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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너, 너희들.”
우리 셋의 대화에 큰누나는 얼굴이 벌게진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큰누나도 저럴 때가 있다니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내 길지 않은 15년 인생에 이런 진귀한 구경을 하다니 말이다.
“호호호. 언니가 그런 얼굴일 때가 다 있네? 이거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인데? 이니안, 너 가끔 언니한테 좀 맞아라. 저런 얼굴 자주 좀 보게.”
“이, 이리아.”
내 마음을 읽은 듯한 작은 누나의 말에 큰누나의 얼굴은 더욱더 빨개졌다. 하지만 마지막 말은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종종 맞으라니. 아무리 자기가 맞는 게 아니라지만 좀 심한 소리다. 물론 농담이란 건 알지만 말이다.
“언니도. 그러면 이니안이 너무 불쌍하잖아. 이틀이나 정신을 놓고 있었는데.”
역시 막내 누나. 작은 누나의 말에 있는 오류를 정확히 짚어내었다.
“괜찮아, 괜찮아. 그래도 소드 마스터인데 그 정도로 죽기야 하려고.”
막내 누나의 말에 대한 대답은 방문에서 들렸다. 어머니의 호통을 피해 도망쳤던 형이 다시 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모처럼 우리 오남매가 모두 모였다. 식사 때를 제외하고는 우리 남매끼리 이렇게 모두 모인 일은 무척 드물었다.
우리들이 사이가 안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나와 큰누나를 제외한 다른 세 사람이 워낙 바쁜 사람들이라 그런 것이다.
“오빠도. 그럼 오빠가 이니안 대신 그래 보는 건 어때?”
막내 누나의 멋진 반격. 그 한마디에 형은 양손을 세차게 흔들었다.
“차라리 일주인간 당직을 하련다.”
형의 말에 우리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큰누나를 제외하고 말이다.
“그런데 웬일이야? 아까 볼 일 있다며?”
나의 말에 형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그 모습에 우리 네 사람의 눈길이 형의 입으로 향했다.
“그게 말이지… 상당히 곤란한 소식이 들어와서 말이야.”
“뭔데?”
나의 물음에 잠시 천장을 쳐다보던 형의 입이 다시 열렸다.
“좋다면 좋은 소식이고 나쁘다면 바쁜 소식이야.”
좋은 소식이면 좋은 소식이고, 나쁜 소식이면 나쁜 소식이지 저 어정쩡한 표현은 대체 뭐란 말인가?
“오빠, 그게 무슨 말이야?”
큰누나의 물음에 형은 머리만 긁적였다.
“그게 말이지… 이니안 네 편입 시험 성적 말이야.”
“응. 뭔가 잘못 된 거야?”
누나들도 궁금함이 가득한 눈으로 형을 바라보았다.
“하아. 정말 네 녀석을 똑똑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겠다.”
“뭐야? 그게 무슨 말이야?”
“어떻게 답을 밀려 쓸 수가 있냐! 이 바보야! 중간 이후부터 밀려 써서 그나마 그 정도 점수라도 나온 거란다. 나참, 그리고 밀려 쓰지 않았으면 신학과 역사는 만점에 조금 못 미치는 점수래. 뭐, 수학은 밀려 쓰지는 않았다만 점수가 별로 안 좋고. 어쨌든 밀려 쓰지 않았다면 8학년에 충분히 편입할 점수였다고 하더라.”
형의 말이 끝나자 우리는 모두 정신이 나갔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저런 소식이라니…….
“그리고 어쨌든 결과는 결과니까 6학년에 편입해야 한다더라. 아무튼 그 소식을 전해 들으시곤 아버지도 화가 거의 풀리셨어.”
황당한 와중에 좋은 소식이다. 아버지의 화가 거의 풀렸다니 어쩌면 내 검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소식을 전해 들으시고는 ‘이니안답구나. 허허허’ 하고 웃으시더라.”
끙. 정말 할 말 없다.
“호호, 호호호호. 정말 이니안답다.”
형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작은 누나와 막내 누나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가르칠 때 이니안의 실력은 아주 뛰어났다고. 물론 수학은 좀 어려워했지만 역사는 무척이나 잘했어. 그런데 그런 점수가 나올 리가 없지.”
너무 웃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막내 누나가 말했다. 그러고는 다시금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다. 기껏 열심히 공부하고는 답안지에 답을 밀려 써서 6학년이라니.
“후우∼ 네 점수가 너무 이상해서 왕립학교 교장이신 퓨이어스 자작님께서 다시 채점하셨대. 혹시 채점이 잘못된 건 아닌가 하시고 말이야. 그런데 네 점수는 처음 채점한 대로라서 이번에는 문제지와 비교하시면서 답안지를 살피셔서 어느 문제부터 답안을 밀려 쓴 걸 발견하신 거야. 덕분에 아버지 화는 풀리셨지만 이것도 망신이라면 망신이다, 이 녀석아.”
형의 말에도 난 아무런 변명을 할 수 없었다. 정말 망신이라면 망신이니 말이다.
새빨갛게 변했을 것이 분명한 얼굴을 푹 숙이고 있는데 갑자기 한기가 몰아닥쳤다. 이 방향에는 분명… 살며시 고개를 들어보니 역시였다.
큰누나가 차가운 얼굴로 살기와 한기를 흘리고 있었다. 큰누나의 변화를 곧 형과 작은 누나, 막내 누나도 알아차렸다.
“어, 로레인, 갑자기 왜 그래?”
“언니…….”
“큰언니…….”
“호호. 호호호호!”
형과 누나들의 부름에 큰누나는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니안 네가 답을 밀려 써서 형편없는 점수를 받았고, 그거 때문에 아버지께 엄청나게 혼난 거란 말이야? 그리고 그것 때문에 내가 정신이 나가서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어머니께 혼나고 너한테 미안해서 고개도 못 들고 있었단 말이지?”
시… 심상치 않았다. 나뿐 아니라 형과 누나들도 느끼고 있었다.
“네 그 칠칠치 못한 행동 때문에 결국 나만 바보가 됐다 이거란 말이지?”
이건 정말 위험했다. 여기서 큰누나가 다시 이틀 전처럼 정신이 나가 버린다면 이번에는 신관을 불러야 할지도 몰랐다.
“형! 작은 누나! 막내 누나! 살려줘! 나 아직 환자야!”
“풋. 푸하하하하하!”
“호호호호호호!”
아이덴과 네이라가 배를 잡고 뒹굴면서 웃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답을 밀려 써서 6학년이라니. 정말 정신없이 웃었다.
“아빠 어릴 때 정말 재미있어. 어떻게 이러실 수 있지?”
네이라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얼마나 웃었으면 눈가에 눈물이 맺힐까?
“그러게 말이야.”
남매는 다시 일기에 집중했다.
이 일기를 끝까지 읽기 전에는 아마도 이 방에서 나가지 못할 듯했다. 그 만큼 아빠의 일기는 엄청난 중독성을 가지고 있었다.
658년 9월 25일
“자, 조용.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 공부하게 된 편입생을 소개하겠다.”
회색의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날카로운 눈빛의 선생님이 교탁을 두드리며 웅성거리는 아이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 교실에 들어오기 전에도 시끄러운 소리가 밖으로 들렸었다. 하지만 선생님의 뒤를 따라 내가 들어갔을 때는 나에 대한 호기심으로 서로 웅성거리는 듯했다.
“이름은 이니안 케이 사이몬. 올해 열다섯으로 오늘부터 함께 공부할 동급생이다. 사이몬, 인사하도록 해라.”
선생님의 말씀에 난 한 발자국 움직여 교단 앞에 섰다.
“이니안 케이 사이몬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이 나의 이름을 말씀하셨을 때부터 혼란스러워 하는 기색을 보이던 아이들이 내 인사를 듣고는 완전히 혼돈에 빠져 버렸다. 여기저기서 웅성웅성, 우왕좌왕하는 것이 정신없었다.
“사, 사이몬이라고?”
“설마? 그 사이몬?”
서로 간에 귓속말로 주고받는 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그때 아이들 중 한 명이 손을 번쩍 들었다.
“응? 마일론? 무슨 일이냐?”
손을 들 학생을 지적하며 선생님께서 말씀하시자 그 학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새로 온 편입생의 성이 사이몬이라 하셨는데 사이몬 공작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이들이 차마 직접 묻지는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마일론이라는 아이는 당당하게 나의 가문에 대해서 물었다. 깊이 잠겨 있는 듯한 눈빛이 마음에 드는 녀석이었다.
“그렇다. 사이몬 공작가의 막내다. 하지만 그게 이곳에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걸 모두들 잘 알고 있을 거다. 그러니 이런 소란은 그만두도록.”
선생님의 말씀대로다. 우리 카일로니아 왕국에서는 왕립학교와 왕립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기간 동안 재학생은 모두 동등하다.
일단 입학 및 편입을 하게 되면 모두 동등한 신분인 것이다. 그건 설사 이 나라의 세자가 입학한다 하더라도 적용되는 제1교칙이었다.
입학하기 전에 노예였든 평민이었든 귀족이었든 왕족이었든 입학 후에는 모두 같은 학생인 것이다. 그래서 다들 이름만을 불렀다.
나도 성을 포함한 풀 네임으로 소개되었지만 그건 첫 소개일 때만 그렇게 한다. 아마 앞으로 다들 내 이름을 부담 없이 부를 것이다.
이것을 주장한 이가 초대 퓨이어스 공작님이셨고, 대대로 퓨이어스 공작가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교칙이다 보니 지금껏 예외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 1교시 준비하도록 해라. 그리고 이니안, 너는 저기 마일론 옆에 앉으면 되겠구나. 마침 옆자리가 비어 있으니.”
잠시 학교의 제1교칙을 떠올린 사이 그 말씀을 남기시고 선생님은 교실 밖으로 나가셨다.
홀로 교단 앞에 서 있는 건 생뚱맞기 그지없었기에 엉거주춤 걸음을 옮겨 선생님이 가리켜 주신 자리에 앉았다. 자리로 가는 동안도 아이들의 귓속말은 그대로 내 귀에 들렸다.
“세상에… 사이몬 공작가라니… 그렇다면 이슈데인 선배의 동생이라는 거잖아.”
“우와! 그 천재 이슈데인 선배의…….”
“왜 이슈데인 선배만 생각해? 당장 메이린 선배가 최고 학년에 있잖아. 그리고 이미 졸업했지만 이리아 선배랑 로레인 선배도 있고.”
“맞아. 사이몬이라는 성을 쓰는 사람들은 다들 엄청난 천재니까.”
내 귀에 들려온 작은 귓속말들. 그 말들을 들어보니 모두들 내가 사이몬 공작가의 자제라서 놀란 것이 아니었다. 내가 형과 누나들의 동생이란 사실에 놀란 것이다.
하긴 형과 누나들 모두 왕립학교에 엄청난 전설과 신화를 만들고 졸업했으니. 그리고 막내 누나는 여전히 신화와 전설을 창조하는 중이었고.
“그런데 왜 우리랑 같은 학년이지? 열다섯 살이라며? 그러면 8학년에 가야 하는 거 아냐?”
“그러네. 설마……?”
“에이. 말도 안 돼. 사이몬이라는 성을 쓰는데.”
“그렇지? 우리가 모르는 무슨 사정이 있겠지?”
자리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 뒤에서 들려온 몇 마디에 나의 얼굴에는 굵은 힘줄이 솟아올랐다. 어째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했는데 결국 나이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열 받기도 하고 쪽팔리기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답을 밀려 쓴 내 잘못이니.
“반가워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이니안 형. 내 이름은 마일론이에요.”
울컥한 심정을 진정시키며 자리에 앉자 옆에 있던 아까 그 마일론이라는 아이가 손을 내밀며 인사를 했다.
“아, 반가워, 마일론. 그리고 그 형이라는 말은 빼줬으면 하는데. 그리고 말도 편하게 하고. 어차피 동급생이잖아.”
“에이. 그래도 형인데 어떻게 그렇게 해요? 다들 사정이라는 게 있는데. 그러니 앞으로도 형이라고 부를게요. 제가 그게 편해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해.”
마일론의 말에 나는 슬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형이라는 말을 듣기 싫었다. 이유는 쪽팔리기 때문이다. 나이도 두 살이나 많으면서 이 학급에 있어야 한다니, 그건 다른 사람들에게 나 바보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들어보니 ‘형’이라는 말, 상당히 기분이 좋은 말이다. 그냥 흐뭇한 웃음이 얼굴 가득 퍼지다니 말이다. 이건 아마도 막내라 밑에 동생이 없이 자라서 그런 것이겠지.
좋아. 두 살이나 어린 아이들과 함께 공부한다는 게 자랑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으니 기꺼이 형이라는 말을 들어주도록 하지. 그렇게 나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참, 형, 오늘 처음이라 교과서 없죠? 제 거 같이 봐요. 1교시는 수학이에요.”
마일론은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책을 꺼내 우리 둘 사이에 놓았다. 참 볼수록 마음에 드는 녀석이다.
그런데 방금 1교시가 뭐라고 했더라…
“1교시가 뭐라고?”
혹시나 하는 심정에 물어보았다, 활짝 펼쳐진 교과서가 무슨 과목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제발 마일론이 잘못 꺼낸 것이기를 빌면서.
“수학이요.”
이럴 수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수학이라니. 분명 6학년부터는 검술 수업이 있는 걸로 아는데 검술 수업이나 할 것이지. 왜! 왜! 학교생활의 시작이 수학이냐 말이다! 그것도 큰누나에게 맞은 후유증으로 무려 1주일이나 늦게 들어온 이 상태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