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디언 소드-175화 (완결) (175/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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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외전> 이니안의 일기

펄럭. 펄럭.

일기장이 세차게 넘어간다.

일기장을 넘기는 네이라의 손길이 분주하다. 그리고 그녀의 두 눈이 분노로 빛나고 있었다.

“이게 뭐야? 뭐? 오빠 좋아해요? 웃기고 있네. 흥.”

재빨리 일기를 읽고 서둘러 다음 장으로 넘기던 네이라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일기를 읽어 갔다.

“네, 네이라. 좀 천천히 넘겨. 난 아직 다 못 읽었단 말이야.”

“오빠는 좀 가만히 있어. 이거 지금 심각하단 말이야. 아빠한테 딴 여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지금 천천히 읽게 생겼어?”

네이라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면서 일기장을 또 넘겼다.

“웃겨. 이 쉐이나라는 애. 공부 가르쳐 준다고 집으로 불러서는 고백을 해? 아주 순진한 척 해가지고는? 그리고 아빠는 또 뭐야. 그렇다고 헬렐레 해서는 나도 좋아하는 것 같아?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지 좋아하는 것 같아는 또 뭐야? 흥. 엄마는 이걸 아나 몰라.”

“네, 네이라. 일단 좀 진정해.”

동생의 돌변한 모습에 아이덴이 놀라서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아이덴의 목소리는 네이라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모든 정신을 이니안의 일기에 집중한 상태다.

“호오. 그래. 그래도 덕분에 아빠가 시험은 잘 쳤다 말이지. 아주 여우야, 여우.”

눈을 파랗게 빛내며 네이라의 손이 다시 일기장을 넘긴다.

이게 뭘까? 이런 게 사랑이라는 감정일까? 이제는 쉐이나가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다. 그리고 쉐이나를 보고 있노라면 항상 가슴이 두근거린다. 어떨 때는 마주 보고 있는 것도 힘들 때가 있다.

“하아, 점점?”

일기장에 적힌 한 구절에서 네이라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미 그녀의 얼굴은 흥분할 대로 흥분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이걸 아빠한테 가지고 가서 따져, 말어?”

“네이라. 이건 네가 이럴 게 아니잖아. 화를 내도 엄마가 화를 내야지.”

“오빠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

네이라의 말에서 살기까지 느껴지자 아이덴은 얼른 입을 닫았다.

맹세코 아이덴은 자신의 여동생의 이런 무서운 모습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나 어머니의 모습을 보더라도 네이라의 성격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두 분 모두 저런 불같은 성미는 없었던 것이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아이덴은 불현 듯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흑발의 미녀의 모습에 숨을 멈췄다.

‘로레인 고모. 그래 로레인 고모야.’

아이덴은 동생에게서 고모의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할아버지, 할머니에게서 로레인 고모의 성격이 아버지한테서는 숨어 있다가 네이라에게서 드러난 거야.’

아이덴은 두려웠다. 자신의 동생이 커서 로레인 고모처럼은 되지 않을까 두려웠다. 하지만 그것은 훗날의 일이다. 일단 지금 폭주하고 있는 동생을 말려야 했다.

아이덴은 재빨리 다시 네이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일기장을 바삐 넘기던 네이라의 손길이 둔해져 있었던 것이다. 네이라는 읽은 부분을 읽고 또 읽는 듯 일기장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일기장을 넘기지도 않았다.

“왜 그래?”

아이덴의 물음에도 네이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덴도 일기장에 시선을 가져갔다.

불타오른다.

검에 맺힌 청광의 오러가 지옥의 겁화가 되어 타오른다.

서걱.

사람의 허리를 양단한 검은 마치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푸른빛을 뿌리고 있다.

손에 전해진 감촉.

사람을 죽였다.

바로 오늘.

태어나서 첫 살인을 했다.

하지만 처음이 어려웠을 뿐.

그 이후는 쉬웠다.

지금까지 나의 검에 베어 목숨을 잃은 자가 몇일까?

셀 수 없다.

나는 무수히 검을 휘둘렀고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갔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빠져나간다.

하지만 아니다.

난 계속해서 검을 휘두른다. 검이 사람의 몸을 가르는 감촉이 손끝을 타고 와 머리까지 울린다.

젠장.

그래도 나는 계속해서 검을 휘두른다.

“헉헉헉.”

점점 숨이 가빠온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다. 빨리 가야 한다.

세 놈이 앞을 막아서며 튀어나온다.

“멈춰라! 네 이놈!”

셋 중 대장인 듯 보이는 복면의 사내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든다. 적이 보이는 순간 몸이 반응한다.

“비켜! 난 바빠!”

천천히 움직인다 싶은 검은 어느 순간 빛살로 화해 세 명을 동시에 쓸고 지나간다. 나는 세 명은 돌아보지도 않고 다시 달린다. 내 몸의 체력이 부족함을 지금처럼 원망한 적은 없었다. 젠장.

“저 방이다.”

얼마나 달렸을까?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저 방문만 열면 된다. 저곳에 그 아이가 있다.

쾅!

단번에 날린 검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을 박살냈다.

“쉐이나!”

난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 아이를 찾았다.

저기 있다.

내 두 눈에 그 어여쁜 모습이 선명히 들어온다.

푸욱.

그때 섬뜩한 소리가 귀에 울린다.

절대로 들려서는 안 되는 소리다.

살을 뚫고 뼈를 헤집으며 심장을 가르는 그 소리.

눈이 붉게 물들었다.

온몸이 덜덜 떨린다.

피가 거꾸로 솟는다.

나를 향해 항상 기분 좋은 미소를 보여주던 저 붉은 입술.

입가에 입술보다 더 붉은 핏줄기가 서서히 흘러내린다.

“오빠…….”

평소와 다름없는 미소였지만 왜 이다지도 처연하게 보이는 걸까?

온몸의 마나가 소용돌이치며 두 다리로 몰려간다.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끌어내 달린다.

쉐이나 앞에 도달한 것은 순식간이다.

검을 든 손을 뻗는다.

쉐이나의 뒤에서 그녀를 찌른 녀석의 목을 꿰뚫는 검.

그 순간 쉐이나의 두 눈이 사르르 감긴다.

항상 나를 바라봐주던 에메랄드빛의 눈동자가 사라져 간다.

검을 놓고 양손을 뻗어 쓰러지려는 그녀를 조심스레 안았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등에 박힌 검을 뽑는다.

가슴에 뻥 뚫린 구멍.

그곳에서 분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선혈.

얼굴에 무엇인가 묻었다.

따뜻한 온기를 가지고 천천히 흘러내리는 그것을 손으로 스윽 닦아낸다.

붉은 피다.

쉐이나를 안아든 내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온몸에서 피어오르는 오러가 격하게 불타오른다.

눈에서 초점이 사라진다.

분노는 내 몸의 오러를 더욱 광포하게 만든다.

나의 오러는 사방을 부수어 버리는 광풍으로 화한다.

“쉐이나!!”

목이 찢어지는 듯한 절규가 입에서 터져 나왔다.

난…

악마가 되었다.

아이덴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네이라 때문에 중간 부분을 모두 건너뛰었기에 내용이 연결이 되지 않는 것이다. 아빠가 시험공부를 하러 쉐이나라는 동급생의 집에 간다고 되어 있는 부분 이후로는 아이덴은 일기를 전혀 읽지 못한 것이다.

“네이라.”

일기의 내용에 대해 물으려고 아이덴은 동생을 쳐다보았다.

또르르륵.

네이라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굴러 떨어진다.

그 모습에 아이덴은 깜짝 놀랐다.

“왜, 왜 그래? 네이라.”

아이덴은 당황했다. 사랑스러운 여동생이 갑자기 눈물을 흘리자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던 것이다.

“너무 슬프다, 오빠. 이 쉐이나라는 아줌마. 너무 불쌍해.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화냈던 게 너무 미안해.”

네이라는 울먹울먹한 소리로 말했다.

“왜 그래?”

“아빠랑 쉐이나라는 아줌마랑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대. 그리고 여름 방학 때 같이 미에른 후작가의 별장으로 휴양 차 갔대. 친구들이랑 말이야. 그런데 괴한들이 습격을 한 거야. 그리고 아빠가 보는 앞에서 그 쉐이나라는 아줌마가 죽었어.”

아이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동생이 슬퍼하는 눈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이 부분 너무 슬퍼. 아빠가 일기에 절규하고 있는 것 같아. 아빠가 얼마나 슬퍼하는지 느낄 수 있어서 더 슬퍼.”

아이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동생에게 다가가 동생의 어깨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아앙!”

네이라는 아이덴의 품을 파고 들여 울음을 터뜨렸다.

네이라는 일곱 살이다.

“이 방에서 뭐하고 있니?”

그때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두 아이의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아. 뭘 이렇게 어질렀니? 이 방은 아빠가 어릴 때 쓰던 방이니까 깨끗이 하라고 했지?”

너저분하게 어질러져 있는 방의 모습에 포르시아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아, 저기. 엄마. 그게…….”

갑자기 나타난 엄마의 모습에 아이덴이 당황했다.

“응?”

몸을 돌린 자신의 두 아이의 모습에 포르시아의 안색이 변했다. 예쁘디, 예쁜 딸 네이라가 아이덴의 품에서 울고 있는 것이다.

“아이덴. 너. 설마 동생을…….”

“아, 아니에요. 엄마!”

아이덴은 놀라서 부인했다. 아이덴의 당황해 하는 모습에 포르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아이덴이 동생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응?”

포르시아의 시선이 아이덴의 뒤에 펼쳐진 노트에 향했다. 익숙한 글씨가 쓰여진 노트다. 멀어서 무어라 쓰여 있는지는 잘 알아볼 수 없었지만 몇몇 글자는 읽을 수 있었다.

“난 악마가 되었다?”

포르시아는 중얼거리며 그 문장을 읽었다. 익숙한 문장이다. 가슴에 아로새겨진 문장이었다. 그제야 포르시아는 두 아이가 이 방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너희들!”

포르시아의 목소리에 두 아이는 찔끔했다.

“아빠 어릴 때 방에서 아빠 일기를 읽다니, 뭐하는 거니.”

“힉.”

두 아이는 모두 몸을 움츠렸다.

“후우. 그리고 하필이면 거기까지 읽을 것은 뭐니?”

포르시아도 일기의 내용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아이들을 보았다.

“엄마!”

네이라가 냉큼 그때를 놓치지 않고 포르시아의 품에 안겼다.

“슬퍼요. 너무 슬퍼요. 엉엉.”

포르시아의 가슴을 적시며 네이라가 펑펑 울었다.

“그래, 그래. 우리 네이라. 착하지. 그래. 아빠의 일기는 참 슬퍼. 엄마도 그 부분을 읽고는 무척이나 울었단다. 예전에 아빠에게 그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이야기로 듣는 거랑 그때의 심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일기랑은 다르더구나. 무척이나 슬펐지. 너희들은 하필이면 그 부분을 읽었니.”

포르시아는 네이라의 등을 쓰다듬으며 달랬다. 마음 착한 자신의 딸이 너무나 슬프게 울었다.

“저… 엄마도 아빠 일기 몰래 읽은 거예요?”

무언가를 눈치 챈 아이덴이 은근하게 포르시아에게 물었다. 아이덴은 지금 일기의 슬픈 내용보다는 아빠의 일기를 몰래 훔쳐본 일로 혼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응?”

아들의 물음에 포르시아는 당황했다.

네이라를 달래느라 그만 자신도 이니안의 일기를 몰래 읽은 것을 아이들에게 말해 버린 것이다.

“그, 그게…….”

열 살 배기 아들의 물음에 포르시아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헤헤.”

그 모습에 아이덴이 배시시 웃었다.

“그럼 엄마랑 우리랑 공범이네요?”

반짝반짝이는 눈으로 포르시아를 올려다보는 아이덴. 그 눈빛이 말하는 바는 뻔했다.

“너!”

포르시아가 눈을 부라렸다. 그 모습에 아이덴은 순간 움찔했다.

“후우.”

하지만 이내 포르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 엄마도 공범이구나.”

그 말에 아이덴도 포르시아의 품에 안겨 들었다.

“엄마.”

아이덴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으음. 그럼 이왕 이렇게 공범이 된 것 같이 끝까지 읽어 볼까? 네이라. 이 부분은 슬프지만 뒤에는 즐거운 부분도 많단다. 아빠는 보기와는 다르게 굉장히 성실히 일기를 쓰시거든. 사실 엄마도 많이 놀랐단다.”

“으음. 그렇구나.”

퉁퉁 부은 눈으로 아빠의 일기에 시선을 가져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 앉아서 두 아이를 안은 포르시아가 이니안의 일기장을 넘겼다.

“그런데 엄마. 아빠가 원래 그렇게 눈치가 없어요?”

네이라의 물음에 포르시아가 웃음 짓는다.

“그래. 무척이나 눈치가 없지. 오죽하면 엄마가 훔쳐보는지도 모르고 아직도 여기에 일기를 적겠니.”

“헤에? 정말요?”

“그럼. 이 일기장에 삼 일 전 일기까지 적혀 있단다. 사실 엄마도 오늘 아침에 봤거든. 호호호.”

이니안의 어린 시절의 방에서 세 사람의 웃음소리가 피어난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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