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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슈마인은 그녀만 보면 경기를 일으켰다. 그것은 이슈데인도 익히 아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슈데인이 조금 전에 직접 슈마인을 낮잠 재우고 내려오는 길이다.
지금 로레인이 슈마인을 깨우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아, 알았어. 같이 가자, 로레인.”
어쩔 수 없는 부정(父情)에 이슈데인은 로레인에게 백기를 흔들었다.
“아니, 됐어. 그것보다 슈마인이 너무 보고 싶은걸.”
로레인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로, 로레인…….”
이슈데인이 정말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다.
아니, 이슈데인에게 그러한 표정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로레인은 너무도 쉽게 이슈데인의 얼굴에 애처로움을 만들어 버렸다.
“뭐, 오빠가 그렇게 부탁한다면 사랑스러운 여동생으로서 어쩔 수 없지.”
다시 몸을 빙글 돌리는 로레인, 그녀의 얼굴에는 승리자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리아와 메이린은 질린 얼굴로 자신들의 큰언니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사이몬 공작가의 세 번째 서열다운 솜씨다. 참고로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각각 사이몬 공작과 공작 부인이다. 즉, 이 집안의 장남인 이슈데인은 자신의 여동생에게 서열이 밀린 것이다.
“하아. 서재로 가자. 마침 아버님도 비번이라 기다리고 계셔.”
로레인의 얼굴에 한숨을 내쉰 이슈데인이 앞장 서 걸음을 옮겼다.
“응? 아버지도? 별일이네. 아버지랑 오빠가 비번일이 겹치다니.”
이리아가 신기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뭐, 가끔은 그런 날도 있어야 아버지랑 아들이 얼굴 보면서 지내지.”
옆에서 걷는 메이린의 말이다.
“왔느냐?”
이슈데인이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사이몬 공작이 늘 한결같은 얼굴로 딸들을 맞이했다. 마치 저녁 파티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딸을 맞이하는 얼굴 같았다.
“다녀왔습니다.”
세 사람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래, 앉자.”
공작이 소파에 앉자 다른 네 사람도 각기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갔던 일은 어찌 되었느냐?”
“전혀요. 쓸 만한 남자라고는 하나도 없었어요.”
로레인이 실망했다는 얼굴로 말한다.
“그럼, 모두 이겼느냐?”
사이몬 공작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대륙에 자신의 왈가닥 큰딸을 이길 남자가 없을 것임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았다. 이미 예상했던 일인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딸의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을까 싶어서 보냈던 것인데 결과는 역시나 인 듯하다.
“…아뇨.”
잠시 멈칫 하던 로레인이 힘겹게 대답을 했다.
그녀의 대답에 사이몬 공작과 이슈데인이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설마 그녀가 질 것이라고는 생각도 안했던 것이다.
“허허허. 그럼 너도 이제 시집가는 거냐?”
놀라기는 했지만 그래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치는 딸을 꺾은 이가 있다는 말에 사이몬 공작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묻는다.
아버지의 물음에 로레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쉽지만요. 시집갈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거든요.”
“설마 너보다 강한 여기사가 있다는 말이냐?”
사이몬 공작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녀가 시집갈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면 여자밖에 없었다. 그녀가 공공연히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을 꺾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그러니 공작은 자신의 딸이 여자에게 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니요.”
로레인의 대답에 사이몬 공작은 알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답답하구나.”
속 시원히 이야기를 하지 않는 딸을 보며 사이몬 공작이 말했다.
“혹시…….”
그때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이슈데인의 입이 열렸다. 사이몬 공작의 눈이 그를 향했다.
“그럴 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설마 이니안에게 진 거냐?”
이슈데인은 자신의 동생들이 막내를 찾아 나선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정보를 제공까지 하지 않았던가. 이슈데인은 그런 그녀들이 이렇게 빨리 돌아왔다는 것은 이미 이니안을 찾았다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지만 그 사실을 몰랐던 사이몬 공작의 얼굴이 놀람으로 가득 찼다.
“그래, 이니안에게 졌어.”
이리아가 로레인을 대신해 대답했다. 로레인은 그때 일을 다시 떠올리자 그때의 분함이 떠오르는 듯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이리아의 대답에 사이몬 공작의 얼굴에 자리하고 있던 놀람이 황당함으로 바뀌었다.
“허어. 대체 무슨 말이냐? 속 시원하게 설명해 보거라.”
공작의 말에 메이린이 입을 열어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중에서 그녀가 가장 알아듣기 쉽고 일목요연하게 설명을 잘했다.
“으음…….”
메이린의 설명이 모두 끝나자 잠자코 듣기에 집중하던 사이몬 공작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흘러 나왔다.
“정말로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이냐?”
이슈데인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메이린에게 물었다.
“몰라. 내가 익힌 게 아니니까. 난 단지 책을 읽었을 뿐인걸. 그리고 가능한 거겠지, 실제로 이니안이 해냈으니까.”
메이린의 대답에 사이몬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구나.”
그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막내아들이 옛 실력을 회복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힘을 가진 자가 힘을 잃었을 때의 고통은 그 당사자가 아니면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것은 공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상상도 하지 못할 고통을 겪고 있을 아들 생각에 항상 마음 한쪽이 아팠었는데 다시 힘을 찾았다니 정말 다행이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이슈데인의 물음에 메이린이 고개를 저었다.
“특별히 할 일은 없는걸. 마일론이랑 파르미안이 무투회가 끝난 후 메이른 후작가의 옛 별장으로 가긴 했지만 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이고. 뭐, 로레인 언니는 무척이나 가고 싶어했지만 우리가 간다고 뾰족한 수는 없잖아. 오빠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으면 우리도 마찬가지야. 단, 그 현장에 있었던 마일론이라면 좀 다를지도 모르지만.”
메이린의 말에 이슈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 녀석은 어떻게 한대?”
“일단 칸세르 공작가의 공녀가 실마리를 쥐고 있다면서 계속 곁에 있을 생각인 것 같았어.”
메이린의 대답에 이슈데인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드래곤의 눈물이라… 그런 물건이 있는 줄은 몰랐어. 그리고 미에른 후작가에 그런 것이 있었는 줄도 몰랐고.”
“아마 후작가에서도 몰랐을 거야. 보통 사람은 모르는 거니까. 그리고 어지간한 마법사들도 몰라. 흑마법사가 아니면 말이야. 그러니 미에른 후작가도 딱하지. 엉뚱한 물건 때문에 그런 화를 당했으니까.”
메이린이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흐음. 그때 그 일에 제국의 공작가가 관계 되어 있단 말이지…….”
사이몬 공작의 목소리에 은은한 분노가 어려 있었다.
이슈데인의 조사로 제국의 고위 귀족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까지는 알아냈지만 설마 공작일 줄은 몰랐다.
물론 이것도 어디까지나 심증일 뿐이다. 정확한 물증이 없으니. 그러나 정황이 너무나 잘 들어맞았다.
공작은 분노했다.
그때 그 일로 인해 카일로니아 왕국의 후작가 하나가 큰일을 당하고 휘청거렸고 또한 자신의 아들이 커다란 상처를 입고 집을 나가 버렸다.
그 상처가 가문에 대한 불만 때문이든 스스로의 나약함 때문이든 어쨌든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은 그 사건이었다.
“공작가가 직접 관련 됐는지는 몰라요. 분명 그때 그곳을 습격한 사람들이 무슨 눈물이라는 것을 찾았고 또한 미에른 후작가에 확실히 그 드래곤의 눈물이라는 것이 존재했던 것 또한 사실이에요. 또 공녀의 몸에 드래곤의 눈물의 기운이 어린 대법이 펼쳐진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그때 습격자가 공작의 사주를 받았는지는 모를 일이지요.”
메이린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것도 그렇지만 상황이 너무 딱 맞아떨어져.”
이슈데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 사실 나도 칸세르 공작의 짓이라고 생각해. 이리아 언니의 말을 들어보면 그것은 정말로 희귀한 것이라서 지금까지 발견된 것을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다고 하니까.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제국의 공작가에게 무어라 할 수 없으니까 문제야. 정확한 물증이 필요한데 아무것도 없잖아. 심지어 미에른 후작가에서 사라진 그 드래곤의 눈물도 이미 대법에 사용해 버려서 남아 있지 않을 건데.”
메이린의 말에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에서 이치에 어긋나는 것은 없었다.
심증과 정황이 확실한데도 물증이 없기에 어쩌지 못하는 상황. 그것만큼 답답하고 또 화나는 상황도 없었다.
“후우.”
그 답답함이 이슈데인의 한숨이 되어 밖으로 나왔다.
사이몬 공작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가만히 벽의 한 점을 응시하고 있다. 무언가 생각에 잠길 때의 그의 버릇이었다.
그때 그 일은 카일로니아의 국왕도 무척이나 분노했던 사건이다. 이미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때 일에 대한 조사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근위기사인 이슈데인이 왕세자의 경호 업무를 중단한 채 3년이나 왕국을 떠나 있기도 했다. 그리고 이슈데인이 돌아온 후에도 그를 책임자로 한 근위기사들로 구성된 조사단이 활동을 계속하는 중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슈데인은 아들로써 아버지에게 묻는 것이 아닌 근위기사로서 근위기사단장에게 물었다.
“설사 제국의 황제라 할지라도 그런 식으로 우리 왕국을 어지럽혔다면 응당 그 죗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하물며 공작가에서 저지른 일을 묵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려면 그에 맞는 명분과 명명백백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국가 간의 일을 처리하는 절차다. 우리에게는 명분과 증거, 모두 없다. 아니, 명분은 있을지 몰라도 그 명분을 받쳐 줄 증거가 없구나.”
사이몬 공작은 안타까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 음성의 한켠에는 짐작하지만 그 대상을 어찌할 수 없는 분노 역시 스며 있었다.
“그래도 일단은 국왕 전하께 사실을 알리도록 하겠다. 아니, 네가 이 일의 조사단장이니 너도 함께 가는 것이 좋겠구나. 너희 셋도 같이 가자꾸나. 일단 직접 보고 겪은 것은 너희들이니까.”
사이몬 공작의 말에 네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결론은 이미 나 있는 것 아닌가요? 어쩔 수 없다고.”
“그렇지. 그래도 일단 보고는 드려야지. 아직도 국왕 전하께서는 내게 종종 물으신다. 그때 그 일의 조사 과정의 진척 상황에 대해서 말이다. 미에른 후작가는 우리나라에 큰 공헌을 했고 또 큰 축을 담당하는 가문이다. 그런 가문이 그런 횡액을 당했으니 전하께서 여전히 마음에 담아두고 계심이야. 그러니 일단 우리가 알아낸 모든 것을 아뢰어야지. 그것이 비록 심증과 정황 증거뿐이라도 말이다.”
막내딸의 물음에 사이몬 공작이 대답했다.
“그렇긴 하네요.”
대답을 하는 메이린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고민했고 이미 이렇게 될 것을 예측했었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결론이 나니 힘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왕국의 힘도 필요가 없었다. 사이몬 공작가가 지닌 힘이라면 그 힘만으로도 어떻게든 할 수 있었다.
명백한 증거만 있다면…
“그리고.”
공작의 입이 다시 열리자 네 사람의 시선이 아버지를 향했다.
“나는 이니안을 믿는다. 그 아이가 실마리를 발견했고, 그때 일을 파헤치고자 한다면 능히 그 일을 모두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너희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하기도 조금 그렇지만 내 자식들 중 가장 뛰어난 아이는 이니안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어리석은 그 녀석이 자각하지 못할 뿐이지만 말이다.”
사이몬 공작의 말에 네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그들 남매들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다. 다만 이니안만이 그 사실을 몰랐다.
“그래요. 이니안이라면 가능할 거예요.”
메이린이 동생에 대한 믿음이 가득한 눈으로 대답했다.
“뭐, 그럼 그렇게 결론이 난 건가요?”
이슈데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미 결론이 났다면 그 일에 관해 더 이상 인상 쓰고 고민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심력 낭비다. 그 사실을 이들 다섯 사람은 너무나 잘 알았다. 그랬기에 금세 바뀐 이슈데인의 표정에 무어라 하지 않았다.
“그럼… 그 카르세온이라는 녀석 어땠어?”
이슈데인이 로레인을 보면서 물었다. 메이린의 이야기에서 대강 듣기는 했지만 본인의 감상을 직접 듣고 싶었던 것이다.
“형편없었어.”
로레인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아쉽네, 장래의 매제감으로 점찍어 놨던 녀석인데.”
이슈데인은 정말 아쉬운 듯했다.
“그랬다가는 매형과 처남이 매일 치고받고 으르렁거릴걸.”
카르세온과 이니안의 관계를 상기시키며 로레인이 어림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난 언니랑 상당히 잘 어울리는 조합이라고 생각해.”
그때 이리아가 끼어들었다.
“너!”
이리아를 향해 로레인이 소리쳤다.
“뭐, 모르지. 내가 준 실마리를 풀었다면 내 형부가 될지도.”
메이린의 말에 로레인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그게 무슨 말이야?”
금시초문인 말이다. 메이린이 카르세온에게 실마리를 줬다니?
다른 이들이 흥미로운 얼굴로 메이린을 쳐다보았다.
“마나가 흐르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메이린의 말에 사이몬 공작과 이슈데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대륙에서 오직 사이몬가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것을 메이린은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게 이야기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건 조금 경솔했던 것 같구나.”
사이몬 공작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우리 가문 사람이 될 건데요, 뭐.”
아버지의 엄한 얼굴에도 메이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