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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칼이 사라지고 얼마 되지 앉아 동쪽 하늘이 뿌옇게 밝아왔다.
“참으로 긴 밤이었네요.”
이니안 곁에 선 포르시아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네. 악몽 같은 밤이었습니다.”
입가에 쓴웃음이 감돈다.
하룻밤 사이에 모두 죽었다.
살아남은 이는 이니안과 포르시아, 다프네, 캐서린이 전부였다.
그때 한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냐?”
잔뜩 경계의 눈초리를 한 다프네가 외쳤다. 어느새 그녀는 검을 뽑아들고 있었다.
“어? 나야, 나. 그런데 무슨 일 있었어? 여기가 왜 이래?”
모포를 어깨에 둘러맨 케라우가 잠에서 덜 깬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저놈도 있었군.”
이니안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한창 힘들 때는 밤이라는 이유로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다가 모든 일이 끝난 아침이 되어서야 얼굴을 들이밀다니, 케라우를 만난 이후 지금처럼 얄미웠던 적은 없었다.
“후우.”
잔뜩 긴장했던 다프네는 검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물론 사나운 눈으로 케라우를 한 번 노려봐 주는 것을 빼먹지 않았다. 처참하게 파괴된 주변의 모습에 케라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때 어느 곳의 땅이 들썩였다. 다시 한 번 긴장이 감돌았다.
다프네와 케라우가 경계의 눈초리로 그곳을 지켜본다. 이윽고 흙먼지와 함께 땅을 뚫고 무엇인가가 솟아올랐다. 온몸이 털로 뒤덮인 거대한 덩치.
“케이로스! 살아 있었구나!”
포르시아가 눈물을 찔끔 흘리며 뛰어가 폭 털 속에 안겼다. 흙먼지로 잔뜩 더러워진 케이로스였지만 포르시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지평선 위로 솟아오른 붉은 태양이 땅 위의 어둠을 몰아내며 푸른 하늘로 떠올랐다.
40장. 있습니다
새빨간 구슬이 요사스러운 빛을 뿌리고 있다. 시메티딘은 흐뭇한 눈으로 구슬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른손에 들린 와인 잔이 다가가는 그의 입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미소를 만들고 있었다.
“후후후. 이제 곧 끝이겠군.”
창밖으로는 진득한 어둠이 비춰 보였다.
먼동이 터올 무렵 시메티딘은 비어버린 와인 잔을 구슬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몸을 기대고 있던 소파에서 엉덩이를 들었다.
그때.
요사스러운 빛을 발하고 있던 붉은 구슬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새빨갛던 구슬의 색이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거무죽죽한 색으로 변한 것이다.
몸을 일으키던 시메티딘은 그 자세 그대로 굳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구슬을 바라보았다. 엉거주춤한 어색하기 그지없는 자세였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눈앞에 드러난 결과에 대한 경악이 그를 잠시 동안 석상으로 만든 것이다.
“어, 어떻게… 그들이… 그들이…….”
시메티딘은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두 눈에는 불신의 빛이 가득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의 몸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엉거주춤하던 자세에서 꼿꼿이 몸을 세웠지만 그의 몸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죽다니… 정녕 너는 괴물이란 말이냐?”
허망하게 중얼거린 시메티딘은 이제는 검게 변한 구슬을 품에 넣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구슬이 말해주는 것은 하나였다.
이니안을 습격한 모든 뱀파이어가 죽고 일 또한 완전히 실패했음을 말이다. 만약 모두 죽더라도 성공했다면 구슬을 완전히 투명한 수정 구슬로 돌아갔을 것이다.
포르시아를 죽이는 것이 그들의 봉인을 풀기 위한 조건이었기에 그들 모두가 죽더라도 일단 포르시아만 죽이면 구슬은 투명하게 변한다. 구슬이 검게 변했다는 것은 일도 실패하고 그들도 모두 죽었다는 신호다.
시메티딘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
“그래? 알겠네.”
카르발은 고개를 끄덕이며 단순한 한마디만을 하고는 시메티딘을 바라보았다. 그 눈이 이만 나가보라는 뜻임을 아는 시메티딘은 공손히 인사를 한 후 카르발 황자의 방을 나왔다.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는 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깍지 낀 손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손 뒤의 입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웃고 있었을 것이다.
“젠장. 어떻게든 했어야 했는데…….”
품 안에 가진 패를 모두 쓴 상태였기에 그의 속은 더욱 타 들어갔다. 이제 멍하니 두 손 놓고 황자와 포르시아의 결혼을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할지도 몰랐다.
***
“다행이군. 이니안이라… 후후. 다음에 만날 일이 있다면 한 번쯤은 술 한 잔 기울이고 싶군. 정말 잘해줬어.”
카르발 황자는 소파 뒤로 머리를 젖히며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자리하고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제 바실러스 자작만 잘해주면 되는 것인가?”
그 말과 함께 카르발 황자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포르시아에 대한 걱정으로 지난밤 한숨도 자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가 무사하다는 소식에 그는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얼굴로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
무성한 나무들이 하늘을 완전히 가려 어둑어둑한 숲 속. 나무들 사이로 좁게 난 길 아닌 길을 이니안을 비롯한 네 사람이 걷고 있었다.
가장 선두에서 걷고 있는 이니안은 몇 걸음을 걷다가 뒤를 돌아보곤 하는 행동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세이버 경, 저는 괜찮아요.”
그때마다 포르시아는 생긋 웃으며 이니안에게 말했다. 마차가 완전히 박살이 나고 포르시아를 호위하던 병사들과 기사들도 이니안과 뱀파이어들의 싸움에 전멸을 했기에 포르시아 역시 도보로 이동하고 있었다.
간밤의 싸움에서 무사히 살아남았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다.
너무도 엄청난 위력의 싸움이 주변의 지형을 완전히 바꿔 버려 포르시아가 자신을 지켜주던 병사들의 시체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인 정도였다.
그래도 그들이 죽은 것은 사실이었기에 지금 포르시아의 마음이 얼마나 무거울지는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음이 지친 상태에 이어지는 육체적으로 고된 이동.
이니안이 걱정이 안 될 리가 없었다.
그런 심정은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인 듯 포르시아를 보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걱정이 가득했다.
“케이로스는 잘 따라오고 있을까요?”
“원래 숲에서 자란 늑대입니다. 문제없을 거예요.”
조용히 걸음을 옮기던 포르시아가 생각났다는 듯 이니안에게 물었다. 지금 이들이 걷고 있는 길은 케이로스의 덩치로 이동을 하기에는 너무 좁아 케이로스는 다른 길로 우회해서 이동하는 중이었다.
이니안의 대답에 포르시아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니안의 눈에는 그 미소가 그렇게 쓸쓸해 보일 수가 없었다.
“케이로스가 보고 싶으십니까?”
“네. 지금, 그냥 보고 싶네요.”
이니안의 물음에 포르시아는 대답을 한다. 그 대답에 이니안은 그냥 고개만 끄덕인다. 두 사람 모두 그것은 힘든 일이라는 것을 잘 알았기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아무 말 없이 걸음만 옮겼다.
휘이익 휘이익.
갑자기 이니안의 입에서 휘파람 소리가 흘러 나왔다. 가만히 걷던 이니안이 입술을 오므리고 휘파람을 불기 시작한 것이다. 조용하던 숲 속에 이니안의 휘파람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모두들 이니안의 휘파람 소리를 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얼굴에는 어느새 은은한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숲을 빠져나가는 데는 꼬박 이틀이 걸렸다. 버티컬 산맥을 넘은 후의 평원 앞에 자리한 작지만은 않은 숲이었다. 하지만 이니안이 길을 잘 알고 있는 덕에 특별히 위험한 일은 없었다.
다섯 사람이 숲 밖으로 빠져나오자 그 앞에는 케이로스가 넙죽 엎드려 있었다. 먼저 도착했는지 일행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입을 쩍 벌리고 하품까지 하는 것이 여간 의뭉스러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케이로스!”
케이로스의 모습에 가장 먼저 달려가 그를 껴안은 것은 당연히 포르시아였다. 케이로스의 커다란 덩치 속에 푹 파묻힌 포르시아는 가만히 케이로스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케이로스, 케이로스, 케이로스… 흑흑흑.”
그리고 그 위에 가늘게 이어지는 흐느낌.
이틀 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결국 그녀의 뺨 위를 아롱지며 흘러내렸다. 그녀의 턱 끝에서 톡 떨어진 눈물방울이 케이로스의 은빛 털에 부딪쳤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그냥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바라볼 뿐이다.
“공녀님.”
잠시 후 이니안이 다가가 그녀가 케이로스에게 안기는 바람에 흘러내린 로브를 다시 끌어올려 덮어주었다.
그 후 그는 가만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실컷 울게 놔두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케이로스의 품에서 울던 포르시아는 그대로 지쳐서 잠들었다. 지난 이틀의 육체적, 정신적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 것이다. 이니안은 그런 그녀를 조용히 안아 케이로스의 품에 잘 뉘였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곳에서 쉬어야 할 것 같네요.”
이니안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캐서린도 다프네도 몹시 피곤한 상태였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이동을 시작하여 점심 때 쯤에 근처의 마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작은 마을이었지만 지난 삼 일간 제대로 씻지도, 자지도, 먹지도 못한 일행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은 마을이었다.
그간의 식사는 이니안이 간간이 해온 사냥으로 해결해왔고 잠은 길가에서 로브로 몸을 감싼 채 새우잠을 잤다. 포르시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몸뿐이었으니…….
그런 상태에서 당도한 마을은 그야말로 지상 낙원으로 눈에 들어왔다.
“아!”
마을의 입구에 들어서던 중 캐서린이 걸음을 멈추며 짧은 탄성을 토했다.
“왜 그래?”
포르시아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돈도 전부 마차에 뒀었어요.”
캐서린이 힘없이 말했다. 아무리 마을에 들어왔다 하지만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몸에 지닌 장신구를 팔려고 해도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그 가치가 너무 커 제대로 팔수도 없을 것이다. 난감한 상황이다.
모두의 얼굴에 난감함이 어렸다.
“괜찮습니다. 제가 가진 돈이 조금 있습니다.”
이니안의 대답에 캐서린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죄송해요, 세이버 경.”
포르시아가 미안한 듯 말했다.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저 때문인걸요. 마차를 부순 것도 저고 말이죠.”
이니안이 빙그레 웃으며 앞장섰다.
마을에 단 하나 있는 작은 여관에서의 휴식은 그야말로 꿀맛 같았다. 어새신들의 습격 이후 계속되는 고생으로 지친 몸이 따뜻한 목욕과 푹신한 잠자리에 완전히 푹 퍼져 버렸다.
모두들 그간의 피로에 지쳐 있었기에 쓰러지듯 잠에 빠졌다. 그리고 그 잠은 하루를 꽉 채웠다.
이니안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잠을 자지 않았다. 침대 위에 정좌를 하고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뱀파이어들과의 싸움에서 입은 내상을 회복하기 위해 마령천참공을 운용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라면 그날 싸운 즉시 운공을 해서 내상을 다스려야 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이제야 제대로 내상을 치료할 여유가 생긴 것이다.
삼 일이란 시간이 내상을 좀 더 심각하게 만들어놓았다. 가진 바 힘의 절반 정도를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제대로 치료가 끝나려면 적어도 일주일은 걸릴 듯했다.
“후우. 앞으로는 조심해야겠군.”
칼의 힘을 전부 끌어다 사용한 후유증은 엄청났다. 만약 그때 칼이 치료 마법을 걸어주지 않았더라면 상태는 훨씬 심각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