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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메이린 누나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의외로 순순히 납득하는 이니안.
[다른 세계에서의 이동이라… 차원 이동은 쉬운 일이 아닌데. 드래곤이라도 불가능한 일이야. 셋 정도의 드래곤이 모이면 또 모르지만. 하지만 차원 이동은 세계의 조화를 깨뜨리는 일.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일일 텐데 어떻게 일어난 거지?]
칼은 이니안의 조상이 차원 이동을 해 이 세상에 나타났다는 사실에 강한 흥미를 보였다.
[그나저나 이니안 네가 사람 같지 않았던 이유가 그것이었군.]
차원 이동에 대한 지식이 있어서였을까? 칼은 로레인이나 이리아와는 달리 메이린의 이야기에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 세 사람은 칼의 존재를 모른다.
“그 이후는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와 대강 비슷해. 초대 공작님께서 건국왕 전하를 만나서 카일로니아를 건국한 거지. 그리고 수도가 그때 초대 공작님께서 나타나신 곳 부근으로 정해져서 사우론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거고.”
“왜 하필 그곳이었어?”
“우리 가문의 저택 자리가 원래 그 화산비고가 나타난 자리야.”
일국의 수도가 정해지는데 그런 비화가 있었다니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
“으음. 그 이야기는 잘 알겠는데, 처음에 그 비고를 어떻게 숨길 수 있었지? 아무것도 없는 평원에 떡하니 나타난 거라면 상당히 위험했을 텐데.”
“진법(陳法)이라는 것이 있어. 마법과는 좀 다른 건데 눈속임이라고 할 수도 있고, 또 물리력도 발휘하기 때문에 결계의 일종이라고 할 수도 있고 뭐 그런 거야. 나도 조금 펼칠 줄 아는 정도야.”
이리아는 자신의 물음에 대한 메이린의 대답에 강한 흥미를 보였다.
[호오. 재미있는 이야기로군.]
아니, 이리아만이 아니라 칼 역시 그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다.
“그리고 그 진법이라고 하는 것은 지하 서고의 기관에도 응용되어 있어. 잘못된 방법으로 문을 열려고 하면 바로 발동되게 되어 있지. 어떤 건지 겪어보고 싶으면 나중에 집에서 시험해 봐도 돼. 하지만 난 그 결과까지는 책임 못 져.”
메이린은 은근한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을 본 세 사람은 절대 시험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메이린이 저런 미묘하고도 은근한 웃음을 짓는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라는 이야기이다.
“카일로니아가 건국된 이후 초대 공작께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지하 서고를 만든 거야. 그리고 그 위에 지금의 저택을 지은 거지. 비밀통로까지 모든 공사가 완료된 후에 책들을 비밀통로를 통해 지하 서고로 옮긴 거고. 뭐, 그렇게 된 거야.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분은 정말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천재라는 거야. 요즘 지하 서고에서 공부하면 할수록 그분의 천재성에 질려 버려.”
마지막 말을 맺을 때 메이린의 얼굴에는 쓴웃음이 맺혀 있었다.
“이니안 네가 발견한 그 마령천참공의 상권은 아마 그 과정에서 비밀통로에 떨어진 걸 거야. 그 책도 대단하다. 아무런 보존적 처치가 안 되어 있는 비밀통로에서 그 세월을 견뎌냈으니.”
이니안은 그제야 어떻게 자신이 그런 책을 손에 넣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되었다. 사실 그 책을 처음 발견했을 때는 그도 의아했다. 어떻게 지하 서고에나 있어야 할 책이 그곳에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자, 그럼 이 이야기 역시 끝난 거지? 그럼 다음 이야기를 들어야지. 어떻게 네가 포르시아 공녀의 곁에 있는 거지?”
이리아의 질문.
이니안은 가만히 고개를 뒤로 젖히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그녀의 곁에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하지만 막상 질문을 받으니 대답을 망설이게 된다. 자신이 그녀의 곁에 있는 이유는 무언가가 다른 것이 더 있는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기에.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는 그 하나였다.
“그때 그 일의 실마리를 그녀가 쥐고 있어.”
이니안은 짧게 대답했다. 이어지는 침묵.
이니안의 대답에 누구도 당장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때 그 일.
이니안을 방황하게끔 만든 일이다. 쉽게 입에 담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때문에 이니안이 사라졌고 이니안이 힘을 잃었으며 이렇게 힘겹게 만난 것 아니던가.
“구체적으로 어떤 실마리를 가지고 있다는 거니?”
메이린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몰라, 나도. 하지만 실마리는 분명 쥐고 있어.”
“후우. 좀 자세히 좀 이야기해 봐.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하다.”
이리아가 한숨을 쉰다.
이니안은 다시 한 번 머리를 뒤로 젖히며 눈을 감았다.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인지 정리하는 것이다.
이윽고 이니안이 눈을 떴을 때 그의 입술은 천천히 그러나 멈춤 없이 움직였다. 그리고 카르세온에게 패하고 나서 케라우에게 들었던 이야기까지 말한 후 이니안은 이야기를 멈췄다.
“으음… 그러니까 그때 습격자들은 무슨 눈물을 찾으라는 이야기를 했었다는 말이지. 그리고 현재 포르시아 공녀는 그 드래곤의 눈물이라는 것을 이용한 흑마법의 대법에 걸려 기억이 조작된 상태고.”
메이린이 이야기를 정리했다.
“그래.”
“그게 가능해, 언니?”
메이린이 이리아를 보면서 묻는다.
“가능해. 흑마법서에도 분명히 나와 있어. 하지만 실제로 행할 수 있을 줄은 몰랐네. 드래곤의 눈물이라는 것은 정말로 귀하거든. 그것이 미에른 후작가에 있었다는 것도 놀라워.”
이니안이 의문 가득한 눈으로 이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어떻게 흑마법에 대해서 알고 있을까?
“뭘 그렇게 놀라? 요즘 흑마법 공부도 하고 있어. 생각보다 재미있더라. 뭐, 그래서 네가 사용하는 마나가 일반적인 마나와 조금 다르다는 것도 알아봤지.”
“흑마법이라니. 누나다워. 보통 귀족은 엄두도 못 내는 일인데 말이야.”
“이 누나가 보통 귀족일리 있니?”
이니안의 말에 이리아가 생긋 웃었다.
“그러니까 너는 지금 포르시아의 아버지, 칸세르 공작이 무언가를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그녀 곁에 있다는 거지. 그리고 드래곤의 눈물을 이용한 대법이 무엇인지도 밝혀내야 하고.”
“그래.”
이니안의 대답에 메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의외다. 가드 나이트의 일을 무척이나 싫어하던 네가 호위기사라니. 결국은 너도 우리 가문의 남자라는 거겠지.”
메이린의 말에 이니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의 검은 이제 소중한 이를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니?”
일그러진 얼굴의 이니안에게 던져진 메이린의 질문.
이니안은 아무런 말도 못했다. 그 말에 며칠 전 나르센 산에서의 일이 떠오른 것이다.
“아니.”
한참 후에 돌아온 이니안의 짤막한 대답.
그 대답에 메이린은 살폿 웃었다. 그렇다. 사람을 지킨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 자.”
만일 이니안이 그렇다고 대답을 했더라면 주지 않으려고 했던 책이다.
이니안은 메이린이 건넨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령천참공 운용편.
부드럽고도 유려한 필체로 적혀 있는 제목.
“이건 언제?”
메이린의 필체로 적힌 제목에 이니안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분명 이 책 한 권은 그녀가 손으로 쓴 것일 것이다. 지하 서고에 있는 책은 가지고 나올 수가 없으니까.
“너랑 헤어지고 나서 너한테 필요할 것 같아서.”
불과 반나절 사이에 책 한 권을 필사했다는 말이다. 누나의 배려가 너무나 고마웠다.
“그런데 말이야.”
그때 이리아가 끼어들었다.
“응.”
“그 케라우라는 친구가 뱀파이어란 말이지?”
이리아의 눈에 강렬한 호기심이 떠올랐다.
“그래.”
“저주에 걸려서 낮과 밤이 바뀌었다고?”
“그래. 리버스 스테이트라는 저주라던데.”
“으음. 그런 저주라면 푸는 건 간단한데… 같은 저주를 한 번만 더 걸어주면 되는 것을.”
[이니안, 네 누나도 정말 대단하군. 보통의 마법사는 절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저렇게 간단히 말하다니 말이야.]
이리아의 말에 칼이 놀랍다는 듯 말했다.
“누나들은 절대 보통 사람이 아니니까.”
[가능하다면 나도 대화를 좀 나눠보고 싶은데.]
칼은 이니안의 누나들에게 강한 흥미를 보였다.
그의 일만 년의 삶을 통해서도 만난 적이 없었던 상상을 초월하는 인물들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케라우라… 한 번 제대로 만나보고 싶네.”
이리아의 눈이 반짝였다.
“케라우보다 더 대단한 이를 만나게 해줄까?”
“뭐?”
이니안의 말에 이리아를 비롯해 다른 두 사람의 눈도 반짝였다. 이니안이 대단하다고 하면 대단한 것이다. 이니안이 지금껏 대단하다고 평가한 이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으니까. 그중 둘이 마일론과 파르미안이었다.
“내가 그렇게 카르세온에게 지고 나서 케라우가 포르시아를 따라가게 했다고 했지?”
“그래.”
“그리고 나서 내가 뭘 했을 것 같아?”
이니안의 물음에 로레인이 대뜸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뭐, 마나 스피어도 회복했겠다, 그런데 패배했으니 이를 갈고 일단 강해지기 위해서 수련을 했겠지. 잠깐, 그러고 보니 너 어떻게 마나 스피어를 회복했는지는 말하지 않았잖아. 메이린과 마이너스 마나가 어떻고 마령천참공이 어떻고 하다가 이야기가 다른 데로 샜었어. 너무 재미있는 이야기라 깜빡했지만!”
로레인은 그제야 떠오른 사실에 이니안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세상에 마나는 두 가지 성질로 존재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수련하고 백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마나가 바로 플러스 마나. 그리고 그 반대되는 성질을 가진 것이 마이너스 마나. 주로 흑마법사들이나 죽은 자들이 사용하는 마나지. 즉, 죽은 이후 영혼이 된다거나 하면 마이너스 마나를 이용하게 되는 거야. 마나가 두 개니까 인간의 몸에는 자연히 그 마나를 담는 그릇도 두 개. 내가 파괴한 것은 플러스 마나의 마나 스피어. 그리고 내가 새로이 마나를 모은 곳은 마이너스 마나의 마나 스피어. 이제 됐어?”
이니안은 지극히 간단히 그리고 빠르게 설명했다. 너무 빠른 설명에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이니안의 물음에 로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좀 전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수련을 시작했지. 그런데 그 장소가 아까 이야기했던 동굴이야.”
“은색 늑대가 지키는 드래곤의 레어였다는 동굴?”
메이린이 물었다.
“아!”
이니안이 대답을 하기 전에 무언가를 깨달은 메이린이 짧은 탄성을 터뜨렸다.
“그렇다면 보아닌의 성수라는 늑대가 그 동굴을 지키는 가디언인 거야? 드래곤의 가디언을 부리다니 너 무언가 엄청난 걸 얻었구나?”
메이린은 왜 은색 늑대 이야기를 듣고 바로 보아닌의 신수와 연결하지 못했는지 탓하며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 드래곤의 가디언이라는 너무나 엄청난 말에 차마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한 것이다.
“그래. 포르시아가, 아니, 로즈가 가디언 케이로스에게 어떤 부탁을 했더라고. 그녀는 드래곤의 눈물을 이용한 대법을 받은 상태라 그 기운을 풍기고 있었어. 케이로스가 그 기운을 알아차리고 그녀에게 드래곤과 같은 대우를 해줬지. 그녀가 그 동굴을 떠나기 전에 내가 레어 안에 들어가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했나 봐.”
조용했다.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니안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로즈가 나에게 그곳에 한 번 들러보라고 해서 간 것이었는데 의외였어. 레어 안에 들어가게 해줬어. 그리고 나는 레어 안에서 마령천참공의 수련을 시작했지.”
이니안은 그 이후의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이야기가 끝났을 때 세 사람은 모두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동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들의 동생이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쉬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그렇지 않아도 메이린에게 들은 이야기의 충격이 채 다 가시지도 않았는데 이번에는 이니안이 엄청난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러니까 마이너스 마나를 이용한 마령천참공은 죽은 이의 세계로 가지 못한 영혼, 그러니까 유령이나 귀신을 볼 수 있게 해준다고 했었지? 거기까지는 나도 납득이 가, 난 마령천참공 하권을 봤으니까.”
메이린은 빠른 속도로 말을 쏟아냈다.
“하지만 말이야, 그 드래곤의 레어에서 마령천참공을 운용한 채로 눈을 떴더니 그 자리에 드래곤의 영혼이 있었다고? 그리고 드래곤의 눈물은 사실 드래곤의 영혼을 이 세상에 묶어두는 매개체라는 거고?”
너무나 빠른 질문에 일일이 대답할 수 없었기에 이니안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덕분에 이니안은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 그 말을 믿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아니.”
이니안은 간단히 대답했다. 그가 생각해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니까. 하지만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이고 사실이었다.
“칼.”
결국 이니안은 칼을 불렀다. 사실 이 이야기를 한 것도 칼이 누나들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니안으로서는 칼에 대한 이야기를 누나들에게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으니까.
“불러주길 기다렸어.”
이니안이 누군가를 부르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세 자매는 갑자기 이니안의 옆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흑발, 흑안의 귀공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분명 누군가가 숨어 있는 기척도, 모습을 드러내는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었다. 이리아 역시 마법적인 흔적은 찾지 못했다.
“정말로 마이너스 마나만으로 이루어져 있어.”
한참 동안 칼을 바라보던 이리아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눈앞의 존재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