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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30장. 쳇, 그런 검법이 있을 줄이야
연무장의 모습이 보임에 따라 이니안이 나가고 있는 곳의 정반대편의 입구에서 그의 상대가 보였다.
길게 기른 흑발.
갸름한 얼굴선.
‘여자인가?’
남자의 모습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흑발의 여성 소드 마스터.
오늘 이니안 자신이 싸울 상대다.
무언가 익숙한 특징. 분명 너무나 친숙했다.
흑발, 여성, 소드 마스터.
이 세 단어는 이니안으로 하여금 한 사람을 떠올리게 하였다.
‘설마?’
앞으로 가던 이니안은 우뚝 멈춰서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자신의 머리에 떠오른 인물의 모습을 날려 버리기 위해서였다.
그럴 리 없었다. 이곳은 갈라히벤이다. 카일로니아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여기에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현재 대륙에 여자의 몸으로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이룬 사람은…….’
한 명이다.
혹시 대륙의 3대 여기사 중 나머지 한 명이 그사이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으면 모르되 그렇지 않다면 단 한 명이다.
로레인 케이 사이몬.
이니안의 큰누나.
그녀만이 현재 대륙에서 유일하게 여자의 몸으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두근두근.
불길한 기분에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상당히 재미있을 거야. 즐기라고. 크크크크!”
케라우가 마지막에 남긴 말이 목에 걸렸다.
‘설마?’
케라우가 그렇게 음흉한 웃음을 지은 것은 분명 무언가 있기 때문이다. 그 녀석이 무언가를 꾸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니안은 자신의 상대에 대해 아무런 사항도 알지 못했다. 그저 소드 마스터 이상의 실력을 가졌다는 것만을 알 뿐이다.
왜냐면 사이에 케라우가 끼어 있기 때문이다.
즉, 케라우가 이니안이 받아야 할 정보를 중간에서 은폐하거나 바꿀 수 있다는 말이다.
이니안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상대는 이미 연무장에서 팔짱을 끼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이니안의 시선은 상대의 얼굴을 향하지 않았다. 도저히 마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미 그의 시력이라면 충분히 상대를 분간할 수 있는 거리에 있음에도 말이다.
“우와!”
“용자님이시다!”
“우오오오오오! 용자님!”
이니안이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엄청난 함성이 실내를 뒤덮었다.
갑작스러운 함성에 이리아와 메이린이 귀를 막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포르시아도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크크크. 짜식, 대강 눈치를 챈 모양이네. 시선이 아래를 향한 것을 보면 말이야. 흐흐흐. 그렇다고 피할 수는 없지. 자아, 어서 고개를 들어. 그리고 현실을 직시해. 그때의 네놈의 표정 이 몸이 똑똑히 지켜봐 주마. 크흐흐흐.’
이니안이 모습을 드러내자 케라우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어렸다. 드디어 그가 고대하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이니안.”
이리아와 메이린이 동시에 이니안의 모습을 보고 중얼거렸다.
그사이 더 늠름해진 동생의 모습.
4년 전 가출을 할 때에는 덩치만 컸지 여전히 아이의 얼굴을 하고 있던 녀석이 이제는 제법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경험을 했다는 거겠지?”
메이린은 어딘가 처연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 경험이 얼마나 힘든 고생이었을지 생각하니 절로 마음이 아파왔다.
“이니안 형.”
마일론과 파르미안 역시 감격에 찬 얼굴로 연무장의 이니안을 바라보았다.
이니안은 다시 한 번 자신을 향하는 친숙한 시선을 느꼈다.
이것은 나르센 산으로 가던 그날 대로에서 느꼈던 그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니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에 따라 상대의 모습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발, 다리, 허리, 몸을 지나 볼록 솟은 가슴.
분명 여자다.
이윽고 얼굴에 도달한 시선.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있는 입을 지나 오뚝한 코,
그리고…
살기를 풀풀 날리며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순수한 검은색의 눈동자.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눈이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모습이다.
“로레인 누나…….”
고개를 당당히 들고 상대를 마주본 이니안의 입에서 나직한 소리가 새어 나온다.
“훗. 드디어 만났구나.”
로레인의 미소가 더욱 짙어진다.
싸우러 나오기 전까지는 내키지 않은 로레인이었으나 막상 이니안을 보자 투지가 무럭무럭 솟아올랐다. 그간 이니안 덕에 한 마음고생, 몸 고생이 모두 투지로 바뀌어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것이다.
“어떻게…….”
이니안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무작정 마나 스피어를 파괴하고 집을 뛰쳐나와 4년 만에 만난 것이니.
스스로 가문을 버리겠다고 편지 한 장 달랑 남기고는 뛰쳐나왔다.
그리고 지금 가족을 만났다.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이니안은 로레인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익숙한 시선이 계속 느껴지는 그곳을 바라보았다.
역시 그곳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이리아 누나, 메이린 누나, 그리고 마일론과 파르미안 녀석까지…….’
이니안과 눈이 마주치자 이리아와 메이린은 오랜만에 본 막내 동생을 향해 미소를 지어주었다. 이니안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니안은 다시 시선을 로레인에게로 돌렸다.
어쨌든 지금은 그와 싸워야 할 상대였다. 용자에게 도전한 전사.
그것이 그의 누나였다.
“이니안, 각오는 되었겠지?”
스산한 기운이 느껴지는 한마디.
늘 이랬다. 로레인은.
익숙해졌지만 언제부턴가 들을 수 없었던 말.
정말 오랜만에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이니안의 입가에 미소가 만들어졌다.
이니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니안과 로레인의 분위기에 관람석에서는 웅성거림이 여기저기에서 생겼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이다.
“마치 저 두 사람 서로 잘 알고 있는 사이 같은데요?”
이니안과 로레인, 두 사람의 대화는 극히 작은 소리였기에 포르시아가 앉은 곳까지 들리지 않았다. 아니, 가장 앞쪽에 앉은 사람도 두 사람의 입이 살짝 움직이는 것을 보았을 뿐, 대화 내용은 들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포르시아는 예리한 눈썰미로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읽었다.
“크크크크!”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케라우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뭐, 그건 모르죠.”
빙긋 웃는 케라우.
“왠지 케라우 씨는 굉장히 즐거워 보이네요.”
케라우의 모습에 포르시아가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말했다.
찌릿.
포르시아의 반응에 대번에 다프네의 사나운 눈빛이 케라우를 향했다. 단지 이니안이 절친한 친구라는 이유로 평민 용병 주제에 공녀님의 옆에 있는 자다. 예의 바르게 행동해도 봐줄까 말까인데 저렇게 제멋대로인 행동이라니. 이니안이나 케라우나 다프네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하하하. 뭐, 그렇게 보셨다면 오해이십니다. 친구가 결투를 하러 나갔는데 기분이 좋다니요. 하하하!”
다프네의 사나운 눈빛에 케라우는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다.
“후우―”
그 모습에 한숨을 쉰 포르시아는 다시 이니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스릉.
가벼운 울림과 함께 두 사람은 검을 뽑았다.
“어디 그 몸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지켜봐 주지, 용자님.”
비꼬는 듯한 말과 미소.
로레인의 몸 주위로 마나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곧 그 마나는 오러의 형체로 로레인의 검 위에 맺혔다.
새빨간 붉은빛의 오러.
그녀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오러였다.
‘으음.’
붉은빛의 오러에 가장 놀란 것은 다프네였다.
이니안의 상대가 여자란 것을 안 순간부터 혹시나 했다. 그녀가 아는 한 여자의 몸으로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넘은 이는 한 명이었으니까.
“라토시스 씨.”
다프네가 케라우를 불렀다. 케라우는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성이 있었다. 몰락 귀족이 평민이 된 경우 종종 그런 일이 있었기에 특별히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다만 케라우가 자신은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부탁했었다. 다프네만은 끝까지 성으로 불렀지만.
사실 ‘씨’라는 호칭도 붙이기 싫었고 경어를 쓰기도 싫었다. 하지만 그녀의 주인인 포르시아가 그러는 것을 어찌 자신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설마 상대가 로레인 케이 사이몬 경인가요?”
대결에 관한 내용은 전부 케라우가 진행했기에 상대를 제대로 알고 있은 이는 케라우뿐이었다.
“네.”
케라우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세상에! 그 사이몬 가의 소드 마스터라고요?”
포르시아가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네.”
역시 웃으며 대답하는 케라우.
“어째서 세이버 경에게 그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죠? 소드 마스터라도 사이몬 가의 소드 마스터는 다른 마스터와는 달라요.”
질책이 분명했다. 그렇게 케라우를 향해 소리를 지른 포르시아는 더욱 걱정스러운 눈으로 이니안을 바라보았다.
‘뭐, 저 녀석도 사이몬인걸.’
그 사실을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이니안에게 죽을 테니까.
“엄청난 사실을 잘도 숨겼네요.”
다프네가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말했다. 뭐, 케라우는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들었지만.
“미리 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으니까요. 하루의 여유로 준비할 것도 없고요.”
여전히 웃는 케라우. 요즘 이니안이 항상 웃는 모습에 그도 물들어가고 있었다. 다만 이니안과는 달리 그 웃음이 능글맞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지만 케라우의 말이 맞았다.
다프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연무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이몬 가의 검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 운이 좋았다. 이니안이 어떻게 되든 그건 그녀가 알 바 아니었다.
눈앞에서 붉게 타오르고 있는 오러를 만들어낸 누나.
누나의 오러를 본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이니안도 마나 스피어의 마나를 끌어올렸다. 마이너스 마나가 온몸을 치달렸다. 그리고 검으로 솟아오른 오러.
여전했다.
여전히 맑은 푸른빛을 내는 오러다.
청광의 오러.
자신의 오러 블레이드이건만 정말 오랜만에 봤다. 힘을 되찾은 다음 오러 블레이드를 뽑아 올린 것은 처음이었다.
카르세온과 싸울 때는 능력이 안 되었고, 칼의 레어에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도 굳이 오러 블레이드를 만들지 않았다. 꼭 만들어야 아는 것이 아니었기에.
이니안도 자신의 마나 스피어를 파괴한 후 처음 보는 오러 블레이드인 것이다.
‘훗. 여전히 푸른빛이군.’
반가웠다. 마나의 속성이 변해서 빛깔이 변하지 않았을까 했는데 여전히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우와와와!”
“오러 블레이드다!”
로레인이 오러 블레이드를 만들 때부터 관람석의 열기는 뜨거워지고 있었다. 거기에 이니안 마저 오러 블레이드를 만들어내자 곧 관람석에서는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역시 용자님!”
“오러 블레이드와 오러 블레이드의 대결이라니!”
장내는 두 사람의 사정 따위와는 상관없이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들고 있었다.
“오러 블레이드라니. 세이버 경이 소드 마스터였나요?”
포르시아가 놀란 듯이 물었다. 그녀로서는 짐작도 못했던 사실이다.
“크크크. 그렇죠. 저 친구 괴물같이 강하거든요.”
여전한 특유의 웃음소리와 함께 케라우가 대답했다.
“으음.”
추측이 사실로 드러나자 심사가 편치 않은 다프네가 신음을 흘렸다. 그녀로서는 심사가 복잡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가장 놀란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네, 네가… 어떻게…….”
이니안과 대치하고 있는 로레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분명 마나 스피어를 파괴했다고 했다. 그런 것을 거짓으로 말할 녀석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았다. 게다가 오빠가 알아본 바로도 분명 마나 스피어를 파괴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카르세온과의 전투 이야기에서 제법 실력을 키웠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다. 마나 스피어가 파괴된 이상 강해진 방법은 보통의 기사들과 같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그런데 눈앞에서 청광의 오러를 피어 올리고 있다.
“설마 거짓말을 한 거니?”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에 뻔히 대답을 아는 질문을 던졌다.
이니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절대 거짓말할 녀석은 아니다.
“대체 어떻게?”
“이게… 대체…….”
관람석의 이리아와 메이린도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마나 스피어가 없는 녀석이 저렇게 선명하고도 맑은 오러라니.
대륙의 일반적인 소드 마스터들의 오러 블레이드는 저렇게 맑은 빛을 내지 못한다. 어딘가 탁한 빛이 섞여 있기 마련이다.
심연까지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인 저 맑디맑은 오러 블레이드는 오직 사이몬 가의 사람들만이 가능했다.
“응?”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이니안의 오러 블레이드를 바라보던 이리아가 무엇인가를 느낀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