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2 독립 (3/90)

Chapter 2   독립

압실론 후작령의 서쪽에는 콘라드 후작령이 이웃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온 소피아는 많은 여성의 질투와 시기를 살 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트렌시아 제국을 지탱하는 10대 제후들은 서로 가족처럼 끈끈한 유대 관계를 형성했다.

실제로 제후 가문은 황가나 제후 가문끼리 혼인했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서로 어떤 식으로든 혈연관계가 형성되었다.

에반스의 모친인 레이첼도 그레고리 후작의 영애였다. 하지만 계모인 지금의 후작 부인은 제후 가문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일부러 이웃하고 있는 후작 가문과 친하게 지내려 노력했다.

그 노력의 결과 후작 부인은 콘라드 후작가와 돈독한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그렇게 자주 왕래하며 친분을 쌓던 중 후작 부인이 콘라드 후작 부인과 영애인 소피아를 초대했다.

그 초대를 콘라드 후작 부인이 흔쾌히 받아들여 소피아는 압실론 후작가에 오게 되었다.

소피아는 14살로 에반스보다 한 살 어렸지만 허리까지 흘러내린 금발과 맵시 있는 몸매로 나이에 비해 조금 성숙해 보였다.

‘아름답다.’

처음 소피아와 마주친 에반스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녀는 마치 유명한 화가가 그려 놓은 여신처럼 묘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콘라드 후작 영애 소피아에요.”

짙은 쌍꺼풀과 긴 속눈썹이 만든 매혹적인 눈매가 대답을 촉구하듯 에반스를 직시했다.

“나, 나는.”

에반스가 더듬거리고 있을 때 테오르가 나타났다.

“소피아,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응, 이분과 인사하고 있었어.”

“이분?”

테오르가 얼굴을 찡그리며 에반스를 쳐다보았다.

그때, 에반스가 정신을 차렸다. 평소 같으면 테오르와 마주치면 귀찮아서 그냥 물러났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압실론 후작가의 장남, 에반스요.”

“장남?”

소피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테오르를 쳐다보았다.

“테오르가 후작가의 장남이라고 하지 않았어?”

“어? 아. 그게 말이야.”

테오르가 곤란하다는 얼굴로 쩔쩔매는 것을 보고 에반스는 자신도 모르게 희열을 느꼈다. 에반스도 잘 알고 있었다. 테오르가 공공연하게 자신이 후작가의 장남이라 떠들고 다닌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귀족 명부에 올라 있는 후작가의 장남은 분명히 에반스였다. 그것은 에반스가 죽기 전까지 결코 바뀔 수 없는 일이었다.

“소피아 아가씨. 여기 계셨군요.”

그때 테오르를 구해 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소피아의 유모였다.

“후작 부인께서 찾고 계십니다.”

“그래? 알았어. 에반스 님,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럼 다시 봬요.”

소피아는 앙증맞은 미소로 에반스에게 작별을 고했다.

“아, 네.”

에반스도 정신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소피아에게 인사했다.

소피아와 유모가 사라지고 나자 테오르가 사나운 얼굴로 에반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감히 나를 모욕하다니. 이 수모는 곧 갚아 주마.”

으르렁거리는 테오르를 보고도 에반스는 무덤덤했다. 에반스의 머릿속에는 온통 소피아밖에 없었던 것이다.

잔뜩 화가 난 테오르는 곧장 모친인 후작 부인을 만나러 갔다.

그때 후작 부인의 방에는 콘라드 후작 부인과 소피아가 함께 있었다.

“테오르, 어서 오너라. 콘라드 후작 부인께서 갑자기 일이 생겨서 지금 떠나셔야 한다는구나.”

후작 부인의 말에 테오르가 아쉽다는 듯 힐끗 소피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희 후작령에는 구경할 것이 많은데. 다음에 오시면 제가 직접 안내하겠습니다.”

테오르의 말에 콘라드 후작 부인이 간드러지게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 말이라도 고맙군요. 나는 가지만 그래도 소피아는 여기 있을 테니 소피아에게 그 친절을 베풀어 주면 좋겠네요.”

“네? 소피아가 여기 남는다고요?”

테오르가 깜짝 놀라며 두 후작 부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호호호. 테오르. 소피아가 여기 남는 게 그렇게 좋으니?”

테오르의 모친인 후작 부인이 웃으며 말하자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테오르가 얼굴을 붉혔다. 그런 테오르를 보며 후작 부인이 미소를 지었다.

“소피아가 이곳에 더 머물고 싶다고 해서 내가 허락했단다.”

“우리 아이를 잘 부탁해요. 테오르.”

콘라드 후작 부인 역시 미소를 지으며 테오르에게 말했다.

“네, 걱정 마십시오. 소피아는 제가 잘 돌보겠습니다.”

이제 14살인 테오르가 제법 의젓하게 두 후작 부인 앞에서 호언장담했다. 그 모습을 본 두 후작 부인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한참을 웃었다.

얼마 후, 콘라드 후작 부인이 콘라드 후작령으로 떠났다.

테오르는 모친인 후작 부인과 콘라드 후작 부인을 배웅했다. 그리고 소피아와 에반스의 일을 후작 부인에게 얘기했다.

“뭐라고? 그 쥐새끼 같은 녀석이 제 입으로 압실론 후작가의 장남이라 떠들었단 말이냐?”

“네, 소피아 앞에서 무슨 개망신인지.”

“내 이놈을.”

후작 부인에게 있어 압실론 후작가의 장남은 테오르뿐이었다. 후작 부인이 지금까지 에반스를 그냥 두고 본 것은 그가 조용히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분수도 모르고 후작가의 장남이라 떠들고 다닌다면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따끔하게 훈계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 그러면 되겠군.”

무슨 좋은 생각이 났는지 후작 부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어렸다.

“어머니.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호호호. 그래. 좋은 생각이 났단다. 넌 두고만 봐라. 이 어미가 다 알아서 할 테니.”

후작 부인은 그 길로 곧장 압실론 후작을 찾아갔다. 그리고 소피아가 남기로 했으니 오랜만에 가족끼리 저녁 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다.

압실론 후작이 순순히 그러자고 승낙하자 후작 부인은 즉시 에반스에게 사람을 보내서 저녁 식사에 참석하라고 했다.

압실론 후작의 지시라는 말에 에반스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저녁 식사에 참석했다.

후작 부인과 그녀 소생인 3명의 아들과 2명의 영애가 그의 눈에 띄었다. 그런데 2명의 영애 사이에 또 다른 귀족 영애가 있었다.

“아!”

에반스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너무도 아름다운 그녀는 바로 소피아였다.

소피아도 에반스를 발견하고 아는 척 한 손을 들어 보였다.

그때 식당으로 압실론 후작이 나타났다.

압실론 후작이 식당에 마련된 자신의 자리에 앉자 후작 부인이 나섰다.

“자, 모두 앉도록 해요.”

후작가의 가족들이 모두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테오르는 친절하게 소피아를 그의 옆자리로 안내했다. 그렇게 가족들이 모두 자리에 앉고 나자 한 자리가 남았다.

그런데 아직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은 두 사람이었다. 바로 후작 부인과 에반스였다.

“어머, 자리가 하나뿐이네.”

누구 들으라고 한 소리인지 모르지만 후작 부인의 말에 모든 시선이 후작 부인과 에반스에게 쏠렸다.

“아랫것들이 실수한 모양이로군. 나는 괜찮으니 네가 앉으렴.”

후작 부인이 에반스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하지만 레이디를 세워 두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므로 에반스는 그 자리에 앉을 수 없었다.

“아닙니다. 부인께서 앉으십시오.”

에반스가 후작 부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자 후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지. 저 아이가 앉을 수 있게 어서 자리를 내어 오너라.”

후작 부인은 그렇게 명령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때, 압실론 후작이 말했다.

“그럴 것 없다. 에반스,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네?”

“누가 너에게 여기 오라고 했느냔 말이다.”

“…….”

압실론 후작이 싸늘하게 말했다. 그 모습에 에반스는 할 말을 잊었다. 자신이 저녁 식사 자리에 불러 놓고 오히려 역정을 내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태연히 앉아 있는 후작 부인과 테오르의 얼굴이 그의 눈에 띄었다.

후작 부인이 나섰다.

“여보, 왜 그러세요. 후작가의 장남에게…….”

“장남? 흥! 저놈은 제 어미를 잡아먹은 괴물일 뿐이야. 꼴 보기 싫으니 내 눈앞에서 당장 사라져라.”

압실론 후작의 호통에 에반스는 창백해진 얼굴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런 그를 소피아가 안됐다며 동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다음 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소피아가 먼저 에반스를 찾아온 것이다.

“에반스 오라버니. 어제는 후작님이 너무 심했어요.”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의 편을 들어 주는 소피아로 인해 에반스는 사실 정신이 없었다.

“어? 아. 그래.”

소피아는 그 아름다운 외모만큼이나 친절하고 상냥했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에반스는 소피아에게 더욱 더 깊이 빠져들었다.

하지만 소피아는 단지 에반스가 불쌍해서 그를 만나 주고 친절을 베풀었을 뿐이었다. 소피아는 주위에 불쌍한 사람이나 동물이 있으면 꼭 챙겨 줘야 직성이 풀렸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불쌍한 사람이나 동물은 그저 호기심의 대상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그냥 불쌍해서 도와주고 스스로 만족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에반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압실론 후작과 가족들에게 냉대를 받고 있는 에반스가 불쌍해서 잠시 친절을 베푼 것이었다. 그 이외에는 그 어떤 감정도 그녀에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친절을 받은 당사자는 달랐다.

며칠 동안 자신을 찾지 않았던 소피아가 불쑥 콘라드 후작가로 떠난다는 얘기를 듣고 에반스는 용기를 내서 소피아를 찾아갔다.

꽃다발을 준비하고 그 속에 자신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넣은 채 말이다.

에반스는 소피아가 콘라드 후작가로 떠나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그녀에게 고백할 생각이었다.

에반스가 그녀의 방 가까이 도착했을 때, 그녀의 방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소피아의 모습이 보였다.

“아! 소피아.”

소피아는 콘라드 후작가로 떠나기 위해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니 정신이 없어 보였다.

“야옹!”

그때 고양이 한 마리가 소피아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발에 얼굴을 비비며 혀로 발등을 핥았다. 그러자 소피아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뭐야. 아이. 더럽게 어딜.”

퍽!

놀랍게 소피아는 사정없이 고양이를 걷어찼다. 발길질에 차인 고양이가 나동그라지자 소피아가 싸늘하게 말했다.

“아이, 짜증나. 불쌍해서 구해 주면 제 주제를 알아야지. 사람이나 동물이나 다 똑같다니까.”

그때 그녀의 방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 너무 잘해 주지 말라니까. 하인들만 해도그래. 조금만 잘해 주면 꼭 기어오르거든.”

“그건 맞는 말 같아. 천한 것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

“그런데 에반스 말이야. 어떤 것 같아?”

소피아 옆으로 한 남자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 남자의 정체는 바로 테오르였다.

“에반스 오라버니 말이야?”

소피아의 말에 테오르가 눈살을 찌푸렸다.

“오라버니는 무슨.”

“그래도 나보다 한 살 많으니 오라버니잖아. 그런데 에반스 오라버니가 왜?”

“아니, 보아하니 너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서. 혹시 너한테 찝쩍대지 않았나 했어.”

“모르겠는데. 그 오빠는 별로 말이 없잖아.”

“넌 에반스가 어떤데?”

테오르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소피아에게 물었다.

“어떻긴. 그냥 불쌍해서 몇 번 만나 줬을 뿐인데.”

“그래? 난 또 네가 에반스를 좋아하는 줄 알았지.”

“뭐? 나를 어떻게 보고. 내가 가주와, 가문에 인정도 받지 못하는 자를 좋아할 것 같아?”

“그럼 나는 어때?”

“너? 으음, 글쎄…… 네가 압실론 후작가의 주인이 된다면 생각해 볼게.”

“하하하. 이거 널 차지하려면 반드시 압실론 후작이 되어야겠는걸.”

테오르와 소피아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에반스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부르르 몸을 떨던 에반스가 힘없이 뒤돌아섰다. 그가 들고 있던 꽃다발도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얼마 뒤, 자신의 방을 나선 소피아는 복도에 떨어져 있는 꽃다발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 여기에 꽃다발을 떨어트려 놓은 거지?”

소피아는 그 꽃다발을 주워 들었다.

“향기도 별로네.”

그녀는 한 번 꽃향기를 맡은 후 미련 없이 뒤로 던져 버렸다. 당연히 그녀는 꽃다발 속에 있던 에반스의 편지는 발견하지 못했다.

소피아 뒤에 있던 하녀가 짜증스런 얼굴로 꽃다발을 주워서 휴지통에 넣어 버렸다.

에반스의 첫사랑은 그렇게 버려졌고, 그 일로 에반스는 자신이 진심으로 대해도 상대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로 인해 에반스는 예전처럼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오로지 검술 수련에만 집중했다.

***

다시 훌쩍 일 년의 시간이 흘렀다.

에반스가 16살 성인이 될 날에 불과 며칠 남았을 때였다.

에반스의 성인식은 조용한 가운데 치러질 예정이었다.

소피아의 일 이후 에반스는 후작가에서 쥐 죽은 듯 조용하게 지냈다. 그래서 더 이상 후작 부인과 테오르와 부딪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에반스가 조용히 있다고 해서 후작 부인과 테오르가 에반스를 그냥 내버려 두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후작 부인은 틈만 나면 압실론 후작에게 에반스 얘기를 꺼냈다. 가문에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그것이 모두 에반스의 탓인 양 몰아갔다.

그런 이유로 일 년 전에 비해 에반스의 사정은 훨씬 좋지 못했다. 에반스는 압실론 후작가의 개망나니로 소문나 있었다.

그동안 에반스가 한 일이라고는 조용히 검술 수련한 것밖에 없는데 말이다.

문제는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힌 터라 압실론 후작은 후작 부인의 모든 음모를 사실로 믿고 있다는 점이었다. 압실론 후작은 골치가 다 아팠다. 성인식이 다가올수록 에반스의 말썽은 극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놈이.”

오늘은 그가 가장 아끼는 애마의 다리를 에반스가 부러트렸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어제는 집안 하녀를 때려 문제를 일으키더니 오늘은 애마의 다리였다.

“프레드릭을 불러라.”

압실론 후작가의 제1기사단장이며 후작의 호위 기사이기도 한 나이트 프레드릭이 잠시 후, 후작의 집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찾으셨습니까?”

“나와 같이 갈 때가 있다.”

평소 압실론 후작은 어디를 갈 때면 기사단장의 임무 덕분에 바쁜 프레드릭 대신 다른 기사를 호위로 데리고 다녔다.

그러나 가끔 개인적인 일이 있으면 반드시 프레드릭을 불렀다.

압실론 후작은 자주는 아니지만 한 번씩 잠행을 나갔다. 민생을 살피는 데 이런 잠행만큼 확실한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눈에 띄지 않게 검은 후드로 몸을 가린 압실론 후작은 후작성 주위 마을을 돌며 열심히 살고 있는 백성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물가가 조금 오르기는 했지만 시장은 잘 굴러가는군.”

상점이 밀집된 번화가와 시장을 둘러보며 압실론 후작은 비교적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밀의 가격이 작년에 비해 오십 퍼센트나 올랐습니다. 그 때문에 백성들이 많이들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프레드릭이 말했다. 그 말에 압실론 후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말인가? 내게 보고되기로 밀의 가격은 작년 대비 이십 퍼센트가 올랐다고 했거늘.”

압실론 후작이 프레드릭을 데리고 잠행을 나서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훌륭한 호위 기사이기도 했지만, 거짓말이나 아부라고는 전혀 할 줄 모르는 강직한 성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밀의 가격이 오십 퍼센트 인상된 것은 확실합니다. 제 아내가 며칠 전, 제게 한 말이니 말입니다.”

압실론 후작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압실론 후작령에서 밀을 가장 많이 사들인 곳은 다름 아닌 램버튼 백작가였다.

램버튼 백작가의 가주, 램버튼 백작은 바로 현 압실론 후작 부인의 오라비였다.

아무래도 램버튼 백작가에서 압실론 후작 몰래 곡물 거래에 개입한 것이 분명했다.

“내 이놈들을.”

압실론 후작은 당장 램버튼 백작가와 결탁하고 곡물 거래를 한 재무관들을 불러 엄중하게 문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자.”

서둘러 프레드릭과 함께 후작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압실론 후작은 평소 이용하던 정문이 아닌, 후문을 이용했다.

후문에서 후작이 사용하는 건물로 가려면 가장 빠른 길은 후원을 통과해야 했다. 화가 단단히 난 압실론 후작은 당연히 가장 빠른 길로 걸었다.

“타앗!”

그때,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가 압실론 후작의 귀에 들려왔다.

“응. 뭐지?”

후작이 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았다.

“저긴.”

압실론 후작은 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바로 후원 쪽 에반스가 기거하는 곳에서 터져 나온 기합이었던 것이다. 개망나니 에반스를 생각하니 후작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때였다.

“좋은 기운이군요.”

불쑥 프레드릭이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누군지 모르겠으나 제법 정순한 오러를 체내에 지니고 있는 듯 보입니다. 수련 중에 그 예기가 이곳에 있는 저에게까지 느껴질 정도라면 말입니다.”

프레드릭은 최상급 소드 익스퍼트로 후작령에서 가장 강한 기사였다.

압실론 후작은 프레드릭이 소드 마스터가 되어 주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보다 많은 시간을 수련에 정진할 수 있게 호위 임무는 물론, 기사단장의 일도 최근에는 부기사단장에게 모두 떠맡겼다.

게다가 평소 칭찬에 인색하기로 소문난 프레드릭이었다. 당연히 압실론 후작으로서도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지?’

압실론 후작의 발걸음이 자연 후원 쪽 에반스의 거처 방향으로 움직였다.

압실론 후작가의 후원은 아름답기로 제국에서도 소문이 나 있었다.

그 꽃향기가 가득한 꽃밭을 지나 정원 특유의 미로를 뚫고 지나가자 텅 빈 공간이 나타났다.

그런데 그곳은 다른 곳과 달리 흙이 여기저기 파헤쳐 있었다. 후원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도 압실론 후작은 처음 알았다.

‘정원은 나무와 꽃이나 있을 줄 알았지 이렇게 텅 빈 공터가 있을 줄은 몰랐군.’

그때 공터 한가운데에서 상의를 벗은 채, 검술 훈련을 하고 있는 자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저기 푹푹 파인 황폐한 땅에서 그자는 익숙한 듯 검을 휘두르고 열심히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자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검술을 수련하던 에반스였다.

후원에 마련된 공터는 검술 스승이었던 홀렌스와 에반스가 직접 터를 닦아서 만든 연무장이었다.

에반스는 묵직한 검을 가로와 세로로 흔들며 천천히 온몸의 근육을 깨우고 나서 돌연 한 걸음 앞으로 발을 내디디며 검을 휘둘렀다.

부웅!

점차 검을 휘두르는 속도를 높여 가며 전후좌우로 검을 이리저리 휘두르자 검과 몸이 혼연일체가 되어 움직였다.

“좋군요.”

후원의 나무 뒤에 숨어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프레드릭이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압실론 후작 역시 기사 수련을 받은 만큼 눈앞에 검술을 펼치고 있는 자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화려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검술을 펼쳐 보이고 나서 그자가 호흡을 가다듬을 때, 압실론 후작은 그자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저, 저…….”

놀란 압실론 후작이 막 손짓을 하려 할 때, 그자의 검에서 푸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호오. 예상은 했지만 저 정도로 선명한 오러검이라니……!”

감탄사를 연발하는 프레드릭은 그의 주군인 압실론 후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압실론 후작성에서 검은 머리카락의 젊은 남자는 몇 명 되지 않았다.

에반스가 워낙 두문불출해서 프레드릭은 한눈에 에반스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압실론 후작은 바로 에반스를 알아보았다.

“저자의 실력이 어느 정도일 것 같나?”

압실론 후작의 물음에 프레드릭은 여전히 눈을 떼지 못한 채 대답했다.

“소드 익스퍼트 초급 이상입니다. 중급에 가까운 실력으로 보입니다. 저런 자가 있었다니. 당장 누군지 알아봐야겠습니다.”

프레드릭은 평소 검술 수련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또한 에반스를 볼 일도 거의 없어서 지금 그의 눈앞에서 검술을 펼쳐 보이고 있는 자가 압실론 후작가의 장남, 에반스인 줄은 몰랐다.

프레드릭의 대답에 압실론 후작이 말했다.

“그만 가지.”

“네?”

프레드릭이 놀라며 압실론 후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와서 눈앞의 대단한 실력을 갖춘 자가 누군지 알아보지도 않고 간다는 것은 평소 압실론 후작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잔뜩 굳은 얼굴의 압실론 후작은 어디 아픈 사람처럼 창백해 보였다.

“후작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어디 아프십니까?”

걱정스러워진 프레드릭이 호들갑스럽게 물었다.

“나는 괜찮네. 오랜만에 잠행이라 피곤한 모양이야. 그만 들어가서 쉬어야겠어.”

압실론 후작은 프레드릭과 함께 후원을 빠져나갔다. 그는 자신의 집무실이 있는 건물 쪽으로 움직이면서 힐끗 뒤쪽 후원을 돌아보았다.

그때, 프레드릭이 그제야 뭔가를 눈치챈 것 같았다.

“아! 그러고 보니 검은 머리카락이면 후원의 그자는…….”

“쉿! 당분간 이 일은 아무에게도 말해선 안 될 것이야.”

“…….”

압실론 후작의 명령에 프레드릭은 말없이 머리를 숙였다.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압실론 후작은 곡물 가격을 속인 영지 재무관들을 부르는 것도 잊고 뭔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개망나니인 에반스가 소드 익스퍼드 중급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은 압실론 후작에게 있어 너무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압실론 후작도 젊은 시절 기사 수련을 받았기 때문에 오러검을 사용하는 소드 익스퍼트가 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았다.

에반스의 나이는 이제 15살이었다. 물론 며칠 후면 16살로 성인이 되지만 15살이나 16살이나 어차피 소드 익스퍼트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그런데 에반스는 그 나이에 소드 익스퍼트 중급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 말은 그동안 에반스가 꾸준히 검술 수련을 해 왔다는 말이었다.

그동안 에반스는 압실론 후작에게 매일 사고나 치는 골칫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

압실론 후작은 밀의 가격도 그렇고, 에반스의 일도 그렇고, 후작성 내에 자신이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압실론 후작은 그날 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집사 올란도를 불렀다.

집사 올란도와 시녀장 엘렌은 죽은 후작 부인을 곁에서 모시던 자들이었다. 후작 부인이 죽으면서 그들이 후작 부인을 대신해서 지금까지 에반스를 키우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압실론 후작이 먼저 올란도에게 말했다. 그러자 올란도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후작님께서 저를 찾으셨군요.”

“그게 무슨 말인가?”

“저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날?”

“후작님께서 도련님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될 날 말입니다.”

압실론 후작과 올란도의 대화는 세 시간에 걸쳐 이뤄졌다.

새벽 무렵 올란도는 압실론 후작의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압실론 후작은 그동안 에반스가 얼마나 고독하게 성장했으며 또 계모인 후작 부인과 그 자식들에게 어떤 식으로 천대받아 왔는지 들었다.

더욱이 에반스가 벌인 것으로 매일 보고되던 말썽도 사실 그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압실론 후작은 올란도를 내보내고 나서 아침 해가 뜰 때까지 홀로 자신의 집무실에 남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압실론 후작은 정오가 되어서야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총관을 불러라. 아니다. 됐다.”

압실론 후작은 그동안 집안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후작가 내부의 일은 대부분 후작 부인과 총관이 알아서 처리해 왔다고 보면 됐다.

총관 레이먼드는 후작 부인이 결혼할 때 데리고 온 집사였다. 그러니 사실상 압실론 후작 가문의 일은 후작 부인의 뜻대로 처리되어 왔다고 보면 됐다.

어린 에반스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을지 안 보고도 훤했다.

‘내가 미쳤구나. 그녀를 닮은 것이 보기 싫어서 그 아이를 멀리했지만 정작 그 아이마저 영영 사라지면 이제 그녀를 기억하고 추억할 만한 것이 세상에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아! 이제야 그 아이의 소중함을 깨닫다니…….’

그때부터 압실론 후작은 어떻게든 에반스를 보호하려 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후작가의 가신들은 에반스가 성인이 되어 가자 서둘러 그를 내쫓으려 했던 것이다. 그동안 에반스가 저질러 왔던 죄목을 하나하나 거론하며 말이다.

압실론 후작은 그것이 에반스의 짓이 아님을 알았지만 그것을 증명할 방법도, 시간도 없었다. 후작 부인과 가신들은 성인이 된 에반스를 하루라도 후작성에 더 남겨 두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압실론 후작은 에반스를 후작성 밖으로 내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압실론 후작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

압실론 후작은 에반스의 성인식 날, 그를 자신의 집무실로 직접 불렀다.

“어서 오너라.”

압실론 후작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선 에반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압실론 후작은 그동안 자신의 잘못으로 고생하며 성장한 에반스에게 어떤 식으로든 용서를 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압실론 후작의 입에서는 미안하다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성인이 된 것을 축하한다.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네 스스로 자립할 때가 온 것 같다.”

에반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예상은 했지만 성인이 되자마자 나를 내치시려 하시는군.’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리는 에반스에게 압실론 후작이 이어서 말했다.

“영지를 내리겠다. 그곳에서 우선 영주로 백성들을 잘 다스려 보아라. 차후 때가 되면 내 너를 다시 부르겠다.”

에반스는 그래도 맨몸으로 내치지 않고 영지라도 내려 주겠다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에반스는 압실론 후작이 건네는 영주 임명장을 들고 후작의 집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힘없이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에반스의 거처에는 집사 올란도가 후작을 만나러 갔던 에반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련님, 후작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올란도의 물음에 에반스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버님께서 기어이 여기서 나를 내쫓으시겠다는군.”

올란도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올란도는 며칠 전 밤에 압실론 후작을 만나 그동안의 모든 오해가 이제 다 풀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압실론 후작이 에반스를 내쳤다고 하니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올란도가 에반스가 들고 있는 영주 임명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 나보고 영주가 되라더군.”

에반스는 들고 있던 영주 임명장을 별 대수롭지 않게 탁자 위로 던졌다. 보나마나 어디 변방의 조그마한 영지의 영주일 것이 뻔했다.

“도련님, 제가 잠깐 봐도 되겠습니까?”

올란도가 영주 임명장을 챙겨 들며 에반스에게 물었다.

“뭐 그러던지.”

사실 에반스도 자신이 어디 촌구석으로 내쫓기는지 조금쯤 궁금했다.

“헉!”

임명장을 보던 올란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것을 본 에반스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집사가 다 놀랠 정도면 도대체 어디 박혀 있는 촌구석 영지이기에.”

“카, 카라스라니!”

올란도가 놀란 나머지 에반스의 말을 끊으며 외쳤다.

“뭐?”

카라스란 말에 에반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올란도가 들고 있던 임명장을 에반스에게 건네며 말했다.

“카라스 영지의 영주를 맡으라고 되어 있군요. 직접 보십시오.”

올란도가 건네는 영주 임명장을 받아 든 에반스는 그 내용을 살폈다. 그런데 정말 임명장에는 에반스를 카라스의 영주에 임명한다고 적혀 있었다.

“맙소사! 카라스의 영주라니.”

카라스는 압실론 후작령의 3대 영지 중 하나였다.

압실론 후작성의 파렌스 영지. 압실론 후작의 동생, 첸들러 백작이 통치하는 라코프 백작성의 라사드 영지. 그리고 로체스 자작성의 카라스 영지였다.

로체스 자작성은 규모 면에서 라코프 백작성보다 오히려 더 큰 고성이었다.

군사적으로도 제국 북방 최고의 요충지로 상시 주둔 중인 병력만 5천이었다.

그런 중요한 곳의 영주라는 것은 압실론 후작이 아직 에반스를 자신의 장남으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감격 어린 표정으로 올란도가 말했다.

“이제 됐습니다. 드디어 후작님께서도 도련님을 인정하시나 봅니다.”

올란도는 자신이 압실론 후작과 만났음을 얘기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압실론 후작이 특별히 올란도에게 부탁했었다. 자신이 직접 에반스에게 지난날의 과오를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겠다고 말이다.

올란도는 그 일이 곧 이뤄질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에반스가 카라스의 영주로 압실론 후작성을 떠나는 날 아침까지 압실론 후작은 에반스에게 용서를 구하지 못했다.

압실론 후작은 막상 에반스를 보자 도무지 입에서 용서해 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서로 소원하게 지내다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 기회에 내가 카라스로 가든지 아니면 에반스를 불러서 그때 얘기해야겠다.’

압실론 후작은 다음을 기약하며 에반스를 카라스 영지로 떠나보냈다.

‘다음에 올 때는 압실론 후작가의 정식 후계자로 보자꾸나. 이 애비가 너의 자리를 반드시 되찾아 주마.’

압실론 후작은 몰래 후작성의 성곽에 올라서 떠나가는 자신의 장남 에반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지평선으로 행렬이 모두 사라지고 나서도 압실론 후작은 그 자리를 떠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후작님, 이만 돌아가시지요.”

프레드릭의 말에 그제야 압실론 후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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