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숨이 끊어지면서 저주의 말과 함께 힘겹게 남긴 의미를 알 수 없는 그 한마디, 그 한마디에 바실러스는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곧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이제 죽어버린 호크의 시체에 붉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바실러스가 마법으로 일으킨 불꽃이다. 곧 복도는 시체가 타는 매캐한 냄새로 가득 찼다.
바실러스는 무심한 눈으로 타 들어가는 시체를 지켜보다가 완전히 시체가 탄 후 몸을 돌렸다.
“칸세르 공작, 당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오. 드래곤의 눈물로 기억을 조작해 공녀가 자신의 손으로 황자를 죽이게 만들려 했다니 말이오.”
바실러스의 나직한 중얼거림이 복도에 울렸다.
***
“어떻게 되었느냐?”
“예, 갈라히벤을 곧 떠날 듯합니다.”
수하의 말에 소파에 앉은 인물의 입가에 가는 미소가 어린다.
“그래. 이제야 제대로 일을 진행할 수 있겠군. 훗. 성녀라니 정말 웃기지도 않은 일이야.”
어이가 없다는 중얼거림.
그 일 때문에 그는 상당히 곤혹을 치렀다. 수많은 인원과 다크 크리스 길드를 동원하고 실패했음에도 다음 기회를 벼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회가 왔다. 여행을 떠난다고 하니.
하지만 공작가의 문장을 달고 이동하는 마차를 쉬이 습격할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어느 정도 제국과 멀어지기를 기다렸다. 목적지가 갈라히벤이라는 소리에 그곳의 국경을 넘었을 때 일을 진행하기로 결정을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성녀라니. 덕분에 모든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그러면 지금 어디로 움직이고 있지?”
“일단은 동쪽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턱을 괸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린다.
“준비는?”
“제국 내 다섯 개의 어새신 길드에 의뢰를 마친 상태입니다.”
“그 정도면 규모는?”
“한 길드 당 100명의 어새신이 투입됩니다. 모두 A급 이상의 전력입니다.”
사내의 고개를 끄덕여진다.
“A급 이상의 어새신 500명이란 말이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사내는 긴장한 얼굴로 주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정도면 가능할지, 아니면 불가능할지 판단이 안 서는군. 지난번에도 반드시 성공할 거라 생각했는데 실패를 해서 말이야. 세 곳 더 알아봐. 적어도 800은 되어야 조금 안심이 될 듯하군.”
“알겠습니다.”
A급 이상의 어새신 800명. 그는 그 정도의 인원을 동원해서 포르시아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그럼 나가봐.”
“네.”
주인의 명령에 무릎을 꿇고 있던 사내는 조심스레 방을 빠져나갔다.
“흐음. 정말이지, 일이 점점 복잡해지는군. 역시 그때 어떻게든 처리를 했어야 했는데… 설마 사이몬 가의 골칫덩이가 끼어들 줄이야. 어쨌든 일이 점점 더 위험해지고 있어. 어서 처리하지 않으면 황자 저하께서…….”
소파에 앉은 사내는 턱을 괸 채 손가락으로 소파의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면서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대체 이 사내의 정체는 무엇일까? 칸세르 공작과 그의 측근만이 알고 있다는 그 음모의 내용을 그는 정확히 파악한 듯했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방법은 포르시아의 제거.
그가 삼천 명의 어새신과 다크 크리스까지 동원할 정도로 대대적으로 움직인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
라코스 왕자의 반역 사건 다음날. 포르시아는 서두르듯 갈라히벤을 떠났다. 그 소식에 반역 사건을 처리하던 국왕을 비롯한 귀족들이 뛰쳐나와 말렸지만 포르시아의 뜻은 확고부동했다.
국왕의 입장에서야 반역 사건까지 정리를 해준 이니안이 고맙고도 고마웠으니 어떻게든 붙잡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포르시아의 입장에서 이 이상 갈라히벤에 있는 것이 충분히 부담이었다. 덕분에 애초에 목적한 무투회가 열리는 그날 포르시아는 갈라히벤을 떠났다.
성녀가 빠진 무투회는 그래도 예정대로 치러졌다. 무투회 자체는 매년 있어오던 행사였으니 진행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다만 무투회장에서 성녀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을 기이하게 여긴 사람들의 소동이 조금 있었을 뿐이다.
“이제 어디로 가는 겁니까, 공녀님?”
마차에서 다프네가 포르시아에게 물었다. 일단 포르시아는 마차에 오른 후 동쪽으로 가요, 라고 말했고 마차는 나이안의 동문을 빠져나와 줄곧 정동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으음.”
다프네의 물음에 포르시아가 대답을 꺼려했다. 괜히 창 쪽으로 시선을 돌리기까지 했다.
톡톡.
그때 마침 포르시아가 있는 창 쪽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포르시아는 마침 잘 되었다는 듯 서둘러 창문을 연다.
“무슨 일이죠, 세이버 경?”
전날 밤 무도회장에서 있었던 일에도 불구하고 포르시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니안을 보면서 물었다. 그것은 이니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동쪽으로 계속 나가면 버티컬 산맥입니다.”
이니안 역시 앞으로의 경로가 걱정이 된 듯 포르시아에게 물었다. 이니안의 물음에 포르시아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역시 산맥을 가로지르는 것은 어려울까요?”
결국 포르시아의 목적은 버티컬 산맥을 넘는 것이었다. 확실히 예정된 여행 기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예정에 없던 일 때문에 당초 예상보다 훨씬 빨리 갈라히벤을 떠나고 있는 중이니 말이다.
“안 됩니다.”
대답은 마차 안에서 들려왔다. 다프네가 엄한 얼굴로 포르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단순한 여행일 뿐입니다. 굳이 버티컬 산맥을 넘지 않으시더라도 대륙 서부에서도 충분히 갈 곳이 많습니다. 미덴스트 연방의 서 미덴스트와 북 미덴스트, 차이덴 왕국의 북부와 세바노 왕국, 그리고 지금 가고 있는 곳에 있는 소호 왕국의 서부도 괜찮은 곳입니다.”
이니안 역시 산맥을 넘는 것이 내키지 않는 듯 포르시아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나는 대륙 동부를 가보고 싶은걸요.”
포르시아는 투정부리듯 말했다.
“동부요?”
“그래요.”
이니안이 되묻자 포르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아.”
이니안은 절로 한숨을 쉰다.
“동부로 가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시간이 많이 걸리죠. 저도 이미 지도를 살펴봤어요. 이곳에서 산맥을 넘지 않고 동부로 가려면 그린디어 산맥과 버티컬 산맥을 크게 돌아 우회를 해야 하죠.”
“그렇습니다.”
이니안이 하려던 말을 포르시아가 먼저 하자 이니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이미 이 사실을 알고서도 동부에 가겠다고 하다니 이니안은 그 연유를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제가 가고 싶은 곳은 산맥을 하나 더 우회해야 해요.”
포르시아가 덧붙여 말했다.
“네?”
이니안이 놀라 되물었다.
“뉴레이안 산맥, 그것을 넘어야 하거든요.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우회를 해야 하겠지요. 그러면 목적지에 가는 데만 일 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릴 거예요. 라칼트 대륙을 바다를 따라 크게 반 바퀴 도는 것이나 다름없는 경로니까요.”
포르시아는 이미 지도를 보며 상당히 연구한 듯 당차게 말했다.
“결국 제가 가고 싶은 곳을 가려면 산맥을 넘는 수밖에 없어요.”
“공녀님, 그러시다면 이번에는 그냥 서부만 둘러보시고 이동 마법진을 이용하실 수 있을 때 동부를 둘러보시도록 하십시오.”
포르시아의 간절한 열망을 느꼈음인지 다프네는 차마 안 된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미루라고 하며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
“안 돼요. 미룰 수 없어요.”
포르시아는 다프네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 여행이 끝나면 저 결혼해요. 여행을 떠나기 전에 아버지께서 살짝 언질을 주셨어요, 여행이 끝나 대법이 안정되는 대로 황자 저하와의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라고. 이미 황자 저하께도 말씀을 드렸다 하시더군요.”
쿵.
왜일까. 포르시아의 말에 이니안은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포르시아의 결혼과 자신은 아무 상관이 없다. 자신은 단지 그때 그 일의 실마디를 얻기 위해 포르시아의 곁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포르시아의 결혼 이야기를 듣는 순간 커다란 충격을 느꼈고 곧 가슴 한 쪽이 아려왔다.
‘이건 뭐지?’
이니안은 자신의 알 수 없는 감정에 당황해했다. 하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침착한 얼굴을 가장했다.
그런 이니안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하던 포르시아가 조금 섭섭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자신의 당황한 마음을 추스르기에도 정신이 없었던 이니안은 그녀의 그런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공녀님, 아무리 그러시더라도 지금 산맥을 넘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길리안 산맥에서의 일을 잊으셨습니까?”
다프네는 당황한 목소리로 포르시아를 설득하기 위해 과거의 일을 들추어냈다. 포르시아에게 절대 좋은 기억이 아님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다. 다프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포르시아의 마음을 돌려야 했다.
“알아요. 기억하고 있어요. 제가 어떻게 그 일을 잊겠어요?”
포르시아의 목소리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그 목소리에 다프네는 포르시아의 심정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자책했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선 그렇게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이에요. 그건 길리안 산맥이라서 그런 거잖아요. 제가 갈라히벤에 있는 동안 알아본 바로는 버티컬 산맥은 길리안 산맥 정도는 아니라고 하더군요.”
“그래도 산맥을 넘는 것입니다. 그때는 그저 산자락 정도까지만 접했었지만 실제로 산맥을 넘으려면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마차가 지나가지 못하는 길도 있습니다.”
이니안이 무뚝뚝하게 끼어들었다. 다프네는 자신 대신 잘 말해주었다는 얼굴로 이니안을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그러면 걷겠어요.”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자란 공녀, 포르시아는 산길을 걷겠다는 말을 너무 쉽게 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충분히 그런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로즈는 그 추운 겨울 대륙 북부의 눈보라를 헤치고 훌륭히 자신의 두 발로 걸었으니 말이다.
“꼭 가셔야 하겠습니까?”
“그래요. 꼭 대륙 동부에 가고 싶어요.”
이니안의 물음에 포르시아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후우…….”
그 모습에 이니안이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대륙 동부로 모셔다 드리죠.”
“고마워요, 세이버 경.”
이니안의 말에 포르시아가 살풋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세이버 경!”
그 뒤를 이어 다프네가 다급히 외쳤다.
“걱정 마십시오, 파이어 경. 저는 동부에 데려다 드리겠다고 했지, 산맥을 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설마 산맥을 우회해서 대륙을 돌겠다는 건가요?”
이니안의 말에 포르시아가 절대 그럴 수 없다는 얼굴로 끼어들었다.
그 모습에 이니안은 웃음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대륙을 가로지를 겁니다. 산맥을 넘지 않고 대륙을 가로지를 방법이 있으니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이니안의 대답에 포르시아와 다프네, 두 사람은 모두 고개 갸웃거렸다.
대체 어떻데 대륙의 동서를 나누는 버티컬 산맥을 넘지 않고 대륙을 가로지른다고 하는 것일까?
그 의문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이 될 것이지만 그래도 궁금한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작 그 해답을 아는 사람은 미소만 지을 뿐, 어떠한 답도 주지 않았다.
35장. …이니안
밖은 분명 태양이 밝게 떠 있는데 방 안은 어둑어둑했다. 여전히 창을 향해 뒤로 돌려져 있는 소파, 그리고 그곳에 앉아서 가만히 턱을 괴고 있는 사내.
“그래, 계속 동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네.”
“그렇다면 버티컬 산맥을 넘을 생각인가 보군.”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수하의 대답에 사내의 입에 잔혹한 미소가 어린다.
“우리 일을 도와주는군. 크크.”
음산한 웃음.
“산맥을 넘을 것으로 예상되는 지점에 여덟 곳의 길드를 모두 투입해.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네.”
주인의 명령에 수하는 대답을 한 후 조용히 방을 나섰다.
***
현재 포르시아 일행은 막 갈라히벤의 국경을 넘어 소호 왕국에 접어들었다. 자신을 향해 음모의 손길이 뻗어오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포르시아는 그저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자신의 바람대로 대륙 동부에 갈 수 있다는 것이 즐거운 것이다.
“대체 어디로 가려는 걸까요?”
문득 다프네를 향해 시선을 돌린 포르시아가 정말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산맥을 넘지 않고 대륙을 가로지르는 방법이라니…….”
다프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으음. 그래도 파이어 경은 기사 수행으로 여행도 다니고 하셔서 혹시나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요.”
포르시아의 말에 다프네는 쓴웃음을 지었다. 벌써 몇 번째 같은 대화인지 몰랐다. 그리고 이제는 저 다음에 포르시아의 입에서 나올 말도 알고 있었다.
‘동부에 가본 적이 있냐고 물으실 차례군.’
“저기, 다프네 경은 기사 수행하면서 대륙 동부에 가보신 적이 있나요?”
다프네의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포르시아의 질문이 입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