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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얼마 후 파르미안은 눈을 떴다.
하지만 곧 다시 눈을 감았다. 방 안을 가득 채운 빛에 눈이 부셨던 것이다.
“훗! 날 밝았다. 어때?”
이니안의 말이 들릴 때쯤 파르미안은 조금씩 눈을 뜰 수 있었다. 잠시 마나를 움직인 것 같은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괴, 굉장해요, 형!”
파르미안은 감격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굉장하지? 다른 사람들은 결코 모르는 사이몬 가만의 비전이야. 그러니까 내가 너에게 이것을 가르쳐 준 것은 비밀이다.”
이니안의 말에 파르미안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가만의 비전을 평민인 자신이 익혔다. 만일 그 사실이 알려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훗. 그래, 앞으로 매일 해 뜰 때랑 해 질 때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곳에서 그렇게 마나를 움직여. 마나를 움직이는 동안 누군가가 건드리면 바로 불구가 되어버리니까. 꼭 지켜라.”
어떻게 들으면 섬뜩해지는 말이었다.
“네.”
“그리고 그렇게 마나를 계속 움직이다 보면 갑자기 길이 막힌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을 거야. 그건 노폐물과 탁기가 쌓여서 마나가 흐르는 길이 막힌 것뿐이니까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계속 마나를 부딪쳐 가면 뚫릴 거야. 단, 천천히 느긋한 마음으로 뚫어라. 급하게 뚫으려 하다가는 역시 불구가 되는 수가 있으니까.”
다시 한 번 섬뜩한 이야기가 이니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네.”
파르미안은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사실 이니안이 조금 과장되게 이야기한 것이다. 자세히 옆에서 하나하나 가르쳐 줄 수 없기 때문에 주의 사항을 철저히 지키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 그렇게 마나를 움직이면서 내가 가르쳐 준 검법을 사용하면 위력이 훨씬 강해질 거야. 원래 내가 가르쳐 준 검법에 맞게끔 만들어진 마나 운용법이니까. 대신 피어스 브레이크를 사용하지 못하지.”
“네?”
피어스 브레이크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말에 파르미안은 깜짝 놀랐다. 검을 익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맹격기, 피어스 브레이크를 펼칠 날을 꿈꾸며 검을 휘두른다. 그런데 그것을 사용하지 못한다니, 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은 말이다.
“그렇게 놀라지 마. 사실은 피어스 브레이크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기술이니까. 내가 가르쳐 준 방법대로 검을 사용하면 네가 움직이는 검 하나하나가 모두 다 피어스 브레이크가 되는 것이니까.”
이니안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파르미안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아니었다. 일 검, 일 검이 피어스 브레이크라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사이몬 가의 사람들은 여러 개의 피어스 브레이크를 사용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것이 바로 그 비결인 것 같았다.
파이브 로드(Five Road).
이니안이 파르미안에게 가르쳐 준 검법이다. 지극히 간단해 보이는 다섯 가지 동작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익히면 익힐수록 난해했다. 이니안의 말대로라면 그 다섯 가지 동작 모두가 피어스 브레이크인 것이다.
“이니안 형.”
파르미안의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이니안을 불렀다.
“됐어.”
이니안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정말로 감사해요.”
파르미안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훗. 사내 녀석이 눈물을 그리 쉽게 보이는 게 아니야.”
알고 있다.
이니안이 늘 하던 말이다.
하지만 파르미안은 그날 이니안의 눈물을 보았다. 그리고 남자가 흘리는 눈물의 가치 또한 알았다. 그랬기에 지금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분명 눈물을 흘릴 가치가 있는 일이었기에.
“소드 마스터가 되기 전에는 절대 우리 집 사람한테 들키지 마. 소드 마스터가 된 다음 알려진다면 우리 집에서 널 거둘 테지만 그렇지 않으면 너의 마나를 모두 없애 버릴 거야.”
마지막 주의 사항.
“넷!”
파르미안은 힘차게 대답했다.
이때는 그저 조심하라는 뜻으로만 받아들였다, 자신이 배운 그것이 소드 마스터로 가는 극히 빠른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사실 소드 마스터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경지가 아니었기에.
“그래, 그럼 다음에 보자. 그때는 꼭 소드 마스터가 되어 있도록 해. 훗.”
그렇게 웃음을 남겨놓은 채 이니안은 올 때처럼 창을 통해 사라졌다. 이미 아침이 밝아 창밖의 거리에는 사람들이 가득한데도 이니안은 개의치 않는 듯 훌쩍 몸을 날려 금세 사라졌다.
그때는 몰랐다.
그저 이니안의 인사가 조금 이상하다 싶었다. 다음에 볼 때는 소드 마스터가 되어 있으라니. 소드 마스터가 하루아침에 되는 것도 아닐 텐데 어째서 그런 인사를 한 것일까?
하지만 곧 알 수 있었다, 이니안이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인사의 의미를.
그날.
이니안은 사우론에서 사라졌다.
***
‘이니안 형. 형의 말대로 저는 소드 마스터가 되었습니다. 형이 말한 것을 지켰어요.’
파르미안의 주먹에 힘이 더 들어갔다.
사실 자신이 기사 작위를 받은 후 마일론이 그곳으로 갈 거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사의 작위를 받는 시험을 미뤘다, 그곳에 간 후 이니안을 찾으러 나설지도 몰랐기에. 소드 마스터가 되는 일이 먼저였던 것이다.
이니안과의 대련.
파르미안 자신이 나서고 싶었다.
그날 이니안이 준 힘으로 이만큼 강해졌다는 것을 이니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나설 차례는 없다. 그랬기에 그저 주먹을 꽉 쥐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파르미안이 여전히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이니안이 그날 자신이 가진 마나의 절반을 소모해 자신의 몸에 엄청난 양의 마나를 남겨준 것이다.
이니안이 가진 마나의 3할 정도의 양이 그날 파르미안의 몸에 남겨졌다. 5할을 불어넣었지만 그 과정에서 2할이 사라지고 3할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래서 파르미안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었다.
이니안으로서는 이미 그때 마나를 모두 흩어버리기로 결심을 한 후였기에 그중 일부를 기꺼이 파르미안에게 선사한 것이다,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제자인 파르미안에게.
파르미안이 4년 전의 그때를 회상하는 사이 시간이 제법 흘렀다. 응접실로 향해 오는 마나마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으니 말이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문을 열면서 마나마가 들어왔다.
“아니오, 별말씀을요. 오히려 저희가 폐를 끼치고 있는걸요.”
메이린의 말에 마나마는 쓰게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분명 큰 폐였다.
“도전의 의사를 전하니 용자께서는 흔쾌히 승낙하셨습니다. 시간은 내일 정오. 장소는 본궁 기사단의 실내 연무장입니다.”
마나마의 말에 일행의 얼굴은 밝아졌다. 이제 하루 후면 이니안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실내 연무장이면 연무장이 심하게 훼손될 텐데요.”
이리아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이곳에 오기 전 카르세온과 로레인의 대련을 보았기 때문이다. 소드 마스터끼리의 격돌이 주위에 어떤 위력을 발하는지 충분히 실감을 한 터였다.
“그건 걱정 없습니다. 100년 전 갈라히벤이 낳은 대마법사님이 실내 연무장에 방어 마법을 걸어두셨습니다. 어지간한 충격으로는 손상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 밑에는 기사단 건물이 지어질 때부터 보아닌의 신성 마법으로 결계가 쳐져 있고요. 이중 방어막이 있어서 지금까지도 처음 지어졌을 때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마나마는 그것은 걱정 없다는 얼굴이었다. 단지 다른 것이 걱정일 뿐.
그는 아직도 용자님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그는 용자님을 보지도 못했다. 용자님의 친구라는 용병에게 말을 전했을 뿐이다. 그러자 그는 알았다고 하고서는 씨익 웃으며 방에 들어가더니 나와서 흔쾌히 허락했다는 말을 전했을 뿐이다.
이니안에게 이 소식을 알리기 전 국왕에게도 알렸다. 마침 그 자리에 교단의 교황도 있었다.
국왕은 마나마의 보고에 당황해했지만 교황이 인자하게 웃으며 별 일 없을 거라고 했다. 그의 말에 국왕도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이니안의 결정에 맡긴 것이다.
“누추하긴 하지만 이곳에 방을 마련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사단 건물에 있는 방이라면 뻔했다. 어차피 기사들이 쓰기 위해 만든 건물일 테니까.
일반 병사들이 머무르는 건물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어쨌든 귀족 영애가 머무르기에는 무리가 있는 방이다.
“뭐,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죠.”
물론 보통의 귀족 영애에 한해서다.
메이린은 웃으며 자신들이 머물 방을 부탁했다. 그녀들은 비록 공작가의 영애들이지만 일반 귀족들과는 달랐으니까.
***
“흐음… 도전이란 말이죠? 재미있겠는데요?”
침울해 있던 포르시아가 케라우가 가지고 온 이야기에 살짝 웃었다. 그녀는 기사들의 대련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자신의 명예를 걸고 자신의 검에 혼신을 다해 상대의 검에 부딪치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멋지게 보였기 때문이다.
“쩝. 이런 때에 도전이라니… 귀찮은데.”
이니안이 별로 내키지 않는 듯 말했다.
“하지만 보아닌의 용자는 반드시 도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데? 도전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던걸. 소드 마스터는 되어야 도전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
케라우의 말에 다프네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렇다면 이니안이 소드 마스터와 싸운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니안의 본 실력을 볼 수 있을 터. 뿐만 아니라 소드 마스터가 검을 쓰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은 기사로서 놓칠 수 없는 커다란 공부였다.
“상대가 소드 마스터라고요?”
소드 마스터라는 말에 포르시아가 깜짝 놀랐다.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포르시아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이니안을 바라본다. 그녀는 아직 이니안의 정확한 실력을 몰랐다. 그저 네오마인을 그렇게 만들 정도로 강하다는 것만 알뿐.
네오마인을 그 정도로 만들려면 소드 마스터 정도의 실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하하하. 괜찮습니다, 공녀님. 이 녀석은 소드 마스터가 아니라 그 할아버지 앞에 데려다놔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녀석이니까요.”
케라우가 이니안의 등을 탁탁 두드리며 크게 웃었다.
이니안은 그런 케라우의 모습에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푸훗.”
그 모습에 포르시아가 작게 웃었다.
“게다가 이 도전은 피할 수가 없다고 하니까요.”
“아, 그렇다고 했었지요. 조심하세요, 세이버 경. 보아닌의 용자가 아무리 무패의 용맹한 전사라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과거에 그랬다는 거예요. 저나 경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예요. 어쩌다가 경이나 저나 이렇게 되었지만 말이죠.”
그러고는 포르시아는 곁에 있는 케이로스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포르시아는 케이로스를 쓰다듬던 손을 멈췄다. 그리고 가만히 케이로스의 커다란 얼굴을 마주 보았다. 거대한 케이로스의 머리 앞에 있으니 그렇지 않아도 작은 포르시아의 얼굴이 더욱 작아 보였다.
포르시아는 물끄러미 케이로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케이로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팅.
순간 포르시아가 손가락으로 케이로스의 코를 튀겼다.
끼잉.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케이로스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물론 어디까지나 예의상 일부러 흘린 신음이다. 그 정도에 눈 하나 깜짝할 케이로스가 아니었으니.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이그.”
그러고는 다시 케이로스의 목을 껴안으며 그 털에 얼굴을 묻는 포르시아.
다른 사람들은 그런 포르시아의 행동을 웃으며 지켜볼 뿐이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포르시아의 행동을 지켜보던 케라우가 이니안을 바라본다.
“반드시 받아들여야 한다며? 그러면 받아들여야지.”
“언제로 할까?”
“빠를수록 좋겠지? 어차피 해야 한다면. 그러면 내일 정오. 오늘은 조금 그러니까. 그리고 장소는 이곳에 부탁하도록 하지.”
“알았어. 그러면 그렇게 전할게.”
이니안의 대답을 들은 케라우가 문을 열고 나갔다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