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디언 소드-124화 (124/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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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라코스 왕자가 한 말의 파장이 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용자 테무이는 갈라히벤 역사상 출현한 용자들 중 가장 강했던 용자라고 알려진 인물이다. 지금도 용자 중의 용자로 전설이 되어 그의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역시, 대강 예상은 했지만 이거 골치 아프군.’

이니안은 한쪽 머리가 지끈거렸다.

라코스 왕자가 소드 마스터라는 것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로레인보다는 많이 약했다. 카르세온보다 조금 강한 정도? 그 정도의 실력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재 자신은 혼자다. 게다가 포르시아를 지켜야 한다. 일이 상당히 어렵게 꼬이고 있었다.

“이제야 당신들의 어려움을 알겠군요.”

이니안은 낮게 중얼거린다. 새삼 아버지와 형이 얼마나 힘든 일을 해내고 있는지 깨달은 것이다.

“네?”

혼잣말을 포르시아가 들은 듯하다.

“아니요. 그냥 혼잣말입니다.”

이니안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지금 포르시아는 잔뜩 신경이 곤두선 상태다. 조금이라도 안심시키려면 이렇게 웃어줘야 한다.

“자아, 용자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자리의 이분들은 당신만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아, 이런, 아직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않았군요. 갈라히벤 왕국의 이름만 왕자인 왕자, 라코스라고 합니다.”

라코스의 입가에 떠오른 비웃음. 그는 이니안의 실력을 믿지 않았다. 그는 테무이의 검법서를 보았기에 알았다. 용자란 고대의 검법서를 우연히 손에 넣은 인물이었지, 결코 신의 축복을 받은 자가 아니었다.

신의 축복을 받은 용자는 없다. 그는 그렇게 믿었기에 갈라히벤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배하는 용자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다.

“난감하군요. 공녀님을 위해 열린 무도회에서 왕자의 반란이라니요.”

이니안은 라코스를 마주보며 웃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더없는 기회라서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니, 당신들 덕에 이런 기회를 얻었으니 오히려 감사하고 있다고 할까요?”

라코스의 얼굴에 살기가 어렸다.

“자, 이 자리의 여러분들께서 당신께 기대를 가지고 있는 듯한데 어찌하시겠습니까?”

라코스는 보랏빛 오러가 넘실거리는 검을 곧추세웠다. 검의 끝은 정확히 이니안의 미간을 향하고 있다.

포르시아의 손을 잡은 채 이니안은 한 발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몸으로 포르시아의 몸을 완벽히 가린 것이다.

“나의 임무는 공녀님을 지키는 것이랍니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아무런 감정이 없는 말이었다.

“호오. 그럼 성녀라 불리는 저분께 폐만 끼치지 않는다면 오늘 이곳의 일에는 상관하지 않으실 거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라코스의 얼굴에 은근한 웃음이 떠오른다. 솔직히 그로서도 이니안은 부담스러운 상대다. 자신이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대륙에 그 명성을 떨치는 사이몬 가의 소드 마스터를 꺾은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 자신도 그 정도 일은 자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 대 일의 결투 상황.

지금처럼 병력을 동원해 다수의 사람을 제압하는 데 있어 이니안의 존재는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니었다.

“어, 어떻게…….”

이니안과 라코스의 대화에 곳곳에서 실망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용자만 믿고 있었건만 그 용자가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 상관치 않겠다니.

“세이버 경…….”

이니안의 손을 꽉 잡은 포르시아가 안타까운 음성으로 그에게 속삭인다. 그녀도 이니안의 임무가 지금 같은 상황에서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라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갈라히벤에 와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받았던가.

비록 그녀 자신이 의도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들이 자신에게 보여준 그 정성과 경의들을 생각할 때 절대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어쨌든 자신과 이니안은 이들에게 있어 성녀요, 용자였다. 그런 이상 이 상황에서 자신들만의 안위를 돌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저는 상관 말고 국왕 전하를 도와주세요.”

가녀린 목소리. 포르시아의 손을 쥔 이니안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도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스스로 다짐하지 않았던가. 무슨 일이 있어도 포르시아만은 지키겠다고. 반드시 그러하겠다고.

“저의 임무는 공녀님을 지키는 겁니다.”

무뚝뚝한 목소리. 이니안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무표정한 얼굴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다.

다른 이들은 이니안과 포르시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만은 들었다. 소드 마스터의 능력으로 범인의 한계를 초월한 청력을 가진 라코스, 그였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과연. 이 상황에 방해만 하지 않으신다면 왕자의 이름을 걸고 두 분의 안전을 보장하지요.”

승리자의 미소였다. 이제 이 공간에서 자신을 막을 가능성을 지닌 이는 아무도 없다는, 그래서 자신의 한 판의 도박이 성공으로 돌아갔음을 확신하는 미소다.

이니안은 딱딱하게 굳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라코스의 미소를 지켜볼 뿐이다.

“요, 용자님…….”

라코스의 말에서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음을 깨달은 이들의 허탈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이곳을 떠나실 수 있게 해드리고 싶습니다만, 그렇게 했다가 혹시라도 성녀님의 안전이 확보되면 용자님의 마음이 바뀔까 걱정이 되어서 말입니다.”

라코스의 뜻은 명백했다. 자신의 반역이 성공할 때까지 이니안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포르시아를 인질로 잡고 있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저도 성녀님을 해치고 싶지 않답니다. 성녀님은 제국의 공녀이시자 앞으로 황태자가 되실 1황자 저하의 약혼녀이신 분. 이곳에서 혹시라도 해를 입으시게 했다가 우리 왕국에 미칠 그 후환이 두렵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라코스는 시종일관 여유를 보였다. 그의 눈에는 이미 반역이 성공했다는 여유가 가득했다. 반면 국왕의 눈에는 어느새 체념의 빛이 어리고 있었다.

“하아, 결국 이렇게 된단 말인가. 다 나의 부덕이니라.”

모든 것을 포기했다는 국왕의 음성. 그의 말에 라코스의 시선이 그를 향한다.

“아바마마, 그것은 아닙니다. 비단 후궁의 왕자들이 이런 대접을 받은 것은 저만이 아닙니다. 갈라히벤의 역사에 묻힌 수많은 왕자들 또한 그랬습니다. 그 한이 쌓이고 쌓여 저를 통해 터져 나온 것뿐입니다. 절대 아바마마의 부덕이 아니지요. 단지 아바마마께서는 운이 없으셨을 뿐입니다. 제가 아바마마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이 불운이었을 뿐이지요.”

라코스의 말에 국왕의 눈이 떨렸다. 자신은 어이해 아들의 저런 심사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일까? 어이해 아래에서 있었던 불순한 움직임을 사전에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일까?

후회가 몰려왔다.

이런 지경으로까지 상황이 악화될 때까지 조금도 주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자신의 안일함에 후회와 분노가 몰려왔다.

“그래, 그랬던 것이더냐? 나의 잘못이 아니라고? 아니다. 나는 왕으로서 왕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구나. 그것이 곧 나의 부덕이니라.”

체념을 하고 모든 것에 대한 미련을 버렸기에 얻은 위엄일까? 라코스가 그 야욕을 드러낸 이후 처음으로 메오루 국왕은 국왕다운 위엄을 내보였다.

“세이버 경.”

포르시아가 다시 한 번 더 이니안을 불렀다. 조금 전과는 달랐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아니, 어떤 결심을 한 듯 비장함이 담겨 있었다.

“네. 말씀하십시오, 공녀님.”

“국왕 전하를 도와 반역도들을 물리쳐 주세요. 이건 명령입니다.”

단호했다. 그녀의 두 눈은 스스로 품은 결심으로 비장하게 빛났다.

“따를 수 없습니다.”

이니안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명령이라고 했습니다.”

“공녀님의 명령이 공녀님의 안전을 해칠 위험이 있다고 판단될 때 전 그것을 거부할 권리가 있습니다.”

딱딱한 목소리다. 더 이상 포르시아가 아무런 말도 못하게 하기 위함일까? 늘 포르시아에게 말할 때의 그 자상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알고 있어요. 알고 내리는 명령입니다.”

포르시아도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이니안은 등 뒤의 포르시아에게서 느껴지는 서릿발과도 같은 기세에 그녀의 결심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따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니안이 할 수 있는 대답은 한 가지였다. 이 자리에서 포르시아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없었다.

아직도 라코스는 보랏빛 오러 블레이드가 넘실거리는 검을 자신을 향해 겨누고 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려 한다면 그 검은 자신이 아닌 포르시아를 표적으로 삼아 그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댈 것이다.

“세이버 경, 어쩔 수 없군요.”

포르시아의 목소리가 조금 변했다. 그때 이니안의 머리를 스치는 장면. 그것은 포르시아가 취한 행동은 아니었다.

로즈가 카르세온을 앞에 두고 취한 행동이다. 왜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때 일이 이니안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단검을 자신의 목에 대고 카르세온을 위협하던 로즈.

그때 일을 떠올린 순간 포르시아의 자유로운 오른손이 그녀의 드레스 품으로 향했다. 이니안은 포르시아를 잡고 있던 왼손을 놓고는 재빨리 뒤돌아 그녀의 양손을 붙잡았다.

이니안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라코스가 움찔 반응을 했으나 그 결과가 자신을 등지고 포르시아의 양손을 잡는 것이기에 곧 검을 움직이던 팔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이니안을 겨냥한 채 그 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게 무슨 짓인가요?”

포르시아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공녀님께서 하시려는 무모한 짓을 말리기 위한 것입니다.”

“뭐라고요?”

“언제 품속에 단검을 넣어 오셨습니까?”

이니안의 말에 포르시아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어렸다. 아무도 모르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호신용으로 챙겨 온 것이다.

사실 그녀는 영지를 떠난 후 줄곧 품에 단검 한 자루를 가지고 다녔다. 비록 싸울 줄은 모르지만 만약의 사태에 혹시라도 모를 대비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 어떻게 그걸…….”

포르시아의 목소리에서 조금 전의 날카로움은 사라졌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당황스러움이 가득할 뿐이다.

“후우. 역시.”

이니안은 한숨을 쉰다.

“공녀님. 이제는 자신의 몸을 담보로 하는 그런 위험한 행동은 하지 마십시오. 당신 스스로를 세상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세요.”

너무나 당황스러운 상황에 포르시아는 이니안이 ‘이제는’이라고 말한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공녀님, 공녀님 스스로를 가볍게 내던져서는 안 됩니다.”

이니안은 두 손을 맞잡고 포르시아를 마주한 채 가만히 그녀를 내려보았다.

포르시아는 고개를 들어 이니안을 올려다본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힌다.

포르시아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이니안의 두 눈에 안타까움이 가득 차오른다.

“하,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세이버 경은 움직이지 않을 거잖아요.”

당황스러움에 멈춰 있던 포르시아의 의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신다 하더라도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공녀님께 무례를 범해 공녀님을 제압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그, 그런…….”

포르시아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한다.

그랬다.

이니안 정도의 실력자라면 자신과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 상황에서는 자신이 목에 들이대는 단검을 빼앗는 것은 정말이지 손쉬운 일일 것이다. 조금 전에는 채 단검을 꺼내기도 전에 양손을 잡히지 않았던가.

이니안은 천천히 포르시아의 두 손을 놓았다.

“무례를 범한 점 죄송합니다.”

포르시아를 향해 한 쪽 무릎을 꿇은 이니안.

포르시아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어쩔 수 없는 일인걸요.”

포르시아는 체념한 듯했다. 자신이 어떻게 발버둥을 쳐도 이니안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이니안의 임무는 자신을 지키는 것.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행동할 것이다.

이니안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고 있는 것이고 또한 포르시아 자신을 위하고 있었으니.

갈라히벤의 국왕과 귀족들에게는 무척이나 미안한 일이다. 또한 이 땅의 국민들을 마주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안한 일이다.

그때 이니안이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킨 이니안은 여전히 포르시아를 마주하고 있다. 단지 조금 전과 달리진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그의 입가에 맺힌 미소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니안은 뒤돌아섰다.

갑자기 정반대로 돌변한 이니안의 행동에 그의 등을 바라보는 포르시아의 입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대체 이것이 어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33장. 그냥 잠시 이렇게 있어요

“이런. 그 말씀은 저랑 대적하시겠다는 겁니까?”

이니안이 돌아서자 라코스는 곤란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군요.”

이니안은 미소를 지었다.

“혼자서 감당하실 수 있을까요?”

라코스는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제가 혼자라고 한 적 있나요?”

검병에 손을 가져가는 이니안의 얼굴에는 미소 이외에 여유로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흐음. 아무리 둘러봐도 용자님을 도와줄 이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이니안을 향한 라코스의 검이 이니안의 움직임에 따라 조금씩 움직인다.

“칼그레이언, 나와라.”

이니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우웅.

이니안의 중얼거림과 함께 공간이 떨리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는 한 남자.

흑발, 흑안에 차가운 얼굴을 한 귀공자가 이니안의 옆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떻게……!”

갑작스러운 칼의 출현에 라코스는 당황했다. 갑작스레 나타난 이에게서 느껴지는 힘이 결코 작지 않았던 것이다.

“이, 이분은…….”

당황하기는 포르시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앞에 듬직하니 서 있는 또 하나의 등.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이다.

“아, 그때.”

이윽고 포르시아는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자신의 머리를 향해 떨어지던 단검을 순식간에 나타나 쳐내고는 나타날 때만큼 빠르게 사라졌던 사람, 바로 그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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