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디언 소드-123화 (123/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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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이왕자이신 라코스 왕자님이십니다.”

그때 근처에 있던 무마타가 이니안의 곁에 다가와 귓속말로 속삭였다. 그 말에 이니안은 더욱 놀랐다. 그가 보기에 일왕자라고 했던 나이파는 고작 열다섯 정도의 나이였다. 그런데 이왕자라는 자가 오히려 스물은 넘어 보였으니 이상할 만도 했다.

갈라히벤의 왕위 계승 순위를 몰랐기에 이니안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다. 무마타의 귓속말을 이니안이 포르시아에게 나직이 전했다. 그 말에 그녀도 상당히 놀란 듯했다.

“네 이놈! 이 무슨 망발이냐!”

그때 메오루 국왕이 모습을 드러내며 라코스 왕자에게 호통을 쳤다.

“흥. 무슨 짓이긴요. 아바마마, 전 옳은 말을 한 것뿐입니다.”

그의 대답에 국왕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예전부터 느꼈습니다만 이 나라는 미쳤습니다. 고작 덩치 큰 늑대를 하나 데리고 나타났다고 용자라느니 성녀라느니 하고 떠받든다니요.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킥킥킥!”

국왕은 몸을 휘청이며 뒷걸음질쳤다. 분노가 지나쳐 정신을 놓을 뻔한 것이다. 국왕은 차마 말을 제대로 꺼내지도 못했다. 그 정도로 극렬하게 분노한 것이다.

“네, 네놈이…….”

라코스를 가리키는 국왕의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린다.

“흥, 제국의 공녀라는 계집이 성녀일리 없지 않습니까? 그저 커다란 늑대 한 마리가 따른다고 성녀라고 받들다니, 나라도 미쳤고 교단도 미쳤습니다. 킥킥킥!”

실성한 듯한 웃음이 이어졌다.

“여, 여봐라. 근위기사들은 무엇 하는가! 저놈을 당장 잡아다 내 앞에 꿇리지 않고!”

분노한 국왕의 노성이 터졌다.

그의 명령에 무도회장을 경호하고 있던 근위기사 셋이 라코스를 향해 다가갔다. 그때 반대편의 근위기사들이 움직이며 그들을 막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자신들의 앞길이 막히자 동료를 보며 짜증나는 듯 외쳤다.

푹.

대답 대신 들린 소리.

단검이 갑옷의 틈을 교묘히 파고들어 배에 박혀 있었다.

“이, 이게 무슨…….”

단검에 찔린 기사는 동료의 검이 박힌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지만 채 말을 끝맺지 못했다.

‘좋지 않다.’

이니안은 대번에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며 포르시아의 곁에 바짝 붙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대응할 수 있도록.

현재 무도회장에 포르시아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자신 혼자였다. 다른 기사들은 모두 무도회장 밖에 있었다. 다프네 역시.

무도회장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근위기사가 근위기사를 찔렀다. 그것도 국왕의 명령을 받은 근위기사를 찔렀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명백했다.

반역이다.

“이, 이게…….”

국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채 잇지 못했다.

“킥킥킥. 보시는 바 대로지요.”

라코스는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품에서 작은 병을 꺼내 그 안에 든 액체를 마셨다. 그러자 금세 벌겋게 변했던 얼굴색이 원래의 혈색을 찾았다.

“이거, 성녀와 용자의 존재는 믿지 않지만 이번만은 고마워해야겠군요. 이렇게 간단히 일을 끝낼 수 있게 되어서.”

라코스 왕자의 눈이 번들거리는 살기를 뿜어낸다.

딱!

라코스 왕자가 손가락을 튀기자 무도회장을 둘러싸고 있는 여덟 곳의 문이 열리며 기사들을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상황의 전개에 무도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할 말을 잃었다. 모두 석상이라도 된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죠?”

포르시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니안에게 묻는다. 이니안의 팔을 움켜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잘 모르겠습니다. 잠시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무, 무슨 일이 벌어지진 않겠죠?”

포르시아의 물음에 이니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일은 이미 벌어졌다.

“걱정 마십시오. 공녀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믿음직스러운 말이다. 포르시아의 몸이 잔잔히 떨린다.

“네, 네놈은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짓이 무슨 짓인지 알고 있느냐? 이, 이놈!”

“후훗.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반역이지요. 실패하면 삼족을 멸한다는 반역이고 말고요.”

국왕의 노성에 라코스 왕자는 여유로운 얼굴로 웃으며 답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저지르느냐? 네놈이 이런 짓을 벌이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당연하지요. 오늘 이 자리에서 왕위 계승권을 가진 이는 저를 제외하고는 모두 죽을 테니까요.”

섬뜩한 말이다.

결국 그는 이 자리에 있는 자신의 혈족을 모두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으, 으윽!”

라코스의 대답에 메오루 국왕은 뒷목을 잡으며 쓰러졌다.

“전하!”

주위에 있던 귀족 몇이 그를 향해 서둘러 달려간다.

충격에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면서도 국왕은 사나운 눈으로 자신의 아들을 노려보았다.

“크크크. 이 나라는 미쳤습니다.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어요. 종교에 미쳐서는 국정은 그저 신의 뜻대로란 말만 외쳐대다니, 이곳은 인간들이 세운 나라이지 신의 나라가 아니란 말이지요.”

갈라히벤의 정치 구조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신의 말씀대로 이루어진다. 덕분에 국왕의 최고 자문 기관은 보아닌 교단이었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이, 아니, 거의 모든 사람들이 보아닌의 신자였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서서히 불만의 싹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불만은 지배층인 귀족에게서부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의 능력으로 작위를 올려온 귀족들일수록 불만이 컸다. 자신의 능력으로 현재의 위치를 쟁취했건만 결국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보아닌 교단이었다. 때로는 왕이 꼭두각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그런 세력들이 알게 모르게 오래전부터 규합했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그들의 지도자는 라코스 이왕자였다.

갈라히벤은 건국 이후 지금까지 왕가의 혈통이 끊긴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국민들의 정서상 왕가의 혈통을 끊고 나라를 뒤엎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나타난 적임자가 라코스 왕자인 것이다.

갈라히벤의 왕위 계승 서열은 보아닌의 가르침을 따른다.

보아닌 교단은 원칙이 일부일처제다. 그러므로 왕이 들인 후궁은 부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당연히 후궁의 자식 역시 아무런 권한이 없다. 단지 이름만 있을 뿐인 것이다.

왕자라 불릴 뿐이지 왕자도 무엇도 아니었다. 왕의 부인이 아닌 자가 낳은 자식이기에 그랬다. 그는 정말로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물론 다른 나라도 후궁의 자식이 왕위 계승 서열에서 밀린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은 그래도 왕자였고 왕자로서의 위엄과 권위, 권리, 책임이 있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라코스는 아니었다.

그는 그저 왕궁의 장식품에 불과할 뿐이었다.

우스웠다. 왕궁도 보아닌의 교단도 우스웠다.

일부일처제라 하면 아무리 왕이라 할지라도 부인은 왕비 하나로 한정했어야 했다. 이 땅의 보아닌 교단이라면 가능한 일이다. 왕 역시 보아닌의 신자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일이었다.

하나 우습게도 왕은 그 교리를 지키지 않았고 또다시 우습게도 교단은 그런 왕의 행동을 눈감아준다. 벌써 오랜 세월 이어져 내려온 일이다.

그사이의 합의점. 그것이 왕자이되 왕자가 아닌 이들의 존재다. 그저 왕궁의 장식품으로 전락해 평생을 살다가 죽는 운명.

그런 그들의 한이 절절히 이어져 내려와 결국은 라코스에게서 터진 것이다. 더군다나 보아닌 교단의 강대한 힘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접근해 왔다.

때가 맞았다. 그들은 손을 잡았다.

“어떻습니까, 국왕 전하? 크크크.”

라코스의 설명에 무도회장의 모든 이들은 경악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교단에 불만을 가진 세력이 있다는 것은 다들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일을 벌이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우리도 이렇게 기회가 빨리 오리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적어도 5년은 더 준비를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라코스의 눈이 포르시아를 향한다.

“그런데 성녀님이 등장해 주시더군요. 그래서 이 나라는 다시 한 번 미쳤지요. 교단의 힘에 반발하려고 일어났는데 교단 제일의 상징에게 도움을 받게 되다니. 이래서 세상은 재미있는 거지요. 후후후.”

“그, 그게 무슨 말이냐?”

“세상에, 성녀가 나타났다고 나라가 흥청망청거립니다. 신의 축복이라고. 그리고 성녀가 죽을 뻔했다고 왕궁 기사단의 전력 대부분을 풀어 그 암살자를 찾게 하다니요. 덕분에 왕궁은 텅텅 빈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죠. 근위기사들을 남기고 대부분 왕궁 밖으로 나갔으니까요. 그리고 근위기사의 칠 할은 이미 제게 포섭된 상태입니다.”

그 말이 끝나자 근위기사들 중 대부분이 라코스 왕자 주위로 이동했다.

“어, 어찌.”

그 모습에 국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들이 이 왕국에서 가장 능력있는 기사들이니까요. 하지만 대접은 항상 신전 기사 다음이었지요. 그러니까 불만이 쌓일 수밖에요. 아무리 보아닌의 신자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종교만큼이나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사상. 그것은 능력주의입니다. 능력이 자신보다 뒤처지는 이들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니 당연히 불만이 쌓이지요. 적어도 동등하게는 대우해줬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보아닌에 대한 신앙으로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겠지요.”

라코스 왕자의 설명에 몇몇 근위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도의 관심이 모두 성녀와 용자에게 쏠린 덕에 준비를 쉽게 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왕도의 고위 귀족들과 왕족들이 모두 모이는 무도회라니, 이런 기회를 놓친다면 제가 바보지요.”

라코스는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었다.

“크으. 네놈, 네놈이 생각한대로 될 것 같더냐! 이 자리에 계신 용자님이 널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국왕의 분노한 외침에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이니안을 향했다. 그들의 안색은 눈에 띄게 밝아져 있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에 그들은 이 자리에 이니안이 있다는 것조차도 잊고 있었던 것 같았다.

‘후우. 결국 이렇게 되는군. 쓸데없는 일에 엮이다니.’

솔직히 이니안은 나서고 싶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포르시아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자신 혼자였다. 그런데 자신이 저들을 상대한다면 누가 포르시아를 지킨단 말인가. 게다가 이 사람들 사이에 다크 크리스의 어새신이 섞여 있지 말란 법도 없었다.

아니, 이니안의 걱정대로 미르는 이 사이에 섞여 있었다.

‘호호호. 의외의 기회가 찾아왔는걸. 무도회라 경계가 느슨해질 것 같아서 숨어들어 왔는데 말이야.’

기척을 완전히 지우고 천장에 숨어 있는 미르는 기분 좋은 듯 웃고 있었다. 이니안 근처에 간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지만 은신의 로브의 능력을 믿고 모험을 했다.

과연 은신의 로브는 훌륭해 이니안도 자신의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도 더 가까이 가는 건데.’

이니안의 괴물 같은 능력에 아티팩트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했던 지난번을 후회했으나 곧 털어버렸다. 지금은 포르시아에게 집중할 때다.

“흥. 용자라는 것도 어차피 당신들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할 뿐입니다.”

라코스는 로레인과 이니안의 대련을 보지 못했다. 그만이 아니라 반란에 가담한 귀족들과 근위기사들 역시 모두 보지 못했다. 그때 그들은 반역을 일으킬 준비로 바빴던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이니안의 대련에 정신이 쏠려 그들이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아무도 의심을 하지 않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그 이후 그 대련에 대한 소문을 들었으나 믿지 않았다.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소문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 할지라도 라코스 왕자는 믿는 것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꼭두각시 장식품으로만 생각했을지 몰라도 그는 능력이 있었다.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에 그 능력을 몰랐을 뿐.

‘저 녀석, 상당히, 아니, 무척 강하다.’

그제야 이니안은 라코스 왕자를 제대로 살폈다. 이제까지는 흘러가는 상황을 지켜보느라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뭐, 좋아. 차라리 잘 됐어. 정리를 하고 이 나라를 떠날 구실을 만드는 것도 좋겠지.’

이니안은 나름대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때 그의 팔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포르시아가 떨고 있었다. 어느새 라코스가 둘을 향해 살기를 쏘아 보내고 있었다.

“떨지 마십시오, 공녀님.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따뜻한 미소와 부드러운 말.

이니안의 말을 듣는 순간 포르시아는 거짓말처럼 자신의 몸의 떨림이 멎는 것을 느꼈다.

“세이버 경.”

포르시아는 촉촉이 젖은 눈으로 이니안을 올려다본다. 자신을 마주 보는 이니안의 얼굴이 그렇게 믿음직스러울 수가 없었다.

“훗.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라코스 왕자의 말에는 강한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흥, 네가 어찌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국왕을 비롯한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귀족은 이니안의 실력을 직접 목격했다. 그랬기에 이니안에 대한 믿음은 대단했다.

“겨우 사이몬 가의 여자 소드 마스터를 꺾은 것 가지고 말입니까? 그딴 여자는 저도 꺾을 수 있습니다.”

라코스 왕자의 말에 이니안의 눈썹이 꿈틀했다. 인연을 끊었다고 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태어난 가문이다. 게다가 로레인은 자신의 누나다. 가문이 모욕을 당했다. 누나가 모욕을 당했다.

“우우.”

“어, 어떻게.”

언제 검을 뽑아든 것일까? 사람들은 라코스 왕자가 검을 들고 있는 모습에 놀랐다.

아니, 정확히는 검을 감싸고 있는 보랏빛 광채에 경악했다.

그것은 분명 오러 블레이드였다.

“이것을 할 줄 알면 소드 마스터라고 한다죠?”

라코스 왕자가 웃는다.

“당신들은 경배할 줄만 알지 찾아 익힐 줄을 모르더군요. 하지만 난 알고 있습니다. 그 차이이죠. 왕궁 도서관. 그곳에서 전 보물을 찾았습니다. 용자 테무이의 검법서를 찾았으니까요.”

사람들이 술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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