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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그래, 그럼 우린 이만 갈게. 용자님께 도전했다가 패한 주제에 이렇게 오랫동안 잡아두는 것도 예의는 아니지. 도전자의 권리로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는 있지만.”
용자에게 도전한 자에게 주어지는 한 가지 권리. 그것은 용자와 잠시 동안 독대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갈라히벤 사람들에게 있어 용자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다. 해서 과거의 갈라히벤에는 용자에게 도전하여 그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꿈꾸던 검사도 존재했었다.
로레인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른 이들도 모두 일어났다. 이니안은 왕궁의 정문까지 누나들을 배웅하고는 포르시아가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그분들은 모두 돌아가셨나요, 세이버 경?”
“네.”
“대단하네요. 사이몬 가의 검을 꺾다니요.”
포르시아의 칭찬에 이니안은 머쓱하게 웃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제가 검술은 잘 모르지만 예전부터 기사 분들의 대련은 많이 지켜봤어요. 제가 보기에는 결코 운이 좋아 이긴 것은 아닌 것 같던데요.”
“칭찬, 감사합니다.”
이니안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니안은 포르시아에게 자신과 로레인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아직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이니안이 사이몬 가의 인물인 것을 모른다. 이니안이 밝히지 않은 것이다.
그랬기에 다들 로레인이 도전자의 권리로 이니안을 만나기를 원했고 이니안은 용자로서 그 요청에 응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아, 세이버 경이 사이몬 가의 분들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앞으로의 일정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어요.”
포르시아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무마타 라온의 말씀으로는 앞으로 일주일 후에 무투회가 열릴 거라고 해요. 그리고 사흘 후부터 무투회가 열리기 전날까지 성녀의 출현을 기념하는 축제가 열린다나요? 곤란하게 말이죠.”
포르시아는 자신으로 인해 축제가 열린다는 사실이 못내 어색하고 부담스러운지 난처한 얼굴을 했다.
“그래서 축제 첫날은 아무래도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세이버 경과 저는 말이죠. 그리고 무투회가 열리기 전날 왕궁에서 무도회가 있다고 하네요. 저희를 배려해서 대륙 양식으로 준비했다고 꼭 참석해 달라고 했어요. 이것도 나가봐야겠죠? 그리고 무투회 관람. 이것이 대략적인 일정이네요. 그 외에는 큰일이 없는 것 같아요.”
포르시아가 생긋 웃었다.
지금까지의 빡빡했던 일정에 비해 비교적 여유로운 것이 마음에 든 듯하다. 사실 일정이 이렇게 여유로워진 것도 케라우가 알게 모르게 무마타를 압박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사이사이 시간은 나이안의 명소를 둘러보거나 쉬면서 지내도록 하죠.”
“네, 알겠습니다.”
포르시아는 그렇게 긴장 속에서 보낸 하루를 마쳤다. 이니안이 로레인과 싸우기로 결정이 된 순간부터 그 대결이 끝난 순간까지 그녀는 이니안에 대한 걱정으로 내내 긴장한 상태였다.
대결을 마치고 무사한 얼굴로 들어온 모습을 보자 그 긴장이 풀리며 몸에 피곤이 몰려왔다.
어느새 서쪽 하늘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
벽에 걸린 괘종시계가 자정을 알리며 열두 번을 울었다. 이니안은 오후에 누나들을 만났던 방으로 향했다. 본래 보아닌의 용자인 이니안을 위해 준비된 건물에 있던 방이다.
이니안이 포르시아를 지키기 위해 그 건물에 머무는 것을 고사했기에 현재는 빈 건물이다. 보아닌의 용자가 언제든 와서 쉴 수 있도록 한 왕궁의 배려였다.
이니안이 방에 들어서자 이미 그곳에는 세 사람이 도착해 있었다. 소파에 단정히 앉아서 이니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늦었네.”
“누나들처럼 한가하게 유람하는 입장이 아니라서.”
이니안이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하긴 공녀를 호위하는 것이 상당히 피곤한 일이긴 하겠지. 호호호.”
이니안의 맞은편에 앉은 세 명의 공녀.
이들은 겁도 없이 단 셋이서 대륙을 여행하고 있었다. 사실 그 셋이면 거의 걱정이 없는 조합이지만 말이다.
“자, 그럼 낮에 빼먹었던 것 모조리 말해, 우선 네가 사용하고 있는 그 힘부터. 마나 스피어가 복구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다.”
물론 사이몬 가 사람들만의 상식이다. 로레인이 눈을 사납게 떴다.
“으음. 이런 말하면 믿으려나? 세상에 마나는 두 가지 성질로 나뉜다는 것 알아?”
“역시.”
이니안의 물음에 메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추측이 맞은 것이다.
“응? 알아?”
메이린의 반응에 이니안이 놀랐다. 자신이 본 그 책은 지하 서고에 없는 것이다. 저택의 비밀 통로를 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 그것이 마령천참공이었기에 아무리 지하 서고의 모든 책을 읽은 메이린이라 하여도 알 리가 없었다.
“물론. 지금 네가 말하지 않은 것도 알고 있어. 거기에 더해 네가 모르는 것도 알고 말이야. 일단 네가 마이너스 마나를 이용한 무공을 익혔다는 것과 그 무공의 이름이 마령천참공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건 말해 둘게.”
“에에?”
이니안은 무슨 괴물 보는 듯한 눈으로 자신의 막내누나를 보았다. 이것만은 절대 알 리 없다고 자신하던 것을 알고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으랴?
“얘는. 누나를 보는 눈이 그게 뭐니?”
메이린은 그런 이니안의 시선이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까지 알 줄은 몰랐는걸.”
이니안은 고개를 저었다.
“뭐 네가 모르던 사실을 나는 알고 있으니까. 사실 그 책은 상, 하권으로 나눠져 있고 상권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 하권은 분명 지하 서고에 있었거든. 아마 네가 사라진 그 상권을 본 거겠지.”
몰랐다.
진정 몰랐다.
자신이 읽은 마령천참공에는 하권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아니, 그 한 권만으로 이미 훌륭한 무공 서적이었기에 하권이 존재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뭐야, 그게? 난 그 책을 비밀 통로에서 주웠었다고!”
“흐응. 그랬구나. 그래서 없었던 거구나.”
메이린은 그제야 알 수 없었던 일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잠깐. 지금 두 사람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거야? 당최 알 수가 없으니.”
로레인이 끼어들었다. 이리아는 예전에 메이린에게 마법에 대한 조언을 구할 때 마령천참공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들었기에 둘의 대화 내용을 대강이나만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레인은 전혀 모르는 이야기였기에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끼어든 것이다.
“으음. 제대로 이야기하자면 긴데… 할 수 없지, 뭐. 다들 들어둬서 나쁠 것 없는 이야기이고.”
잠시 고민하던 메이린이 결정을 내린 듯 말했다. 그녀의 말에 이리아도 흥미를 보였다. 다들 들어둬서 나쁠 건 없다는 말은 결국 자신도 모르는 이야기라는 것이었으니까.
“으음. 다들 우리 사이몬 가의 내력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 가문의 비전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진 비전인지 말이야. 사실 우리 가문의 비전이 대륙의 상식으로 보자면 비상식적인 거지.”
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 스피어. 오직 사이몬 가에만 존재하는 비법이다. 그리고 그 비법은 대륙의 일반적인 상식에 비해 너무나도 발전된 개념이다. 하나의 대륙에 존재하면서 마치 다른 세상의 것인 것처럼 말이다.
“사실이 그래. 우리 가문의 기원은 이 라칼트 대륙이 아니니까.”
메이린의 그 뜻을 알 수 없는 말에 나머지 세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우리 가문의 시조이신 진 케이 사이몬 대공, 그분은 다른 세계에서 오신 분이야.”
쿠쿵.
믿을 수 없는 충격이 세 사람을 덮쳤다.
진 케이 사이몬 대공.
본래 진 사이몬으로 카일로니아의 건국왕과 둘도 없는 친구였으며, 또한 카일로니아의 건국 일등 공신이다. 그의 사후 그의 공을 기려 사이몬 가에 ‘케이’라는 중간성이 하사되었고 또한 그 일인에 한해 대공의 작위가 부여되었다.
여전히 카일로니아의 전설에 등장하는 무적의 기사. 그것이 사이몬 가의 시조 진 케이 사이몬이었다. 카일로니아의 모든 사람들은 대공으로 추앙하지만 사이몬 가의 인물들은 진 케이 사이몬을 그냥 초대 공작님이라고 불렀다.
한데 그런 초대 공작이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다른 세계? 다른 차원? 뭐 그렇게 설명을 해야겠지.”
“잠깐만! 아무리 메이린 너라지만 지금 그 이야기를 믿으라는 거니?”
로레인이 손을 들어 메이린의 말을 막으며 외쳤다.
“사실인걸. 나도 믿기 힘들었지만 분명 사실이야.”
메이린은 단호한 얼굴로 확실히 말했다.
“내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건 초대 공작님의 일기를 읽었기 때문이야. 지하 서고에 그분의 일기도 있었거든.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곳에 있었기에 나만 본 거지, 나는 그 안의 책을 모두 읽었으니까.”
세 사람의 얼굴에는 조금이지만 수긍하는 기색이 생겼다.
분명 사이몬 가의 지하 서고의 모든 책을 읽은 사람은 없었다. 그 방대한 양의 책을 과연 누가 다 읽으려 했겠는가. 필요한 책조차 찾지 못할 때가 수두룩했는데 말이다.
단 예외가 생겼으니 바로 메이린이었다. 메이린은 그곳의 모든 책을 다 읽었다. 그러니 누구도 발견 못했던 초대 공작의 일기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도 가능한 이야기였다.
“초대 공작님은 우리 라칼트 대륙이 있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 중원이라는 곳에 있던 분이야. 그곳은 우리 가문과 같은 체계의 무공을 익힌 사람들이 사는 또 다른 세상을 ‘무림’이라고 불렀다고 해. 그리고 그분은 그곳에서 가장 강한 열 세력 중 한 곳의 사람이었고.”
아무도 모르는 진 케이 사이몬 대공에 얽힌 비사.
그것이 지금 메이린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진 케이 사이몬.
그는 본디 중원이라는 곳의 사람이었다. 그곳에서의 정확한 이름은 서문진(西門辰).
구대문파 중 한 곳인 화산파의 제자로 그 오성은 뛰어났지만 근골이 평범하여 그다지 눈에 띄는 이는 아니었다. 그 자신도 무공을 수련하는 것보다는 책을 읽는 것을 더 좋아했기에 화산의 제자라면 누구나 꺼리는 일을 스스로 맡았었다.
그 일이란 바로 화산비고(華山秘庫)의 관리.
화산비고란 화산파가 세워진 이후 그들이 모은 모든 서적들의 서고였다. 강호에 흘러 다니는 하찮은 책부터 화산파의 진산절학이 적혀 있는 비급까지 모든 종류의 책들이 총망라되어 있는 비고다.
화산파의 근간이 되는 비고.
그랬기에 아주 중요하면서도 또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사실 화산파의 제자 중 그곳에 드나드는 이는 그다지 없었다.
직접 무공을 전수해 주는 사부가 있었기에 굳이 책을 찾아가면서까지 무공을 익히려는 이들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들 검을 휘두르는 무인. 책과 별로 친하지 않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그래서 문제가 하나 생겼으니 그토록 중요한 비고의 관리를 누구도 맡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행이라고 할까? 서문진이 아직은 어린 제자였을 때의 화산파에는 화산비고의 중요성에 스스로 그곳을 지키고 관리하겠다고 나선 장로가 있었다.
화산검성(華山劍聖). 당대 화산파의 제일고수였으며 무림오대고수 중 한 사람. 그가 스스로 화산파의 대소사에서 손을 떼고 그곳을 지키러 나선 것이다. 그리고 후인을 물색했다.
처음에는 화산검성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유혹에 무수한 사람이 몰렸지만 그가 내건 단 하나의 조건에 그들은 모두 발걸음을 돌렸다. 화산검성이 내건 단 하나의 조건.
평생 동안 화산비고를 지켜라.
강호의 영웅이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안고 있는 젊은 제자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때 나선 이가 서문진이었다.
근골이 평범했기에 어차피 그의 한계는 정해져 있었다. 게다가 그는 무공보다는 책이 좋았다. 평생 동안 화산비고를 관리하면서 그곳의 책을 읽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
그 생각이 드는 순간 그는 더 이상의 고민 없이 화산검성을 찾아가 그의 뒤를 잇겠다고 했다.
화산검성이 크게 기뻐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그는 화산검성의 제자가 되었고 서문진의 평범한 근골과 상관없이 화산검성은 서문진을 정성껏 가르쳤다.
그리고 5년 후, 서문진이 20세가 되던 해에 정사대전이 터졌다.
화산제일고수인 화산검성으로서는 계속해서 화산비고만은 지킬 수 없게 되었기에 그는 서문진을 홀로 비고에 남겨 두고 산을 내려갔다.
화산검성이 화산비고를 떠난 지 열흘이 되던 날 밤.
그날은 묘하게도 때에 맞지 않은 심한 폭풍우가 몰아쳤다. 하늘은 벼락을 떨어뜨리기에 바빴고 벼락 뒤에 이어진 우렛소리에 세상이 들썩였다.
너무나 거센 폭풍우였기에 비고가 걱정이 된 서문진은 비고 옆에 지어진 작은 초막을 나와 비고에서 밤을 보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망가지는 곳이 생기면 즉시 조치를 취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비고에는 별 탈 없이 폭풍우가 물러나고 날이 밝았다.
밖에서 들리는 새소리에 날이 밝았음을 안 서문진은 비고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깨달았다. 비고에 별 탈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엄청난 사건이 생겨 버렸음을.
그가 비고의 밖으로 나왔을 때 그의 눈에 펼쳐진 곳은 화산이 아니었다.
그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평원에 비고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사우론의 사이몬 공작가의 자리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메이린이 자신의 세 남매를 바라보니 그들은 모두 얼이 빠져 있었다.
하긴 자신도 그 일이 기록되어 있는 일기를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진 대공의 일기를 보고도 믿지를 못했는데 자신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이들이 그 말을 믿을 수 있을까?
“하아. 믿을 수가 없네. 메이린, 네가 하는 말을 안 믿을 도리도 없지만 말이야.”
로레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렇게 생각하면 납득이 가는 것도 있지만 말이야.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 자체를 납득할 수 없으니…….”
이리아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