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실론 후작이 파격적으로 에반스에게 카라스의 영주 자리를 맡기자, 그 일로 후작 부인과 가신들은 난리가 났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카라스 영지가 어떤 곳인데 이제 막 성인이 된 도련님께 맡기신단 말입니까?”
“맞습니다. 그런 중요한 곳은 보다 더 신중하게 영주를 결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압실론 후작의 뜻도 이번만은 너무나도 강경했다.
“모자란 녀석이지만 그래도 나의 장남이다. 내가 그 정도도 해 줄 수 없다는 것인가?”
결국 후작 부인과 가신들도 카라스 영지를 에반스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후계자인 에반스를 후작성에서 내쫓을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말이다.
16살 생일이 지나고 불과 일주일 뒤, 에반스는 카라스의 영주로 로체스 자작성에 부임했다.
로체스 자작성은 축조된 지 500년도 넘은 오래된 성이었지만 마치 금방 축조한 듯이 그 외양은 튼튼해 보였다.
에반스는 성 주위를 꼼꼼히 살피고 만족스러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성이군.”
세월의 여파를 피해 간 듯 높고 견고한 성채 사이로 우뚝 솟은 첨탑은 도도하게 위엄을 뽐내고 있었다.
로체스 자작성은 압실론 후작성과 같은 평지성이지만, 6미터가 넘는 넓은 해자와 20미터가 넘는 성벽을 갖추고 있어 그야말로 군사적 성향이 강한 성이었다.
“몇 군데 보루를 더 설치하고 치로 성문을 두르면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겠어.”
보루는 성채에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설치하는 구조물이며, 치는 성채에 튀어나온 성벽을 말했다. 보루와 치는 수성전 상황에서 공격적인 면을 고려해 고안된 성의 구조물이었다.
검술 스승 홀렌스는 에반스를 검술만 아는 멍청이로 키우지 않았다. 그는 기사로 60년이 넘는 경험을 통해 쌓은, 실질적이고 다양한 군사적 지식을 에반스에게 전수했다.
그러면서 군사 서적, 특히 전쟁사를 통해 그동안의 많은 전략과 전술이 기록된 서적을 의무적으로 읽게 만들었다.
또한 밤이면 토론을 통해 그 지식을 에반스가 확실하게 습득할 수 있게 했다.
에반스는 자신이 생각한 대로 성을 보수했다. 그리고 기사들과 병사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공표했다.
“나에게는 허약한 기사와 병사는 필요 없다. 매달 테스트를 통해 실력에 미달되는 기사들은 월급에서 일 실버를 깎겠다. 또한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병사들은 기합을 받게 될 것이다.”
에반스의 선언에 기사들과 병사들이 웅성거렸다. 이때, 에반스가 다시 말했다.
“기사들 중 수준이 뛰어난 자들에게는 포상금과 함께 최고의 검술을 전수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 그리고 병사들 중에서도 실력이 출중한 자는 기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
기사들과 병사들이 입을 ‘쩌억’ 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사들에게 검술은 곧 그들의 모든 것이었다. 그런데 최고의 검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니 이거야말로 그들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기사들보다 더 놀란 것은 병사들이었다. 가끔 일반 병사들 중에서 기사가 되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건 진짜 드문 경우였다.
한데 에반스는 그 기회를 주겠다고 병사들에게 공표한 것이다.
‘기사가 될 수 있다면…….’
병사들의 눈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에반스는 자신이 말한 약속을 확실히 지켰다. 압실론 후작가에서 배운 검술 중 가장 뛰어난 검술을 기사들에게 직접 전수했고, 병사들 중 실력이 뛰어난 자들은 예비 기사로 뽑았다.
그리고 영지 내에 병사의 수를 기존 5천 명에서 7천 명으로 2천 명을 더 늘렸다.
재정이 어려울 경우, 그해 병력은 늘리지 않았지만 사정이 풀리면 영주의 품위 유지비 전부를 병사 수를 늘리는 데 사용했다.
결국 로체스 자작성 내 기사와 병사는 해마다 꾸준히 늘어났다.
고성인 로체스 자작성을 보수하며 에반스는 첨탑에 관망대를 설치하려 했다. 그는 성의 맨 꼭대기에서 주위 영지를 한눈에 내려다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지붕을 덮고 있던 석재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뭔가가 발견되었다.
보고를 들은 에반스는 직접 지붕으로 올라갔다.
“오래전에 사용했었던 일종의 비밀의 방 같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잊혀 지금까지 방치된 모양입니다.”
공사 감독의 말에 에반스는 지붕 위에 있는 방문의 입구를 열게 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갔다. 안은 먼지가 가득했고 에반스가 바닥에 발을 내딛자 먼지가 구름처럼 일었다.
“콜록. 콜록.”
잠시 먼지를 배출시키고 나서 에반스는 방 안을 살폈다. 방 안에는 책상 하나와 의자, 불을 밝히는 마법등과 그리고 간이침대가 있었다.
책상 위에는 한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에반스는 조심스럽게 책상 가까이 다가갔다. 책은 먼지에 덮여 있어 표지 제목을 읽을 수 없었다.
“후욱!”
에반스가 입김을 불어 먼지를 제거하자 책의 표지 아랫부분에 직접 손으로 쓴 자필 서명이 드러났다.
“체이스 드 라마스. 헉! 검공 라마스!”
에반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다시 조심스럽게 책 표지 위쪽으로 입김을 불었다. 그러자 표지의 제목이 나타났다.
“검술서! 저, 정말 검공 라마스가 남긴 검술서란 말인가?”
검공 라마스가 누구던가? 인간 최초로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넘어 그랜더 마스터에 오른 인물이었다.
에반스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검술서의 표지부터 면밀히 살폈다. 오래된 책은 자칫 바스라질 수도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해서 첫 장을 넘겼다.
첫 장에는 검공 라마스의 좌우명이 자필로 쓰여 있었다.
정말 해서는 안 될 일이 포기다.
그리고 그 밑으로 또 하나의 자필 좌우명이 쓰여 있었다.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은 뛰어야 한다.
그 바로 아래 그 글을 쓴 사람의 서명이 적혀 있었다.
“루이스 드 렉터! 오오. 렉터 공작!”
트렌시아 제국 사상 최강의 소드 마스터로 불렸던 렉터 공작은 말년에 자신의 검술을 완성시키겠다며, 제국을 주유하며 돌아다닌 것으로 유명했다.
그때 그가 거둬들인 5명의 제자들이 지금 트렌시아 제국을 지탱하고 있는 20명의 소드 마스터들 중 5명이었다.
다음 장을 넘기던 에반스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그 다음 장에는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 밑으로는 렉터 공작이 다급하게 쓴 듯 보이는 글이 남아 있었다.
다 내가 부족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이렇게 죽는다면 어찌 스승님을 뵐 것인가? 너무도 가슴 아프다. 자질만 뛰어나다고 그 품성은 보지 않고 아이들을 제자로 거둔 것이 잘못이었다. 제자들이 스승님께서 남긴 검술서를 노리고 나를 해칠 줄이야. 다행히 그 아이들이 내게서 가져간 검술서는 진본이 아니다. 또한 거기에는 스승님의 검술 전부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자연스럽게 빠져 들게 만드는 글귀였다. 에반스의 눈동자가 끊임없이 움직였다.
내가 부족해서 내가 배울 만큼만 기록해서 가지고 다녔는데 그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하지만 녀석들이라면 그것이 사본이며 빠진 내용이 있다는 것을 곧 눈치챌 것이다. 녀석들은 이곳은 모른다. 이곳은 스승님과 나만 아는 유일한 장소. 하지만 내가 여기 있으면 녀석들은 결국 이곳마저 찾아낼 것이다.
에반스는 책장을 넘기며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스승님이 남긴 검술서를 지키기 위해 나는 녀석들에게 갈 것이다. 그리고 녀석들이 보는 앞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죽고 나면 녀석들은 이 검술서를 영영 차지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스승님께서 남긴 검술이 사장되는 것이 걱정이다. 혹시 이곳을 발견한 연자가 있다면 부디 이 검술을 익혀 스승님의 유지를 이어 주길 바란다.
마지막까지 읽은 에반스는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렉터 공작의 제자라면 에반스도 잘 알았다.
“이, 이럴 수가…… 그들이 이 검술서를 차지하기 위해 스승인 렉터 경을 암습했다니.”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트렌시아 제국에 큰 파장을 불러올 것이 자명했다. 렉터 공작의 다섯 제자가 누구던가? 그들은 제국의 10대 제후와 함께 중앙 정계를 장악하고 있는 실세들이었다.
렉터 공작의 첫째 제자 레이놀드 후작은 국방장관이고, 둘째 베일리 후작은 수도 방위군의 총사령관, 셋째 아돌프 후작은 황궁 수비대 총대장, 넷째 도널드는 수도 바룬의 자경대 총감, 그리고 다섯째 카베인은 제국 아카데미 기사학부의 학장을 맡고 있었다.
그들 다섯이 사실상 제국 수도와 제국 중앙 지역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 자들이 검술서 한 권 때문에 스승을 암살 하다니!
물론 그것이 검공 라마스가 남긴 검술서라면 얘기가 달라졌다.
“공사는 당분간 중단한다. 그리고 이 근처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경계를 강화하라.”
검술서는 오래되었고 렉터 공작의 피가 묻어 상태가 좋지 못했다. 에반스는 조심스럽게 검공 라마스가 남긴 검술서를 필사했다.
에반스가 검술서의 내용을 다 베껴 쓰자 검술서는 절반이 바스러져서 더 이상 책으로써의 기능은 할 수 없게 되었다.
에반스는 검술서와 잔해를 깨끗하게 불태웠다. 그리고 첨탑에 관망대 설치 공사를 계속 진행시켰다.
그날 이후 에반스는 자신의 수련관에서 은밀히 검공 라마스가 남긴 검술을 익혔다.
***
카라스 영지는 지리상 트렌시아 제국 최북단. 변방의 끝에 위치해 있었다. 제국의 북쪽은 대륙의 지붕이라는 파르미르 고원이 가로막고 있었다.
고원 너머에는 미개의 대지가 있었으며 그곳에 사는 자들은 바바리안(야만족)이라 불렸다.
야만족은 크게 두 부족이 있었는데, 이들은 서쪽의 고란족과 동쪽의 랄트족이었다.
그들은 추수 시기만 되면 트렌시아 제국의 국경을 침략해서 노략질을 일삼았다.
제국이 이에 대비해서 성을 축성하고 병력을 배치해 침략에 대비하면서 야만족들은 약탈하는 것보다 화친을 원했으며 교역을 요구했다. 그래서 트렌시아 제국에서는 화친 협상을 벌였고, 본격적으로 야만족과 교역을 시작했다.
야만족은 주로 말과 유제품, 가죽류를 팔았다. 트렌시아 제국에서는 농산물과 직물, 철, 황금, 무기류를 교역 시장에서 거래했다.
압실론 후작령에서도 매년 5차례에 걸쳐서 랄트족과 교역을 했다.
그 교역의 중심지는 바로 카라스 영지였다.
카라스 영지에 우뚝 솟은 로체스 자작성은 야만족을 방비하는 트렌시아 제국의 대표적인 변방 요새 중 한 곳이었다.
또한 야만족과의 교역 장소로써 인구만도 20만에 달하는 큰 영지였다. 이후 발전 가능성 역시 무궁무진한 곳이었다.
카라스 영주는 중개무역권의 이권 일부를 가지고 있어 다른 영지에 비해 재정적으로도 여유가 많았다.
에반스는 어느덧 카라스의 영주로 5년을 살았다. 그동안 에반스는 철혈영주로 불리며 카라스 영지민들의 두려움과 함께 존경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변방에서 비교적 큰 규모의 카라스 영지는 에반스가 영주가 되었을 당시 거의 무법 지대였다. 갓 카라스 영주로 부임한 에반스는 먼저 로체스 자작성의 기사들과 병사들을 장악했다.
그런 힘을 기반으로 무법천지의 카라스를 단숨에 휘어잡았다.
에반스는 매달 영지민들이 보는 앞에서 100여 명의 중범죄자를 공개 처형시켰다.
“카라스에서 죄를 지으면 모두 이렇게 될 것이다.”
100여 명의 시체를 발아래 두고 외치는 그들의 젊은 영주를 보고 카라스 영지민들은 공포라는 전율을 맛보았다.
에반스가 통치하는 5년 동안 중죄를 지은 자는 신속한 재판과 함께 어김없이 공개 처형되어 그 머리가 성문 위에 내걸렸다.
카라스 영지의 성문에는 까마귀가 끊이지 않았고 죄인의 머리가 매달려 있지 않는 날이 없었다.
놀라운 것은 그 5년 사이 카라스 영지의 인구가 2배인 40만으로 불어나 있었다는 점이었다.
카라스 영지는 인근 다른 영지에 비해 세금도 그리 높지 않았고 무엇보다 치안 상태가 좋았다.
당시 트렌시아 제국은 중앙과 지방 세력 간의 알력 다툼으로 연일 시끄러웠다. 그런 불안한 정국에 수도는 물론, 지방의 모든 영지에서는 도둑과 강도가 들끓고 산적과 수적들이 기승을 부렸다.
무엇보다 귀족과 부유한 상인들은 고리대업과 각종 이권 사업에 개입해 힘없는 영지민들을 수탈해서 더 많은 부를 축적해 나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영주들은 그런 귀족과 부유한 상인들이 주는 뇌물만 챙기기 급급했다.
하지만 카라스 영지는 달랐다. 누구든 죄를 지으면 처벌을 면치 못했다. 그것은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이라도 예외일 수 없었다.
카라스 영지에서 고리대업은 불법이며 영주가 아닌, 그 누구도 영지민들을 처벌하는 것도 불법이었다.
에반스는 실제로 법을 어기는 자는 귀족이라도 처벌했다. 때문에 카라스 영지에서는 죄를 짓지 않는 한 안전했다.
그렇다 보니 카라스 영지에 살고자 하는 사람의 수는 해마다 계속 늘어났고 5년 만에 인구가 두 배인 40만 명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에반스는 로체스 자작성의 주인으로 5년을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부친인 압실론 후작을 만나지 않았다.
세월을 거스를 수 없음인가?
제후인 압실론 후작이 급작스럽게 몸 상태가 나빠져서 병석에 누웠다는 소식이 에반스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에반스는 무심했다. 아니, 부친에 관한 말이 나오면 그 스스로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
“내 알 바 아니다.”
에반스는 압실론 후작이 부르지 않는 한, 먼저 그를 찾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누군가 에반스의 목숨을 계속 노렸던 것이다. 매일같이 암살자들이 에반스를 죽이기 위해 카라스 영지를 찾아왔다.
마침내 에반스의 분노가 폭발했다. 낳아 준 부모를 대신해 에반스를 키워 준 집사 올란도가 그만 에반스를 구하려다가 암살자의 손에 죽은 것이다.
에반스에게 집사 올란도는 아버지나 다름없었다.
분노한 에반스는 즉시 카라스 영지의 전 병력을 동원해서 최근 한 달 사이에 영지에 들어온 자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에반스는 그들을 고문하며 암살자를 찾아냈다. 그 과정에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 나간 자들이 속출했다.
결국 암살자들은 찾아냈지만 그들은 잡히기 전에 이미 자살을 선택했다.
그 일 이후, 카라스 영지민들은 그들의 영주를 더욱 더 두려워했다.
한동안 주춤했던 에반스에 대한 암살은 시간이 지나자 훨씬 더 심해졌다. 1년 동안 에반스는 거의 매일 암살 기도에 시달렸다.
에반스는 누가 자신을 암살하려 하는지 그 배후를 계속 조사했고, 마침내 누구 짓인지 알아내게 되었다. 그를 암살하려 한 배후는 바로 그의 새어머니와 이복형제들이었던 것이다.
병석에 드러누운 압실론 후작이 죽고 나면 자연히 장남인 에반스가 제후령의 새로운 주인이 되기 때문에, 어떻게든 에반스를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수십, 수백 차례에 걸친 독살 기도와 암살자의 흉기에도 에반스는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에반스를 따르던 소중한 사람들의 희생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집사 올란도에 이어 그에게 어머니와도 같았던 시녀장 엘렌도 결국 에반스가 식사할 때 시녀로 위장한 암살자로부터 대신 암기를 가슴에 맞고 죽었다.
에반스는 철혈영주로 불렸지만 특이하게 그를 아는 측근들은 모두 그를 진심으로 따랐다. 그를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로.
하지만 그들의 희생으로 살아남은 에반스는 더욱더 말이 없어지고 더욱더 차가운 성격으로 변해 갔다.
***
에반스에 대한 암살이 시작된 지 어느덧 2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에반스는 많은 지인들을 잃었다. 그리고 희생된 암살자나 그와 연관된 자들도 수천 명 가까이 죽었다. 암살은 하루, 혹은 일주일 정도 뜸했다가도 그 다음 날이면 여지없이 이어졌다.
에반스는 영지 순시를 자주했다. 특히 이때 암살 시도가 많았는데 이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결코 영지 순시를 등한시하지 않았다.
이런 그의 세심한 노력이 지금의 카라스 영지의 발전을 가져왔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그는 영주로서 영지를 살피는 것을 꼭 해야 할 의무로 여겼다. 당연히 그의 이런 순시는 암살자들의 좋은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야앗!”
파파파팟!
안개를 헤치며 빠르게 내달리던 호위 기사 라르손이 걸음을 멈추고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짙은 안개는 하얀 커튼을 드리운 것처럼 그의 시야를 가렸다.
그때 중얼거리는 사람의 목소리가 라르손의 귀가에 들려왔다.
라르손은 귀를 쫑긋 세우고 그 소리에 집중했다. 그러자 곧 그 목소리의 정체를 간파해 낼 수 있었다.
“움타나 바르네 우실라타.”
“마법 주문!”
화들짝 놀란 나이트 라르손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빠르게 몸을 틀었다.
십여 걸음 뛰었을까?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는 눈을 감은 채, 신비한 빛을 뿌리는 지팡이를 쥐어 들고 주문을 외우는 마법사의 모습이 보였다.
“안 돼!”
나이트 라르손이 그 마법사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가 도착하기 전에 주문의 영창이 먼저 끝났다. 마법사의 전면, 불과 십여 걸음 앞에 누가 있었다.
우르릉. 쾅쾅!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내리쳤다.
번쩍!
세상이 온통 눈부신 빛으로 번뜩였다.
나이트 라르손은 질끈 눈을 감은 채, 본능적으로 오른팔로 눈까지 가렸다.
잠시 후, 그가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벼락이 내려친 곳을 쳐다보았다.
“영주님!”
떨어지는 벼락을 맞았는지 나이트 라르손의 호위 대상인 그의 주군, 카라스 영주 에반스가 움직임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에반스가 멈춰 서 있는 자리 주위에 있던 풀이 새까맣게 타 버린 걸로 봐서 그가 벼락에 정통으로 맞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놀란 나이트 라르손이 그에게 달려가려 했을 때 싸늘한 에반스의 음성이 들렸다.
“훗! 이게 단가?”
에반스가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어느새 주위에 가득했던 안개가 거짓말처럼 걷혀 있었다.
완벽하다 믿었던 자신의 마법 공격이 실패했단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지, 마법사는 놀라 두 눈을 부릅뜨고 에반스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마법사가 다시 마법 주문을 외웠다. 하지만 마법사가 주문을 영창하는 것보다 에반스가 더 빨랐다.
파파팟! 부웅!
어느새 마법사에게 접근한 에반스의 검이 가볍게 바람을 가르며 움직였다.
스팟!
에반스의 검이 마법사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에반스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나이트 라르손이 빠르게 마법사에게 접근했을 때,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신비한 빛이 감돌던 마법사의 마법 지팡이가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법사의 몸은 고목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이트 라르손의 눈동자가 약간 위로 향하자, 마법사는 로브와 후드 부분과 함께 머리가 사라져 있었다. 눈을 아래를 내리자 그 옆 땅바닥에 잘린 마법사의 머리가 떨어져 있었는데 하필 그 얼굴이 나이트 라르손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죽은 마법사의 얼굴이 좀 이상했다. 고통스럽거나 놀란 표정이 아니라 너무 편하고 당당하게 죽음을 받아들인 듯한 모습이었다. 마치 순교라도 한 듯 말이다. 그때 라르손의 등 쪽으로 강한 충격이 전해졌다.
퍽!
“크윽!”
놀라 비명과 함께 라르손은 그대로 뒤로 나동그라졌다.
“멍청한 놈!”
차가운 목소리가 나이트 라르손의 귀를 파고들었다. 나이트 라르손은 재빨리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앞에는 무뚝뚝한 표정에, 싸늘한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그의 주군 에반스가 서 있었다.
각진 턱에 짙은 검은 눈썹과 구레나룻, 그리고 떡 벌어진 어깨는 그를 더없이 강인한 남자로 보이게 했다. 그때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에 에반스의 검은 머리칼이 흩날리자 그가 귀찮다는 듯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그리고 들고 있던 투구를 다시 썼다.
에반스가 머리를 기른 것은 죽은 유모의 유언 때문이었다.
그녀는 죽기 직전 웃으며 머리칼이 긴 편이 에반스에게 어울린다고 말했던 것이다.
에반스의 검은 눈썹과 검고 진한 눈동자에서 나이트 라르손은 내면의 아픔을 읽어 냈다. 그 아픔을 알고 이해하며 그를 보듬어 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분노에 찬 에반스의 눈과 나이트 라르손의 눈이 마주쳤다.
“마법사가 내가 아닌 너를 공격했으면 어쩔 뻔했느냐?”
에반스가 버럭 화를 냈다.
“죄, 죄송합니다.”
나이트 라르손이 서둘러 고개를 숙이자 에반스의 눈빛이 무심히 착 가라앉았다.
“조심해라.”
에반스는 그 말과 함께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뒤돌아섰다.
나이트 라르손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그 뒤를 따랐다.
“시신을 치우고 대열을 정비하라.”
나이트 라르손의 외침에 쭈뼛거리며 서 있던 병사들이 죽은 마법사의 시신을 치웠다.
이제 에반스를 속속들이 잘 아는 최측근은 몇 명 남지 않았다. 물론 그중에는 호위 기사인 라르손도 속해 있었다.
라르손은 에반스와 동갑으로 에반스의 유일한 친구이자 집사 올란도가 남긴 유일한 혈육이기도 했다.
에반스는 라르손만큼은 죽게 할 수 없다며 가능한 라르손을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트려 놓으려 했다. 하지만 라르손이 먼저 이를 거부했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제게 부탁하셨습니다. 도련님보다 더 오래 살면 하늘나라에서도 용서치 않겠다고 말입니다.”
결국 라르손의 고집에 에반스가 두 손을 들었다. 하지만 에반스는 라르손에게 자주 개인적인 심부름을 시켰다.
심부름을 시킬 때마다 에반스를 암살하려는 기도가 있었다. 라르손을 보호하기 위해 에반스가 그에게 심부름을 시켜 밖으로 내보냈던 것이다.
그 이유를 알면서도 라르손은 에반스의 심부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절한 에반스의 그 검은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라르손이 에반스 곁에 있으면 그의 움직임이 되레 제약 받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르손도 오러검을 사용하는 소드 익스퍼트 초급의 실력 있는 기사였다. 그러나 암살 기도 시 급박한 상황에 처하면 오히려 에반스가 그를 지키려 했기 때문에 그는 결국 거추장스런 존재밖에 되지 않았다.
에반스는 아직 23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이미 절정의 경지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검술에 있어 궁극의 경지라 불리는 소드 마스터가 아니고서는 검으로 에반스를 해할 자는 없었다.
번쩍!
강렬한 섬광이 앞쪽에서 일었다. 동시에 굉음이 울렸다.
콰쾅!
대기가 타올랐고 불기둥이 솟구쳤다.
“영주님!”
그 불기둥의 화마가 주위를 집어삼키는 곳에 나이트 라르손의 주군이 에반스가 있었다.
대지가 들끓었다. 그 열기를 느낀 에반스가 흠칫 놀랐다.
‘마법진!’
암살은 미끼였다. 진짜는 바로 이 마법진이었다. 폭렬진이라고도 부르는 이 마법진은 다른 사람이 지나가면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목표물이 지나가면 폭발해서 그 목표물을 죽이거나 파괴했다.
목표물에 따라 그 파괴력도 각양각색인데 일반적으로 암살에 사용되는 폭렬진은 3서클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사용된 폭렬진은 달랐다.
지이이잉!
순식간에 마법진 정중앙의 한 점으로 모인 마나가 끊임없이 열기와 함께 붉은 불기둥을 만들었다.
먼저 섬광과 같은 열기가 에반스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이어 폭발음과 함께 섬광과 같은 열기가 그의 몸을 덮었다.
콰쾅! 화르르르!
에반스는 마법진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감지한 순간, 체내 마나를 최대한 끌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몸 주위로 유백색 실드가 맺혔다.
아직 소드 마스터가 되지 못해 완벽한 대 마법 방어 실드를 형성해 내지 못하지만 최상급 소드 익스퍼트 경지로 만들어 낸 방어 실드라면 웬만한 마법 공격은 방어해 낼 수 있었다. 앞서 마법사의 공격을 맨몸으로 막아 낸 것처럼 말이다.
화르르르, 고오오오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맹렬하게 에반스의 몸을 휘감던 화기가 결국 에반스가 만들어 낸 푸른빛 실드를 뚫고 들어왔다. 뜨거운 열기는 에반스의 갑옷을 달구었고 그의 몸에 고통을 선사했다.
“크윽!”
투구 속 에반스가 이를 악물었다. 화기는 그대로 에반스의 몸속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화기로 인해 체내 장기들이 위험했다.
에반스는 화기가 몸속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호흡을 멈추고 신체 모든 기능을 일시 정지시켰다. 동시에 마나홀의 마나를 몽땅 화기로부터 장기를 보호하는 데 사용했다.
그사이 그의 몸은 타들어 갔다.
털썩!
에반스는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고기 타는 냄새가 났다. 갑옷은 지금 그의 몸을 익히는 냄비와 같았다. 고통에 겨워 악물고 있던 입안에 피가 고였다.
주르르르!
치이이익!
입안에서 흘러내린 피가 갑옷에 닿자 순식간에 끓어올라 수증기로 화했다. 매캐한 냄새가 그의 코를 자극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 없다. 힘을…… 힘을 내자.’
에반스는 살기 위해 집중했다.
그때 그의 뒷머리가 뜨끔했다. 그와 동시에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짜릿한 쾌감이 척추를 타고 몸 전체에 전달되었다.
‘젠장, 틀렸는가?’
에반스는 이것을 죽음 직전 반짝 찾아온 쾌락이라 여겼다. 이제 곧 자신이 죽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에반스는 죽지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이 더 선명해지고 그의 몸을 잠식하고 있던 극렬한 통증도 말끔히 사라졌다. 그리고 마나홀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헉!”
에반스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우우우웅!
마나홀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2배, 3배, 4배, 계속 부풀어 오른 마나홀이 결국 터졌다.
퍼엉! 쏴아아아!
마나홀 속 마나가 그의 몸속을 마구 휘젓고 다녔다. 그중 일부는 혈관 쪽으로 몰려갔다.
투투툭!
혈관이 터져 나갔다.
두둑두둑! 꿀렁꿀렁!
이어서 몸속의 뼈와 장기들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와 함께 에반스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 이것은……!’
소드 마스터가 되면 모든 신체 기능이 변화한다. 에반스의 머릿속에 검공 라마스가 남긴 한 소절의 글귀가 떠올랐다.
신체는 위기의 순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 그 초인이 바로 소드 마스터다.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 에반스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고 그것이 최상급 소드 익스퍼트였던 에반스를 초인, 즉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게 만든 것이다.
‘아!’
에반스는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는 희열감에 탄성을 터트리며 감격에 겨워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때 그의 귓가로 라르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휘이이잉!
작고 미세한 먼지가 비처럼 라르손과 병사들 주위로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앞쪽에서 에반스와 10여 명의 병사들을 삼켜 버린 절망의 불길이 사그라지면서 병사들의 옷과 낙엽 등이 재가 되어 주위로 휘날렸던 것이다.
넋을 잃고 있던 라르손이 미친 듯 앞으로 달려 나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영주님. 오오. 맙소사. 안 돼. 영주님!”
앞쪽에는 반경 20미터 주위가 초토화되어 있었다. 그 주위로 10여 명의 병사들이 불에 타 죽은 채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에반스의 모습이 보였다.
에반스는 갑옷을 입은 채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런 에반스의 갑옷은 불에 그슬려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꼼짝도 하지 않는 에반스는 누가 봐도 죽은 듯 보였다.
“오오! 영주님!”
라르손이 비탄에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그때였다.
“나는 괜찮다. 하지만 당장 움직일 수 없을 것 같다. 호위를 부탁한다.”
검게 변한 투구 속에서 에반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순간 라르손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알겠습니다.”
라르손은 에반스의 옆에 서서 병사들로 하여금 주위를 빙 둘러싸게 했다.
또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일부 병사를 내보내서 주위를 정탐케 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무릎을 꿇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던 에반스의 몸이 꿈틀거렸다. 곧 그의 몸에서 푸른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바우우우웅!
신비로운 광채는 에반스의 몸을 휘감고 강하게 빛을 내뿜었다.
에반스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병사들은 등을 돌린 채 눈을 감았다. 라르손 역시 빛이 너무 강렬해서 눈을 감고도 부족해서 팔로 눈을 가렸다.
푸른빛은 십여 분 정도 계속되다가 서서히 그 밝기가 덜해졌다.
라르손은 팔을 치우고 천천히 눈을 떠서 에반스를 보았다.
에반스의 몸은 아직도 은은하게 푸른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그는 어느새 자세를 고쳐서 땅바닥에 정좌한 채 앉아 있었다.
그렇게 다시 십여 분이 흐르자 에반스의 몸을 감싸고 있던 광채가 모두 사라지고 그가 눈을 떴다.
번쩍!
투구 속에서 섬뜩한 붉은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라르손을 비롯한 병사들 모두 자신들도 모르게 두려움에 온몸이 오그라들었다. 그리고 덜덜덜 몸을 떨었다.
잠시 후, 에반스가 몸을 일으키고 그의 투구 속에서 뿜어져 나오던 붉은 광채가 사라지자 라르손의 떨리던 몸도 잦아들었다. 이어 병사들도 안정을 되찾았다.
철컥!
투구가 열리고 에반스의 얼굴이 보였다. 에반스는 아예 쓰고 있던 투구를 벗었다. 그러자 절반이 훌쩍 타 버린 검은 머리카락과 함께 온통 땀으로 범벅된 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영주님, 괜찮으십니까?”
라르손이 습관처럼 먼저 안위부터 물었다. 그러자 에반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여기가 어딥니까?”
“네?”
에반스는 마치 라르손을 처음 본 듯 말했다.
“여긴 영화 세트장인가요?”
“여엉화아라니요? 영주님 정신 차리십시오.”
“아아악!”
그때, 에반스가 갑자기 두 손으로 머리를 잡고 고통스러워 했다.
“영주님! 뭣들 하느냐? 어서 영주님을 모셔라.”
라르손의 외침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다가와서 에반스를 부축했다. 즉시 들것을 만들어 에반스를 싣고 로체스 자작성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는 사실에 흥분해 있던 에반스는 라르손에게 자신을 호위할 것을 명했다.
소드 마스터가 되면 최상의 신체 조건을 갖추게 된다. 모든 감각이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민감하게 발달한다.
또한 체력은 물론, 힘에서도 예전과 비교할 수 없는 완벽한 몸으로 변신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에반스가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머리의 기능 또한 예전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하게 된다는 점이었다.
‘윽!’
신체의 기능이 모두 최상의 조건으로 변신한 후, 에반스는 머리에 통증을 느꼈다. 그제야 자신의 머리 역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에반스는 서둘러 정좌하고 앉았다.
‘제일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에반스는 호흡을 가다듬고 정신을 집중했다. 머리의 기능이 향상되면 검술의 빠른 이해는 물론, 더 명석해진 머리로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을 터였다.
몸을 변화시켰던 마나가 일제로 머리로 쏠렸다. 에반스는 순간 머릿속이 백지처럼 변하며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전혀 다른 세상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환호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간단하게 뭐라고 떠들었다. 그리고 어디로 가더니 고무된 표정으로 뭔가 이상한 것을 귀에 대고 뭐라고 떠들었다. 그러자 그것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그는 고통스러워 하며 가슴을 잡고 쓰러졌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그는 어디로 실려 갔다. 그리고 죽었다.
“허억!”
최진철이 깨어났다. 그는 머리에 뭔가 갑갑한 것을 쓰고 있었다. 앞을 더듬자 고리가 만져졌다. 그 고리를 풀고 덮개를 열자 웬 사람들이 보였다.
최진철은 머리에 쓰고 있던 것을 일단 벗었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호흡하기가 훨씬 편안해졌다.
그때 그 앞에 웬 갑옷을 입은 금발 머리 남자가 다가왔다. 그리고 자신을 영주님이라고 부르면서 괜찮은지 물었다.
최진철은 여기가 어디며 혹시 영화 세트장인지 그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최진철의 말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참기 힘든 두통이 밀려왔다. 동시에 에반스의 기억이 물밀듯이 그의 뇌리에 쏘아져 들어왔다.
최진철은 들것에 실려 이동하며 이곳이 어디며, 자신이 누군지 차츰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최진철이란 존재는 에반스의 전생의 인물이며, 자신이 소드 마스터가 되면서 전생의 기억이 마치 봉인 풀리듯 풀렸음을 깨달았다.
‘전생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에반스의 뇌리에 최진철이 살아온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차근차근 떠올랐다.
‘아버지!’
최진철의 기억에서 자신의 죽음에 크게 슬퍼하셨을 부친을 떠올리며 에반스는 너무도 가슴이 아파 절로 눈물이 흘렀다.
지금의 부친인 압실론 후작과 달리 최진철의 부친은 아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다. 그리고 아들인 최진철 역시 부친을 그 누구보다 존경하고 사랑했다.
에반스는 압실론 후작에게 느끼지 못했던 아버지의 정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행복하게 웃었다.
전생의 기억이 세세히 떠오르며 에반스의 얼굴이 웃었다가 울었다가, 혹은 화를 냈다가 슬퍼했다가를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