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디언 소드-174화 (174/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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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이니안은 그의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다. 그래도 제국의 황자였기에 그 목숨을 빼앗는다는 것은 자칫 대륙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끌고 들어갈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가자.”

이니안이 포르시아를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네.”

포르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녀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잘 됐어요. 이니안 오빠. 저도 이제 안심하고 떠날 수 있을 것 같네요.]

“응?”

그때 이니안의 귀에 불현 듯 들리는 목소리.

그리고 이니안은 볼 수 있었다. 마령천참공을 최대한으로 운용하고 있었기에 여전히 그의 눈에는 마이너스 마나가 전해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볼 수 있었다. 기쁨 가득한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그를 향해 손을 흔들며 하늘 위로 천천히 올라가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쉐이나…….”

이니안은 추억에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오빠. 항상 걱정이었어요. 오빠를 아니까. 제가 없으면 어떻게 될지 알 것 같아서 항상 걱정하며 곁에 있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안심하고 떠날 수 있을 것 같네요. 오빠. 행복하세요.]

그리고 쉐이나는 사라졌다.

이니안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랬구나. 늘 내 곁에 있었구나. 그래서 그곳에 없었던 거구나.”

이니안은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허공에 대고 중얼거리는 이니안의 모습에 포르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바라보았다. 때가 되면 말해줄 것을 믿기에.

46장 제 이름은 꽃이에요.

밝은 햇살이 내려 쬔다.

길리안 산맥은 그 악명과는 달리 한적하기만 했다. 길리안 산맥을 넘는 길의 한곳에 말 한 마리와 늑대 한 마리가 걷고 있다.

말의 등에 탄 이는 케라우 혼자였고 케이로스의 등에는 이니안과 포르시아가 함께 타고 있었다.

포르시아는 행복한 얼굴로 이니안의 품에 안겨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날 황자궁에서 이니안이 포르시아의 곁에서 작게 속삭였었다.

“네가 사라지고 나서 난 깨달았어… 난 네가 없으면 안 된다는 걸… 예전에 누군가가 나에게 말해줬었어. 이런 감정을 ‘사랑’이라고 부른다고… 아무래도 난 너를…….”

“네?”

“사… 사… 사랑해.”

어울리지 않는 장소였다.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였다.

힘겨운 싸움 끝에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서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그 말을 하는 이니안의 모습이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올지도 몰랐다.

아니 포르시아도 웃었다. 아주 환하게 웃었다.

자신이 꼭 하려던 말을 이니안이 먼저 해주었기에 포르시아는 기쁘게 웃었다.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고백에 대한 웃음 따위는 없었다. 그저 행복이 가득한 웃음이 있을 뿐이다.

그때 얼굴이 새빨개진 이니안이 어쩔 줄 몰라하며 포르시아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포르시아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다시 포르시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포르시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도요. 사랑해요.”

그녀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이니안은 세상을 다 얻은 듯한 웃음을 터뜨리며 포르시아를 안았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카르발 황자를 뒤로 하고 황자궁을 벗어났다.

다시 카일로니아로 가는 길은 포르시아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 길리안 산맥을 넘기로 했다.

이제는 마법으로 이동을 해도 되련만 이니안과 함께 여유로운 여행을 하고 싶다는 이유로 도보행을 고집했다. 물론 이니안은 기쁘게 승낙했다.

단지 옆에서 같이 가고 있는 케라우만 툴툴거리고 있을 뿐이다.

“쳇. 좋을 때다, 좋을 때야.”

케이로스의 등에서 서로 사랑의 말을 속삭이던 이니안이 생각났다는 듯 케라우를 돌아보았다.

“아, 그래. 네가 나를 따라다닌 것 말이야. 왜였지?”

“그거야 원래의 나로 돌아가기 위해서였지. 네놈은 분명히 나에게 그 실마리를 준다고 약속했었다.”

이제는 포르시아도 케라우가 뱀파이어인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납치할 때의 모습이나 그리고 로즈였을 때 보았던 케라우의 그 기괴했던 모습이 케라우가 뱀파이어라는 것을 알게 해준 것이다.

포르시아도 흥미 있다는 듯 이니안과 케라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래. 그랬지. 자, 받아.”

이니안은 품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 케라우에게 던졌다. 케라우는 가볍게 금화를 잡아챘다.

“뭐야? 이건.”

케라우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이니안을 바라보았다.

“네가 원래대로 돌아갈 실마리.”

“뭐?”

케라우는 약간 화가 난 듯했다. 자신에게는 절실한 문제를 가지고 이니안이 장난을 치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끝까지 들어. 일단 그 금화를 손바닥을 펼쳐서 그 위에 올려봐.”

“자.”

케라우는 일단 화를 가라앉히고 이니안이 시키는 대로 했다.

“좋아. 그럼 그 금화를 뒤집어봐. 어때?”

“어떻긴, 뒷면이 나왔지.”

“그럼 다시 뒤집어봐. 어때?”

“장난쳐? 그럼 당연히 앞면이지.”

“그렇지? 그게 실마리야.”

“이니안!”

케라우는 정말로 화가 난 듯했다. 누구나 다 아는 그런 사실로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여섯 살짜리 꼬마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머리 좀 굴려봐라. 처음에 앞면이던 동전을 한 번 뒤집으면 뒷면이 나와. 그걸 또 한 번 뒤집으면 다시 앞면이 나온다고.”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네놈 남의 절박한 사정을 가지고 장난을 치냐? 지금! 동전은 한 번 뒤집고, 또 한 번 뒤집으면 당연히…….”

거기까지 말한 케라우가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머리를 스쳐 지나간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잠깐… 그러니까 지금… 한 번 뒤집은 걸 다시 뒤집으면 다시… 설마?”

그제야 이니안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설마다.”

“허허. 허허허허.”

케라우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허탈할 수가. 설마 같은 저주를 두 번 당하면 원래대로 돌아간다니… 그런 어이없는…….”

“어이가 없지만 사실이야. 드래곤도 보증했고 말이야. 나도 좀 어이가 없었지만 말이지. 훗. 우리 집에 가면 이리아 누나가 그 저주를 사용할 수 있을 거야. 누나에게 부탁해 줄게.”

“아아, 아니다. 됐어. 당분간은 이렇게 지내도록 하지.”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뭐, 낮이라는 세계도 한 번 살아보니 제법 재미있더라고. 바실러스 녀석의 지하감옥에서는 괴롭기만 하던 곳인데 말이지. 뭐, 방법을 알았으니 되돌아가고 싶을 때는 얼마든지 되돌아갈 수 있으니까 말이야. 움화화화화홧!”

케라우는 말 위에서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쳇.”

이니안이 재미없다는 듯 혀를 찼다.

“쿡쿡.”

그 모습에 재미있는지 포르시아가 낮게 웃었다.

“아, 오빠.”

그때 생각났다는 듯 포르시아가 이니안을 불렀다.

“응?”

“그때, 쉐이나라고 부른 사람. 누구에요?”

이니안은 그날 이후 삼 일이나 지났지만 그때의 일에 대해서는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포르시아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은 것이다.

“그, 그게.”

그 물음에 이니안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러자 포르시아는 더욱 궁금해졌다.

“누구에요? 말해줘요.”

포르시아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이니안은 결국 한숨을 쉰 후 입을 열었다.

자신과 쉐이나에 대한 이야기가 천천히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렇게 쉐이나는 죽었어… 그리고 전에 갔던 그 별장이 그때 그곳이야.”

이니안은 이야기를 끝냈다.

포르시아가 눈물을 흘렸다. 자신이 알지 못하고 있던 이니안의 아픔 때문에. 그리고 자신보다 먼저 이니안을 사랑했던 쉐이나의 슬픈 죽음 때문에.

이니안의 눈에도 슬픔이 물들었다.

이제는 추억으로 변해 버린 쉐이나의 흔적. 그 이야기를 하는 동안 가슴 깊은 곳의 아픔이 다시 한 번 꿈틀한 것이다.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그저 케이로스가 앞으로 발을 내딛는데 몸을 맡기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포르시아의 입이 열렸다.

“오빠.”

“응?”

“제 이름의 뜻을 아세요?”

“글쎄.”

“제 고향인 메이지아 공작령에 가면요, 노란 들꽃이 있어요. 봄이면 산에 들에 곳곳에 흐드러지게 피는 노란 꽃이에요.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지만 무척이나 예쁘죠. 제 이름은 꽃이에요. 바로 그 꽃이요. 그 꽃의 이름이 포르시아죠. 후훗.”

“그래?”

“네. 그리고 제국에서는 꽃마다 꽃말이라는 것 붙여 놓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처음 들어.”

이니안의 대답에 포르시아는 미소를 지었다.

“포르시아도 고유한 꽃말을 가지고 있어요. 제 부모님이 그 꽃말 때문에 제 이름을 그렇게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그 꽃말은 ‘나의 사랑은 당신보다 깊습니다’예요. 나는 절대 오빠보다 먼저 떠나지 않을 거예요. 왜냐면 저는 포르시아니까. 저의 사랑이 더 깊으니까요.”

이니안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뒤에서 포르시아를 꼭 끌어안을 뿐이다.

“고마워.”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포르시아는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행복을 만끽했다.

“그럼 길을 바꾸도록 할까?”

“네? 어디로요? 카일로니아로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포르시아가 보고 싶어졌어. 그 노란 예쁜 꽃.”

“네? 그건 봄에 펴요. 지금은 늦여름이고요.”

“괜찮아. 봄까지 그곳에 있지 뭐. 어차피 장인어른이 되실 분이 계신 곳 아냐? 그곳에 가서 인사도 드리고 포르시아가 필 때까지 꾹 눌러 앉아 있지 뭐. 하하하.”

“오… 오빠.”

이니안의 말에 포르시아는 눈물을 찔끔 흘렸다.

다섯 살 때쯤 헤어지고 다시는 만나지 못한 부모님이다. 이제는 그녀의 기억 속에서 그 얼굴마저 희미해지여 했다.

하지만 그녀를 향해 지어 보이던 그 따뜻한 미소만은 똑똑히 기억했다.

“자, 그럼 케이로스 부탁한다.”

이니안의 지시에 케이로스는 나가던 방향을 바꿨다.

“쳇.”

옆에서 케라우의 투덜거림이 들렸으나 이니안은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한 마리의 말과 한 마리의 늑대는 길리안 산맥을 타고 남서쪽으로 이동했다. 메이지가 공작령은 길리안 산맥과 뉴레인안 산맥이 만나는 곳에 면해 있었다.

숲 속에 불어오는 싱그러운 바람이 두 사람의 뺨을 간질이고 지나간다.

휘이익휘이익.

이니안의 입에서 휘파람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바람이 지나간 그 자리를 이니안의 푸른 휘파람 소리가 뒤쫓아 갔다.

포르시아는 이니안이 품을 파고들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두 눈을 감고 이니안이 만들어주는 휘파람 소리에 빠져들었다.

<다음 편은 외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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