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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하지만 제가 알기로 그때 이미 칸세르 공작가에는 공녀가 존재했습니다.”
“물론이지. 어느 평민의 아이를 데려다가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했었지. 나 역시 그때는 제도에 있었기에 잘 알고 있어. 물론 그 아이가 평민의 아이였다는 것을 안 것은 대법을 시행할 때였지만 말이야.”
“대체 칸세르 공작은 무슨 일을 꾸미는 겁니까?”
바실러스는 절박한 심정으로 물었다. 이건 아니었다. 칸세르 공작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기회로 중앙에 진출할 발판을 마련하려 했다. 그러기 위해 칸세르 공작의 휘하에 자청해서 들어온 것이다.
그라면 자신이 익힌 흑마법까지도 충분히 감당해 낼 인물이었기에. 그런데 호크와 대화를 나누면서 무언가 위험한 냄새가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암살.”
“네?”
“황자의 암살. 그것이 칸세르 공작이 이십 년에 가까운 시간을 투자해 꾸민 음모네.”
침묵이 내려앉았다.
호크의 대답에 바실러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지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지금 자신의 귀로 흘러든 말이 가진 의미는 너무나 엄청났다. 새어나가면 아무리 공작가라 할지라도 당장에 풍비박산이 날 어마어마한 일이다.
‘위험해.’
바실러스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제 겨우 칸세르 공작의 그늘에 들어왔지만 서둘러 이곳에서 발을 빼야 했다.
지금 타고 있는 배는 너무 위험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안전해 보이나 지금 당장 침몰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좀 더 확실하고 안전한 배로 갈아타야 한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후후. 내 말을 믿으니 그렇게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 아닌가?”
바실러스의 말에 호크가 여유 있게 대답했다.
“그런 엄청난 말을 듣는다면 누구라도 딱딱하게 굳을 겁니다.”
“그래. 보통은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7서클을 이룬 마법사는 그렇지 않아.”
바실러스는 침묵했다. 여기서 그가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아니, 칸세르 공작의 음모의 구체적인 내용을 추궁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호크가 말해줄 거라 믿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여기까지 자신에게 밝힐 이유가 없었다.
“제법이군. 역시 7서클을 마스터한 자다워. 궁금할 텐데 묻지 않는군.”
호크는 슬쩍 미소 지었다. 그동안 가슴에만 담아두고 저주하기만 했던 이들에 대한 응징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 때문일까.
“좋아. 모두 이야기해주지.”
바실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 조건이 있네.”
그 말에 바실러스는 그를 응시했다.
“마나의 맹약을 하게, 지금 이곳에서 나에게 들은 것을 모두 1황자 저하께 알리겠다고. 그렇게 해야 칸세르 그 간악한 공작 놈과 클레비클 녀석이 처참한 최후를 맞이할 테니까.”
마나의 맹약.
그것은 마법사들이 스스로에게 거는 금제다.
라칼트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지성을 가진 종족 중 유일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종족, 인간. 그에 대한 대비책으로 인간이 인간을 믿지 못해 만들어낸 것이다.
마법사가 일정한 조건을 걸고 마나에 맹약을 했을 때 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마나가 소멸한다. 마법사에게 있어서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극악한 금제인 것이다.
바실러스는 난감해졌다. 호크가 내건 조건, 바실러스로서는 쉽지 않은 것이었다.
그가 진실로 1황자가 보낸 사람이라면 그 조건을 수락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만나서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전하는 것은 더없이 간단하다. 하지만 지금은 칸세르 공작의 사람.
1황자를 만나는 것도 문제였지만 만났다 하여도 자신의 말을 1황자가 믿어줄지 의문이었다. 잘못하면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위험한 도박인가?’
하지만 만약 1황자가 바실러스의 말을 믿어준다면 바실러스는 갈아탈 아주 안전하고 튼튼한 배를 얻게 된다. 실패하면 모든 마나를 잃거나 죽음, 성공하면 보장된 미래.
그야말로 도박이었다.
“알겠습니다. 맹약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무수한 계산과 생각이 있었지만 그것은 순식간이었다. 고민이 길어지면 호크가 바실러스의 신분을 의심할 것이다.
사실 호크가 맹약을 하라고 한 것은 정말 최소한의 안전책이다. 황자가 보낸 사람을 통해 황자에게 말을 전하는 것, 얼마나 간단한 일이란 말인가.
“좋아. 기한은 일 년으로 하지. 빠를수록 좋지만 자네가 아무리 황자 저하께서 보낸 사람이라 할지라도 황자 저하를 뵙는 것이 쉽지는 않을 테니. 하지만 공녀님을 모신다면 일 년 안에는 반드시 한 번은 뵐 수 있을 거네.”
바실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시간에 여유가 있었다. 이로서 자신의 도박이 성공할 확률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나, 마나의 은혜를 입은 아들 크리스토퍼 바실러스는 지금 위대한 마나의 이름을 걸고 맹약을 하노라. 호크 말라온이 나에게 전한 말을 지금 이 순간부터 일 년 안에 라칼트 대륙의 거대한 제국, 미오나인의 1황자 카르발 칼 폰트 미오나인에게 전할 것이니 만약 내가 이 맹약을 지키지 못한다면 세상의 오롯한 힘, 마나의 은혜가 사라질 것이니 지금 이 자리에서 마나의 이름 앞에 맹세한다.”
바실러스의 주문이 끝나자 잠깐 동안 밝은 빛이 일더니 그의 왼쪽 가슴 안으로 사라졌다. 마법사의 마나가 모인 곳은 심장이다. 만약 그가 맹약을 지키지 못한다면 지금 심장으로 들어간 빛으로 인해 그가 가진 모든 마나를 잃을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본 호크의 입이 열렸다.
“카르시노마 오마 칸세르 공작, 이 간교한 녀석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재주 중 하나가 바로 사람을 알아보는 재주야. 물론 자신을 의식해서 숨기는 사람을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지 몰라도 무방비에 있는 사람을 파악하는 것은 순식간이지. 그런 그의 눈에 비친 황자 저하 두 분은 정반대였어.”
바실러스는 집중해서 호크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아직 1황자 저하는 아홉 살, 2황자 저하는 일곱 살에 불과했지만 그는 그 두 분을 정확히 파악했지. 1황자 저하는 총명하고 자비로웠으며 그릇이 큰, 그야말로 성군의 자질을 타고나셨지. 반면 2황자 전하는 편협하고 어리석을 뿐 아니라 폭급하고 제멋대로인 분이야, 황제의 자질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때 칸세르 공작은 막 정계에서 자신의 권력을 다질 때였어. 지금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을 절대의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때는 아직 제국의 다섯 공작가의 힘이 비등비등할 때였지. 메이지아 공작가만이 힘이 조금 처지는 정도였고 말이야.”
바실러스는 기억을 더듬어 그때의 정계의 상황을 떠올렸다. 언제든 중앙에 진출할 수 있도록 중앙에 대한 관심은 항상 가지고 있었기에 당시의 권력 구도를 기억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랑베르 공작이었지, 아마.’
칸세르 공작과 맞수를 이룰 만한 권력자였으나 끝내 칸세르 공작과의 권력 싸움에서 패하고 지금은 아들을 대리인으로 제도에 남겨놓은 채 영지에서 조용히 생활 중인 귀족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이미 자신이 제국의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이후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 때문에 두 황자 저하의 차이는 그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지.”
“2황자 저하를 택했겠군요.”
바실러스는 자신을 그때의 칸세르 공작의 입장에 두자 쉽게 답이 나왔다.
“그렇네. 1황자 저하는 지나치게 뛰어나시네. 그분이 황제의 위에 오르신다면 칸세르 공작의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지. 1황자를 제거하고 자질이 떨어지는 2황자를 황제로 세운 후 자신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른다. 제국의 권력을 장악한 귀족에게 있어 더없이 매력적인 계획이지. 자신의 권력을 더욱 단단히 만들 수 있으니까 말이야.”
여기까지 듣자 바실러스는 대략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왜, 칸세르 공작이 포르시아에게 대법을 시행했는지, 왜 1황자를 암살하려 하는지도. 그리고 포르시아가 1황자의 약혼녀인 이유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공녀님의 손을 더럽히려는 것이로군요.”
“그렇네.”
바실러스의 말에 호크는 침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1황자 저하의 나이가 아홉에 불과할 때 그는 이미 자신의 딸을 그분의 비로 들일 마음을 먹은 거지. 그 후 딸을 시켜 황자 저하를 암살할 생각이었고. 그래서 친딸이어서는 곤란했지. 더군다나 그렇게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려면 보통의 방법도 소용이 없었고. 그래서 그는 그때 갓 태어난 평민의 여자 아이를 데려다 자신이 딸이 태어난 것처럼 꾸민 것이지.”
여기까지는 바실러스도 쉽게 납득할 수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를 하고 긴 시간 웅크리고 있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으나 성사만 된다면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였다.
하지만 왜 그 평민 아이가 있어야 할 자리에 포르시아가 있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평민 아이가 자라면서 불거져 나왔어. 피는 속일 수 없는 것인지 귀족, 그것도 최고위 귀족인 공작가의 아이로서 가져야 할 위엄이 전혀 없었어. 사람은 환경이 만든다고 하지만 수백 년 이어온 가문의 내력이라는 것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더군. 그 아이는 어떻게 보아도 공작가의 사람으로 봐줄 수 없었으니 황자 저하의 비로 만드는 것도 힘들어졌지.”
“그래서…….”
“그렇네. 공녀의 자질이 있는 아이를 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공녀를 데리고 오면 되는 거네. 때마침 그때 메이지아 공작가에 조건에 딱 맞는 아이가 있었지.”
“그분이 포르시아 공녀님이로군요.”
“그래.”
바실러스는 이제 모든 일의 전모를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제일 먼저 대법을 받았던 것은 납치된 직후이겠군요. 메이지아로서의 기억을 일단 모두 지우고 칸세르로서의 기억을 만들어야 했을 테니.”
“그렇네. 그때는 클레비클 혼자서 했지.”
“그때 사용한 드래곤의 눈물은 어디에서 구한 겁니까?”
그때 당시라면 아직 카일로니아의 그 일이 일어나기 전이다.
“그건 나도 모르네. 내가 알 필요가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다른 일은 어떻게……?”
“클레비클이 자랑스레 떠들더군. 날 이 꼴로 만들어놓고 말이지. 후후.”
“그러고 보니 공녀님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기에 그렇게 칸세르 공작에게 분노하시는 거죠? 공녀님의 신분이 어떻든 당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 아닙니까?”
바실러스의 질문에 호크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분은 나의 은인의 손녀네. 자네도 흑마법을 익혔으니 알걸세, 흑마법사들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쳐지는지. 내가 수행마법사 시절, 흑마법사라는 이유만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을 뻔한 일이 있었지. 정말 억울했네. 모든 증거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내가 흑마법사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매도했네. 그때 내가 흑마법사라는 것과는 상관없이 공정한 눈으로 나의 누명을 벗겨준 분이 메이지아 공작님이시지. 그 이후 그때의 인연으로 일 년에 한 번씩은 인사를 드렸었네.”
“그렇군요. 그러면 어느 순간부터 행적이 묘연했던 것도…….”
“공녀님을 찾기 위해서였지. 그러다가 어느 순간 포기하고 망연자실하게 있을 때 마법사로서의 호기심을 불태울 재료를 들고 클레비클이 나타난 것이고. 그도 나와 메이지아 공작가와의 관계는 몰랐으니 나에게 온 걸 테지. 나 역시 그 대상이 공녀님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에게 협조했고. 내가 대법의 대상이 될 사람을 처음 본 것이 대법을 시행하기 불과 세 시간 전이었네.”
참으로 공교롭고도 공교로운 일이었다. 호크는 자신이 애타게 찾아 헤매던 은인의 손녀를 자신의 손으로 음모의 희생양으로 만드는 일에 일조한 것이다.
“난 단번에 공녀님을 알아볼 수 있었네. 비록 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었어. 그때부터 다급해졌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털어서 짐을 꾸린 후 대법이 펼쳐질 때 일부러 마나를 다르게 운용했어. 마나가 꼬이면서 일순 벌어진 틈을 타 공간 이동 스크롤 카드를 사용해 공녀님을 내가 대강 준비한 짐과 함께 이 저택에서 내보냈지. 시간이 너무 없었어. 어디에 알릴 수도 없었고 좀 더 제대로 공간 이동을 시켜드리지도 못했어.”
호크는 안타까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된 거로군. 그렇다면 그때 기억을 잃은 것은 대법을 펼치는 와중에 발생한 마나의 꼬임에 의한 부작용이었을 수도.’
바실러스는 그제야 왜 포르시아가 자신의 영지에 그런 모습으로 나타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갑자기 내려진 수배령 역시 납득이 되었고.
“한데 어느 날 클레비클이 나타났어. 공녀님이 돌아왔다는 말을 전해주러. 크크크. 난 정말이지 미친 짓을 한 것이지.”
호크는 다시 기괴한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에 대한 분노와 후회, 회한이 가득 담긴 웃음을.
“잘 들었습니다.”
드디어 바실러스는 자신의 머릿속에 복잡하게 어질러져 있던 퍼즐을 완벽하게 맞출 수 있었다. 이제 어지러이 난잡하게 흩어져 있던 조각이 아닌, 완벽하게 맞춰진 퍼즐이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당신과의 약속, 반드시 들어드리겠습니다.”
“암. 그래야지. 꼭 부탁하네.”
바실러스의 말에 호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당부의 말을 했다. 마나의 맹약까지 했으니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재차 당부를 했다. 바실러스를 향한 당부는 곧 스스로를 위안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니 이제 편히 쉬십시오.”
“크윽.”
바실러스가 고개를 숙이는 순간 호크의 입을 비집고 나오는 신음 소리. 그의 입가에 가는 핏줄기가 흘러내린다.
“왜… 왜……!”
호크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실러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당신이 살아 있으면 내 일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요. 고맙습니다. 당신이 준 정보 덕에 죽을 뻔한 위기를 피할 수 있게 되었고, 또 살 길도 찾았으니까요. 덧붙여 사과드리죠. 전 1황자 저하가 보낸 사람이 아닙니다. 칸세르 공작이 보낸 사람이지요.”
“네… 네놈…….”
바실러스의 마지막 말에 호크의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믿고 모든 것을 이야기했는데 칸세르 공작의 수하였다니, 통탄할 일이다.
“아, 오해는 마십시오. 저는 이제 갓 칸세르 공작의 수하로 들어왔을 뿐이니까요. 덕분에 침몰하는 배에 남아 있지 않고 배를 갈아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이 이야기해 준 사실로 1황자 저하의 그늘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군요. 도박이 되긴 하겠지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확실히 확률이 높으니까요. 그러니 미련 없이 눈을 감으십시오. 당신이 원하는 대로 칸세르 공작은 파멸할 것이고 공녀님은 무사하실 겁니다.”
“크윽. 그 말… 지키지 않는다면 죽어서도… 저, 저주할 것, 이다. 그, 그, 그리고… 겨, 겨, 결… 혼… 식… 이, 이, 이… 다.”
그래도 바실러스의 마지막 말에 한 줌의 미련은 버렸으니 그렇게 호크는 눈을 감았다. 마지막 한마디를 아주 힘겹게 남기고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