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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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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옆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에 다프네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는 곧 재빨리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포르시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혹시라도 그녀의 잠을 깨울까 불을 켜지는 않았지만 주변을 식별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포르시아의 얼굴을 확인한 다프네는 그녀를 살짝 흔들어 깨웠다.
“공녀님, 공녀님.”
포르시아의 얼굴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으며, 그녀는 괴로운 표정으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으음. 으으음.”
“공녀님.”
다프네가 조금 더 세게 포르시아의 몸을 흔들었다.
“으응?”
그제야 포르시아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리며 그녀가 잠에서 깼다.
“파이어 경?”
몇 번 눈을 깜빡인 포르시아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얼굴의 주인을 알아보았다.
“네. 접니다, 공녀님. 무슨 악몽이라도 꾸셨습니까?”
다프네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 제가 무슨…….”
“많이 괴로워하셨습니다.”
“그랬나요? 고마워요.”
포르시아는 몸을 일으켜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후우. 꿈을 꿨어요. 지금까지는 꾼 적이 없는 기이한 꿈이에요.”
꿈 이야기를 하는 포르시아의 표정은 웃는 것도 괴로워하는 것도 아닌 기묘한 것이었다.
“저도 공녀님께서 수면 중에 괴로워하시는 모습은 처음입니다.”
여행을 시작한 이후 줄곧 다프네는 포르시아와 잠자리를 계속해 왔다. 그녀를 지키는 호위 기사로 당연한 행동이다. 그간 포르시아는 어디에서든 쉬이 숙면을 취했다. 이렇게 잠을 자다가 신음을 흘린 것은 처음인 것이다.
“생전 가본 곳도 없는 곳이에요. 사방이 눈으로 뒤덮인 곳이었어요. 그리고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세찬 눈보라가 몰아치는 곳, 그곳을 저 혼자 걷고 있었어요. 온몸을 얼리는 추위와 얼굴에 부딪치는 차가운 눈발. 모두가 현실 같았어요. 한 번도 겪은 적이 없는 일인데도 말이죠. 훗. 그러다가 어딘가에 걸려 넘어졌죠. 사람 같았어요. 손이 새빨개져서는 눈을 팠어요. 그때 경이 절 깨운 거예요.”
포르시아는 멍한 눈으로 조금 전 꾼 꿈을 다프네에게 이야기했다.
“괜히 제가 경에게 폐를 끼쳤네요. 큰일은 아니니 다시 자도록 해요.”
그 말을 마치고 포르시아는 다시 침대에 몸을 묻었다. 다프네 역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침대에 몸을 눕혔지만 신경은 온통 포르시아에게 쏠려 있었다.
그날 밤. 포르시아는 두세 번 더 신음 소리를 흘리며 다프네를 깨웠다. 그때마다 다프네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포르시아를 바라볼 뿐 다시 그녀를 깨우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어차피 다시 잠들면서 또 다시 신음을 흘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
날이 밝았다.
과연 이니안의 장담대로 쾌청한 하늘이 푸르게 세상을 감싸 안고 있다.
“히야~ 정말 네 녀석 말대로 그쳤네. 어찌된 일이냐?”
“능력이지.”
케라우의 말에 이니안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공녀님, 괜찮으십니까?”
포르시아의 안색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예, 괜찮아요.”
포르시아는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지만 이니안의 눈에는 괜찮아 보이지가 않았다.
“하루쯤 더 쉬어도 상관없습니다만.”
“아니에요. 저는 빨리 사우론으로 가고 싶네요. 제가 마음껏 움직일 수 있는 시간도 얼마 없을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마을을 벗어나 포르시아와 캐서린이 케이로스의 등에 오르고 다시 빠른 이동이 시작되었다.
“세이버 경.”
“네.”
“우리는 어떤 강을 건너죠?”
뉴레이안 산맥에서는 두 개의 강이 발원한다. 북쪽으로 흘러가 라칼트 강과 합쳐져 바다로 흘러드는 사우 강, 그리고 남쪽으로 흘러 로란 반도의 서쪽 바다로 흘러드는 로란 강.
둘 모두 사우론의 서쪽에 있기에 어쨌든 강을 한 번은 건너야 한다. 뉴레이안 산맥을 넘기 전이라면 로란 강을, 넘은 후라면 사우 강을 건너야 하는 것이다.
“사우 강을 건널 생각입니다.”
“그러면 산맥을 먼저 넘는 거군요.”
“네.”
“각오는 되어 있으니 저에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포르시아는 아직 이니안이 편히 넘을 수 있는 길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때 이니안과 다프네의 대화는 그녀에게는 들리지 않았고 또 다프네가 굳이 이야기를 하지도 않은 것이다.
“알겠습니다.”
며칠을 동쪽으로 향하던 진로가 언젠가부터 북쪽으로 바뀌어 있었다. 점점 뉴레이안 산맥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다.
“공녀님.”
“왜 그러시죠?”
“사우론에는 왜 가고 싶어 하시는 겁니까?”
이니안은 지금껏 묻지 않았던 것을 물었다. 포르시아는 그저 사우론에 꼭 가보고 싶다고만 했을 뿐 왜 가고 싶은지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까지 굳이 묻지 않았지만 불쑥 이니안이 물은 것이다.
“꼭 가보고 싶은 가문이 하나 있어요.”
포르시아는 제법 빠르게 달리고 있는 케이로스의 등에서 하늘을 보면서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지난번에 한 번 그 가문의 사람을 보았지요. 여자인데도 불구하고 참 멋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니안은 그 말에 무언가 자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예감 같은 것을 느꼈다.
“사실 전 어렸을 때부터 검을 휘두르는 걸 보는 걸 좋아했어요. 공작가의 레이디가 기사 분들이나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다니 조금 우습죠? 훗. 하지만 말이에요. 검의 움직임을 보고 있노라면 너무나 아름다워 황홀경에 빠지곤 했죠. 특히나 실력이 뛰어난 기사 분들의 검은 더 아름다웠어요. 지금까지 제가 본 검들 중 가장 아름다운 검은 세이버 경의 검이에요.”
“칭찬 감사합니다.”
“아니요. 정말 그런 걸요.”
두 사람의 대화 때문일까? 이동 속도가 상당히 느려져 있었다. 포르시아의 말이 길어지자 다프네가 천천히 속도를 늦춰 이제는 조금 빨리 걷는 수준의 속도였다.
“그런데 그분의 검도 세이버 경 못지않게 아름다웠어요. 정말 감탄했죠. 그때는 세이버 경에 대한 걱정뿐이었는데도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으니까요.”
그 말에 이니안은 그녀가 감탄한 사람이 누구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느낀 그 불안감의 정체 또한 알 수 있었다.
“그때 결심했어요. 반드시 사우론에 가보겠다고. 그리고 꼭 사이몬 공작가에 들러서 수많은 아름다운 검들을 보고 싶다고 말이에요.”
역시.
포르시아는 이니안이 조금 전 느낀 대로 이니안 자신의 가문인 사이몬 공작가를 목적지로 삼고 있었다.
입 안이 씁쓸해졌다.
이런 식으로 집에 돌아가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렇군요.”
이니안은 낮게 대답했다.
“그래요. 제 개인적인 바람 때문에 많은 분들이 희생되셨지만… 전 그래서라도 꼭 가보고 싶어요. 그분들도 분명 그 아름다운 검의 움직임을 보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마지막 말에서 포르시아의 목이 잠겼다. 자신 때문에 죽은 병사들을 떠올리자 깊은 슬픔이 가슴을 차고 올라온 것이다.
이니안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르렀다.
‘그래, 이제 갈 때도 되었지.’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자신은 참으로 철없이 집을 뛰쳐나왔던 것 같다. 이제야 아버지의 말씀을, 형의 고됨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한 명의 사람을 지키는 입장이 되어서야 조금씩 자신이 부정했던 것을 인정하게 되고 가문에 대한 원망도 누그러들고 있었다.
느끼고 있었다.
그랬기에 지금도 그냥 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이다. 입 안이 잠시 씁쓸해졌을 뿐이다.
정녕 집에 돌아가기 싫었다면 아마도 당장에 멈춰 서서 포르시아를 설득했을 것이다, 갈 수 없다고.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녀가 가고 싶어하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의지가 이제는 집에 가볼 때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곳도 들러볼까?’
잠시 떠올린 생각을, 머리를 흔들어 떨쳐 버렸다.
이제는 추억이다. 비록 가슴을 찢는 아픈 추억이지만 말이다. 지금이라면 그곳에 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은 혼자의 몸이 아니다. 다른 이를 수행하는 몸이기에 그곳에 가는 것은 조금 미뤘다.
언젠가는 가봐야 하는 곳이다. 잊고 있었지만 메이린이 그곳에 갈 이유를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비록 곁을 스쳐 지나간다 해도 스쳐 지나갈 뿐인 것이다.
이틀을 더 가자 드디어 산맥에 접어들었다.
무성히 솟아 있는 나무들의 푸른 잎이 이제는 뉴레이안 산맥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니안은 변함없는 걸음으로 앞장서 걸었다.
산맥이었으나 길이 산맥 같지 않았다. 산을 오르고 있었지만 무척이나 움직이기가 편한 길이다. 과연 산을 넘고 있는 것이 맞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저기… 원래 산을 넘는 것이 이런 건가요?”
케이로스의 등에서 산길을 오르는 포르시아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이 정도의 일이라면 이니안과 다프네가 그렇게 반대할 리가 없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아닙니다. 저도 이런 산길은 처음입니다.”
다프네가 고개를 흔들면서 대답했다.
“세이버 경, 어떻게 된 거죠?”
포르시아의 시선이 이니안을 향했다.
“버티컬 산맥을 넘을 때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모르는 길이지요.”
이니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제가 예전에 엘프의 마을에 가본 적이 있다고 지나가듯 말씀드렸었죠?”
“그럼, 여기가?”
포르시아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네. 엘프들의 길입니다. 그들의 마을에서 그들이 주로 다니는 곳으로 뻗어 있는 길이지요. 엘프들의 자취가 남아 있기에 몬스터들도 접근하지 않는 곳입니다. 게다가 숲의 종족인 그들이 다님으로 해서 길이 오히려 다니기 쉽게 변했죠. 보통 사람도 쉬이 오를 수 있을 정도의 길입니다만 역시 산을 오른다는 것은 변함이 없으니 그래도 제법 힘드실 겁니다.”
“대단하군요, 세이버 경은 대체 어떻게 엘프까지 알고 있는 거죠?”
“운이 좋았습니다. 저도 한 아이 때문에 알게 되었죠. 그 아이나 저나 우연히요.”
이니안은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포르시아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니안의 목소리에 담긴 슬픔을 느낀 것이다.
“이 길을 따라가면 어렵지 않게 산을 넘을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이 끝이었다.
일행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하루를 이동해서 정상에 이르렀고 몇 개의 봉우리를 지나 드디어 뉴레이안 산맥의 북쪽면 경사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산맥을 절반쯤 내려왔다. 이제 반나절만 더 가면 산맥의 초입까지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늘이 심상치 않았다.
부쩍 늘어난 구름에 하늘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이거 한바탕 쏟아지겠는데?”
케라우가 하늘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그렇군요.”
포르시아 역시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그렇습니다, 공녀님. 특히나 산은 언제 비가 쏟아질지 모르는 곳이지요.”
포르시아의 말에 케라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잠시 비를 피하고 비가 그친 후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다프네 역시 하늘을 올려다본 후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