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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그사이 케이로스가 빛살과도 같이 움직였다.
번개 같은 케이로스의 움직임에 순식간에 세 명의 어새신이 나가떨어졌다. 모두 배에서 상당한 출혈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들은 신음 한 줄기 흘리지 않았다. 과연 잘 훈련된 어새신다웠다.
“응?”
그런 케이로스의 움직임에 어딘가 자신의 기억과 다른 어색함을 느낀 이니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왠지 너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실력이 많이 준 것 같다.]
머리 한구석에 떠오른 의문을 바로 물었다.
[그건 그곳에 깃들어 있던 마나의 힘을 빌렸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을 떠나면 저의 힘은 그곳에 있을 때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케이로스가 직접 전투에 나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일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칼?]
[아아. 레어에 깃든 나의 마나지. 레어를 보호하기 위해서 깃들어 있는 건데 필요할 경우 케이로스가 일부를 가져다 쓸 수 있게끔 해둔 거야.]
칼은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그렇다면 난 그때 속은 거였나?’
급박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은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지금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은데 말이다.
“뭐, 좋아. 이제 나도 좀 움직여야지.”
이니안은 천천히 검을 뽑았다.
병사들과 기사들의 벽에 막혀 아직 마차 근처에 접근한 어새신은 없었지만 점점 그 수가 많아지고 있었다. 곧 병사들이 만든 벽이 무너질 것이다.
마차의 곁에 서 있던 이니안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원형의 대형 중 가장 취약한 곳에 나타나 검을 움직인다. 은빛의 검이 궤적을 남기고 지나감에 따라 어새신들의 몸에서 피가 튀어 오른다.
사정을 전혀 봐주지 않고 일격에 목숨을 끊어버리는 필살의 검.
죽이지 않으면 죽는 상황이다.
이니안은 평소와는 다르게 독하게 검을 놀렸다. 일수의 망설임이 자신들의 위험으로 다가오기에 그는 철저히 단번에 어새신들의 목숨을 앗았다.
몇 번 검을 휘두르자 그곳은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곧 다른 곳이 곧 뚫릴 듯 위태위태해졌다. 이니안이 금세 그곳으로 몸을 날려 다시 검을 휘둘렀다.
어두운 공간을 가르는 은색의 검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 끝에 붉게 튀어 오르는 핏방울이 요사스럽게 어둠 속에 빛난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어새신들은 반짝거리는 한 줄기 빛이 되어 몰아치는 케이로스 덕에 그 걸음이 많이 늦춰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모두들 A급 어새신답게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면서도 케이로스에게 악착같이 덤벼들었다. 죽음을 각오한 일격을 내뻗고 케이로스의 발톱과 이빨에 목숨을 빼앗기는 어새신들.
케이로스도 이런 경험은 처음인지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움직임이 조금씩 둔해졌으며 몸 여기저기에 잔 상처도 하나둘 늘고 있었다.
“아무래도 좀 도와줘야겠는데?”
[그래? 알았어.]
이니안의 요청에 칼이 모습을 드러냈다.
갑작스레 허공에 몸을 두둥실 띄우며 나타난 흑발의 청년. 하지만 공격을 하던 어새신들 중 그 누구도 칼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의 임무에 충실할 뿐이라는 듯 쉬지 않고 마차를 향해 몰아쳐 갔다.
“제법인 녀석들이군.”
칼은 시동어도 없이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끝에서 무수한 매직 미사일이 쏘아져 나갔다. 마차를 지키는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어새신들을 처리할 가장 좋은 마법은 의지로서 조종이 가능한 매직 미사일이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매직 미사일들이 칼의 의지대로 움직이며 정확히 어새신들에게 날아갔다.
매직 미사일에 맞은 어새신들이 픽픽 쓰러졌다. 여전히 그들의 입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칼의 가세 덕에 이니안은 어새신들을 상대하기 조금 수월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역시 좋군, 마법사가 있으면.”
이니안은 작게 중얼거리고 더욱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팔백이라는 숫자는 결코 작은 게 아니었다. 이니안과 케이로스, 그리고 칼이 그렇게 숫자를 줄였음에도 아직도 많은 수의 어새신들이 마차를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그 실력들이 출중해, 처리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개중에 뛰어난 이는 일격으로 처리할 수 없었다.
덕분에 더욱 시간이 걸렸고 생각보다 체력의 손실도 컸다.
“젠장. 제법이군.”
그사이 병사들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칼이 가세한 다음에는 조금 나아졌지만 이미 3할에 가까운 병사들과 기사들이 바닥에 쓰러졌다. 어새신들의 집요한 공격에 그 명을 달리한 것이다.
“이번에는 시간이 조금 걸리는 것 같네요.”
포르시아가 걱정스레 말을 했다.
“네. 이번에는 아무래도 수가 좀 많은 듯합니다.”
다프네가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요? 그래도 아무 일 없겠지요? 세이버 경이 있으니까요.”
포르시아는 목에 걸린 펜던트를 꽉 움켜쥐었다.
“네. 그의 실력이라면 아무 문제없을 것입니다.”
다프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그것은 포르시아를 안심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정말로 그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마령소혼.”
이니안의 검끝에서 마령천참검법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방어가 약해지는 곳을 막아가는 소극적인 대처보다는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어새신들을 쓸어버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마차를 지키기 위해 소극적인 움직임을 보인 것이었지만 칼과 케이로스의 가세로 이니안은 이제는 적극적으로 움직여도 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귀혼천검.”
검이 어지러이 흔들렸다. 사방으로 쏘아져 나가는 수많은 검의 그림자. 어새신들은 속수무책으로 검의 그림자에 쓰러져 갔다. 하지만 개중에 뛰어난 몇몇은 용케도 마령천참검의 초식을 막거나 피해내고 있었다.
그런 이들은 주로 초식의 범위에서 가장 바깥 경계 부위에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니안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우수수 쓰러지는 어새신들의 모습에 마차를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은 검을 휘두르는 것도 멈추고 그 모습에 넋을 잃었다.
칼 역시 잠시지만 매직 미사일을 컨트롤하는 것을 멈췄다.
“허참,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검을 정말 아름답게 사용하는군.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 붉은 피가 난무하며 튀어 오르는 모습까지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니…….”
낮은 중얼거림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니안의 검에 대한 감탄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혈화만천.”
주변의 시선이 어떻든 상관없이 다시 한 번 검이 움직인다. 이니안이 몸동작에 변화를 줄 때마다 어새신들은 물러서기 급급했다.
그들이 가진 생존의 본능이 눈앞에서 아름답게 검을 휘두르는 인물에게서 최대한 멀어지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어새신들이 물러서면서 피하는 것에 집중해서였을까? 이니안의 검에 쓰러지는 숫자가 점점 줄어들었다. 마령보를 펼치면서 따라붙어 열심히 검을 휘둘렀지만 사방으로 산개해 흩어지는 어새신들을 모두 처리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곳은 넓은 평원이었기에 거리를 벌려 넓게 흩어지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했기 때문이다.
“쳇. 약은 녀석들.”
이니안이 낮게 투덜거렸다. 그의 심정은 어떻게든 속전속결로 처리를 하고 싶었지만 점점 시간이 많이 걸리고 있었다. 과연 예전에 상대한 형편없는 녀석들과는 달랐다.
이들은 상대를 공략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이 불리할 때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창천광휘!”
청검밀밀과 만혼금쇄는 다수의 적을 상대하기 위한 수법이 아니었기에 건너뛰고 바로 창천광휘의 수법으로 검을 뻗었다.
검에서 몰아쳐 나오는 마나의 폭풍이 어새신들을 휩쓸어간다. 그들은 어떻게든 검이 만들어내는 폭풍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한 번 휘말려 들자 속수무책이었다.
그저 검을 쭈욱 뻗은 것뿐인데 이런 위력이라니. 이니안이 싸우는 모습을 몇 번 보았던 병사들도 질렸다는 얼굴이었다.
“여러 개의 피어스 브레이크라…….”
어떤 일이 있어도 열릴 것 같지 않았던 어새신 중 한 명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아무래도 속은 것 같군. 아무리 여덟 개의 길드가 공동 전선을 펼쳐도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의 음성은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드디어 자신들의 암살 목표를 지키는 상대가 자신들의 실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대는.”
나직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어새신이 전투 자세를 풀고 이니안을 향해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카일로니아의 사이몬 공작가의 사람인가?”
여러 개의 피어스 브레이크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오직 그곳에만 있었다. 그것은 대륙에서 검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어새신은 자신의 물음에 상대가 고개를 가로젓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훗. 대륙은 넓다라는 것인가? 그래도 의외로군. 몇 백 년의 세월 동안 깨지지 않았던 상식이 깨진다는 것은 솔직히 충격이야. 솔직한 심정으로는 지금 당장 후퇴하고 싶다. 하지만 계약이 우리 발을 묶어놓고 있어. 마지막 한 명이 죽는 순간까지도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고 의뢰주와 철저히 약속을 했거든. 의뢰 대금도 벌써 선불로 모두 받았고. 그러니 검에 조금은 사정을 봐주었으면 좋겠군.”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다시 허리를 낮추고 어떤 상황에도 대응할 수 있는 전투 자세를 취했다. 그의 눈빛도 낮게 가라앉았다.
‘아마도 우리는 미끼라는 거겠지. 하지만 이것까지 알려주면 안 되겠지? 의뢰주가 그 많은 돈을 한 번에 지불한 것도 아마 내가 이 상황을 깨달을 것이고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조건도 포함되어 있는 것일 테니.’
이 자리에 모인 여덟 어새신 길드의 총 지휘를 맡은 카일로니아 왕국의 블랙 소드 길드의 길드장 트레이스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며 땀으로 흥건히 젖어오는 손으로 검을 꽉 쥐었다.
“끝내지.”
낮은 목소리. 그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에 마차를 둘러싼 어새신들은 공포라는 감정을 느꼈다. 저 목소리의 주인공이 휘두른 검에 얼마나 많은 동료들이 죽어나갔던가.
이니안이 천천히 검을 곧추세웠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것일까?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전투가 재개되었다.
어새신들은 미친 듯이 마차를 향해 달려들었고, 칼의 손이 바삐 움직이며 수많은 매직 미사일이 날아갔다. 케이로스 역시 다시 한 번 우렁찬 울음을 터뜨리며 어새신들 사이를 종횡무진 헤치고 다녔다.
마차를 지키는 기사들과 병사들도 필사적으로 검을 휘두르며 접근해 오는 어새신을 막았다.
“마령현신!”
드디어 마령천참검의 후반부 세 초식 중 첫 번째 초식이 터졌다. 앞의 여섯 초식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을 보이는 초식. 이니안의 검이 불을 뿜었다.
“아… 악마다.”
“악마다.”
이니안의 뻗어낸 검에 놀란 어새신들은 침묵의 금제에 봉인이라도 되어 있는 듯한 입을 열어 두려움에 가득 찬 신음을 흘렸다.
자신들을 향해 뻗은 검끝에서 넘실넘실 피어오른 기운이 형성하는 어마어마한 환영. 그것은 분명 마계에 살고 있다는 악마가 분명했다.
사나운 눈을 부릅뜬 살기로 가득한 섬뜩한 형상.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그 형상은 분명 악마일 것이다. 어새신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검이 만들어낸 악마가 어새신들을 쓸어간다. 이번만은 어새신들도 맞설 자신이 없는지 등을 보이며 달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