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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청소가 끝나자 이니안은 테라스로 통하는 커다란 문을 열었다. 문에 격자 형태로 끼워진 유리 덕에 문을 닫은 채로도 밖을 볼 수 있었지만, 이니안은 테라스로 나갔다.
비는 여전히 엄청난 기세로 내리고 있었다.
굵은 빗줄기로 인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그토록 좋아하며 자랑하던 풍경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니안이 이 방에 한 번 들어왔던 것도 쉐이나가 이곳의 풍경을 보여주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훗.”
짧은 웃음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온다.
굵은 빗방울이 테라스의 난간에 부딪친 후 물방울로 바뀌어 이니안에게 튀었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가만히 서서 비가 내리는 풍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렇게 밖을 내다보던 이니안은 몸을 돌려 옆방으로 들어갔다. 자신과 케라우가 머물 방이었다. 그 방은 처음 들어와 보는 방이었다. 역시 칼이 마법으로 깨끗이 청소해 주었다.
“청소가 끝났습니다.”
“빨리 하셨네요?”
이니안의 말에 가장 놀란 것은 캐서린이었다. 본디 청소는 그녀의 일 중 하나였기에 대강이라도 이런 곳을 청소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알고 있었다.
조금 전 이니안이 청소를 하겠다고 올라갈 때 자신도 돕기 위해 따라가려 했으나 포르시아가 손목을 잡는 바람에 이곳에서 기다려야 했다.
포르시아가 이니안에게서 무언가를 느낀 듯 가만히 고개를 저었기에 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혼자서 벌써 청소를 다했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드래곤을 불렀나 보군.’
케라우는 조금 전 이층에서 갑자기 나타난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느꼈기에 어떻게 된 일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수고하셨어요.”
“힘든 일은 아니었습니다. 올라가시지요.”
이니안의 안내에 따라 다들 이층으로 올라갔다.
“이 방에서 쉬십시오. 이 별장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방입니다. 지금은 비가 내려서 아무것도 안 보이지만 말입니다.”
포르시아와 다프네, 캐서린은 이니안이 열어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이지 깨끗이 청소가 되어 있었다. 몇 년간 아무도 쓰지 않은 방을 새 건물의 방처럼 만들어놓다니…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이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당연히 캐서린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직업적 자존심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캐서린의 의문 가득한 눈이 이니안을 향했다.
“비밀입니다.”
이니안은 싱긋 웃으며 그 한마디로 사전에 질문을 차단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이니안은 문을 닫고 곁에 있는 방으로 케라우와 들어갔다.
41장. 그녀는 없는 건가…
산의 밤은 빨리 찾아온다.
더군다나 비가 내려 어둠은 더욱 빨리 산을 찾아왔다.
방 안의 안락의자에 가만히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던 이니안이 몸을 일으켰다. 언젠가 한 번은 오려고 했던 곳이다. 과정이 어떻게 되었든 왔으니 이곳에서 하려던 일을 해야 했다.
메이린의 지적에 깨닫게 된 사실.
그날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알아야 했다.
이니안은 천천히 방을 나섰다. 그는 이미 마령천참공을 운용하고 있었다. 눈에도 마나를 보내고 있었다.
그의 눈에 희끄무레한 것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예전에 보았을 때는 그 희끄무레한 상태 그대로였지만 이제는 달랐다. 메이린에게서 받은 운용편을 모두 독파하고 익힌 상태였다. 그에 따라 마나를 운용하기 시작하자 그것들은 곧 사람의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이것이 진정한 영혼이었다.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영혼들이다. 생전의 한에 의해 떠나지 못하고 이곳에 머물러 있는 영혼들, 그것들이 이니안의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얼굴도 눈에 띠었다.
‘오랜만이군.’
하지만 그런 영혼에는 볼 일이 없었다. 어차피 그도 아무것도 모르고 이곳에서 죽은 이니까. 반가웠지만 이미 산 자와 죽은 자, 무시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니안은 눈에 띠는 영혼들의 모습을 잘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찾는 이는 단 둘이었다.
이곳의 집사였다가 그날 죽은 버스터와 이곳을 습격한 어새신들의 우두머리로 보였던 인물이었다.
버스터는 어새신들을 막다가 그들의 검에 죽었으며 어새신들의 우두머리는 이니안이 직접 죽였다.
그때 그는 그녀를 찔렀으며 이니안이 손으로 그의 목을 뚫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이다. 분명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니안은 그때 당시 버스터가 죽었던 곳으로 향했다. 마령천참공의 운용편에 보면 원한이 있는 영혼은 자신이 죽은 자리 근처에 머물러 있다고 되어 있었다.
버스터는 그때 별장의 현관에서 죽었다. 별장에서 가장 먼저 죽은 이였다.
이니안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현관에 도달했다. 문은 봉해져 있었기에 굳게 닫힌 채였다. 그는 문을 향해 서 있는 익숙한 등을 볼 수 있었다.
버스터다.
“오랜만입니다.”
이니안의 목소리가 울렸다. 익숙한 뒷모습의 주인이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절 보실 수 있습니까?]
“네.”
버스터의 물음에 이니안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사이몬 공작가의 이니안 도련님 같습니다만.]
“기억력은 여전히 좋으시군요.”
이니안이 희미하게 웃었다.
[어떻게 저를 보실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반갑습니다.]
버스터 역시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벌써 사 년이 지났습니다만 아직도 머물러 계시군요.”
[저는 이 별장을 지켜야 하는 집사입니다. 그런데도 소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떠날 수 있을 리가 없지요.]
그의 대답에 이니안은 그가 죽었으나 변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생전에도 무척이나 책임감이 강했던 사람이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그때의 일을 끝맺어야지요. 흉수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으니까요.”
[훗. 그 씹어 먹을 녀석들.]
이니안의 말에 버스터의 눈에 파란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 녀석들 중 남아 있는 녀석이 있습니까?”
어새신들은 어차피 목숨을 걸고 일을 하는 자들이다. 일을 하다가 실패해서 죽었다 하더라도 원한을 가지고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니안은 그것이 조금 불안했던 것이다.
[둘인가 있습니다. 쳐다도 보기 싫은 녀석들이지요.]
원한이 가득한 말이다. 이니안은 그 심정이 충분히 공감이 갔다. 자신 역시 그랬으니까.
“드래곤의 눈물이란 것을 아십니까?”
[아름다운 보석이지요. 몇 대 전의 후작부인께서 어디서 구했는지 가져다 이 별장에 두셨지요. 굉장히 귀한 물건이라 하시면서요. 제 일 중의 하나가 그것을 관리하는 것이기도 했답니다.]
이니안은 역시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그 녀석들은 드래곤의 눈물을 노리고 이곳을 습격한 것이다.
[왜 그러십니까?]
“드래곤의 눈물이 아직 이곳에 있습니까?”
[그건 모르겠군요. 그날 이후 저는 줄곧 이곳을 지키고 있었으니까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확인을 해보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버스터의 모습이 스르륵 사라졌다. 잠시 후 그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없군요.]
“역시. 그때 그 녀석들은 그것을 노리고 습격한 듯하군요.”
[어… 어째서…….]
이니안의 말에 버스터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이니안은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간략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 그런…….]
버스터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니안 도련님, 부탁드립니다. 부디 이곳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우리들의 원한을 풀어주십시오.]
버스터는 간절한 눈으로 이니안을 바라보았다.
이니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니안의 대답과 동시에 버스터의 몸이 희미해졌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 말과 함께 버스터는 사라졌다. 이니안이 원한을 풀어주겠다는 말에 더 이상 이 자리에 대한 미련이 남지 않은 것이다.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린 영혼은 신의 품으로 가서 다시 환생의 고리를 돈다. 버스터도 곧 환생의 고리에 들어가리라.
이니안은 몸을 돌렸다.
이제는 그자를 만나러 가야 할 때다. 그자라면 분명 그날 일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이 있으리라. 앞으로 내딛는 발걸음이 살짝 떨린다.
그자가 있으리라 생각되는 곳. 그곳은 그녀가 죽은 곳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녀도 그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몸이 가늘게 떨렸다.
이니안의 발걸음은 천천히 그날의 그곳으로 향했다.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선 식당.
어둠에 휩싸여 으스스한 기운이 감돈다.
이니안의 눈에 수많은 영혼들이 보였다. 모두 그날 이곳에서 죽은 시녀들의 영혼이리라.
영혼들 사이를 헤치고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그자를 죽인 그 장소로.
역시 그곳에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앉아 있는 영혼. 그 영혼의 주위로는 어떠한 영혼도 다가가지 않았다.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이니안 자신이 죽인 어새신들의 우두머리다.
“그녀는 없는 건가…….”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 그래 차라리 그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살짝 떨리던 몸이 진정됐다. 혹시라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찾아왔던 작은 경련은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사라졌다.
이니안은 그자의 영혼 앞에 우뚝 섰다.
그자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어떤 존재가 자신의 앞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느낀 것이다.
[누구냐?]
그의 입이 열렸다.
“널 죽인 자.”
이니안이 차갑게 대답한다.
[그런가? 훗.]
상대를 확인한 그자의 영혼은 낮은 웃음을 흘렸다.
[결국 너도 죽은 것인가?]
“아니, 난 살아 있어. 단지 어떤 능력을 손에 넣어 죽은 자를 볼 수 있을 뿐.”
[그렇군.]
그의 목소리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원한과 분노로 가득 차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그는 그 모든 것에서 초탈한 것 같았다.
“이해할 수 없군.”
이니안이 나직이 말했다.
[무얼 말인가?]
“세상에 남은 영혼들은 생전의 원한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라 들었어. 그런데 너에게서는 그런 원한 따위는 느낄 수가 없군.”
[세상에 미련이나 원한 따위는 없어. 단지 궁금함이 있을 뿐. 그깟 보석을 위해 우리가 죽어야 했던 이유가 무얼까 라는 궁금함이 나를 이곳에 잡아놓고 있는 것이지.]
“그게 미련이지.”
[그것과는 좀 달라.]
한 사람과 한 영혼은 마치 오랜 시간을 만나온 친구와 같이 대답했다.
[그런데 넌 왜 날 찾아온 거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날의 일 말인가?]
“그래.”
[하긴. 그날의 너는 무척이나 필사적이었지.]
“그랬지. 그리고 지키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네 목에 내 검을 박아 넣는 것뿐이었어.”
[후후. 그때 상당히 아팠어.]
“내 가슴은 더 아팠다.”
[그랬을지도.]
이니안의 눈은 무심히 가라앉아 있었다. 원수나 다름없는 어새신의 영혼과 대화를 나눔에도 불구하고 조그만 감정의 동요조차 없었다.
“원한과 미련이 없다면 말해줘도 되지 않을까?”
이니안의 요청에 영혼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