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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저하, 저는 저하의 명으로 칸세르 공작의 곁을 지키면서 그가 포르시아 공녀에게 어떤 일을 하는지 똑똑히 지켜보았습니다. 제가 한 가지 천추의 한이라 여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칸세르 공작이 메이지아 공작가의 어린 공녀를 납치했을 때 그것을 알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만 저하께 아뢰었더라도 오늘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후우. 그대는 그때 겨우 열 살이었던 나를 믿지 못한 것이겠지. 내가 여덟 살 때 나의 부탁으로 칸세르 공작의 수하로 들어갔으면서도 말이야.”
카르발 황자는 한숨과 함께 말을 꺼냈다. 시메티딘의 말이 그를 어느 정도 진정시킨 듯했다.
여덟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이미 칸세르 공작의 야망을 알아차리고 조치를 취했다는 카르발 황자, 그 엄청난 심기가 놀라웠다. 보통의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부모 품에서 천진난만하게 놀 때였다.
“그랬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바보 같은 일이지요. 그때 제가 알렸더라면 저하께서 포르시아 공녀를 경계하셨을 테고, 그랬다면 오늘같이 난감한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까요.”
“이미 지난 과거네. 그때 일은 마음에 두지 말게. 하지만 자네가 지금까지 나에게 알리지 않고 벌인 일은 분명히 잘못한 일이야. 운이 좋아 그녀가 무사했으니 망정이지 만약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더라면 아무리 자네라도 용서할 수 없었을 걸세.”
카르발 황자의 말에 시메티딘의 입가에 가는 미소가 어렸다. 황자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단지 지금까지 실패한 암살 시도가 전부라 생각하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메티딘 자신은 황자가 자신에게 준 최후의 패를 사용했다. 그것을 받을 때만 하더라도 설마 자신이 그 힘을 사용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하지만 사용했다. 그리고 그 보고를 위해서 오늘 찾아온 것이다.
다만 포르시아에게 일어난 일을 어찌 알았는지 카르발 황자는 시메티딘을 보자마자 불호령을 내렸던 것이다.
“저하, 저에게 그때 일은 이미 과거의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십 년, 이십 년 후에는 그분도 저하에게 있어서 과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그게 무슨 뜻인가?”
무언가 불길함을 느낀 카르발 황자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한다.
“지금 그들이 그분을 공격하고 있을 것입니다. 소호 왕국의 영토 안에서 말입니다.”
“자세히 말해라!”
카르발 황자는 그분을 공격하고 있다는 말에 다시 분노했다. 겨우 진정시켜 가슴 한 곳에 밀어놓았던 분노의 불길이 거세게 일어났다. 포르시아는 그에게 있어 그런 존재다.
“저하께서 고대 던전에서 발굴하여 저에게 맡긴 비장의 힘. 그 힘을 사용했습니다. 그분을 지키고 있는 사이몬 가의 그 기사의 힘은 상상을 초월하기에 결국 저는 그 패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이라!”
카르발 황자의 눈에 핏발이 차올랐다. 그가 시메티딘에게 준 비장의 힘이라는 것은 단 하나였다. 던전의 발굴품들 중 아주 유용하고 강력한 것이었기에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여 맡긴 것인데 설마 이렇게 사용할 줄은 몰랐다.
“그, 그들을 소환했단 말인가?”
“정확히는 봉인을 풀어준 것이지요.”
“네… 네놈…….”
마나가 요동을 친다. 요동은 바람이 되었고 바람은 다시 폭풍으로 변했다. 방 안은 카르발 황자가 만들어낸 마나의 폭풍으로 당장이라도 터질 듯했다.
“황자 저하께서 무사히 제위에 오르시고 제국을 평화로이 통치하기 위해서 그분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저는 마법사입니다. 칸세르 공작이 클레비클을 시켜 사용한 그 흑마법은 저로서도 전율을 느낄 만큼 위험한 것입니다. 대마법사라 불리는 저로서는 부끄럽게도 그 마법을 파훼해낼 자신이 없습니다. 결국 저하를 지키는 방법은 그분에게 영원한 안식을 드리는 것입니다. 저하께 보고를 한다면 지금처럼 노하시면서 반대하실 것이 뻔하였기에 제가 독단으로 처리한 것입니다. 죽여주십시오. 제 이 한 목숨으로 저하께서 무사히 제위에 오르실 수 있다면 그리하겠습니다. 이미 그분은 그들의 습격에 명을 달리하셨을 것입니다.”
시메티딘은 두 무릎을 모두 꿇고 앉아 머리를 숙였다.
카르발 황자의 꽉 쥔 주먹에선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붉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네, 네놈이 대체 무얼 안다고 대가 준 힘으로 그딴 일을 저지르느냐!”
숨 막히는 살기가 시메티딘을 향해 집중되었다. 시메티딘은 여전히 고개를 조아린 상태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잔인해도 너무 잔인했다.
어린 시절 자신의 비밀스럽고 충직한 수하이자 후견인이었던 자가 자신 몰래 약혼자를 죽이려 하고 있다. 곧 결혼을 하게 될 그녀를 죽이려 한다.
그것이 자신을 위하는 일이라니. 그럴 수는 없었다.
결국 카르발 황자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가 가겠다.”
“가실 수 없습니다.”
시메티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라면 분명 나를 그곳으로 공간 이동 시켜 줄 수 있어. 어서 보내줘!”
“안 됩니다.”
시메티딘은 단호했다.
“이익.”
앙 다문 이가 입술을 파고들어 입가에 붉은 피가 흘러내린다. 하지만 시메티딘은 단호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나가!”
결국 지금 카르발 황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방에서 시메티딘을 나가게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연인을 죽이려 하는 자이지만 그것 때문에 벌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하찮은 부하가 아니다.
더군다나 자신을 위해 그랬다는 구실을 가지고 있기에 카르발 황자는 무너지는 가슴을 움켜쥐는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하, 저하께서는 먼 미래에 오늘의 결정을 잘한 것이라 여기실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마음에 안 드는 한마디를 남기고 시메티딘은 카르발 황자의 방을 나갔다.
“포르시아…….”
아무도 없는 빈 방에서 카르발 황자가 힘없는 목소리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
환한 빛을 발하던 스크롤 카드는 곧 그 빛이 사라졌다. 그리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찢어진 스크롤 카드가 마차 바닥에 떨어졌다.
“이, 이게?”
갑작스러운 상황에 포르시아는 얼떨떨한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카드 조각을 바라보았다.
“공녀님, 다른 카드를!”
다프네의 재촉에 다른 카드를 꺼내 찢었지만 역시 결과는 같았다. 그때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쏘아낸 붉은 빛이 마차를 덮쳤다.
콰콰쾅!
요란한 폭음이 울리며 마차는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날아갔다. 또한 폭발의 여파로 그나마 몸을 건사하고 있던 병사들과 기사들 역시 처참하게 날아가며 목숨을 잃었다.
여섯 방향에서 한 점으로 집중된 마법의 위력은 엄청나서 마차가 있던 곳을 중심으로 반경 십여 미터의 공간에는 어떠한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마차의 잔해만 흩어져 있을 뿐이다.
그나마 마차를 멀리서 포위하고 있던 어새신들이 살아남아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마차가 있던 자리를 바라볼 뿐이다.
“후퇴한다.”
트레이스는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낮게 명령을 내렸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자신들이 이곳에 있을 이유는 없었다.
어새신들은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모습을 감췄다.
“후후후. 재빠른 녀석들이군. 어떻게 하지?”
“어차피 아무 이야기가 없던 녀석들이잖아. 놔둬. 괜히 건드려 봐야 귀찮아.”
“그래도 오랜만이라서 말이야.”
바닥에 사뿐히 발을 디딘 여섯 인물이 후퇴하는 어새신들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래도 일이 너무 간단했어. 생각보다 재미가 없군. 드래곤의 영혼이 함께 있었는데도 말이야.”
산산이 부서진 마차의 잔해를 발로 차면서 중얼거린다.
“글쎄, 우리를 깨운 정도라면 이 정도는 아닐 것 같은데…….”
한 명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그는 주변을 꼼꼼히 살폈다.
“역시, 쉽게 끝날 일은 아니었어.”
그의 말에 다른 다섯의 시선도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콜록콜록.”
포르시아가 주변에 자욱하게 일어난 먼지에 기침을 하면서 앉아 있었다. 이니안이 그 뒤에서 자신의 로브를 벗어 포르시아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조금 지저분한 것입니다만… 지금은 이것밖에 없군요.”
“고마워요. 콜록.”
이니안이 포르시아의 어깨에 덮어준 로브는 어새신들의 피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포르시아의 옷이 가슴 부위가 찢어져 있었기에 그것이라도 덮어줘야 했다.
“위험했어.”
이니안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의 눈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는 여섯 인물을 향해 있었다.
“그래, 위험했지. 내가 블링크를 떠올리지 못했다면 말이야. 역시 늙으면 죽어야 해.”
칼이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툭툭 쳤다. 근거리 이동 마법인 블링크. 그 정도의 마법은 칼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 전과 같은 난전의 상황이 워낙 오랜만이라 잠시 깜빡했던 것뿐이다.
칼은 블링크를 떠올리자마자 이니안의 곁으로 이동한 후 다시 마차 안으로 이동해서 마차 안의 세 사람마저 데리고 이곳으로 이동한 것이다.
정말이지 순식간의 일이었다, 칼이 마차를 떠나는 순간 블러드 캐논이 마차에 격중 되었을 정도로.
“후훗. 역시 쉽지 않은 일이야. 저 정도 인물이 곁에 붙어 있으니.”
“뭐. 그렇군. 하지만 이미 죽었으면서 죽어야 한다니. 그 말은 조금 웃기지 않은가?”
정체불명의 여섯 인물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의외라는 눈으로 이니안과 그 뒤의 인물들을 볼뿐이다.
“여유롭군. 하지만 그 여유가 얼마나 갈 수 있는지 지켜봐 주지.”
이니안의 검에서 청광의 오러 블레이드가 솟아올랐다. 오늘 검을 뽑고 처음으로 만들어내는 오러 블레이드다. 그 빛깔이 더욱 맑고 투명해져 있었다.
“소드 마스터라, 그거로군. 훗. 실력에 자신이 대단하겠어.”
“인간이니까.”
이니안이 분노가 가득한 눈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칼, 부탁한다.”
“알았어.”
이니안의 말에 칼은 여유있게 대답했다.
이제 이니안과 그들의 거리는 불과 삼사 미터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그제야 그들에게서 움직임이 있었다. 서로 적절한 거리를 두고 흩어져서는 이니안을 둘러쌌다.
‘강하다.’
이니안은 그들의 실력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적어도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 중 아버지와 형을 제외하고는 가장 강한 이들이었다.
‘아니, 어쩌면 형보다도 강할지도 모르겠어.’
분노가 가슴을 지배해 온몸에 들끓었지만 그의 머리는 여전히 침착하고 냉정했다. 이니안은 이미 상대의 실력을 충분히 가늠했고 그래서 분노와는 달리 조심스레 그들에게 접근했다.
“후훗. 얼었나 보군.”
그 모습에 여섯 사람 중 한 명이 조소를 띠었다.
“글쎄.”
이니안은 얼굴에 웃음을 띤 채 대답했다.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는 듯했지만 검을 쥔 그의 손이 땀으로 축축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누구의 명령으로 습격한 것이지?”
이니안은 알 수 있었다. 포르시아를 습격하기 위해 준비된 패는 저들 여섯임을 말이다. 마차를 둘러싸고 자신들을 공격했던 어새신들은 단지 주의를 돌리기 위한 위장패에 불과했다.
“훗. 우리는 명령 같은 것은 안 받아. 단지 부탁을 하나 들어주는 것일 뿐.”
“그렇다면 그 부탁을 한 자는?”
“대답 안 할 거라는 거 잘 알고 있지 않나?”
이니안이 미소 지었다. 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