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습을 당한 영주가 의식을 잃고 성에 실려 왔을 때 치료사 델루이는 영주가 크게 다쳤구나 생각했다.
지금까지 성 밖에서 수백여 차례의 암습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영주는 당당히 말을 타고 돌아왔다. 혹시 부상을 입었어도 그것을 아랫사람들 앞에서 내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강인한 영주가 들것에 실려 왔으니 당연히 목숨이 경각에 달린 엄중한 부상을 입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델루이가 아무리 살펴봐도 영주는 아무 이상도 없었다.
라르손이 다급히 델루이에게 물었다.
“어떠신가?”
“그, 그것이…….”
델루이가 말하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자 라르손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서, 설마 어디 안 좋은 것인가?”
“그게 아니라. 지금 영주님께서는…….”
“영주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십니다.”
“뭐라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 라르손에게 델루이가 말했다.
“아주 깊게 잠드셔서 당분간 깨우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라르손은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모르니 그대는 옆방에 대기하고 있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치료사 델루이가 영주의 방을 나서자 라르손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는 그의 주군을 보며 말했다.
“허어. 주무시다니. 간이 크신 것인지 아니면 이제 죽음에도 무신경해지신 것인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던 라르손은 잠든 에반스의 침대 옆에 서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혹시 있을지 모를 암습에 대비해서 말이다.
그때 에반스가 잠꼬대를 했다. 뭐가 좋은지 히죽히죽 웃다가 화를 냈다가 갑자기 눈물까지 흘렸다.
라르손은 그런 에반스를 깨우려다가 치료사의 말이 떠올라 계속 자게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한나절을 자고 나서 에반스가 눈을 떴다.
‘여긴……?’
익숙한 방 안의 모습이었다. 에반스가 카라스 영지의 영주로 7년을 사용해 온 자신의 방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라르손의 모습을 발견했다.
“라르손.”
“아! 영주님. 괜찮으십니까?”
걱정스런 얼굴로 묻는 라르손을 보고 에반스는 자신도 모르게 살짝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 미소는 바로 사라지고 예의 무뚝뚝한 철혈영주 에반스의 말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호들갑 떨지 마라. 나는 괜찮다.”
에반스는 몸을 일으켰다. 소드 마스터가 된 까닭인지 자신의 몸이 제 몸 같지 않았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병사와 하인, 하녀들의 조잘거림까지 그의 귀로 선명하게 들려왔다.
또한 지금까지 보지 못한 것들이, 가령 벽에 붙어 있는 벼룩이라든지 창밖 나무 사이에 붙어 있는 매미라든지 별 시답잖은 것들이 죄다 보였다.
에반스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몸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겠군.’
에반스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라르손은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에반스에게 뭐라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랬다가 에반스가 또 호들갑을 떤다며 호통을 칠 테니 말이다.
꼬르르!
그때 에반스의 배에서 배고프다며 아우성을 쳤다. 그러고 보니 에반스는 거의 하루 가까이 먹은 것이 없었다. 눈치 빠른 라르손이 즉시 말했다.
“식사 준비시키겠습니다.”
라르손이 나가고 나자 에반스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거울 앞으로 갔다.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고 외양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단지 피부가 더 깨끗해졌고 강하고 날카로워 보였던 턱 선과 눈매가 한층 부드러워져서 예전보다 선해 보였다.
살짝 웃자 제법 매력적이었다.
턱 선을 만지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거울을 바라보고 에반스가 중얼거렸다.
“이런 외모에 아직 애인조차 없다니, 아깝군.”
최진철의 기억까지 가지게 된 에반스는 사고 자체가 많이 변해 있었다. 예전의 딱딱하고 우울했던 에반스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말투는 예전 그대로 차갑고 무뚝뚝했다.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은 의외로 소박했다. 스프와 호밀 빵, 그리고 중간으로 익힌 스테이크가 다였다. 하지만 그 맛은 기가 막혔다.
에반스는 십 분도 안 돼 음식들을 모두 먹어 치웠다.
“더 가져오라고 할까요?”
라르손은 집사 올란도와 시녀장 엘렌이 죽은 후, 그들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아니. 됐다.”
에반스는 검소했다. 어린 시절부터 에반스는 사치와 담을 쌓고 살았다. 아니, 사치를 경험하지 못했다고 봐야 옳았다. 검술 수련 이외에 사교 활동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에반스는 영주라기보다는 거의 기사에 가까웠다. 사실 에반스가 영주로서 한 일은 별로 없었다. 그저 공정하게 세금을 거두며 영지 내 치안을 예전보다 강화하고, 자주 순시를 다녔을 뿐이었다.
그 이외의 시간 동안 에반스는 여느 기사들처럼 검술을 수련했다.
에반스는 영지 문제는 대부분 영지 관리들에게 일임시켰다.
단지 영지 관리들은 철혈영주인 에반스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그동안 비교적 공평무사하게 영지를 운영해 왔던 것이다.
그런 에반스가 이제 궁극의 경지라는 소드 마스터가 되었으니 더 이상 죽어라 검술 수련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앞으로는 검술을 더 가다듬는 데 치중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하루에 한두 시간이면 충분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하루에 적게는 8시간에서 많게는 12시간까지 하던 검술 수련 시간이 줄어들었다. 에반스는 그 시간 동안 할 일이 없어졌다.
에반스가 가장 먼저 눈을 돌린 곳은 바로 영지 업무였다. 최진철의 기억에 따르면, 정치는 꽤 흥미로운 일이었다. 물론 최진철이 살았던 대한민국과 이곳 트렌시아 제국은 기본적으로 정치 형태가 달랐다.
하지만 국가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이라는, 근본적인 취지는 다를 것이 없었다. 단지 에반스는 이미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유지하고 행사할 것인지만 결정하면 됐다.
소드 마스터가 된 에반스의 초보 정치 활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에반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새로운 집사와 시녀장을 뽑는 일이었다. 그 일에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라르손이었다.
“영주님.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입니까?”
눈시울을 붉히며 라르손이 물었다.
“그게 아니라 너도 이제 기사로서 수련에 매진할 때가 된 것 같아서 내린 판단이다. 나는 네가 집사나 시녀장이 아닌, 실력 있는 기사단장으로 내 곁에 있어 주기를 원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에반스의 말에 그제야 라르손의 얼굴이 밝아졌다.
“네, 잘 알겠습니다. 영주님의 곁을 지켜 드리는 든든한 기사단장이 되기 위해 오늘부터 수련에 박차를 가하겠습니다.”
라르손은 결연한 표정으로 잠시 에반스의 곁을 떠났다.
문제는 라르손만큼 믿을 만한 자가 없다는 점이었다. 집사와 시녀장을 뽑는다는 공지가 나간 후, 에반스를 찾아온 자들은 죄다 암살자들뿐이었다.
소드 마스터인 에반스가 그런 암살자들에게 당할 리 없었다. 암살자들의 목이 줄줄이 성문에 내걸리자 더 이상 집사와 시녀장이 되겠다고 찾아오는 자들도 없었다.
***
트렌시아 제국의 수도 바룬은 대제국의 중심지에 걸맞게 인구 천만의 대도시였다. 바룬은 제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바룬에서 갖은 술수와 음모에 휘말려 멸족하는 귀족들은 흔하디흔했다.
귀족 중심의 트렌시아 제국은 건국 후, 500년이 흐르면서 귀족의 수도 거의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실제 지나가는 사람 중 다섯 명에 한 명은 귀족이라는 말도 있었다.
지금은 귀족들도 돈과 권력이 없으면 멸문당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었다.
한때, 제국의 최고 명문 귀족가였던 메디슨 가문도 멸문의 길을 걷고 말았다.
트렌시아 제국의 개국 공신가였던 메디슨 백작 이후, 300년 동안 메디슨 가문은 줄곧 제국의 내무장관을 비롯한 중요 관직을 맡아 왔다.
하지만 200년 전 제국이 내란에 휩싸였을 때, 정통성을 주장하며 황태자의 편에 섰다가 결국 2황자인 리처드가 승리하면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황제로 등극한 리처드 2황자, 즉 리처드 1세는 개국 공신 가문인 메디슨 백작가를 바로 내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중앙 정계로의 진출을 막아 버렸다. 더 이상 권력의 중심에 서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그렇게 20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메디슨 백작가는 수도에서 주로 한직을 겉돌면서 작위도 남작가로 추락했다.
이제는 그 말단 관직마저도 뺏기면서 메디슨 가문은 더 이상 제국의 귀족 가문이라 불릴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허어. 이제 죽어서 선조의 얼굴을 어찌 뵐 것인가?”
40대 중반의 마른 체형에 제법 깐깐해 보이는 얼굴의 귀족이 힘없이 말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젊은 귀족 영애가 말했다.
“아버님, 걱정 마세요. 가문은 제가 다시 일으켜 세울 게요.”
중년의 귀족 남자는 그런 귀족 영애를 보며 한숨을 내 쉬었다.
16, 17세로 보이는 귀족 영애는 외모도 출중하고 두 눈이 초롱초롱한 것이 여간 영특해 보이지 않았다.
“휴우, 네가 아들로만 태어났었어도.”
중년의 귀족 남자는 바로 메디슨 남작이었다. 그에게는 자식이 딸 에이미 하나뿐이었다. 부인은 딸을 낳은 다음 해 전염병으로 죽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재혼 얘기가 있었지만 아내를 너무나도 사랑했던 그는 재혼 대신 딸 에이미를 키우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가 갑자기 말단 관직에서 내쫓긴 것은 뇌물 수뢰 혐의 때문이었지만 실제로는 상급자에게 뇌물을 바치지 못해서였다.
워낙 청렴하고 매사에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는 메디슨 남작은 백성들 사이에서는 존경의 대상이었지만 그 위의 상급자들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았다.
그러던 중 새로 부임한 관청의 우두머리가 말도 안 되는 꼬투리로 메디슨 남작을 잘라 버렸다. 메디슨 남작이 뇌물을 받았다고 죄를 덮어씌운 것이다.
사실 다른 관리들은 몰라도 메디슨 남작이 그럴 리 없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알았다.
하지만 관청의 우두머리는 제국의 실세인 국방장관 레이놀드 후작의 아들이었다. 그 누구도 메디슨 남작을 위해 나서지 못했다.
결국 메디슨 남작은 퇴직금 한 푼 받지 못하고 관청에서 내쫓겼다.
그런 메디슨 남작 앞에 상인으로 보이는 자가 나타났다.
“오오. 이게 누군가? 메디슨가의 그 잘난 분이시군.”
그는 평소 에이미를 눈독 들이고 있던 자로 이번 소식을 듣고 득달같이 달려 온 것이다.
“입 닥쳐라. 감히 어디서.”
“허어. 아직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모양이군. 어디 두고 봅시다.”
상인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사라졌다. 그리고 한 달 후 다시 그들 부녀 앞에 나타났다. 상인의 말대로 세상은 험난했다. 관직을 잃고 난 메디슨 남작은 이제 매 끼니를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따님을 내게 주시오. 그럼 백 골드를 주겠소.”
1골드면 5인 가족이 1달은 먹고 살 수 있었다. 100골드면 메디슨 남작이 끼니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지, 지금 나보고 내 딸을 팔라는 것이냐?”
메디슨 남작이 버럭 화를 내자 상인이 능글맞게 웃으며 옆에 서 있던 에이미에게 말했다.
“흐흐흐. 내 말만 잘 들으면 네 애비를 관청에 도로 복직시켜 줄 수도 있다.”
“이, 이놈이. 썩 꺼지지 못하겠느냐?”
메디슨 남작의 호통에 상인은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흥. 아직 덜 굶주렸군. 어디 한 사흘 굶어 보쇼. 그런 말이 나올지 말이요. 흐흐흐.”
상인은 곧장 뒤돌아서 부녀들 앞에서 사라졌다.
다시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에이미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메디슨 남작에게 말했다.
“아버님. 이제 식량도 얼마 남지 않았어요.”
메디슨 남작과 에이미는 일거리를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귀족인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수도에 없었다.
허드렛일이라도 하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평민들이 거절했다. 귀족에게 일을 시켰다가 다른 귀족의 눈에라도 띄는 날이면 그들 입장만 곤란해졌다.
“알았다. 내가 알아서 하마.”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메디슨 남작도 별 뾰쪽한 수는 없었다. 친했던 관청의 관리들을 찾아갔지만 그들은 그를 만나 주지도 않았다.
힘없이 집으로 돌아온 메디슨 남작은 에이미와 한 남자가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흐흐흐. 너만 내게 오면 네 애비는 원래 자리를 찾을 수 있다. 너도 이대로 메디슨 가문이 멸문하는 걸 두고 볼 생각은 아니겠지?”
“그, 그건…….”
“현명하게 판단해라.”
남자는 바로 에이미를 눈독 들이고 있던 그 상인이었다.
하루가 더 지나고 메디슨 남작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심을 굳혔다.
“에이미, 우리 수도를 떠나자.”
“네?”
에이미가 깜짝 놀랐다.
“내 아무리 궁핍해도 너를 팔아서까지 일신의 영달과 가문을 지키고 싶진 않구나.”
메디슨 남작은 어제 에이미와 상인이 나눈 대화를 엿들었다고 밝혔다.
“아버님, 하지만 저만 희생하면.”
“절대 안 된다. 너는 이 애비가 반드시 훌륭한 배우자를 찾아 결혼시킬 것이다. 가문을 일으키는 것도 이 애비가 할 것이다.”
메디슨 남작은 몰래 집을 정리해서 그 돈으로 수도 바룬을 떠났다. 혹시 상인에게 들키면 그자가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몰라 은밀히 움직였다.
“어디로 가실 거예요?”
에이미의 물음에 메디슨 남작이 말했다.
“압실론 후작령에 내 사촌이 살고 있다. 일단 그곳으로 가자.”
메디슨 남작은 에이미와 압실론 후작령으로 향했다. 그리고 사촌이 사는 곳을 찾아갔다. 한데 남작의 사촌은 이미 3년 전에 죽었고, 가세가 기울어서 그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살고 있었다.
결국 의지할 데가 없어진 메디슨 남작과 에이미는 여행 경비마저 떨어지자 날품팔이를 하며 계속 정착할 곳을 찾아다녔다.
다행히 두 부녀가 귀족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들은 평민들의 궂은일이나마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어떻게 흘러 들어온 곳이 바로 카라스 영지였다. 카라스 영지는 압실론 후작령에서 가장 살기 좋은 영지로 손꼽혔다.
오랜 여정으로 거지 몰골을 하고 있던 두 부녀는 카라스 영지에서 일자리를 구해 살기로 결정했다.
다른 영지와 달리 카라스는 치안 상태가 좋고 일자리가 많았다. 그래서 부녀가 살기에 가장 적합했다.
메디슨 남작과 에이미는 카라스 영지의 빈민촌에 허름한 집을 구해서 그곳에서 살기 시작했다.
충분한 학식과 소양을 갖춘 메디슨 남작과 에이미는 카라스 영지 행정서사의 일과 영지 관리의 자식들을 가르쳤다.
빈민촌에서는 그런 부녀를 선생님이라며 깍듯이 대했다. 메디슨 남작도 빈민촌의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영지 관리에게 가서 대신 억울함을 호소했다.
에이미 역시 가르치는 영지 관리에게 부탁해서 일이 잘 해결될 수 있게 했다.
또한 에이미는 빈민촌 아이들 중 글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서 무료로 학습소를 운영했다.
메디슨 남작과 에이미는 카라스 영지 빈민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
에반스는 집사와 시녀장을 공개 모집한 후 영지 관리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그동안은 라르손이 그를 대신해서 영지 관리들이 가져온 서류에 영주의 인장을 찍었다. 그 시간에 에반스는 검술 수련을 해 왔던 것이다.
“앞으로 집무실에서 직접 보고를 받을 것이다. 그러니 각자 정해진 시간에 찾아와서 혼선을 빚는 일이 없게 하라.”
에반스는 아침에서 정오까지 오전의 4시간을 정무를 돌보는 시간으로 잡았다. 관리들은 각자 30분 간격으로 정해진 시간에 영지 일을 보고해야 했다.
갑작스런 이런 결정에 영지 관리들은 잔뜩 긴장한 표정들이었다. 그들은 에반스가 두려워서 그동안 제대로 해 먹지도 못하고 영지를 관리해 왔다.
그러다가 에반스가 영지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확신하고 몰래 해 먹으려 했는데, 갑자기 이런 결정이 떨어진 것이다.
그들은 혹시 자신들이 비리를 저지려는 것을 에반스가 눈치챈 것이 아닌지 전전긍긍했다.
그런 영지 관리들의 속내를 다 간파하고 있다는 듯 에반스가 말했다.
“중요한 것은 미래다. 과거 너희들의 잘못이 무엇이었든 지금부터 열심히 하면 그 죄는 용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알겠나?”
“네!”
확실히 찔리는 것이 있었던지 영지 관리들은 우렁차게 대답했다.
오전 정무를 돌보고 나서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에반스는 대개 영지 순시를 나섰다. 하지만 그가 돌아보는 곳은 군사시설이나 중개무역이 이뤄지는 시장과 영지 번화가였다.
에반스는 사실 인구 40만의 영지민들이 어떻게 살든 관심도 없었다. 그냥 보기에 영지가 번듯하니 살기 좋은 영지이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카라스는 앞으로 가장 살기 좋은 영지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순시에 나선 에반스는 평소에 가는 길이 아닌 빈민촌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영주님, 그쪽은 천한 것들이 사는 곳입니다.”
라르손을 대신해서 에반스의 호위를 맡은 나이트 베르만이 앞을 가로막았다.
에반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베르만, 너는 지금 내 영지민을 천하다고 했다. 그 말은 곧 카라스 영지가 천하다는 것이고 그 영주인 내가 천하다는 뜻이 아닌가?”
에반스의 말에 나이트 베르만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대답했다.
“여, 영주님께서 천하시다니요? 제가 언제 그런 말을…….”
“닥쳐라. 너에게 묻겠다. 네가 입고 있는 그 갑옷과 검과 방패는 누구 돈으로 구입한 것인가?”
“영주님이십니다.”
나이트 베르만이 즉각 대답했다.
“그렇지. 나지. 하지만 엄연히 말해 그 돈은 영지민들이 낸 세금으로 구입한 것이다. 그런데 그 돈으로 기사의 위용을 갖추고 있는 자가 어찌 영지민들을 천하다고 말하는 것인가? 이는 베르만, 네가 네 얼굴에 스스로 침 뱉는 것과 같다.”
“죄, 죄송합니다.”
“앞으로 영지민을 천하다고 말하는 자는 더 이상 내 기사와 병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에반스의 말에 나이트 베르만과 주위 병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큰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영주님.”
그런 모습을 보고 에반스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명했다.
“가자.”
에반스는 곧장 빈민촌으로 움직였다.
주위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았던 영지민들은 철혈영주의 말을 신속히 전파했다.
“정말 영주님이 그랬다고?”
“그렇다니까.”
“허어.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거지?”
“그러게 말이야.”
그 소식을 접한 영지민들은 자신들을 챙겨 준 영주가 고맙기보다는 대체 왜 그런 말을 했는지를 더 궁금하게 여겼다.
초여름이지만 오후 무렵은 한창 더울 시기였다.
낡은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선 빈민촌은 유난히 덥게 느껴졌다. 따닥따닥 붙어 지어진 폐건물들이 도무지 바람이 드나들 통로를 만들어 주지 않아서였다.
에반스는 빈민촌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퀴퀴한 냄새를 맡았다.
“이게 무슨 냄새지?”
주위를 살피자 배설물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길가마다 웅덩이에 음식물 찌꺼기들이 썩고 있었다.
그런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헐벗은 아이들이 해맑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이들은 영주가 나타난 사실도 몰랐다.
“위생 상태가 정말 최악이로군. 우선 상하수도 시설부터 만들어야겠어.”
오물 냄새와 질척이는 진창에 병사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그들의 영주가 갑자기 말에서 내렸던 것이다.
에반스는 망설이지 않고 진창을 걸어서 빈민촌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의 상태며 빈민들이 생활 모습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물을 구하려 해도 근처에 우물이 없어서 서너 시간을 걸어서 이웃 마을에 가야 했다.
그러니 몸을 씻고 빨래를 한다는 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우물도 몇 군데 파야겠군.”
에반스는 빠르게 빈민촌의 문제점을 파악해 나갔다. 그때였다.
“이게 무슨 소리지?”
아이들이 일제히 뭔가를 따라 말하는 소리를 듣고 에반스가 그쪽으로 움직였다.
낡은 폐가 안에서 십여 명의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그 앞에는 한 젊은 여자가 벽에 뭔가를 적어 놓고 그것을 아이들에게 따라 읽게 하고 있었다.
“기다려라.”
에반스는 기사와 병사들은 남겨 두고 혼자 폐가로 들어갔다.
귀족인 에반스가 나타나자 수업이 바로 중단되었다.
“누구세요?”
젊은 여자는 카라스의 영주인 에반스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긴 영주가 이런 빈민촌에 나타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니 알아보지 못하는 게 오히려 당연했다.
“지나가다가 글 읽는 소리가 들려서 왔다. 여기서 뭐하는 것이냐?”
에반스의 물음에 젊은 여자는 약간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저는 무료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세금을 낼 처지가 못 됩니다.”
“세금? 무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누가 세금을 받는단 말이냐?”
“그것이 얼마 전 영지 관리께서 오셔서 아이들을 계속 가르치려면 세금을 내야 한다고.”
“뭐? 수입이 없는데 세금은 무슨…… 알았다. 그 일은 내가 해결해 주마. 그런데 네 이름이 무엇이냐?”
뭘 어떻게 해결해 주겠다는 건지 모르지만 젊은 여자는 마치 자신이 영주라도 되는 양 당당하게 얘기하는 젊은 귀족 남자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저는 에이미라고 합니다.”
“에이미라. 혹시 내 밑에서 일해 볼 생각은 없느냐?”
“네?”
“믿을 만한 시녀장이 필요해서 말이다.”
에이미는 젊은 남자가 이웃 영지의 귀족이거니 생각했다. 보통 젊은 귀족 남자들은 이런 식으로 평민 여자들을 꼬여 내서 실컷 데리고 놀다가 버리곤 했다.
그런 허접한 유혹에 넘어갈 에이미가 아니었다.
“한 달에 십 골드를 주신다면 생각해 보겠어요.”
10골드면 큰돈이었다. 에이미는 당연히 젊은 남자가 미친년이라며 화를 내고 사라질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젊은 남자의 대답은 순식간에 에이미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알았다. 십 골드 주지.”
“네?”
“그럼 내일 아침에 영주성으로 오너라.”
“저, 저기…….”
에반스는 자신의 말을 끝내자 에이미가 부르는 것도 무시하고 곧장 폐가 밖으로 나갔다.
에반스는 그 길로 곧장 빈민촌 깊숙이 더 들어갔다. 그런 에반스를 쫓아서 기사와 병사들이 우르르 그 뒤를 쫓았다.
에반스는 빈민촌 내부를 더 천천히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빈민촌 외곽에 늘어선 술집들을 보았다.
“저곳은 뭐지?”
에반스의 물음에 나이트 베르만이 바로 대답했다.
“저곳은 사창가입니다.”
“사창가!”
에반스가 눈살을 찌푸리자 나이트 베르만이 설명했다.
“이곳은 낮에는 음산할 정도로 조용하고, 밤이 되면 붉은 불빛이 번쩍거리는 곳입니다. 빈민촌 자체가 이렇게 시궁창 꼴이지만 그 외곽으로는 이렇게 술집들이 번창해 있습니다. 또한 이런 술집 주변에는 몸 파는 여인들이 득실득실하지요. 빈민들도 먹고살아야 하니까요. 돈 벌기 쉬운 일 가운데 하나가 매춘이기 때문이죠.”
“그런 불쌍한 여인들 뒤에는 그녀들의 수입을 노리는 놈팡이들이 꼬여 들었겠지. 여인들에게 빌붙은 자들이 돈을 쓸 곳이란 뻔하다. 도박과 술, 그게 아니면 마약뿐이지.”
대개 귀족들은 빈민촌 여자들의 이런 안타까운 처지를 잘 몰랐다.
“그, 그것을 어떻게?”
나이트 베르만이 놀라 묻자 에반스가 씁쓸해 하며 말했다.
“어디나 사람 사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네?”
이해되지 않는 소리를 하는 에반스를 나이트 베르만이 멍하니 쳐다보았다.
카라스 영지의 치안 상태는 트렌시아 제국에서 최고라고 불러도 됐다. 하지만 그런 카라스에도 이런 어둠은 존재했다.
영주인 에반스의 햇볕이 이곳 빈민촌에서는 미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에반스를 쫓아 폐가를 나온 에이미는 영지 기사와 병사들에게 치였다.
“저리 비켜.”
그들이 황급히 뒤를 쫓은 사람은 바로 에이미를 고용한 젊은 귀족이었다.
“저 사람이 누구기에……?”
영지 기사와 병사들이 호위할 정도라면 영주의 친척일 가능성이 높았다.
카라스 영주는 철혈영주로 유명했다. 에이미는 그의 눈 밖에 나면 바로 목이 잘려 성문에 내걸린다는 소문이 떠오르자 두려움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선생님!”
그녀가 걱정되었던지 아이들이 폐가 밖으로 나왔다.
“얘들아. 별일 아니니 모두 들어가서 하던 수업 계속 하자.”
에이미는 불안감에 떨며 마저 수업을 진행했다.
수업이 끝난 후, 그녀는 곧장 집으로 갔다.
집에는 한 상단에서 회계 업무를 맡아 보던 메디슨 남작이 음식을 준비 중이었다.
“어서 오너라. 오늘은 네가 좋아하는 스테이크다.”
“스테이크요?”
“그래, 상단주가 저번 일로 고맙다며 고기를 주지 뭐냐.”
“하지만 그 고기는 이곳 사람들에게 스프를 끓여 주면 더 좋지 않을까요?”
메디슨 남작과 에이미는 돈이 생기면 항상 고기를 사서 영양이 부족한 빈민들에게 스프를 끓여 골고루 나눠 주었다.
“허허허. 걱정마라. 고기는 충분히 남아 있다. 오늘은 너와 오붓하게 저녁 식사를 했으면 해서 이 아비가 특별히 준비한 거다.”
에이미는 오늘이 자신의 생일인 것도 모르고 있었다. 빈민촌에 살면서 그녀는 자신보다 이곳 사람들을 걱정하고 무언가 생겨도 그것을 어떻게 빈민들에게 나눠 줄지를 고민했다.
‘착한 녀석. 넌 틀림없이 좋은 남자 만나서 행복하게 살 거다.’
메디슨 남작은 서둘러 식사 준비를 했다. 그리고 두 부녀가 마주 앉아서 오랜만에 고기를 먹었다. 그런데 음식을 먹는 에이미의 표정이 좀 이상했다.
“에이미야. 고기가 맛이 없니?”
“네?”
에이미는 메디슨 남작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듣지도 못했다. 무슨 말 못할 고민이 있는 게 틀림없어 보였다.
“에이미, 무슨 일이니?”
메디슨 남작이 나이프와 포크를 식탁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에이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오늘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생긴 일을 얘기했다.
“뭐, 뭐라고? 그자가 너 보고 내일 아침에 영주성에 오라고 했단 말이냐?”
“네, 그 사람 뒤를 기사와 병사들이 졸졸 따라다니는 것으로 봐서 아무래도 영주와 관련 있는 인물 같아요.”
“철, 철혈영주!”
카라스에서 사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의 영주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메디슨 남작 역시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번 일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여식인 에이미와 연관된 일이었다. 메디슨 남작은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있겠느냐? 내일 나와 같이 영주성으로 가서 그자를 만나 잘 얘기해 보자. 비록 몰락했다지만 나는 아직 제국의 귀족이다. 내 입장을 봐서 그자도 이해해 줄 것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메디슨 남작은 걱정이 되었다. 그러자 식탁의 분위기가 급격히 가라앉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메디슨 남작이 에이미에게 예쁘게 포장된 뭔가를 건넸다.
“이게 뭐에요?”
“풀어 보렴.”
에이미가 포장지를 풀자 예쁜 머리핀이 나왔다.
“이건.”
“스무 번째 생일을 축하한다, 에이미.”
자신의 생일도 잊고 살았던 에이미는 감격 어린 눈으로 메디슨 남작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좋은 날 눈물은…….”
메디슨 남작이 에이미를 위로하며 그녀를 가볍게 안아 주었다.
“고마워요, 아빠.”
어릴 때 이후 오랜만에 ‘아빠’ 소리를 듣고 메디슨 남작은 크게 기꺼워했다.
다음 날 아침, 잔뜩 긴장한 두 부녀가 영주성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냐?”
성문 앞에서 경비병이 두 부녀를 막아섰다. 그러자 에이미가 나서 어제 일을 설명했다. 그러자 경비병이 그 사실을 경비 초소에 알렸다.
잠시 후, 경비 초소에서 기사가 뛰어나와서 두 부녀에게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영주관에서 연락은 받았습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기사가 병사들과 함께 직접 두 부녀를 호위해서 영주관으로 데리고 갔다.
성내 영주관에 도착하자 입구에서 대기 중이던 하인들이 두 부녀를 영주관 안으로 안내했다.
그제야 메디슨 남작과 에이미는 어제 만났던 그 젊은 남자 귀족이 카라스의 영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매일 아침이면 에반스는 영지 관리들의 보고를 받았다. 그 시간을 불과 10여 분 앞두고 에반스는 어제 빈민촌에서 만났던 젊은 여자가 찾아왔다는 보고를 받고 자투리 시간 동안 그녀를 만나겠다고 명했다.
얼마 후 그녀가 중년의 한 남자와 함께 에반스 앞에 나타났다.
먼저 중년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에반스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카라스의 영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메디슨 남작으로 삼 년 전부터 카라스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저의 여식은 영주관의 시녀장을 맡을 정도의 그릇이 못됩니다. 그러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메디슨 남작? 그렇다면 귀족 영애였던가? 귀족 영애가 빈민촌에서 무료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군.”
귀족이라고 다 같은 귀족이 아니었다. 메디슨 남작과 에이미의 행색을 보아하니 몰락한 귀족이 분명했다. 하지만 가문이 망했다고 그 인물까지 쓸모없는 건 아니었다.
에반스가 메디슨 남작과 제이미를 번갈아 쏘아보자 두 부녀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에반스 역시 영지민들이 자신을 철혈영주라 부르며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동안 그 점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는데 앞으로 영지 개혁을 위해서는 이미지를 온화하게 변화시킬 필요가 있겠구나 생각했다.
에반스가 메디슨 남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메디슨 남작이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전에 무슨 일을 했지?”
메디슨 남작은 수도 관청에서 말단 행정관을 맡았다고 대답했다.
“그래?”
에반스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메디슨 남작을 쳐다보았다.
그때 첫 번째 영지 관리가 보고할 시간이 되었다.
“너희는 기다려라.”
에반스의 명령에 두 부녀는 꼼짝없이 영주관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두 부녀는 영주관의 귀빈들이 머무는 호화로운 접객실에 안내되었지만 기다리는 내내 마치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듯 안절부절못했다.
그때 에반스는 영지 관리로부터 영지 일을 보고 받았다.
동시에 그는 영주 전속 마법사 라보스를 불러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메디슨 남작이 몸담았던 관청에서 그에 대한 평가를 알아보게 명했다.
아무리 몰락한 귀족 신분이라고 해도 귀족 영애가 빈민가에서 무료로 아이들을 교육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자식을 보면 그 부모를 알 수 있는 법.
에반스는 메디슨 남작이 자신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닐까 궁금했다.
4시간의 오전 정무가 끝났을 때 라보스는 당장 알아낼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종합해 보고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특별한 명을 내리지 않았던 에반스였기에 라보스로서는 온갖 방법을 모조리 동원했던 것이다.
“으음. 신망이 두터운 관리였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관청 이외에 그자의 주변까지 조사해 봤는데 청렴하고 강직한 자라 합니다.”
“신망이 두터운 관리가 뇌물 수뢰 혐의로 잘렸다?”
“그것은 아무래도 누군가의 농간일 가능성이 큽니다. 잘린 뒤에 남작의 여정을 보면 뇌물 수뢰 혐의는 누군가의 농간일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음, 능력은 어땠다고 하던가?”
“남작이 몸담았던 관청 내에서 최고였다고 합니다. 다만 출신 때문에 그 이상의 출세는 어려웠다고 하더군요.”
“알았다.”
에반스는 라보스의 보고에 만족스러워 하며 두 부녀를 점심 식사에 초대했다.
오랜 시간을 꼬박 기다리던 두 부녀는 점심시간이 되자 다시 카라스의 영주를 만났다.
“앉도록.”
에반스가 자리를 권하자 두 부녀는 서로 눈치를 보다가 일단 자리에 앉았다.
카라스는 부유한 영지였다. 그런데 영주의 식탁은 의외로 간소했다. 빵과 우유, 그리고 스테이크와 와인 한 잔이 다였다.
손님인 두 부녀 앞에도 영주와 같은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자, 식사부터 하지.”
두 부녀는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서둘러 식사를 끝냈다.
식사 후, 에반스는 후식으로 차를 내어 오도록 했다. 그때까지 두 부녀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 두 부녀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서 에반스가 말했다.
“남편이 머리칼을 자르고 온 아내를 보고 버럭 화를 냈지. 자신과 상의도 없이 머리칼을 잘랐다고 말이야. 자신은 아내의 긴 생머리가 더 좋았다며 투덜댔지. 그랬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의 아내가 남편을 보고 뭐라고 했는지 아는가?”
“…….”
갑자기 느닷없는 영주의 질문에 두 부녀는 긴장을 풀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는 당신은 왜 한마디 상의도 없이 대머리가 된 거야? 나도 긴 머리가 좋다고.”
여자 목소리까지 흉내 내서 에반스가 말했다. 그러자 주위 반응이 싸늘했다.
특히 식사 시중을 들던 하인들과 하녀들은 경악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영주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았던 것이다.
“푸웁”
그때 에이미의 웃음보가 터졌다.
“호호호호.”
그런 에이미를 보고 메디슨 남작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영주 앞에서 경망스럽게 웃다니! 자칫 철혈영주의 눈 밖에라도 난다면.
“에, 에이미.”
하지만 에이미는 한 번 터진 웃음을 쉽게 멈추지 못했다.
에반스가 역시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래, 웃으라고. 웃으니 보기 좋잖아?”
에반스가 ‘너는 왜 안 웃느냐?’ 하는 표정으로 메디슨 남작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메디슨 남작도 억지로 에반스를 따라 웃었다. 식탁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