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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저 악마에게 잡히면 처참한 고통을 느끼며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그들의 가슴에서 솟아났다. 인간을 상대하는 것은 모르지만 악마가 나타났다면 다르다. 그들의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원초적인 공포가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으아아아!”
“우아아악!”
“끄악!”
절규에 찬 비명과 함께 검이 만들어낸 악마가 지나간 자리의 어새신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공포가 가득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악마가 주는 공포를 떨쳐 내지 못한 것이다.
“대단하군. 단지 책을 한 권 더 읽었을 뿐인데 그 위력이 전혀 달라졌어.”
칼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신이 레어에서 본 이니안의 검법과는 또 달라져 있었다. 마령현신이라는 저 수법을 그는 이미 몇 차례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조금 전과 같이 전율스러운 모습은 아니었다.
메이린이 준 마령천참공 운용편의 책을 이니안은 이미 모두 읽고 대강 그 내용을 익힌 상태이다. 검을 새로이 만드는 그 시간 동안 그가 빛의 일족의 마을에서 한 일이 바로 책의 내용을 익히는 것이었다.
그 덕에 마령천참검법은 또 한 단계 발전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더욱 정교한 초식의 운용에 대한 내용이 쓰여 있었고 또한 마령천참공으로 모은 마이너스 마나의 다양한 운용 방법도 익혔다.
그 결과가 칼마저도 넋이 나가게 만든 조금 전의 마령현신의 수법이었다.
복면으로 가려져 볼 수는 없었지만 어새신들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가득 어렸다. 검으로 악마마저 만들어 사람들을 쓸어버리는 저 괴물 같은 인간을 과연 상대해야 하는가, 라는 갈등.
그들은 계약에 묶여 있었기에 도망칠 수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인물에게 달려들어 공포를 느끼며 죽고 싶지는 않았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이니안이 보여준 그 전율스러운 모습에 적아를 가리지 않고 모두 충격에 빠진 것이다.
살벌한 전투 중간에 내려앉은 고요. 그 속에서 고요를 깨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마차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포르시아가 걱정스레 물었다.
“…….”
창을 살짝 열어 마차의 밖을 살피던 다프네는 그런 포르시아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녀 역시 마령현신의 수법이 만들어낸 광경을 보고 넋이 나간 것이다.
“파이어 경?”
자신이 불안에 찬 말을 하면 항상 안심시켜 주던 다프네가 아무런 말이 없자 포르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부른다. 다프네가 마차 밖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에 혹시 일이 잘못되기라도 했는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아, 네. 공녀님.”
그제야 다프네가 포르시아의 말에 반응을 보였다.
“왜 그러시죠?”
“세이버 경이 너무 엄청난 광경을 보여줘서 잠시 넋이 나가 있었습니다.”
다프네는 기사답게 주인 앞에서 자신의 실책을 솔직히 인정했다.
“그렇게 대단했나요?”
“네. 아마 이번에도 별 무리 없이 세이버 경이 정리할 듯합니다.”
“다행이네요.”
다프네의 말에 포르시아는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에 자리하고 있던 불안은 사라지고 대신 안도가 그 자리에 살포시 걸터앉아 있었다.
***
“크크크. 엄청나군. 마나로 악마를 만들어 내다니.”
“그래, 엄청나. 하지만 어차피 저 녀석들은 버리는 말. 진짜는 우리지.”
“그래, 이렇게 짙은 어둠이 깔린 밤. 우리에게는 더 없이 좋은 밤이야.”
이니안이 어새신들과 대치하고 있는 사이 마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한 나무에 여섯 명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후드 아래에 드리운 어둠 속에서 붉은 눈동자가 요사스럽게 빛나고 있었으며 입술 밖으로 살짝 삐져 나온 송곳니가 달빛에 섬뜩하게 빛났다.
“그 녀석, 여전히 값진 물건을 많이 가지고 있어. 저렇게 엄청난 녀석들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기척을 완벽히 지워주는 아티팩트라니.”
“이 은신의 망토, 위력이 대단하긴 해.”
“쳇! 이 정도라도 해줘야지, 잘못된 정보를 줬는데. 뭐? 소드 마스터 하나만 조심하면 될 거라고? 그렇다면 저기서 장난치고 있는 저 영혼은 뭐야? 저건 분명 드래곤의 영혼이다. 어떻게 사라지지 않고 이 세상에 남아 있는지는 모르지만 내 눈은 저 영혼이 생전에 드래곤이었다고 말해주고 있어.”
여섯 중 하나가 불만에 찬 소리를 뱉었다. 그랬다. 그들이 이곳에 올 때 상대해야 할 적들 중에 드래곤의 영혼이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었다.
이건 그야말로 완벽한 계산 착오였다. 어쩌면 저들 중 가장 까다로운 상대는 드래곤의 영혼일지도 몰랐다.
“뭐, 인간들은 영혼을 볼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잘못하면 우리 모두 이곳에서 죽는 수가 있다.”
여전히 그 하나는 불만이 가득한 듯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계약이니까.”
그 한마디에 결국 불만을 토로하던 그자도 입을 다물었다.
여섯 쌍의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본다. 붉은 빛이 요사스러운 그 눈동자. 서로를 확인한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
39장. 하면 되는군
여섯 그림자는 너무도 가벼이 몸을 날렸다. 여섯 방향으로 흩어져 마차를 중심에 두고 공중에 표홀히 떠 있는 모습이 어둠과 지독하게 어울렸다. 깊게 눌러쓴 후드 아래에서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빛을 발한다.
“블러드 캐논(Blood Cannon)!”
여섯 개의 입은 동시에 같은 말을 외치면서 손을 앞으로 쭈욱 뻗었다.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붉은 광채와 함께 뻗어나가는 빛줄기.
“뭐야?”
그제야 이니안은 또 다른 인물들의 난입을 눈치 챘다.
“젠장.”
어새신들을 향해 다음 초식을 펼치려던 이니안이 몸을 돌렸다.
“이니안, 저것 위험하다!”
칼 역시 다급한 얼굴로 외쳤다. 영혼이었을 때는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었겠지만 실체화를 한 지금은 급박한 상황에 비해 너무나 느렸다.
칼의 외침에 이니안의 두 발이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마령보의 마령질풍의 수법이 이렇게 느리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뭐? 뭐지?”
포르시아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옷을 찢고 빛을 발하며 솟아오르는 펜던트에 깜짝 놀랐다. 전에 한 번 이런 일이 있었다. 분명 갈라히벤에서 어새신이 자신을 습격했을 때, 그녀를 지켜주었던 방어 마법이 발동되던 모습이다.
이번에도 역시 빛의 구체가 마차 전체를 감싸 안았다. 이번에는 마차 외부에서 오는 공격에 대한 방어였기에 샤이닝 실드가 마차 전체를 감쌌다.
콰콰콰콰쾅! 쾅쾅!
여섯 개의 핏빛 마법과 샤이닝 실드가 부딪치며 요란한 폭음이 터졌다. 그리고 두 거대 마법의 충돌의 여파가 마차를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과 기사들을 덮쳤다.
“우욱.”
“으앗!”
폭발의 여파에 병사들과 기사들은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여기저기로 날려갔다.
“흐음. 샤이닝 실드라… 저쪽도 제법 괜찮은 물건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군. 역시 드래곤의 영혼이 함께 있다는 것인가?”
여섯의 인영 중 한 명에게서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샤이닝 실드는 여섯 개의 블러드 캐논과 격돌하고 곧 소멸했다. 펜던트에 심어진 샤이닝 실드는 그것이 한계였다.
“다시 한 번 간다.”
또 다른 이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다시 여섯 쌍의 손끝에 붉은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고, 공녀님, 위, 위험합니다. 어서 공간 이동 마법의 스크롤 카드를!”
창을 열고 그 모습을 지켜본 다프네가 다급하게 외쳤다. 이 경우는 이니안이 온다고 해도 늦었다. 저런 엄청난 마법이라니. 일단 몸을 피하는 것이 먼저다.
“아, 알겠어요.”
다프네의 다급한 말에 가슴 부위의 찢어진 옷을 여미고 있던 포르시아는 급히 품에서 공간 이동 마법이 담긴 스크롤 카드를 꺼냈다. 혹시 위급한 일이 있으면 쓰라고 시메티딘이 직접 만들어준 스크롤 카드다.
“이동!”
포르시아는 시동어를 외치면서 카드를 찢었다. 곧 카드에서 밝은 빛이 발했다.
공중에 뜬 여섯 사람의 손끝에서 다시 한 번 블러드 캐논이 쏘아진 것과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그 손의 주인은 지금 얼굴 가득 노기를 띠고 있다. 눈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이의 얼굴은 오히려 반대로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그 말을 말이라고 하는 것인가?”
“네, 저하.”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엄청난 분노에도 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어두운 공간의 소파에 앉아 자신의 뒤에 앉은 수하들에게 분노의 기운을 날리던 그는 지금 이곳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너무나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수하의 보고에 카르발 황자는 극심한 분노에 빠졌다. 바실러스가 왔을 때 못지않은 분노다.
“그러니까 자네는 이미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단 말이지?”
“네, 저하.”
카르발 황자는 자신의 수하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자신은 얼마 전에야 겨우 알게 된 엄청난 사실을 눈앞의 수하는 이미 진작에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자신에게 보고했어야 할 것을 감쪽같이 속인 것이다.
“그래서 자네가 나에게 하고 싶다는 말이 결혼을 중지하라 이건가?”
“그렇습니다. 저하께서도 이미 그 사실을 아셨다면 응당 결혼식을 중지하셔야 합니다. 너무도 위험합니다.”
그는 카르발 황자에게 충심을 다해 말했다. 정말로 그 여자는 위험했다. 자신의 충성의 대상에게 능히 죽음을 내릴 수 있는 여자다.
“자네는 내가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불가능하겠지요.”
그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 그녀가 나에게 칼을 들이댄다면 난 기꺼이 내 목숨을 줄 수가 있어.”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독단으로 일을 처리했지요. 그 모든 것이 저하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수하의 말에 카르발 황자의 얼굴에 사나운 기운이 어렸다. 그간 자신의 머리를 어지럽히던 의혹 하나가 눈앞의 인물이 한 말에 의해 풀려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그간 포르시아를 노린 암살 공작들이…….”
“네. 제가 지시한 것입니다.”
그는 너무나 태연한 얼굴로 간결하게 대답했다.
“네 이놈! 시메티딘!”
카르발 황자의 입에서 사나운 일갈이 터져 나왔다.
황자의 분노에 고개를 드는 인물의 얼굴은 분명 시메티딘이었다. 칸세르 공작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제국의 대마법사 시메티딘. 그가 카르발 황자의 충성스러운 수하로서 이곳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진정하십시오.”
그는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이미 이 정도 분노는 각오하고 온 바였다.
“내가 지금 진정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내가 왜 자네를 칸세르 공작에게 보냈는지를 생각해 보면 잘 알 것 아닌가?”
카르발 황자의 얼굴은 분노로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물론 저하께서 지금 어떤 심정이실지는 잘 압니다.”
“아는 사람이 그런 짓을 저지르는가!”
카르발 황자의 주먹이 의자의 팔걸이를 세차게 내려쳤다. 얼마 전 새로이 가져다 놓은 의자의 팔걸이가 또 부서져 나갔다.
하지만 시메티딘은 단단히 각오를 하고 온 듯 꿈적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