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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로레인이 겨우겨우 붉은 꽃송이를 떨쳐낼 때쯤 청검밀밀의 초식으로 은밀히 사라진 검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로레인을 찔러가고.
로레인이 그 검을 막아내자 이어서 펼쳐진 만혼금쇄.
로레인을 옥죄어 들어가는 그 검의 움직임에 그녀가 당황하는 사이, 창천광휘의 초식이 로레인을 향해 터져 나왔다.
“치잇. 매화만천하!”
이번에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검의 위력이 만만치 않음을 느낀 로레인은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강의 위력의 검초로 이니안의 검에 맞섰다.
쿠아아아콰콰콰콰쾅!
요란한 폭음과 함께 엄청난 충격파가 두 사람을 중심으로 휘몰아쳤다.
“꺄악!”
그 충격파는 소용돌이치며 연무장을 완전히 감싼 후 관람석으로까지 뻗어나갔다.
자신들을 향해 휘몰아쳐 오는 어마어마한 충격파에 관람석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언니, 저거 막아야 하는 거 아니야?”
메이린 역시 눈앞에서 자신들을 향해 몰려오는 충격파를 기가 막힌 듯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격돌에 쏟아 부은 힘은 그 정도로 엄청났다. 단지 부딪친 후의 충격파가 이렇게 굉장할 정도라니…….
대체 관람석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이나 한 거란 말인가?
“괜찮아. 어제 뭘 들었어?”
이리아의 말에 메이린은 자신이 너무 놀라 깜빡 잊은 사실을 떠올렸다. 분명 이곳은 파손을 방지하기 위한 방어 마법이 백마법과 신성 마법으로 이중으로 쳐져 있다고 했었다.
“그래도 버틸 수 있을까? 이 정도면 어지간한 7서클, 아니, 8서클 마법은 될 거 같은데.”
“으음. 이 정도면 7서클 익스퍼트 정도는 되겠네. 그리고 내가 잠시 살펴봤는데 이 연무장의 방어 마법은 9서클의 헬 파이어 스톰(Hell Fire Storm)이라도 막아낼 수 있어. 물론 두 방어 마법이 모두 발현되어야겠지만. 저 충격파는 백마법의 방어 마법만으로도 끄떡없어. 우리한테는 아무 영향 없을 거야.”
이리아가 여유롭게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는 이유가 있었다. 당장에라도 해일처럼 관람석을 덮쳐 모든 것을 부수어 버릴 것 같은 충격파지만 결코 방어 마법을 뚫을 수 없다는 믿음.
지이잉.
충격파가 관람석 제일 앞부분에 닿은 순간.
묘한 소리가 울리며 관람석을 둘러싼 하얀 막이 생겼다. 이리아가 끄떡없을 거라 한 방어 마법이 펼쳐진 것이다.
과연 이리아의 말대로 충격파가 한동안 거세게 밀어붙였지만 마법으로 만들어진 하얀 막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충격파가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드러난 광경.
마법의 방어막은 하얀 빛깔이었지만 투명해서 건너편의 이니안과 로레인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은.
검을 들고 담담히 서 있는 이니안.
검에 의지해 한쪽 무릎을 땅에 꿇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로레인.
승부는 났다.
보아닌의 용자가 사이몬 가의 소드 마스터에게 이겼다.
“우와와와와와와!”
“용자님 만세!”
“마라! 보아닌의 은총이여! 마라!”
드러난 결과에 관람석에서 터져 나오는 엄청난 함성.
어떤 이는 두 눈 가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보아닌의 은총을 눈앞에서 보았다며 연신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람.
곁에 있는 이와 손을 꼬옥 잡고 감격스러운 얼굴로 이니안을 바라보는 사람.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기쁨과 환희에 빠져 있었다.
“후우∼ 이겼네요.”
다만 단 한 사람.
포르시아는 그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는 얼굴을 했을 뿐이다. 사실 그녀는 이니안의 승패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크게 다치지 않고 무사하기만을 바랐을 뿐. 하얀 막 건너편으로 보이는 이니안의 모습은 크게 몸을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네. 역시 괴물입니다. 저 녀석은. 쳇!”
케라우의 말에 포르시아의 입가에 살짝 웃음이 떠돌았다.
“호홋. 조금 전의 모습을 보니까 케라우 씨의 말도 이해가 가네요. 조금 전 그 엄청난 충격파에는 저도 무척이나 놀랐어요. 여기 있는 사람이 모두 휩쓸려 가는 게 아닌가 싶어서 말이에요.”
이제 대결이 끝났기 때문일까? 포르시아는 한결 가벼운 얼굴로 이야기했다. 그녀의 말에서 느껴지던 어딘가 억눌린 듯한 기색도 사라졌다.
‘강하다. 나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프네는 케라우와 포르시아 사이의 대화에는 관심 없이 이니안을 노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손아귀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그 힘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후후. 내가 이겼어. 역시 누나는 나한테 안 돼. 그때 한 번만 빼고는 말이지.”
개운한 얼굴로 웃으며 이니안이 로레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쳇, 그런 검법이 있을 줄이야…….”
진 것이 분한 듯 말했지만 로레인의 입가에도 웃음이 맺혀 있었다.
31장. 빌어먹을 무투회
이니안이 머쓱한 표정으로 앉아서 맞은편의 누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 자매는 제각각의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막내 동생을 지켜본다. 그 곁에 앉은 마일론과 파르미안만이 어색한 웃음과 함께 양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자, 그럼 불어.”
당연히 로레인의 간결하고도 직접적인 물음이다. 세 자매 중 저렇게 말하는 이가 그녀말고 또 누가 있을까.
“뭘?”
역시 이니안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로레인이 얼굴을 험상궂게 일그러뜨린다. 하지만 예전과는 다르다는 듯 이니안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호홋!”
메이린이 그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니안, 4년 동안 변하기는 변했구나, 이제 언니의 눈빛에 버틸 수도 있고.”
“뭐, 이 정도는.”
이니안이 어깨를 으쓱한다.
“흥.”
로레인은 또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편지 하나 달랑 남겨 놓고 사라졌던 애가 보아닌의 용자라니,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잖아.”
“누나들이야말로 여기에는 어쩐 일이야? 나야 집을 뛰쳐나왔다지만 누나 셋이서 이 멀리까지 올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이니안은 메이린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오히려 그가 궁금한 것을 물었다.
“뭐 하러 오긴. 너 찾으러 왔지.”
“내가 여기에 있는 줄 어떻게 알고? 또 그걸 허락할 아버님이 아니잖아.”
메이린의 대답에 이니안은 여전히 의문스럽다는 얼굴이다.
“그야, 무투회 구경 왔다가 정말 우연히 널 발견한 거야. 솔직히 우리도 널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다고. 마일론이나 파르미안도 무투회를 보러 왔다가 우리랑 마주친 거고.”
“빌어먹을 무투회.”
이니안이 작게 중얼거린다.
“뭐야?”
그 중얼거림을 들은 로레인, 당연 얼굴이 또 일그러진다.
“쳇, 귀는 밝아가지고.”
이제는 로레인의 얼굴이 붉게 변한다.
“호홋.”
“호호호.”
이리아와 메이린은 재미있다는 듯 그 모습에 기분 좋게 웃었다. 정말이지 4년 만에 보는 그리운 모습이다.
이니안으로서는 정말이지 빌어먹을 무투회이다. 그 역시 무투회를 보고 싶다고 한 포르시아 덕에 이곳으로 오지 않았던가. 그리고 여러 가지 일에 엮이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은 이렇게 누나들까지 만났다.
“물론 너를 찾으러 간다고 하면 아버지가 허락하실 리 없지. 그래서 다른 핑계 대고 나왔어.”
메이린이 로레인을 바라보았다. 이니안의 시선도 자연 메이린을 따라 로레인에게로 향한다. 로레인의 얼굴이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붉게 물들었다.
“응? 큰누나랑 관련있는 거야?”
“응. 언니 아직 시집 안 갔거든.”
메이린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이니안은 그 말만 듣고도 대강의 사정을 추론할 수 있었다.
“하아, 아직 시집 안 갔어?”
한숨과 함께 로레인을 향하는 한심하다는 눈빛.
또다시 로레인의 얼굴이 붉어진다. 붉어졌다가, 하얘졌다가, 로레인의 얼굴은 잠시 동안 몇 차례나 그 색을 달리했다.
“설마 아직도 그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걸고 남편감을 찾는 거야?”
“그렇단다.”
로레인이 시선을 돌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리아가 대신 대답했다.
“차라리 그냥 평생 혼자 살겠다고 선언을 하는 편이 낫지 않아?”
“뭐, 그래도 그 덕에 이렇게 같이 나올 수 있었잖니.”
이리아의 말에 이니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남편감 찾아 나왔다는 거네? 그럼 아버지께서 허락하실 만하지. 어머니는 등을 떠미셨을지도 모르고. 덕분에 나만 이렇게 잡혔네. 그러게 대강 아무 남자나 잡아서 시집가지 그랬어?”
“너, 자꾸 그렇게 까불다가 죽는 수가 있다.”
결국 로레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음산한 목소리.
이니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로레인을 놀리는 것은 여기까지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 이상 더 했다가는 저 무서운 큰누나가 폭발한다. 그렇게 되면 말릴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다.
물론 아버지는 저 멀리 카일로니아의 왕도 사우론에 계신다. 그런 것이다.
“그래도 제법 괜찮은 사람은 찾았어.”
입에 가져갔던 찻잔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메이린이 말했다.
“그래? 제법 괜찮은, 이라고 하는 걸 보니 물론 졌겠네?”
“그렇지. 너도 아는 사람이야. 아주 인연이 깊은.”
그 말에 이니안의 얼굴에 흥미가 돌았다.
“페르마타 카르세온.”
짤막하게 이름만 말한 메이린은 이니안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흥미로운 눈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아아, 그 녀석. 뭐 그 녀석 정도면 제법 괜찮지. 어쨌든 나를 이겼었으니까.”
하지만 이니안의 반응은 담담했다.
이니안과 카르세온. 그때 서로는 서로의 의무에 충실했을 뿐이다. 이니안은 그 일로 카르세온에게 악감정이 없다. 단지 패배가 치욕적이었을 뿐.
“언젠가 그 빚은 갚기는 해야겠지만.”
그 말을 하는 순간 이니안의 눈이 투기로 가득 차는 것을 놓칠 메이린이 아니었다.
‘호호. 역시 너는 너구나, 이니안.’
“그러니까 그게 궁금하단 말이야.”
그때 로레인이 끼어들었다.
“내가 싸워본 바로는 그 녀석이 제법 강한 축에 속하기는 했지만 너를 이길 정도는 아니야. 네가 그때 소드 마스터가 아니었다고 해도 나를 상대한 그 검법을 보면 결코 질 수 없는 상황이라고.”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진 건 사실이야. 대략 삼천 명 정도의 어새신이랑 싸우고 나서 또 다크 크리스 길드의 어새신과 싸운 후 그 녀석과 붙었지만 말이야.”
이니안은 시선을 돌린 채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분하긴 상당히 분했나 보네, 변명 같은 건 안 하는 녀석이.’
메이린은 동생이 보여준 의외의 모습에 입을 가리고 나직이 웃었다.
“훗. 그래도 진 건 진 거지. 패배자 녀석.”
약점을 잡았다는 것일까? 로레인은 바로 이니안에게 공격해 들어갔다. 로레인이 말한 것은 분명 사실이었기에 이니안은 입술만 샐쭉거릴 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자자, 그럼 우리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이제 네 이야기를 할 차례지?”
메이린은 느긋한 얼굴로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시작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얼굴이다. 잠시 막내누나의 얼굴을 바라보던 이니안의 시선이 이리아에게로 향했다가 다시 로레인에게로 향했다. 셋 모두 어서 이야기하라는 무언의 압력을 보내고 있었다.
“후우…….”
짧은 한숨.
이윽고 이니안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집을 나와서…….”
편지를 남기고 집을 떠났을 때의 이야기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몇 달 전의 이야기까지는 그다지 흥미로울 것이 없었다. 그리고 이미 이슈데인이 조사해서 알고 있던 내용이기도 했다. 이니안으로서도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었기에 건너뛸 부분은 건너뛰었다.
“그리고 로즈라는 아이를 만났어. 죽을 뻔한 날 살려준 거지.”
“멍청한 녀석.”
트롤에게 쫓겨 죽을 뻔했다는 말에 로레인은 간단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 속은 좋지 않았다.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있던 녀석이 겨우 트롤에게 쫓겨 죽을 위기에 처했었다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그렇게 된 거야. 알고 보니 로즈가 기억을 잃은 포르시아 공녀였고 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결국 나의 마나 스피어를 복구했어.”
물론 그 말에는 거짓이 섞여 있다. 마나 스피어의 복구 따위 가능할 리가 없다는 것 다들 잘 알고 있다.
마일론은 이니안의 이야기에서 나온 마나 스피어가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것이 사이몬 가의 비전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 챘기 때문이다. 사실 자신이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뭐, 그리고 어쩌다가 길들인 은색 늑대가 이곳 갈라히벤에서는 신수였던 거고, 케이로스 그 녀석이 포르시아 공녀도 잘 따라서 성녀가 된 거고 말이야.”
상당히 많은 부분의 이야기가 생략되었다. 이니안으로서는 마일론과 파르미안까지 있는 자리에서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둘도 없는 소중한 친구들이지만 자신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오히려 그들에게는 화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 그걸로 끝은 아니지? 일단 마나 스피어를 복구했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되니까. 오늘 밤 자정. 이곳에 다시 올게.”
이니안은 자신의 머리에 울린 이리아의 마법에 쓴웃음을 지었다. 마나 스피어 부분은 누나들에게도 대강 얼버무리고 넘어갈 생각이었는데 그대로 걸려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