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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아가씨! 아가씨!”
그 순간 귀에 친숙한 캐서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 포르시아는 두 눈을 떴다.
꿈이었다. 자신은 꿈을 꾼 것이다.
악몽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대체 무슨 꿈일까?
“어떤 악몽을 꾸셨기에 그렇게 괴로워하세요? 어휴! 이 땀 좀 봐.”
곁에 다가온 캐서린이 물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아준다. 그러고 보니 포르시아의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대체 뭘까, 그 꿈은?’
풀리지 않는 의문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
날이 밝았다. 전날의 비 때문인지 더욱 청명하게 푸른 하늘이다.
이른 아침부터 일행은 분주히 떠날 차비를 했다. 포르시아가 악몽으로 일찍 깬 데다 이니안도 심기가 썩 좋아 보이지 않은 탓이 컸다.
그렇게 하룻밤의 갑작스러운 비를 피하게 해준 고마운 별장을 다섯 사람은 떠났다.
다시 이니안의 길 안내로 일행은 행로를 잡았다. 이 별장은 출입로를 지키는 사람이 있다 했기에 이동이 조심스러웠다. 별장 앞으로 난 편한 길로는 얼마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검문소를 지나면 다시금 편한 길로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좁은 산길로 검문소를 우회한 후 다시 일행은 대로에 들어설 수 있었다. 이제 산을 거의 넘은 상태였기에 오늘 저녁이면 산 아래에 있는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다행이에요. 별 일 없이 뉴레이안 산맥을 넘을 수 있어서요.”
“그렇습니다, 공녀님.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포르시아의 말에 곁에 있던 다프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니안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젯밤의 그 일 이후 두 사람은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누가 먼저 그런 것도 아니었다. 왠지 모르게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내가 어젯밤에는 왜 그런 것일까?’
이니안의 머리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은 왜 그때 테라스에 올라가 그렇게 지난 일을 모두 이야기한 것일까? 앞으로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과거인데도 말이다.
이니안은 포르시아 앞에서 왠지 무방비 상태로 변하는 자신을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
‘세이버 경은 괜찮을까? 어제 무척 슬퍼 보였는데…….’
두 사람은 각자의 생각에 잠겨 서로의 눈치만 볼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점점 길이 평탄해지고 있었다. 산을 거의 다 내려온 것이다. 멀리 보이는 모퉁이만 돌면 더 이상 경사진 길은 없을 듯했다.
이윽고 모퉁이를 돌았다.
그리고 이니안은 걸음을 멈췄다.
대로의 한가운데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사람 덕이었다.
그는 로브를 두른 채 당당히 대로에 서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이니안 일행에 볼일이 있어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보는군. 아니,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인가?”
이니안이 가만히 서 자신을 응시하고 있자 길을 막은 이의 입이 열렸다.
“누구시죠?”
이니안의 뒤에 있던 포르시아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포르시아 공녀님. 저는 칸세르 공작 각하와 일황자 저하를 모시고 있는 바실러스 자작이라 합니다.”
바실러스는 포르시아의 모습을 보자 격식있는 몸동작으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귀족다운 모습이었다.
‘바실러스 자작.’
이니안의 눈에서 불이 튀었다. 그리고 케라우의 눈에서 또한 불이 튀었다.
악연으로 얽힌 그가 갑자기 이곳에 나타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게다가 칸세르 공작과 일황자의 밑에 있다니 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그렇군요. 반가워요, 바실러스 자작님. 그런데 이 먼 타국까지는 어인 일이신지요? 이곳은 미오나인 제국이 아니라 카일로니아 왕국입니다만.”
포르시아는 차분한 얼굴로 바실러스를 보며 물었다.
“공작 각하와 황자 저하의 명령을 받잡고 왔습니다. 이만 여행을 끝내시고 본국으로 돌아오시라 하시더군요. 호위기사들과 병사들을 모두 잃은 이상 더 이상의 여행은 위험하다 하시면서요.”
바실러스는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하나 포르시아는 그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군요. 저는 여행을 떠나면서 아버님과 연락을 할 수 있는 수단은 단 하나만을 지니고 있어요. 그것도 아버님만의 일방적인 호출이 가능하죠. 때문에 아버님은 저의 일은 거의 모른답니다. 게다가 아버님의 호출 또한 없었고요.”
포르시아의 말에 바실러스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것으로 그는 스스로 거짓말을 했음을 시인한 꼴이 되어버렸다.
“하하. 설마 그럴 줄은 몰랐군요. 공녀님을 기만하려 한 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바실러스는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제가 일황자 저하의 명을 받잡고 공녀님을 모시러 온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단지 일을 조금 더 편하게 하려고 공작 각하의 명을 사칭했습니다만 그 점은 정말 죄송합니다. 이것이 제가 황자 저하의 명을 받잡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줄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실러스는 품에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독수리가 양각된 문장을 꺼내 보였다.
그것은 일황자의 문장이었다.
제국 내에서 오직 일황자 카르발 칼 폰트 미오나인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문장이다. 일개 자작이 아무렇지도 않게 품에 지니고 다닐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 말은 사실인 듯하군요.”
포르시아의 말에 바실러스는 빙그레 웃었다.
“물론입니다.”
“그래서 황자 저하께서 절 데려오라고 하셨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저하께서는 현재 공녀님께서 이런 작은 인원으로 여행을 하고 계신 것을 무척 걱정하고 계십니다.”
바실러스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저하께서는 참으로 대단하시군요. 아버님께서도 모르시는 일을 알고 계시다니.”
“저하께서 그만큼 공녀님을 걱정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하지만 저는 갈 수가 없군요. 이 여행은 결혼 전 저에게 주어진 마지막 자유입니다. 이 여행을 끝내는 것은 저의 의지로 결정할 거예요. 저하께도 그렇게 전해주세요.”
포르시아의 단호한 거절에 바실러스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공녀님의 여행이긴 합니다만 규모가 이렇게 작아져 버리면 공녀님의 자유 이전에 안전에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시지요. 황자 저하도 그 점을 염려하고 계십니다.”
“이곳에서 제국으로 가는 길이 더욱 위험할 거라 생각되는데요.”
포르시아의 대답에 바실러스의 얼굴에 웃음이 맺혔다.
“그 점은 염려 마십시오. 부족하나마 제가 마법사입니다. 무사히 제국까지 모실 수 있을 것입니다.”
바실러스의 대답에 이니안은 황자 측에서 포르시아의 몸에 펼쳐진 대법에 대한 사실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만일 알고 있다면 저렇게 섣불리 공간 이동 마법으로 데려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니안의 생각과는 달리 황자는 이미 포르시아의 몸에 펼쳐진 대법에 대한 내용을 시메티딘을 통해 들은 터다. 다만 공간 이동 마법이 대법에 이상을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를 뿐이었다.
“후우. 자작님은 제가 왜 이 험한 산맥을 도보로 넘었다고 생각하시나요? 편한 공간 이동 마법을 놔두고 말이지요. 저는 현재 공간 이동 마법으로 이동을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개인적인 몸 상태 때문에요.”
포르시아의 말에 바실러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설마 그런 상황에 있는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설마, 그 대법 때문에?’
바실러스가 알고 있는 사실로는 추측할 수 있는 포르시아가 공간 이동 마법을 이용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한계였다. 그리고 그의 추측은 맞았다.
“그러시군요. 정말, 그런 사실까지는 몰랐습니다. 하지만 어쩌지요? 저는 반드시 공녀님을 모셔오라는 황자 저하의 명을 받아서요. 정말 어길 수 없는 절대적인 명령을 받아서 말입니다.”
그 말을 하는 바실러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강제로라도 데려가겠다는 의지가 그의 몸에서 풍겨 나왔다. 포르시아가 그 기세에 밀려 주춤거렸다.
“자작님께서는 절 납치라도 하시겠다는 건가요?”
하지만 주춤거린 것도 잠시, 포르시아는 바실러스를 쏘아보며 당차게 외쳤다.
“황자 저하께서는 여의치 않을 경우 무력을 사용하는 것도 허락하셨습니다.”
바실러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 카르발 황자가 그런 적은 없었다. 하지만 바실러스는 ‘납치’해 오라는 명령을 그렇게 해석했다.
“훗. 과연 그게 마음대로 될까요? 저를 지키고 계신 분들은 수는 적지만 그 실력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포르시아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이미 이니안의 실력을 숱하게 봐오지 않았던가. 아니, 상대가 마법사인 데다 이렇게 근거리에 있다면 이니안이 나설 것도 없이 다프네만으로도 충분했다.
포르시아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다프네와 이니안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흐음…….”
두 사람의 행동에 바실러스는 잠시 침음을 흘렸다.
“다프네 파이어라 합니다. 무례를 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일단 물러서시지요. 저는 공녀님을 지키는 검. 설사 황자 저하의 명을 받들고 오셨다 하더라도 공녀님께서 거부하시면 전 그 뜻을 따를 겁니다.”
다프네가 절도있는 모습으로 바실러스를 향해 말했다.
“이니안 세이버입니다. 저 역시 파이어 경의 뜻과 같습니다.”
이니안은 짤막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바실러스의 얼굴에는 놀람의 기색이 역력했다.
“이… 니안 세이버?”
“네. 그렇습니다.”
이니안은 바실러스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으리라는 것은 예상했다. 이미 바실러스의 영지에서 그의 성의 지하 감옥에 한 번 갇힌 전적이 있지 않았던가.
“하하하. 그랬군요. 어째서 저자가 이곳에 있나 했더니 바로 당신이 공녀님을 지키고 있었군요. 하하하. 그래요. 이럴 수도 있었겠군요.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그때 분명 제 영지를 벗어난 분이신데 말이지요.”
이니안을 보는 바실러스의 눈이 빛났다.
이니안은 그의 말에서 어쩌면 그가 포르시아가 현재 처한 상황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이니안의 손이 천천히 검병을 향했다.
“무슨 말이지요?”
포르시아가 끼어들었다. 갑작스레 변한 바실러스의 변화가 불안했던 것이다.
“아닙니다, 공녀님. 저기 있는 세이버 경과는 약간의 인연이 있어서요. 이름만 알 뿐, 멀리서 지켜본 적이 한 번 있는 것이 전부였기에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이제야 알았군요. 물론 그 쪽에 사나운 얼굴로 저를 노려보고 있는 케라우 씨는 구면이지요. 제법 오랫동안 얼굴을 봐온 사이라고나 할까요?”
바실러스는 유들유들한 얼굴로 능청스레 말을 이었다.
“이놈…….”
바실러스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케라우의 전신에서 살기가 폭사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포르시아를 비롯한 다프네와 캐서린은 깜짝 놀랐다.
이니안은 차가운 눈으로 바실러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사실 다른 호위 분이라면 어떻게든 무력화할 자신이 있었습니다만 세이버 경은 별개거든요. 워낙 대단하신 분이라 말이죠.”
바실러스는 이니안이 과거에 싸우던 모습을 똑똑히 보았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더욱더 강해졌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요, 세이버 경이 있으니 저는 별다른 위험이 없다는 거예요.”
포르시아의 말에 바실러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제 말을 오해하셨나 보군요. 다른 호위 분이라면 제가 공녀님을 모셔가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을 텐데 세이버 경이 계시면 이야기는 달라지지요. 일이 어렵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케라우 씨가 함께 있다면 이야기는 쉬워집니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한 것이지요.”
“무슨…….”
바실러스의 뜻은 분명했다. 어떻게 해서든 포르시아 자신을 데려가겠다는 거다. 포르시아는 다시 한 번 주춤거렸다.
“그게 무슨 뜻이지?”
이니안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미 상대에게 적의를 느끼고 있기에 예의 따위는 차리지 않았다.
“후후후. 이런 뜻이지요.”
그 순간 바실러스는 마법으로 몸을 뒤로 훌쩍 띄웠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에서 검은 빛이 땅을 향해 쏘아졌다. 그의 손에서 나온 검은 빛이 곧바로 땅속에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