조직원들 중 에반스의 정체를 묻는 자가 있었다. 그때마다 칼은 간단하게 두목인 부르터가 불러서 데려가는 손님이라고 둘러댔다.
칼과 에반스는 아무런 저지 없이 두목인 부르터의 방 앞까지 갔다. 칼이 노크를 했다.
똑똑!
“누구냐?”
안에서 거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이다. 두목은 잠들었나?”
“네, 곤히 잠들었습니다.”
“그래? 문 열어라.”
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덜컥하고 문이 저절로 열렸다. 방 안에는 십여 명의 조직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칼을 보고 바로 허리를 숙였다.
“수고가 많다. 그만 나가 봐라.”
칼의 명령에 조직원들은 일체 토 하나 달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칼은 곧장 방 안쪽에 있는 부르터의 침대로 걸어갔다. 그러곤 드르렁거리며 자고 있던 부르터를 깨웠다.
“음냐. 뭐야?”
부르터가 눈을 뜨자 칼이 그의 멱살을 잡아서 침대 아래로 패대기쳤다.
철퍽!
“아이쿠. 이게 무슨 짓이냐?”
부르터가 큰 소리를 치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수하들을 찾는 모양이었다. 한데 칼의 옆에 후드를 덮어쓴 사람을 제외하고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부르터를 보고 칼이 친절하게 말했다.
“애들이라면 모두 밖에 나갔다.”
수하들이 없다면 부르터의 목숨은 위태로웠다.
“칼, 이게 무슨 짓이냐?”
부르터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가 뭐 하러 너를 찾아온 것 같나?”
이런 식의 칼의 등장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나, 나를 죽이면 총두목이 널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칼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건 곧 죽을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군. 죽기 전에 이분께서 물는 말에 대답이나 잘해라. 그렇지 않으면 끔찍한 고통 속에 죽게 될 것이다.”
칼이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나며 후드를 깊숙이 눌러쓰고 있던 에반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칼에게 너를 죽이라고 사주한 것은 레널드다.”
에반스가 자신을 죽이라고 한 배후를 밝히자 부르터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레널드 그자가 나를…… 칼, 나를 죽여서는 안 된다. 레널드 그자는 지금 조직을 배신하려 하고 있다. 이 사실을 총두목께 알려야 해.”
다급해진 부르터는 레널드가 왜 자신을 죽이려 하는지 모든 것을 밝혔다.
“레널드는 그 삼십 대의 무기를 판 돈을 자신이 혼자서 독식하려 하고 있다. 그러니 이 사실을 어서 총두목인 꼴레오네 님에게 알려야 해.”
“그럴 필요 없어.”
그때 에반스가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헉! 너, 너는 홀렌스!”
에반스를 본 부르터가 두 눈을 부릅떴다.
“네, 네가 어떻게 여기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부르터를 보고 에반스가 말했다.
“그건 알 필요 없다. 내 물음에 답은 했으니 편히 보내 주어라.”
에반스가 칼에게 눈짓을 보내며 뒤돌아섰다.
푹!
“컥!”
칼의 단검이 부르터의 겨드랑이 아래를 파고 들어가서 폐를 뚫고 심장까지 단숨에 관통해 버렸다. 부르터는 부르르 몸을 떨다가 이내 힘없이 축 늘어졌다.
“죽었습니다.”
칼의 말을 듣고 에반스가 말했다.
“이제 쓰고 있던 양의 탈을 벗을 때가 된 것 같다. 칼.”
사실상 꼴레오네파를 떠날 때가 됐다는 것을 언급한 것이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칼은 조직원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부르터의 죽음을 알리고 작별 인사를 했다.
“그동안 나를 따라 준 점 고맙다. 내가 너희들에게 마지막으로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 말밖에 없다. 지금 당장 여기를 나가서 너희들의 집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다시는 남의 등이나 처먹고, 순진한 아이들을 앵벌이나, 소매치기로 만드는 이런 조직원 따윈 되지 마라.”
칼은 그 말을 끝으로 에반스와 함께 꼴레오네파의 아지트를 빠져나왔다.
칼이 나선 뒤, 그의 말대로 조직원들은 하나둘씩 아지트를 떠났다.
다음 날 아침에 꼴레오네파의 아지트에 남아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에반스는 하란 마을에서 소매치기 루미나와 어새신 라일라, 마법사 루크에 이어서 양아치 칼을 얻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에반스로 인해 앞으로 어떤 숙명의 길을 걷게 될지 이때까지 알지 못했다.
(강철영주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