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
“후후. 내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겠지만 어쨌든 자네는 나에게 빚을 하나 졌어. 내가 자네 나라에 전쟁이 터지는 것을 막아주었으니까.”
억지 같았지만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래서?”
이니안은 짧게 물었다.
“나 하나로 만족하게.”
이니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들은 것이다.
“고맙네. 그리고 미안하다고 전해주게나.”
칸세르 공작이 웃으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가득한 평화로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입가로 한 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그의 눈이 어느새 스르르 감겼다.
“아버님!”
“공작 각하!”
아데노마와 스테판이 놀라서 공작의 곁에 다가가 어깨를 흔든다. 그러자 공작의 목이 힘없이 흔들릴 뿐이다.
입 안에 늘 지니고 다니던 독으로 자살을 한 것이다.
제국의 공작씩이나 되는 인물이 무엇이 두려워 항시 입 안에 독을 숨기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너무나 초라한 죽음을 맞이했다.
가진 바 야망에 비해서는 너무나 허무하고 어이없는 죽음이기도 했다.
이니안으로서도 공작의 자살은 의외였다. 설마 자살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 하나로 만족하라는 말에서 무언가 불길함은 느꼈지만 그래도 팔 하나 정도로 생각했었지, 설마 목숨을 버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니안은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는 없었다.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 카르발 황자와 담판을 지어야 했다. 이니안은 아직 포르시아가 깨어난 사실을 몰랐다.
“잠깐.”
서재 밖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이니안을 향해 아데노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이니안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하얀 장갑이 날아와 이니안의 뺨에 부딪쳤다가 떨어진다.
“결투를 청한다.”
“이유는?”
“아버지의 죽음.”
간결한 문답.
이니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니안의 입장에서는 칸세르 공작은 죽어야 했기에 죽은 것뿐이다. 그 정도의 야망을 지닌 이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은 것에는 무척이나 놀랐지만 그뿐이다.
하지만 아데노마의 입장은 달랐다. 결국은 이니안이 옴으로 해서 아버지가 자살한 것이다. 그에게는 이니안에게 도전할 권리가 있었다.
“나가지.”
그 말에 아데노마가 앞장서 걸음을 옮겼다. 이니안은 잠자코 그 뒤를 따랐다. 앞장선 아데노마의 꽉 쥔 주먹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데노마는 지하로 내려갔다. 그가 지난 시간 동안 고대의 검법서를 수련한 지하 연무장으로 향하는 것이다.
가문의 사람들에게 보여줘서 좋을 것 없는 결투다. 아직 공작의 죽음은 스테판만이 알고 있는 상황이다. 더군다나 아데노마는 결투에서 승리할 자신이 없었다.
고대의 검법을 익히고 이 연무장 벗어났을 때만 하더라도 세상의 그 누구라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유명한 사이몬 가의 공작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이니안을 만나고 그 생각은 달라졌다.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니안이 가진 실력의 깊이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불안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의 결투. 그 결투에서 승리의 자신이 없었기에 아데노마는 아무도 없는 지하 연무장으로 향한 것이다.
그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연무장의 문이 열렸다. 내부에는 마법등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런 곳, 대부분 고위 귀족가에는 있는 모양이군.”
이니안이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솔직히 이런 지하 연무장은 자신의 집에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훗. 글쎄. 단지 우리 가문은 비밀이 좀 많아서 말이야.”
“뭐,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
이니안이 아데노마를 마주 보며 섰다. 둘 사이의 거리는 오 미터 정도였다.
두 사람의 손이 동시에 허리에 걸린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스르릉.
검이 검집을 빠져나오는 소리가 동시에 두 곳에서 울린다.
마법등의 빛을 받아 조금은 어두운 공간에서 검신이 반짝인다. 두 사람은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검을 뽑아 든 그 상태로 마주 보고 있을 뿐이다.
아데노마가 한 발을 스윽 끌면서 조금 앞으로 나왔다. 그 순간 이니안의 몸이 사라졌다. 마령보의 수법으로 재빨리 이동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아데노마의 모습 역시 사라졌다. 그 역시 고대의 검법서에 있던 몸을 움직이는 법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두 사람은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르게 맹렬한 속도로 움직였다.
챙채챙!
맹렬한 속도로 움직이는 가운데 있었던 몇 번의 마주침이 검이 부딪치는 소리로 울렸다.
그렇게 몇 번을 더 검을 섞은 후 두 사람은 다시 처음의 위치에서 서로를 마주 보며 섰다.
“다르군.”
“뭐가?”
“대륙에 퍼진 검법과는 다른 검법을 익혔어.”
이니안의 말에 아데노마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놀랐는가? 이 대륙에 고대라 불리던 시절의 검법이지. 그때는 다른 것은 몰라도 검법만큼은 현재보다 더욱 발전되어 있었으니까.”
‘고대의 검법이라… 운용법이 우리 가문의 그것과 비슷했어.’
이니안은 아데노마와 부딪칠 때의 느낌을 떠올렸다. 가문의 기사와 대련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해볼까?”
이니안이 검을 살짝 비스듬히 기울였다.
“좋아.”
아데노마는 검을 한가운데에 거의 수직으로 검을 곧추세웠다.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빛났다.
“마령소혼.”
“파이어!”
두 사람의 외침과 동시에 각자의 초식이 검끝에서 뿜어져 나왔다.
쾅!
첫 번째 부딪침은 무승부였다.
‘검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화기를 다루는 검법이로군.’
사이몬 가에도 그런 검법이 있었다. 자신이 익히지는 않았지만 예전에 메이린에게서 들은 기억이 있었다, 검으로 열기나 냉기를 다룰 수 있는 검법이 존재한다는 말을.
“파이어 월!”
한 번의 맞부딪침이 끝나자마자 아데노마는 재차 검을 찔러왔다. 검에서 불꽃이 피어올라 이니안을 집어삼키려 했다.
“귀혼천검.”
무수히 늘어난 검영이 이니안을 덮쳐 오는 불꽃을 갈랐다. 그리고는 오히려 아데노마를 찔러갔다.
“쳇.”
아데노마는 재빨리 몸을 구르며 이니안의 검을 피했다. 그리고 굴렀다 일어나는 반동을 이용해 곧장 검을 이니안을 향해 찔러 넣었다.
“파이어 스피어!”
불꽃의 창으로 변한 아데노마의 검은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이니안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왔다.
이니안은 만혼금쇄의 수법을 응용해 자신을 노리는 검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쳤다. 그사이 잠시 드러난 빈틈을 향해 이니안은 검을 내리며 청검밀밀의 수법을 찔러 들어갔다. 엄청난 빠르기의 공격이 실패한 여파로 아데노마는 잠시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순간을 노리고 이니안의 검이 그의 목젖으로 다가들었다.
아데노마는 이를 악물고 몸을 회전시켰다.
“파이어 소울!”
그 외침과 함께 검에서 뿜어져 나온 불꽃이 곧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다시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불꽃은 무척이나 거셌다. 이니안이 청검밀밀의 공격의 궤도를 바꿔버릴 정도로.
이니안의 검이 약간 빗나가는 순간 제자리에서 몸을 회전시키던 아데노마는 그대로 이니안에게 돌격해 왔다.
“칫.”
이니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생각한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니안은 마령보의 방위를 밟으며 재빨리 아데노마의 돌격을 피했다. 하지만 아데노마는 이니안 못지않은 속도로 그 뒤를 쫓았다.
“어쩔 수 없어.”
아데노마를 떨쳐 내지 못한 이니안이 낮게 중얼거렸다.
“마령현신.”
마령천참검의 후반부 초식을 사용했다.
그와 동시에 검끝에서 피어오른 기운은 마령이 되어 불꽃의 영혼, 즉 화령으로 화한 아데노마를 덮쳤다.
요란한 폭음과 진동 후 아데노마는 멀리 튕겨져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굴렀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불꽃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끝이군. 그럼 난 간다. 내가 결투에서 이겼으니 더 이상 마주 볼 일은 없을 것 같군.”
이니안은 그 말을 남기고 미련없이 지하 연무장을 벗어났다. 작게 새어 나오는 아데노마의 분노에 찬 흐느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땀에 흠뻑 젖은 카르발 황자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니 어느 정도 분노가 가라앉는 듯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포르시아가 창가의 의자에 앉아 밖을 내다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셨나요?”
아무런 말없이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는 이는 이 방의 주인인 카르발 황자뿐이었기에 포르시아는 어렵지 않게 그가 왔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창밖을 향한 채다.
“그렇소.”
카르발 황자는 뚜벅뚜벅 걸어 포르시아를 향해 다가갔다. 땀으로 흠뻑 젖은 그의 얼굴에서 결심에 찬 눈동자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으로 오면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포르시아, 날 보시오.”
그제야 포르시아는 의자에서 일어나 돌아섰다. 카르발 황자의 얼굴을 본 그녀의 얼굴에는 약간의 놀람이 떠올랐다.
“몸을 격하게 움직이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사람들이 그렇게 알도록 한 거요.”
도대체 속을 알 수가 없는 사람이다. 예전에도 그랬다. 그는 항상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보며 또, 항시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하지만 포르시아는 그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카르발 황자에게 거리감을 느끼게 만든 것이다.
“나와 결혼해 주시오. 아니, 결혼하시오.”
포르시아가 잠시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긴 사이 귀에 들린 카르발 황자의 말이다.
“네?”
갑작스러운 말에 포르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다.
“결혼해 주시오.”
이것이었던가? 조금 전 그가 보여준 결심의 눈빛은 이 말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너… 너무 갑작스러운 말씀이시네요. 게다가 전 아까 말씀드렸듯이…….”
“그만. 어차피 나는 그대와 혼약을 한 사이오. 그리고 그대가 일 년이나 잠이 드는 바람에 오히려 예정된 결혼식 날짜에서 더욱 늦어졌소. 그러니 당장이라도 결혼식을 올려도 이상할 것 없소. 아까 그 말은 못 들은 걸로 하겠소. 내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식을 올리고 싶지만 제국의 황자인 이상 절차가 복잡하오. 내 오늘 아바마마께 말씀을 드릴 것이니 그리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해두시오.”
포르시아의 말을 자르고 카르발 황자는 일방적으로 이야기했다. 포르시아는 잠시 얼떨떨한 얼굴로 카르발 황자를 보았다. 하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단호한 한마디다.
하지만 카르발 황자의 얼굴에 변화는 없었다. 아니,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얼굴이다.
“그대는 잠에서 깨어난 이후 무언가 변한 듯하오. 내가 알던 그대보다 훨씬 강하고 아름다워졌지. 그래서 더욱 그대를 포기할 수 없소.”
“제가 이렇게 변할 수 있었던 것은 추운 겨울 어느 날 어느 동굴에서 그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카르발 황자는 포르시아의 말에서 이상한 것을 느꼈다. 그녀가 이니안을 만난 것은 칸세르 영지의 저택에서였다. 그전에 그를 만나기는 했었다. 하지만 포르시아는 그때의 일을 잊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조금 전의 말로 보아 기억을 하는 듯했다.
“설마 기억을 찾은 것이오?”
카르발 황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네. 찾았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도, 그리고 로즈라는 이름으로 제도를 떠나 홀로 떠돌던 때의 기억도 말이지요. 그것도 다 그가 제가 잠든 동안 이곳에 와서 저를 이끌어주었기 때문입니다.”
포르시아의 말에 카르발 황자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