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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그래, 이제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지. 내 이름은 자크. 카일로니아 최고의 어새신 길드인 미스트 길드의 부마스터였다. 그날의 일은 내가 총지휘를 했지. 의뢰인은 미오나인 제국 칸세르 공작가의 집사. 그것이 전부다. 나는 단지 의뢰에 따른 마스터의 지휘에 따라 이곳을 습격했을 뿐이다. 의뢰는 드래곤의 눈물이라 불리는 보석의 획득과 이곳에 있던 사람들의 전멸. 단, 여의치 않을 시에는 드래곤의 눈물은 어떻게든 빼내올 것. 이것이었다. 너라는 엄청난 괴물이 있었던 덕에 의뢰는 반만 수행하게 되었지.]
이니안은 자크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강의 짐작이 확신으로 넘어간 것 말고는 바뀐 게 없었다.
애초에 칸세르 공작가를 의심하지 않았던가.
“고맙군.”
[그럼 나에게 볼일은 끝난 것인가?]
“대충은.”
[그럼 이만 자리를 비워주지. 난 나의 궁금증에 대한 생각을 계속해야 하겠으니.]
“좋을 대로.”
이니안은 자크의 요청대로 자리를 비워주기 위해 몸을 돌려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에 손을 올리던 이니안은 그 상태로 잠시 멈췄다.
“혹시… 그때 네가 죽였던 그 아이의 영혼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나?”
[몰라. 내가 영혼으로서의 내 자신을 인지했을 때부터 없었다. 이 자리에는 나 혼자 있었을 뿐이야.]
자크의 대답에 이니안을 문을 열고 그 방을 떠났다.
쉐이나는 이곳에 없었다.
그 사실이 묘한 안도감을 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니안은 자신의 기묘한 감정을 가슴 한구석에 밀어놓고 별장의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왜인지 모르게 시원한 바람을 맞고 싶었다.
좀 가늘어지기는 했지만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비에 맞는 것도 상관없다는 듯 이니안은 천천히 별장의 정원을 걸었다. 빗방울이 얼굴을 두드린다.
차가운 기운이 피부를 타고 몸속까지 스며든다.
이니안은 예전에 이곳에 왔을 때 쉐이나가 안내해 준 그 산책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무의식중의 행동이었다.
가만히 걷고 있는 이니안의 머릿속에 무수한 영상이 스쳐 지나갔다. 그 영상에는 모두 쉐이나의 밝은 얼굴이 있었다.
***
“응?”
어둠이 내린 산 속에 비가 내리는 풍경은 너무나 멋있었다. 게다가 이니안이 말한 대로 테라스 밖의 경치는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이미 어둠이 깔려 제대로 볼 수 없음에도 포르시아는 테라스로 나와 바깥 경치를 감상하고 있었다.
테라스의 난간에 맞고 튀는 물방울에 옷이 조금 젖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정원 위를 움직이는 검은 그림자가 들어왔다.
이 별장에는 자신들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갑작스러운 그림자의 출현에 포르시아는 깜짝 놀랐다. 설마 자신을 노리는 이들이 이곳까지 쫓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에서였다.
하지만 곧 침착을 되찾았다. 자신들은 보통 사람들은 모른다는 엘프의 길을 통해서 왔다. 이곳까지 찾아올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정원을 움직이는 그림자를 유심히 살폈다. 어둠에 휩싸여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익숙한 체형이다.
항상 유심히 바라보는 그 체형이었다.
그녀가 테라스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녀는 이미 그림자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인지한 것이다.
포르시아는 테라스의 난간 쪽으로 한 발 더 다가갔다. 빗방울이 세차게 튀었지만 상관치 않았다.
“세이버 경!”
포르시아는 제법 큰 목소리로 이니안을 불렀다. 그녀의 부름에 그림자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는 그녀가 있는 테라스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역시 세이버 경이로군요.”
바로 아래에 다가오자 테라스의 불빛에 얼굴 윤곽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니안의 얼굴을 확인한 포르시아가 그를 향해 생긋 웃어주었다.
“아직 주무시지 않았군요.”
이니안이 의외라는 얼굴로 말했다. 상당히 깊은 밤이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영혼들과 대화하기 위해 일부러 늦은 밤에 움직였는데. 이 시간에 포르시아가 깨어서 테라스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는 것은 솔직히 예상 밖의 일이었다.
“네. 빗소리가 좋아서요. 게다가 이 테라스에서 보이는 경치는 경의 말대로 정말로 아름답네요. 밤이 되어 볼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데도 마음이 포근해져요.”
포르시아는 그야말로 황홀한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이니안은 잠시 동안 멍하니 그 웃음을 바라보았다. 다행이라면 어두운 탓에 포르시아가 자신의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잠시 올라오시겠어요? 이렇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도 조금 그런데.”
난간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이니안을 내려보고 있는 포르시아가 웃으며 말했다. 떨어지는 빗방울에 젖은 그녀의 머리칼이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알겠습니다.”
이니안은 짧게 대답하고 벽을 박차고 가볍게 뛰어올랐다. 겨우 이층이다. 이 정도는 이니안에게 있어 한 번만 도약하면 오를 수 있는 높이인 것이다.
“역시, 쉽게 올라올 거라 생각했어요.”
그 모습에 포르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이어 경은 안에 있습니까?”
“네. 자요. 제법 피곤했나 봐요.”
이니안은 포르시아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프네가 얼마나 피곤할지 그도 짐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사로서 단련이 되어 있다 하더라도 한 사람을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하는 무척이나 피곤한 일인 것이다.
“이곳이 사연이 있는 곳인가 봐요?”
포르시아는 시선을 테라스 밖을 향한 채 이니안에게 지나가듯 말했다.
“네?”
갑작스러운 말에 이니안은 당황해했다.
“아니오. 이 근처에 온 이후로 경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 보여서요. 게다가 이 깊은 밤에 비를 맞으면서 정원을 서성이기도 하고… 제가 알고 있는 경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서 이곳 때문에 그러는 건가하고 생각해 본 것뿐이에요.”
포르시아는 이니안을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예쁜 웃음이다.
이니안은 걸음을 한 발 내딛어 테라스의 난간을 짚었다. 빗방울이 이니안의 머리를, 어깨를 때린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테라스 밖을 내다보았다.
“사연이 있는 곳이지요.”
이니안이 느릿느릿 말했다. 이니안에게서 두 발짝 정도 뒤에 서 있는 포르시아는 그런 그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누구나 사연 한두 가지 정도는 가지고 있는 법이에요.”
조용한 목소리다. 그리고 포근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듣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그런 목소리였다.
이니안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도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니안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의 입과 혀는 이곳에 얽힌 사연들을 음성으로 만들어 내보내고 있었다.
“쉐이나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별장의 주인인 미에른 후작가의 외동딸이었죠. 친구였습니다. 아니, 동생이자 연인이었죠.”
쿠쿵.
먼 곳을 응시하며 느릿느릿 꺼낸 이니안의 말에 포르시아는 가슴 한쪽이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연인… 연인이라…….’
포르시아의 가슴에 가장 큰 충격을 선사한 한 단어였다. 하나 이내 포르시아는 그 말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이니안의 말에 집중했다.
“저도 카일로니아의 귀족입니다. 지금은 이름 없는 평민 용병이지만요.”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그냥 보통 용병이라 생각하기에는 이니안이 보여주는 그 기품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것은 날 때부터 귀족인 자들이 가지는 고유의 기품이었다.
“남들보다 늦게 왕립학교에 들어갔죠. 그리고 그곳에서 만났습니다. 공부에는 취미가 없었던 관계로 두 살 어린 아이들과 함께 다녔죠. 좋은 아이였습니다. 사랑스러운 아이였죠. 어느 순간 사랑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말입니다. 훗.”
가슴이 아렸다.
자신이 이곳의 사연을 듣기를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슬픈 얼굴로 이야기를 하는 이니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포르시아는 자신의 가슴이 너무나 아렸다. 이니안의 표정과 그리고 이야기가 그녀를 아프게 했다.
“사 년 전의 일입니다. 왕립학교가 여름방학을 맞이했고 쉐이나와 또 다른 두 친구와 이곳에 휴양 차 왔었지요. 그리고 어느 밤 어새신들이 습격해 왔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검을 휘둘렀지요. 그때도 이미 제법 강했었으니까요. 정말 제 몸에 있는 힘이란 힘은 모조리 끌어내 싸웠습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죠. 쉐이나는 제 눈앞에서 죽었습니다. 왜 그들이 이곳을 습격했는지, 왜 이곳의 사람들을 그렇게 무자비하게 죽였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 미에른 후작가에서는 이곳을 폐쇄했으니까요. 그리고 저도 카일로니아를 떠났습니다.”
이니안은 입을 닫았다.
떨어진 빗방울이 머리를 축축하게 적신 한 후 얼굴을 따라 흘러내렸다. 적지 않은 비였기에 이미 이니안의 머리칼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얼굴도 빗물에 완전히 젖어 있었다.
붉게 물든 이니안의 눈. 빗물이 눈에 들어간 것일까? 가만히 테라스 밖의 어둠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는 이니안의 두 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테라스에서 이니안의 등을 바라보고 있는 포르시아의 눈도 붉었다. 비를 맞고 있지 않음에도 눈이 붉었다. 얼굴에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비를 맞고 있지 않음에도 말이다.
“쓸데없는 소리를 했군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니안은 그 말을 남기고 테라스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니안…….”
이니안의 뒷모습이 사라진 어둠 속으로 포르시아의 나직한 한마디가 스며들었다.
어둠을 바라보던 포르시아는 곧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테라스에 있을 기분이 나지 않았다. 계속 있으면 더욱 슬퍼질 것만 같았다.
방 안으로 들어온 포르시아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칼을 대강 닦고 침대에 누웠다. 어떻게 청소를 한 것인지 오랜 시간 방치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폭신한 이불이다.
포르시아의 눈이 감겼고 곧 그녀는 잠에 빠져들었다. 가슴 한곳에 새로이 가진 슬픔 때문일까, 잠에 빠져드는 그녀의 얼굴이 조금 어두웠다.
***
새하얀 눈밭이 펼쳐졌다.
손이 시렸다. 얼굴에서 감각이 사라진 지 오래다. 눈밭에서 사람을 파내 조그만 동굴로 옮겼다. 마법으로 불을 피우고 사람을 살렸다. 그 남자는 먹을 것을 요구했다. 아주 건방진 얼굴이다.
그 남자가 밖으로 나간다.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한 쪽 다리에 상처를 입은 그 남자가 들어왔다.
“내 이름은 로즈.”
분명 자신의 목소리다. 그런데 이상했다.
자신의 이름은 포르시아인데, 로즈라니? 대체 누구의 이름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사방의 전경이 사라졌다. 조그만 동굴과 그 남자는 사라지고 암흑만이 가득한 공간이 나타났다.
어둠 속에는 작은 빛이 두 개 있었다. 둘 중 하나가 조금 큰 크기가 다른 빛이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빛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언니! 왔구나!”
“왔네.”
자그마한 귀여운 여자 아이가 품에 폭 안기며 무척이나 반가워한다. 그리고 또 다른 한 명. 그저 살포시 웃으며 자신을 반긴다.
그런데 이상하다. 똑같아도 너무 똑같았다.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주는 여인.
포르시아 자신과 똑같이 생긴 이가 방긋 웃으며 시선을 던진다.
“어… 어떻게… 여긴…….”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몇 개의 단어만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 말에 자신을 보는 여자의 표정이 변한다.
“응? 그런가? 아직은 올 때가 아니었나 보구나.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그 말의 뜻을 아는 이의 얼굴에 왠지 쓸쓸함이 어린다.
“괜찮아. 그래도 너라면 언젠가 꼭 다시 제대로 와줄 거라고 믿고 있으니까. 됐으니까 이만 가봐. 다음에 올 때를 기다릴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저었다.
어느새 품에서 빠져나온 조그만 여자 아이도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든다. 그러고 보니 그 여자 아이의 모습이 낯이 익었다. 그렇다. 자신의 어린 시절의 모습과 꼭 같았다.
‘어, 어떻게 된 일이야.’
혼란스러웠다. 이해할 수 없었다. 무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