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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막내누나에게 한 일이 있었다. 그러자 막내누나는 고개를 저으며 나의 생각을 부정했다.
“이니안, 너는 상대와 대련을 할 때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지? 그게 승리를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 정치 역시 마찬가지란다. 상대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자신의 세력을 넓히는 것은 정치의 기본 중의 기본이야. 그런 걸로 비겁하다고 하면 안 되지. 검술이나 정치나 결국 그런 부분은 다른 게 없거든.”
그때 누나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알 수는 있었다. 머리로는 이해를 했다. 하지만 가슴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검술과 정치는 분명히 다른 것이니까. 난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쟤가 아무리 스타필로 후작가의 아들이라고 해도 이곳은 왕립학교잖아. 학교 밖에서의 신분은 아무 소용없는 거 아니야?”
“형식적으로는 그렇죠.”
“형식적?”
“아, 완전히 형식적인 것은 아니에요. 뭐라고 할까… 설명하기가 조금 애매하네요. 흐음… 일단 선생님들은 그 원칙을 철저히 지키세요. 하지만 학생들은 아니죠. 정확히 말하면 귀족 학생들. 그들은 저 같은 평민이랑 어울리는 걸 극도로 꺼려하거든요. 그래서 비슷비슷한 귀족 아이들끼리 어울려요. 고위 귀족은 고위 귀족대로, 하급 귀족은 하급 귀족대로요. 정말 웃긴 일이죠. 뭐, 그렇다고 모든 귀족 아이들이 그런 건 아니에요. 당장 이니안 형만 봐도 그렇잖아요.”
마일론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를 가나 꼭 있다. 자신이 잘났다는 걸 어떻게든 유세하려는 종자들이. 그것도 스스로의 능력이 뛰어남을 보이는 것이 아닌 그저 남을 짓밟고 학대하는 행위 속에서 자신의 우월함을 보이려는 멍청한 족속들이 말이다.
왕립학교에서 끼리끼리 모여 다닌다는 녀석들도 그런 녀석들이 분명하다. 같잖은 녀석들.
“그런데 그렇다면 좀 웃기지 않냐?”
“뭐가요?”
“바리셀라 녀석 말이야. 겨우 후작가의 자제 주제에 감히 공작가의 자제인 나에게 덤빈 거야?”
“그야, 바리셀라의 생각에 자신은 후작가의 후계자고 형은 후계자가 아니니 결국은 자신이 우위라고 생각한 것 아닐까요?”
뭐야? 그랬단 말이야?
“아,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에요.”
내 이마에 힘줄이 불끈 솟아오르자 당황한 마일론이 급히 자신이 한 말을 무마시키려 했다. 듣지 않았으면 모르되 듣고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정말 생각할수록 같잖은 녀석이다. 소드 마스터라면 어느 나라를 가나 기본이 백작이고 적당한 공을 세우면 후작이 되는 건 일도 아니라는 걸 모를까? 아니, 어떻게 생각하니 상당히 멍청한 녀석 같다.
분명 스타필로 후작가의 후계자라고 했는데 어떻게 나에 대해서 모를 수가 있지? 스타필로 후작가는 군부에서 두 번째로 세력이 강한 귀족가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내가 소드 마스터라는 것도 알고 있을 텐데, 그렇게 무모하게 덤비다니. 하긴 검술 수업 시간에 보인 녀석의 모습은 나에 대해 모르는 듯했다.
군부의 두 번째 세력의 후계자라면서 이 나라의 소드 마스터에 대한 정보도 제대로 모르다니, 스타필로 후작가도 별것 아니군.
“으음. 그러면 바리셀라가 이 반의 대장 격이겠네?”
“그렇긴 하죠. 그런데 체면이 안서요. 성적은 항상 쉐이나에게 뒤져서 만년 2등이고요, 검술은 파르미안에게 뒤져서 2등. 결국 어느 하나 최고인 게 없죠. 뭐 전에는 신분만큼은 쉐이나와 함께 최고였는데 이제는 형이 들어왔으니 신분도 두 번째네요.”
같잖으면서도 불쌍한 녀석이군, 바리셀라 녀석. 어느 것 하나 최고인 게 없다니 말이다. 이인자의 씁쓸함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괴물 같은 이슈데인 형 덕분에 말이다.
“파르미안 녀석은 어때? 아까 보니 검술 실력이 상당하던데.”
“으음. 있는 듯 없는 듯한 애예요. 모든 게 보통이죠. 지극히 평범한 녀석이에요. 아, 예의는 무척이나 발라요. 같은 동급생한테도 함부로 하지 않거든요. 다만 검술만큼은 뛰어나죠. 그거야 형이 직접 상대했으니 잘 아시죠? 검술 수업 때만큼은 눈빛이 변하지만 다른 때는 그저 평범, 그 자체예요.”
“그래? 그거 의외네.”
“저도 의외예요. 아까 파르미안이 형한테 찾아온 것이요. 보통은 쉬는 시간에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거든요.”
그렇단 말이지? 뭐 아무려면 어떻겠는가? 중요한 것은 파르미안이 내 마음에 들었다는 것인데.
그래도 그렇게 평범한 녀석이라니 의외였다. 주머니 속의 송곳은 언젠가는 튀어나오기 마련이라고 저 정도의 재능을 가진 녀석이 그렇게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그렇게 마일론과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3교시는 끝났고 선생님도 교실에서 나가신 후였다. 대체 언제 나가신 거지? 어떻게 첫날부터 수업 태도가 좀 불량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남은 수업들도 순조롭게(?) 마치고 어느새 하교 시간이 다가왔다. 왕립학교 첫 등교 날이 조용하다면 조용하게, 시끄럽다면 시끄럽게 끝나가고 있었다.
“아우. 드디어 끝인가? 제법 지겨운데 그래?”
“예? 지겨웠다고요? 검술 수업을 제외하고는 수업 시간 내내 저랑 이야기했잖아요, 형. 덕분에 저도 오늘 수업을 제대로 못 들었다고요.”
“뭐야?”
이 녀석이 그사이 나랑 친해졌다고 금세 기어오른다. 뭐 수업 시간 내내 마일론 녀석이랑 수다 떨며 논 건 사실이지만 말이다. 내가 살짝 소리를 높이며 째려보자 마일론이 찔끔한 얼굴로 나의 눈치를 봤다.
나이도 내가 많지, 신분도 내가 높지, 검술도 내가 뛰어나지, 당연히 기가 죽을 수밖에. 아, 잠깐 신분도 내가 높지란 말은 취소다. 이곳에서 신분 따위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이곳은 왕립학교인데.
그리고 굳이 왕립학교가 아니더라도 타고난 신분으로 상대를 핍박하는 것은 내가 가장 경멸하는 짓이다. 당당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을 보일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됐다. 어서 가자. 즐거운 나의 집으로 가서 재미난 시간을 보내야 할 것 아냐?”
내가 씨익 웃으며 마일론의 어깨에 터억 하니 팔을 걸치자 녀석도 빙그레 웃었다.
“그래요. 사실 저도 학교 수업은 제법 지겹거든요. 어서 집으로 가야죠.”
“그래 가자. 그런데 넌 집이 어느 쪽이야?”
“남동 구역이에요.”
카일로니아의 수도인 사우론은 커다란 길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사우론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진 길, 다른 하나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길이다. 각각의 길은 사우론 성의 동, 서, 남, 북문에서 뻗어 나온 길이다.
그 길에 따라 사우론은 네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지는데 북서 구역은 왕궁과 여러 관청이 위치한다. 북동 구역은 귀족들의 저택이, 남서와 남동 구역은 시장과 평민들의 주거 구역이다.
물론 이런 구역 구분은 대략적인 것이다. 귀족이면서 남동이나 남서 구역에 사는 사람들도 있고, 평민이지만 북서 구역에 살 수 있다. 물론 그 수는 그다지 많지 않지만.
마일론은 이 중 남동 구역에 사는 모양이었다.
“그래? 남동 구역이면 무기 상점들이 많지?”
“예. 남동 구역의 무기 상점은 유명하죠.”
“그렇다면 언제 한 번 놀러 가도 되지? 무기 상점 구경도 하고 싶고 말이야.”
나의 말을 들은 마일론이 환한 웃음을 지었다.
“언제든지 환영이에요.”
“그래? 고마워.”
남동 구역의 무기 상점이 유명한 것은 사우론의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내가 무기 상점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바로 검 때문이다.
지난번에 압수당한 나의 애검. 영구 압수라는 처분이 내려졌다.
“이니안, 이 검은 내가 너에게 선물한 것이지. 우리 가문에서 늘 가는 그곳으로 데리고 가서 직접 네 손과 체형, 그리고 검놀림에 가장 적합한 것으로 만들어 온 것이다. 하지만 이제 너도 자랐다. 그때의 네가 아닌 게다. 게다가 진정 검을 다루는 자라면 검을 보는 눈도 길러야 한다. 다음에 네가 그곳으로 가서 새 검을 만들 때까지 쓸 검을 스스로 찾거라. 그렇게 검을 보는 눈을 기르도록 하거라.”
내가 실력이 없어 6학년이 된 것이 아니라 어이없는 실수로 6학년이 된 것을 아시고 아버지의 화가 풀리셨을 때 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더니 그 대답이 이것이었다.
나는 진정 간절히 나의 검을 원해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어렵사리 말을 꺼낸 것인데 돌아온 대답이 영구 압수, 아니, 회수란다. 나는 그때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을 맛보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씀도 옳은 듯해 나의 검을 내가 직접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던 차에 마침 마일론이 남동 구역에 산다고 하니 무기 상점들이 떠올랐던 것이다.
마일론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우리는 학교의 정문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나에게 후다닥 다가오는 작은 그림자가 있었다. 나와 마일론 모두 놀라서 바라보니 쉐이나였다.
빨간 얼굴을 하고 나에게 달려온 쉐이나는 내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고는 몸을 돌려 올 때보다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잠자코 지켜보니 마차에 타고는 사라져 버렸다.
쉐이나가 사라진 후 손을 펴보니 작은 쪽지가 있었다. 좀 전에 나에게 다가왔던 쉐이나가 쥐어준 것이다.
“뭘까요?”
옆에 있는 마일론이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바라보고 있었다. 잔뜩 들뜬 얼굴로 내 손 위에 있는 쪽지를 보는 모습이 엄청 신나하는 것 같았다.
“됐어.”
“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서 펼쳐 보세요. 전해준 사람 성의도 있는데.”
“집에 가서…….”
“에이. 여기서 펼쳐 보세요.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지도 않아요?”
어쭈? 이 녀석 봐라?
“네가 더 궁금해 하는 것 같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마일론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럴 리가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내일 봐요, 형!”
마일론은 그렇게 황급히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달려갔다. 잠시 후 모퉁이를 돌아 그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무슨 내용일까?”
사실 나도 그 내용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아까 검술 수업을 마쳤을 때의 일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마일론 녀석의 눈빛이 워낙 수상해 펼쳐 보지 못했다. 저 녀석 잘 웃고 인상도 좋고 느낌도 좋은 녀석이지만 가끔씩 엉큼한 구석이 보이기도 했으니.
“집에 이대로 가지고 갔다간 큰누나한테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니까.”
나는 쪽지를 펼쳐 보았다. 꼼꼼하게 접혀 있어서 펼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쪽지를 펼치자 그곳에는 아담하고 예쁜 글씨로 몇 글자가 적혀 있었다.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 부탁드릴게요.
정말 간결한 내용이군. 괜히 무언가를 기대한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런데 이게 뭐가 어려운 부탁이라고 그렇게 망설인 걸까?
쪽지의 내용은 부탁하는 것이라고 보기에는 성의가 없기는 하다. 하지만 글씨에서 느껴지는 정성에서 쉐이나라는 아이가 나에게 얼마나 간절히 부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니 들어주도록 할까? 얼굴도 예쁘고 말이야.
“그나저나 글씨 정말 예쁘게 잘 쓰네.”
나의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집으로 향하는 나의 손에 쥐여진 쪽지는 곧 작은 불꽃에 재로 화해 길에 흩날려 뿌려졌다.
이런 쪽지 집에 가지고 갔다가 큰누나나 형에게 들켰다가는 상당히 곤란해지니 아쉽지만 내 기억 속에만 넣어둬야지.
“으음. 이거 수상한데… 쉐이나라니? 엄마를 만나기 전에 아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네이라의 눈이 반짝였다. 엄마는 모를지도 모르는 아빠의 어릴 적 이야기가 점점 흥미진진해지고 있었다.
“글쎄,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아이덴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음. 이 이야기를 엄마가 알면?”
네이라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어린다. 정말이지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에이. 그냥 검술만 가르쳐 달라고 한 건데.”
“훗. 오빠, 여자의 감을 우습게 보지마. 분명 무언가 있어, 이 쉐이나라는 사람.”
네이라는 아이덴에게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네이라는 분명 일곱 살이다.
두 아이는 이 뒤에 펼쳐질 이야기가 어떠한 것인지 모른 채 흥미로운 얼굴로 일기장을 넘겼다. 아빠의 어린 시절 숨겨진 사랑 이야기를 기대하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서는.
658년 9월 26일
“좋아, 가르쳐 줄게.”
어제 받은 쪽지에 대한 대답을 학교에 오자마자 했다. 마침 교실에는 나와 쉐이나 둘밖에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평소의 습관대로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를 마친 후 학교로 왔다. 나에게는 평소대로였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무척이나 이른 시간이다.
당연히 교실에 아무도 안 왔을 거라 생각했지만 내가 교실에 들어섰을 때 쉐이나가 자기 자리에 앉아서 조용히 책을 보고 있었다.
집중력이 대단한지 내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다가가 다짜고짜 저렇게 말을 하니 놀란 토끼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고, 고맙습니다.”
얼굴이 발갛게 변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쉐이나. 대체 이 아이는 왜 이렇게 얼굴이 잘 빨개지는 건지.
“그런데 왜 내게 그런 부탁을 할 생각을 한 거야? 난 겨우 어제 편입해 왔을 뿐인데.”
쉐이나의 옆자리 의자를 빼서는 턱 하니 걸터앉아서 물었다. 교실에는 아직 아무도 안 왔기에 둘이 이야기하기에는 좋았다.
“그게… 저… 저는 검술에는 자신이 없고… 또… 이… 이니안 오빠가 검술에 아주 뛰… 뛰어난 것 같아서요.”
흐음.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 현재 왕국의 최연소 소드 마스터인걸. 역대 소드 마스터 중 최연소는 우리 형이지만 말이야.
“그런데 왜 그렇게 말을 더듬는 거니? 원래 그래?”
나의 물음에 쉐이나는 목까지 발개져서는 고개를 더 숙였다. 이마가 책상에 닿지는 않을까란 걱정이 들 정도로.
“아… 그, 그… 게 아, 아니에요…….”
겨우 내 물음에 대답을 했지만 여전히 더듬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라니. 왜 이러지?
좀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멀리서 아이들이 오는 소리가 들려 그만두고 내 자리로 갔다. 왠지 아이들에게 조금 전의 모습을 보여서 좋을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아이들이 약속이나 한 듯 교실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어느새 등교를 했는지 마일론이 옆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이니안 형. 일찍 오셨네요?”
“아, 응? 언제 왔어? 안녕.”
“예? 계속 문쪽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더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제가 온 것도 모르고.”
“아아, 뭐, 그냥.”
마일론의 말에 난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처음 들었을 때는 인지하지 못했었는데 내 자리에 앉아서 천천히 생각해 보니 정말 듣기 좋은 소리였다.
‘오빠’라니. 어제 마일론에게 처음 들은 ‘형’과 마찬가지로 난생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런데 그게 아주 기분이 좋았다. ‘형’이라는 소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그래서 그 기분을 음미하느라 시선만 교실의 문을 향하고 있었을 뿐, 눈에 들어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마일론에게 말할 수는 없었기에 그냥 대충 얼버무렸다.
“그런데, 형. 어제 그 쪽지에 뭐라고 적혀 있었어요?”
잠시 쉐이나의 자리를 쳐다본 마일론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응? 별거 아냐. 검술 좀 가르쳐 달라던데?”
그다지 숨길만한 내용이 아니었기에 난 관심 없다는 듯 대답했다.
“예에?”
“왜 그래?”
“아니, 너무 시시해서…….”
“뭐야?”
“아, 아, 아니에요. 너무 의외라서요. 하하하.”
“분명 시시한 게 어쩌고 한 거 같은데?”
“설마, 그럴 리가요. 하하하.”
나의 추궁에 마일론은 땀을 뻘뻘 흘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귀여운 녀석. 그동안 큰누나와 형에게 단련된 모든 것을 너에게 보여주마.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