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디언 소드-113화 (113/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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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쳇. 알았다고, 알았어. 그래 누나가 길어.”

땅.

나의 말에 바로 응징이 뒤따랐다. 누나의 주먹이 나의 이마에 들렀다 간 것이다.

“말버릇하고는.”

“쳇.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잘 움직여? 아무리 평상복이라지만 누나가 입고 있는 건 엄연히 드레스이고, 또 구두를 신어서 불편할 텐데?”

이마를 문지르며 내가 패배하게 된 방심의 원인에 관해 물었다.

“응? 이거? 뭐, 드레스야 네 말대로 평상복이니까 크게 불편할 건 없어. 치마가 좀 거추장스럽긴 하지만 말야. 그리고 구두는 확실히 불편하긴 한데 이러면 되지.”

누나는 치마의 끝을 살짝 들어올려 보여주었다. 치마 아래 드러난 누나의 발은 맨발이었다.

“잉?”

“저기.”

언제 벗어둔 걸까? 그곳에는 누나의 구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쳇. 이러니 여태 시집을 못 갔지.”

기분이 상한 나의 작은 중얼거림. 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이 그만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당연히 누나의 귀를 피할 리 없었다.

“오호라. 뭐라고?”

분노에 찬 누나의 음성.

“네가 이곳에 왜 왔는지 벌써 잊은 거냐? 그런데 그런 말까지 하다니, 너 아주 매를 버는구나? 응?”

누나의 말에 그제야 난 이 연무장에 혼나러 왔다는 것을 떠올렸다.

“뭐, 좋아. 대련도 끝났겠다. 이제 남은 일은 하나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내 얼굴은 파랗게 질렸을 게 틀림없었다. 내가 이런 기분이 들 때면 곁에서 보던 작은 누나나 막내 누나가 ‘이니안. 왜 그래?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는’이라며 걱정스런 말을 건넸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틀림없이 파랗게 질렸을 것이다. 아니, 파란색이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파란색마저 빠져나가 하얗게 질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누나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무슨 말이긴. 지금부터 네가 비 오는 날 먼지 날 정도로만 맞으면 된다는 거지. 걱정 마. 딱 비 오는 날 먼지 날 만큼만 패줄 테니까. 세상에 6학년이라니. 그것도 겨우 2점 차이? 네 녀석이 오기 전에 아버지께 얼마나 혼났는 줄 알아? 이리아나 메이린은 마음씨가 고와서 오히려 널 걱정했지만 난 달라. 나에게 이런 망신을 주고도 무사할 줄 알았냐? 응? 그리고 뭐가 어쩌고 어째? 시집이 어떻다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누나의 입에서 쉼 없이 살기 가득한 말이 흘러 나왔다. 난 겁에 질린 채 계속해서 뒷걸음질쳤다. 그러다 한 순간 누나의 입에 한줄기 미소가 걸렸다. 회심의 미소. 바로 그것이었다. 불길한 생각에 살짝 뒤를 보았다.

젠장. 연무장 벽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호호. 더 도망가 보지 그러니?”

누나는 왼손으로 가검의 검신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서, 설마 그걸로?”

다시 한 번 스친 불길한 생각에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여기 뭐 다른 게 있니?”

“저기. 목검도…….”

“목검 가지러 가는 사이 네 녀석이 도망쳐 버리면 또 잡으러 가는 수고를 해야 하잖니?”

결론은 지금 들고 있는 가검으로 날 패겠다는 거다. 아까도 말했지만 보통 사람에게나 날이 없는 가검이지, 우리 가문의 사람에게는 진검이나 다름없는 검이다. 한데 그걸로 날 패겠다니…….

“호호호. 이니안, 그럼 잘 가라. 딱 비 오는 날 먼지 날 만큼만 하고 그만둘 테니.”

그리고 악몽과도 같은 타작이 시작되었다.

나는 고스란히 맞았다.

우어엉∼!

남매의 얼굴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으음, 할아버지 화나시면 정말 무섭구나.”

“그것보다… 아빠, 큰 고모한테 정말로 비 오는 날 먼지 날 만큼 맞으신 거야? 역시 큰 고모 무섭다. 나 절대로 큰 고모 말 잘 들을 거야.”

네이라가 정말로 굳게 결심한 듯 작은 주먹을 꼬옥 쥐면서 말했다.

658년 9월 22일

“쿡쿠쿠쿡쿠.”

귀에 거슬리는 웃음소리가 아련히 머릿속에 울렸다. 으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 큰누나와 대련을 하다가 잠시 방심한 사이 져버렸고 이어서 처절한 구타가 시작되었던 것 같은데…….

웃음소리가 들리고 이렇게 보드라운 감촉이라니. 아, 그러고 보니 몸 여기저기가 욱신거리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호오. 이제 정신을 차린 모양이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관통하는 찌르르한 통증을 뚫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당연히 형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눈도 뜨지 않은 상태라는 걸 깨달은 나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흐릿한 시야에 점점 초점이 잡히면서 주변을 정확히 인식할 수 있었다. 내가 있는 곳은 내 방이었다, 이 폭신한 감촉은 내가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이고.

“이니안, 드디어 눈을 떴구나!”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나에게 안겨온 사람은 어머니였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 이틀 동안 정신을 못 차려서…….”

두 눈 가득 눈물이 그렁그렁한 어머니의 말씀에 나는 둔중한 충격을 느꼈다.

이틀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다니. 그렇다면 내가 누나에게 두드려 맞다가 기절을 했다는 것 아닌가? 그것도 이틀이나 정신을 잃고 있을 정도로 심각하게? 이건 소드 마스터로서 씻을 수 없는 자존심의 상처였다.

“쯧쯧. 그래 어때? 사이몬 가의 여덟 번째 소드 마스터에게 죽도록 얻어맞은 소감이?”

히죽거리는 형의 목소리에 나의 눈썹은 하늘로 솟아올랐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니, 이슈데인! 형으로서 이틀 만에 정신을 차린 동생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내가 무슨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먼저 어머니의 호통이 터졌다. 어머니의 말씀에 형은 찔끔한 얼굴을 하더니 몸을 돌려 총총히 내 방에서 걸어 나갔다.

“아, 갑자기 잊고 있던 일이 생겨서. 그럼 몸 조리 잘해라, 이니안.”

역시 어머니. 어머니의 호통 한 번에 형은 꼬리를 말고 도망갔다. 나의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갔다. 통쾌하군.

“그래, 이니안, 이제 몸은 괜찮은 거니?”

형을 단번에 내쫓으신 어머니는 나에게서 약간 떨어지시며 내 몸 이곳저곳을 살피셨다.

“예. 끄떡없어요.”

어머니의 걱정에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양팔을 크게 휘둘렀다. 어머니를 안심시키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으윽.”

그런데 갑작스런 무리한 움직임 때문인가? 내 몸을 울리는 지독한 통증에 난 그만 신음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저런. 이니안, 역시 아직은 많이 안 좋구나. 로레인, 아무리 화가 났다지만 어떻게 이 지경으로 만들 수가 있니?”

어머니는 한쪽을 돌아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호통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가는 말씀을 하셨다. 그제야 나는 큰누나도 내 방에 와 있는 걸 알아차렸다.

“저기, 그러니까… 그게 그만… 그때는 저도 제 정신이 아니라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니안이 쓰러져 있었어요…….”

큰누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개미 목소리보다도 작은 목소리로 간신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 누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표정은 무척이나 묘했다.

화가 난 듯하시기도 했지만 애잔하게 바라보시는 듯도 하고,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하긴 내 성적이 알려진 날 큰누나가 아버지께 크게 혼나는 걸 보셨으니 누나의 심정도 어느 정도 이해는 하고 계실 것이다.

그러니 내가 불려 나갈 때 아무 말씀 안 하셨지. 한데 그 결과가 귀한 막내아들이 이틀간 정신을 잃고 있는 것이었으니 어머니의 심사도 무척이나 복잡할 것이다.

그나저나 몸의 통증이 장난이 아니다. 공작가의 아들이나 되면서 아파서 이렇게 통증을 참아야 한다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보통의 귀족가라면 다친 즉시 마법사나 신관을 불러서 치료를 할 텐데 말이다.

한데 우리 집은 그렇지 않다. 자고로 검의 길을 걷는 기사라면 어느 정도의 상처는 스스로 치료하고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 우리 집안의 수칙이다. 덕분에 나는 간단한 응급조치 후 침대에 눕혀져 있었을 것이다.

죽거나 불구가 될 상처가 아니고서는 치료 마법은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인 것이다.

“이니안, 치료사의 말로는 앞으로 4, 5일은 지나야 제대로 나을 거라는구나. 그러니 학교는 다음 주부터 나가도록 해라. 당분간은 몸조리 잘하고. 알겠지?”

“예.”

어머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무척이나 걱정스레 바라보셨다. 그리고 잠시 동안 물끄러미 날 바라보시더니 몸을 일으키셨다.

“그럼 난 이만 나가보마. 이제 정신도 차렸으니 몸 조리 신경 쓰도록 하고. 로레인, 당분간은 네가 이니안을 돌보도록 해라. 네가 동생을 이리 만들었으니 말이다.”

“예.”

큰누나는 어머니의 말씀에 작게 대답했다. 큰누나의 대답을 들은 어머니께서는 다시 한 번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고는 방을 나가셨다.

이제 방에는 나와 큰누나 단둘만 남았다. 우리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나로서는 앞으로 큰누나가 어찌 행동할 줄을 모르니 조심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지금 큰누나는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니안.”

“응?”

큰누나가 작은 목소리로 날 부르자 난 화들짝 놀라서 대답했다. 나의 반응에 큰누나의 얼굴에는 씁쓸한 웃음이 감돌았다.

내가 큰누나를 무서워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려워하지는 않았다. 내가 무서워 한 것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큰누나의 성격이었고, 큰누나와 투닥거리는 것 모두 결국은 우애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걸 우리는 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큰누나의 부름에 놀라서 대답하는 모습은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굳이 말하자면 경기가 들린 것 같다고 할까? 나도 모르는 사이 그날 일에 상당한 두려움을 가졌던 것 같았다.

하긴 내가 그렇게 맞아본 것은 일곱 살 때 아버지께 맞을 때를 제외하면 없었다. 나도 모르게 겁에 질릴 만도 하지.

“저기, 많이 아프니?”

누나가 내 곁에 다가와 살짝 등에 손을 얹었다. 한데 누나의 손이 내 몸에 닿자 나는 몸을 미세하게 떨었다. 이럴 수가, 전혀 내가 의도한 행동이 아니었다. 몸이 절로 반응한 것이다.

누나라면 이 정도 떨림은 당연히 감지할 터.

“이니안…….”

나의 떨림을 느낀 큰누나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저기, 누나. 이건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라…….”

황급히 내가 무슨 변명을 하려 했지만 어떤 변명을 한단 말인가? 나도 모르게 몸이 알아서 반응했다고? 그럴 수는 없었다. 해서 입만 뻐끔뻐끔거리며 횡설수설하자 큰누나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어. 이번 일은 분명히 내가 잘못했는걸.”

처연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큰누나의 모습이 그렇게 안쓰러울 수 없었다. 죽도록 맞은 건 난데 왜 큰누나가 더 안타깝게 보일까?

“며칠 쉬면 낫는 다니까 너무 신경 쓰지마, 누나.”

“이니안.”

누나의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한마디를 했더니 누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잠깐! 뭐? 눈물? 로레인 누나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고? 이럴 수가! 큰누나에게도 눈물이 있었구나.

단언하건대 내가 기억하기로 큰누나의 눈물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비록 흘러내리지 않고 눈에 맺힌 정도라지만 이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누나도 눈물이 있었구나…….”

너무도 놀라서 무심코 뱉은 말. 나는 말을 하고 나서야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차렸다. 내 얼굴은 급속히 파랗게 질려갔다. 누나의 눈꼬리도 급속히 상승하다가 일순 급격히 하강했다.

“칫! 나는 뭐 사람 아니니? 눈물이 없게?”

현재 내가 누나에게 처참하게 깨져서 환자가 된 상황을 참작한 것일까? 누나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훔치며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내가 한 말에 누나가 화를 낼 뻔했으나 다행히 그냥 넘어갔다. 게다가 분위기도 화기애애해졌으니 참으로 다행이었다.

엄청나게 위험한 발언이었지만 별 일 없이 어색한 분위기만 날려 버렸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않을까?

“이니안, 정신 차렸다면서?”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며 작은 누나와 막내 누나가 들어왔다.

“아, 이리아 누나, 메이린 누나!”

반가운 두 누나였다. 내가 밝은 얼굴로 반기자 누나들도 웃으며 다가왔다.

“역시 이니안이네. 이틀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는데 이렇게 멀쩡한 모습이니.”

막내 누나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지금도 온몸이 욱신거린다고. 괜찮다고는 했지만 솔직히 정말 심하게 맞은 것 같아. 내가 맞다가 정신을 잃다니 말이야.”

“호호호. 그건 그렇네.”

나의 말에 작은 누나가 웃으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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