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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뭐, 신기하게도 되는 모양이더라고요. 좀 전에 살짝 테라스 밖을 내다봤는데 지붕 위에도 사람들로 가득하던데요. 위층의 귀족들도 모두 테라스로 나와서 합장하고 있고요.”
“그래? 그러면 가자. 우리 쪽 테라스에서는 대로가 안 보이니까 마일론 네 방으로 가야겠네.”
두 사람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는지 로레인이 그렇게 말하며 나타났다. 그녀의 뒤에는 이리아가 웃음 지으며 서 있었다.
“그럼 어디 우리가 숙소를 못 찾고 나이안 시내 곳곳을 누비도록 만든 성녀님을 보러 가볼까?”
메이린이 싱긋 웃으며 방 밖으로 나섰다. 로레인이 잽싸게 방 열쇠를 챙기고 다 같이 마일론의 방으로 들어갔다. 마일론의 방 역시 특실로 메이린들이 머무는 방 못지않게 호화로웠다.
“역시 제법 벌었네.”
메이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방의 구조가 같았기에 로레인과 이리아는 굳이 마일론이 안내해 주지 않더라도 테라스로 나갈 수 있었다.
“우와! 사람들 엄청나네!”
수도의 모든 사람들이 대로 쪽으로 몰려나왔는지 그야말로 대로 주변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세 자매의 방은 대로의 정반대 쪽에 있었기에 소란스러운 소리는 들려도 테라스 앞 길거리는 평소보다 한산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이유가 이것이었다.
“마침 저기 행렬이 오는군요. 신기할 정도로 때가 딱 맞네요.”
마일론은 멀리 보이는 코끼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와! 저게 코끼리야? 처음 보는데. 정말 동물이 저렇게 클 수 있는 걸까?”
로레인 역시 코끼리를 발견하고는 감탄으로 토했다.
“그 위에 탄 사람이 성녀인가 보네요. 확실히 성녀라 불릴 정도로 아름답고 고귀한 모습입니다.”
기사답게 상당히 뛰어난 시력을 가진 파르미안이 보통 사람으로서는 얼굴의 윤곽을 구분하기 힘든 거리에서 포르시아의 얼굴을 정확히 보았다.
“흰색인 걸 보니 왕의 코끼리네, 갈라히벤에서 흰색 코끼리는 오직 왕만이 탈 수 있으니까. 성녀는 왕보다도 고귀한 존재라는 거겠지. 그만큼 아름다운걸.”
메이린은 코끼리를 보면서 아무도 묻지 않은 것까지 설명을 해줬다. 그녀 역시 성녀의 미모에 제법 놀란 듯했다.
“그렇다면 코끼리 앞에 있는 늑대가 보아닌의 신수라는 은색 늑대인 모양이네. 그 늑대 위에 탄 사람이 보아닌의 용자일 테고. 어디 보자…….”
로레인은 행렬 구경이 상당히 재미난 듯 코끼리 앞에 있어 왜소해 보이지만 사실은 굉장히 커다란 늑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로레인이 시선을 옮김에 따라 나머지 사람들도 늑대의 등위로 시선을 옮겼다.
“……!?”
“……?!”
“아앗!!”
“헉!”
“으음…….”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제각각 비명에 가까운 놀람의 소리를 터뜨리거나 혹은 너무 놀라 그저 입만 벌리고 있기도 했다.
보아닌의 용자라는, 은색 늑대의 등 위에 탄 기사의 모습.
입고 있는 것은 분명 갈라히벤의 전통 복장이었지만 얼굴이 너무나 낯이 익었다.
아니, 자신들이 너무나 잘 아는 인물이었다.
자신들이 그동안 걱정하며 찾아 헤매던 인물이 늑대의 등 위에 있었다.
“이… 이니안 맞지? 저거?”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로레인이었다.
“분명 맞는 것 같은데요.”
마일론이 그 말에 대답했다.
“그런데 저 녀석이 왜 저기 있지?”
“몰라.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이리아의 물음에 가까운 혼잣말에 메이린을 알 수 없다는 듯 도리질을 쳤다.
“뭐, 어쨌든 찾긴 찾았네. 저 황당한 녀석.”
안도하는 것인지 분노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묘한 목소리. 로레인의 꽉 쥔 주먹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참 황당한 녀석이야. 갑자기 뚝 떨어지듯 성녀를 보필하는 용자라니. 그것도 보아닌의 위세가 절대적인 이곳 갈라히벤에서.”
이리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넌, 어떻게 할 거야?”
“네?”
메이린의 물음에 마일론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만나볼 거야? 계획에는 없던 일이잖아.”
“계획에는 없던 일이지만 이렇게 이니안 형을 보게 되었으니 당연히 만나야지요.”
마일론은 단번에 대답했다.
그도 파르미안도 얼마나 이니안의 행방이 궁금했던가? 하지만 알아볼 방도가 없었기에 그저 참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보게 되었으니 만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 그런데 만나기가 쉽지만은 않을 것 같은데…….”
행렬에 둘러싸인 코끼리와 늑대를 보며 메이린은 한쪽 머리를 짚었다.
마일론도 행렬을 내려다보면서 어떻게 이니안을 만날 것인지 고민했다. 행렬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이니안이 입고 있는 갈라히벤의 전통 용자의 복장에 머물렀다. 그때 메이린도 그것을 보고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쉽게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렇지?”
그렇게 말하는 두 사람의 눈은 어느새 로레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가에 알 수 없는 기묘한 미소를 띠고서.
두 사람의 그런 시선을 동시에 받은 로레인은 흠칫했지만 영문을 알 수 없어 가만히 있었다. 단지 이리아만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세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뭘 어떻게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로레인 언니를 이용하려는 거겠지? 후훗. 재미있겠네.’
로레인은 자신의 등 뒤에서 이리아가 보내는 묘한 시선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뭘 어떻게 해서 만나겠다는 거야?’
***
대로를 둘러싼 사람들의 행렬을 통과해 나이안의 성벽을 벗어나자 넓은 평원이 펼쳐졌다. 그리고 성 밖에는 사람들 또한 없었다. 포르시아가 조용한 나들이를 원한다는 말에 왕궁에서 신경을 써서 사람들을 통제한 것이다.
늘 그렇게 성 밖에서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 외에는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성 밖은 평소의 모습 그대로였다.
눈앞에 펼쳐진 넓은 평원을 바라보며 이니안은 혼자만 무언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해. 뭔가 익숙한 시선을 느꼈던 것 같은데…….’
대로를 지나오면서 잠시지만 느꼈던 시선. 그것은 익숙하기 그지없는 느낌이었다, 익숙하면서도 따뜻한, 그러나 그 속에 몸을 흠칫 떨게 하는 오싹함까지. 도무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느낌이었다.
“갈라히벤은 평원이 정말 넓군요. 국경을 넘어 들어오면서도 느꼈지만 이렇게 넓은 평원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아요.”
네오의 등 위에서 사방을 둘러보며 포르시아는 한껏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마차 안에서 보던 것과 네오의 등 위에서 보는 것은 또 달랐다.
사방이 막힌 마차 안에서 그저 창으로만 보이던 평원. 광활한 평원이었지만 좁은 상자 안에 갇힌 느낌이 들어서였을까? 가슴 한 쪽이 답답했었다.
하지만 사방이 탁 트인 네오의 안장 위에 앉아서, 게다가 네오의 커다란 덩치 덕에 높은 곳에 올라서 주위를 둘러보니 가슴이 뻥 뚫린 것과 같은 시원함과 통쾌함이 몰려왔다.
“하하하. 기분이 무척 좋으신 모양이군요?”
네오의 목덜미에 앉아 네오를 몰고 있던 무마타는 뒤에서 느껴지는 밝은 기운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네. 이런 기분은 정말 오랜만이에요.”
포르시아는 화사하게 웃었다.
“저희 갈라히벤은 국토의 대부분이 평원입니다. 대륙의 커다란 산맥들이 비켜가는 땅 위에 이루어진 나라라서요. 산을 보는 것이 무척 힘들지요. 산이라는 것도 평원 중간 중간에 드문드문 있는 야트막한 것들뿐이니까요. 지금 저희가 가고 있는 곳도 그런 산 중 하나입니다. 산간 지역에 사는 이들의 눈에는 언덕 정도로밖에 안 보일 테지만 갈라히벤에서는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높이의 산이지요.”
무마타는 지금 향하고 있는 곳에 대한 설명을 했다. 포르시아는 나이안 주변으로 나들이를 간다고만 들었지 정확히 어떤 곳인지 몰랐다.
“게다가 그곳은 갈라히벤 유일의 바위산입니다. 어떻게 평원 한가운데에 그렇게 커다란 바위산이 존재할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만. 덕분에 우리 갈라히벤에서는 아주 신성시 여기는 산입니다. 신의 뜻이 그곳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역시 보아닌의 나라라는 갈라히벤 다웠다.
“이제 한 시간 정도만 가면 도착할 것입니다. 그동안 주변 풍경을 즐기시지요.”
“네.”
네오가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묘하게 흔들거리는 느낌이 편안한 마차와는 또 다른 묘한 재미를 주었다. 그 위에서 보는 평원의 풍경은 갈라히벤으로 오는 여행 내내 지루하게 보았던 평원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한 시간.
짧지 않은 시간임에도 금세 지나갔다.
멀리에서 아스라이 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무마타의 말대로 바위산이었다.
다만 다른 바위산과는 좀 달랐다. 회색 바위 중간에 무언가 빛나는 선이 있었다.
“놀랍군.”
그 빛이 무엇인지 알아본 이니안이 낮게 찬탄을 터뜨렸다.
“대단하죠?”
길잡이로 선두에서 말을 몰고 있던 기사는 이니안의 말소리를 들었는지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자신의 모국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다.
“바위 사이로 노란빛이 반짝이는 것 같은데요. 저게 뭐죠?”
포르시아는 회색 바위에 굽이굽이 이러지면서 빛나는 것에 강한 호기심을 느끼며 물었다.
“하하. 조금만 더 가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무마타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로서는 포르시아가 놀라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일부러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이다.
점점 더 산이 가까워지자 포르시아의 입이 조금씩 벌어졌다.
“아, 아아!”
무언가 알 수 없는 말.
입이 벌어지면서 조금씩 새어 나오던 음성도 어느 순간 사라졌다.
그저 멍하니 눈앞에 굉장한 위용을 보이는 절벽과도 같은 산을 바라볼 뿐.
바위산의 한쪽 면. 정확히는 나이안을 향한 경사면이 거의 절벽에 가까울 정도의 기울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노란 빛의 길이 멋진 곡선을 그리면서 지나간다.
그 곡선이 함께 모여 이루고 있는 형상.
인자한 얼굴로 웃으며 정좌를 한 채 앉아 있는 보아닌의 모습이었다.
바위산의 회색빛 벽에 황금빛의 미소 짓는 보아닌이 나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보아닌의 황금 부조를 향해 합장을 하며 성어를 왼 후 무마타는 뒤쪽으로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멍한 얼굴로 입을 벌린 채 보아닌의 부조를 바라보는 포르시아의 얼굴이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