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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28장. 다시 한 번 다짐하지만…
사람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닌다. 이것저것 짐을 챙기고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는 모습들이다. 그중 몇몇은 두 사람의 치장에 온 신경을 쓰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지나쳐 가야 하기에 그 고결하고도 성스러운 모습을 더 돋보이게 하려면 상당히 공을 들여야 한다. 물론 그러지 않아도 보는 이가 절로 고개를 숙일 위엄과 성스러움을 가졌지만 말이다.
이것이 지금 이니안과 포르시아의 나이안 근교로의 외출을 준비하는 왕궁의 모습이었다.
“여러분들 고생이 많네요.”
포르시아의 경어에 그녀의 화장을 손봐주던 시녀가 놀라 허리를 숙였다.
“오히려 영광된 일입니다, 성녀님.”
항상 이렇다. 그녀가 무어라 하든 시녀들의 반응은 두 가지 중 하나다.
허리를 숙이며 ‘영광된 일입니다’라고 하는 것 아니면 합장을 하면서 ‘마라’라고 성어를 읊조리는 것. 익숙해질 듯 익숙해질 듯 익숙해지지 않는 반응이다.
“세이버 경.”
“네, 공녀님.”
이미 준비를 마치고 포르시아를 기다리던 이니안은 짧게 대답했다.
“잘 어울리네요. 아주 늠름해 보여요.”
“감사합니다.”
이니안은 포르시아의 칭찬에 가늘게 웃으며 답했다.
지금 이니안은 갈라히벤의 전통적인 용자의 복장을 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그 모습을 보일 때 용자임을 강조하기 위한 왕궁의 연출이었다. 물론 포르시아도 현재 갈라히벤 전통의 성녀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니안의 경우 금세 그 옷이 만들어졌지만 포르시아의 경우 기록을 뒤져 만드느라 시간이 제법 걸렸다. 어제야 겨우 완성되었으니 말이다.
“우리가 오늘 가는 곳이 어디라고 했죠?”
포르시아의 얼굴은 살짝 들떠 있었다.
갈라히벤에 온 이후 처음으로 여행지에서의 관광다운 관광을 하는 날이다. 그간 성녀라는 이유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그녀가 한 일의 전부였다.
포르시아는 싫은 내색 없이 모든 일을 했기에 보다 못한 케라우가 넌지시 무마타에게 압력을 넣은 것이다.
“무마타 라온, 우리 공녀님이 이곳에 뭐 하러 오셨는지 알고 있습니까?”
“갈라히벤 여행이라고 들었습니다만.”
“그렇지요. 그런데 지금 공녀님께서 하고 계신 일들을 여행이라고 보기에는 좀 어려운데요? 공녀님께서 갈라히벤의 성녀라는 것은 왕궁을 들어선 이후에나 밝혀진 일. 그전에 공녀님의 여행을 위한 일정을 짜놓은 게 있지 않을까요? 우리 공녀님이 너무 착하시다고 계속 이렇게 이곳의 방문 목적과 상관없는 일로 무리하시게 하면 좋을 것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귀족이 아닌 일개 용병인 케라우와의 대화를 떠올린 무마타는 쓴웃음을 지었다. 갈라히벤의 대귀족인 그가 겨우 용병에게 그렇게 휘둘리다니… 물론 그것은 그가 성녀를 모시는 용병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무례한 것은 성녀에게 무례한 것이기에 케라우에게도 예를 다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의 말이 사실이기도 하였기에 무마타는 부랴부랴 나이안 근처의 명소로 포르시아를 안내하기로 하고 준비한 것이다. 물론 국왕의 허락을 받았음은 당연하다.
아니, 애초에 포르시아가 가겠다고 한다면 국왕은 말릴 수가 없었다. 단지 포르시아가 그렇게 가겠다고 먼저 말을 할 사람이 아닐 뿐.
그렇게 케라우의 보이지 않는―포르시아에게―노력으로 성사된 근처로의 외출에 포르시아가 들떠 있는 것이다.
[잘 어울리는군.]
갈라히벤의 전통 복색이 영 어색한지 몸을 움찔거리는 이니안의 모습을 바라보던 칼이 웃으면서 말했다.
“진담이야? 놀리는 거야?”
[양쪽 다라고 해두지.]
칼의 말에 이니안은 포르시아가 눈치 채지 못하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다 되었습니다, 성녀님.”
포르시아의 화장과 옷치장을 하던 시녀들이 허리를 숙이며 포르시아에게서 물러났다.
“자, 그럼 이제 제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이리로 가시지요.”
무마타가 앞장서고 그 뒤를 포르시아가 따랐다. 이니안과 다프네, 케라우가 포르시아의 뒤를 지키며 따랐다. 그 뒤를 캐서린이 종종 걸음으로 따르고 있었다. 케이로스는 포르시아의 곁에서 걷고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아!”
왕궁의 정원에 나온 포르시아는 입을 크게 벌린 채 할 말을 잊었다. 그저 고개를 들어 머리 위를 바라볼 뿐.
“이,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코끼리라는 동물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무마타는 포르시아가 놀라는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이번만은 이니안과 다프네도 얼굴에 은은한 놀람의 빛을 띠고 있었다. 둘 모두 얼굴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인데 코끼리는 두 사람의 얼굴에 경악이라는 감정을 그려주었다.
“대단하네요.”
다프네가 새하얀 색의 코끼리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래요. 책에서 그림으로 보고 설명을 읽기는 했지만 역시 실제로 보는 것은 다르군요.”
갈라히벤에만 존재하는 거대한 동물, 코끼리.
갈라히벤은 사방이 다른 나라와 트여 있다. 국경을 막는 강이나 산맥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코끼리라는 동물은 갈라히벤에만 있었다.
그 때문에 학자들은 그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분분한 논쟁을 벌였지만 여전히 왜 그런지 원인은 밝혀지지 않은 채다.
이 코끼리라는 동물이 갈라히벤을 또한 대륙 속의 다른 대륙으로 만들어주었다.
휘익!
무마타가 휘파람을 불자 코끼리는 무릎을 굽히며 몸을 낮췄다. 하지만 그럼에도 굉장한 높이였다.
그때 병사들이 무언가를 열심히 끌고 왔다.
그것은 바퀴가 달린 계단이었다. 무릎을 굽힌 코끼리의 등 높이에 딱 맞게끔 제작된 이동식 계단이었다.
“이 녀석은 네오라고 합니다. 국왕 전하께서 타고 다니시는 코끼리로 아주 강하고 영리한 녀석입니다. 이렇게 온몸이 새하얀 코끼리는 갈라히벤에서는 오직 국왕 전하만이 타실 수 있습니다. 성녀님께서 외출을 하신다기에 이렇게 준비한 것입니다.”
“나중에 전하께 감사드려야겠네요.”
포르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오는 국왕의 코끼리답게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었다. 금색으로 번쩍이는 비단으로 등이 덮여 있으며 갖가지 빛을 뿌리는 보석들이 비단 위에 장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코끼리의 등에 올린 지붕이 있는 안장 역시 화려하게 금과 보석들로 세공되어 있었다.
계단이 코끼리의 옆에 장치되자 무마타가 무릎을 꿇으며 한쪽 손을 내밀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포르시아는 살포시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무마타의 인도로 포르시아가 안장에 편안한 자세로 앉자 무마타가 코끼리의 목에 걸터앉았다.
“라온께서 코끼리를 모는 건가요?”
“네. 성녀님의 행차이신데 아랫것들에게 몰게 할 수는 없지요. 그리고 갈라히벤의 귀족이라면 누구나 코끼리를 몰 줄 압니다. 그게 귀족의 소양 중 하나이니까요.”
포르시아의 물음에 무마타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이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제법 많이 흔들릴 테니 옆의 난간을 꽉 잡으십시오.”
포르시아는 무마타의 경고에 의자 형태의 안장에 달린 난간을 양손으로 꽉 잡았다.
휘익!
무마타의 휘파람 소리에 네오가 천천히 굽혔던 무릎을 폈다.
기우뚱.
무마타의 말대로 코끼리의 등은 제법 흔들렸다.
“아아!”
그러나 그런 흔들림은 포르시아에게는 큰일은 아니었다, 대신 한없이 높아지는 듯한 자신의 시선에 감탄을 토했을 뿐.
“굉장하네요!”
포르시아의 눈이 반짝였다.
“출발!”
코끼리가 몸을 세우자 어느새 케이로스의 등에 오른 이니안이 외쳤다.
이니안의 외침에 길잡이로 나선 갈라히벤의 기사 한 명이 앞에서 말을 몰았고 이니안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 뒤로 포르시아가 탄 코끼리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좌우로 말에 탄 다프네와 케라우가 있었지만 코끼리의 바로 곁에 있었기에 그 모습이 일견 초라해 보였다.
“휘유∼ 정말이지 엄청난 녀석이란 말이야.”
코끼리의 몸체에 햇빛이 가려 케라우 자신이 말을 타고 있는 곳에 그늘이 드리자 그는 질린 듯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그늘이라니 기분이 좀 그런걸.”
태양이 찬란히 빛나는 대낮이었기에 상관은 없었지만 그래도 빛이 가득한 곳을 두고 그늘 속에 있는 것은 기분이 조금 언짢아지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다프네와 자리를 바꾸기에는 거대한 코끼리의 몸체가 너무나 위험했다.
포르시아가 타고 있는 코끼리 뒤로 기사들과 병사들 그리고 시종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은색 늑대가 가슴을 펴고 당당한 걸음을 옮기고 그 뒤로 화려한 백색의 코끼리가 거대한 몸체를 움직이자 곧 대로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보아닌의 신수인 은색 늑대와 국왕의 하얀 코끼리도 충분한 볼거리였지만 대로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은 오히려 그 두 짐승의 등에 가 있었다.
늑대의 등에 탄 보아닌의 용자와 코끼리의 등에 탄 보아닌의 성녀.
이들은 그 두 사람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려고 이렇게 모여든 것이다.
“성녀님이다! 성녀님! 어쩌면 저리도 고결하고 성스러운 모습이실까!”
“용자님은 어떻고! 아무리 사나운 맹수라도 단번에 때려잡으실 정도로 용맹이 넘쳐흐르시는군!”
대로에 모여든 사람들은 이니안과 포르시아의 모습을 보고 저마다의 감상을 말했다. 그 감상이라는 것이 모두 다 감탄과 감탄, 탄성과 탄성의 연속이었다.
‘이거 무슨 구경거리가 된 기분이군.’
케이로스의 등 위에 당당한 얼굴로 앉아 있지만 이니안의 속마음도 그의 표정처럼 당당한 것만은 아니었다.
***
“응? 이게 무슨 소란이지?”
호텔에서 식사를 마친 후 티타임을 즐기던 메이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로에서 들려오는 엄청난 소음. 무슨 일이 있는 듯했다.
똑똑.
그때 들리는 노크 소리. 문을 열자 그곳에는 마일론과 파르미안이 있었다.
“무슨 일이야?”
“성녀와 용자의 행차라고 하네요. 구경 가시지 않겠어요? 우리를 이렇게 고생시켰는데요.”
마일론이 싱긋 웃었다.
“흐음. 뭐 일부러 갈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는걸. 우리가 보아닌의 신자도 아니고 말이야.”
메이린이 썩 내키지 않는 듯 말했다. 본래 그녀는 복잡한 곳을 싫어하는 편이다. 그래서 굳이 사람들로 가득한 대로로 나가기가 싫은 것이다.
“아, 멀리 갈 필요는 없어요. 저희 방 테라스에서 대로가 보이는 걸요.”
“위에서 내려다봐도 돼?”
마일론의 말에 메이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왕족이나 귀족의 행차 때 그 왕족이나 귀족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큰 죄에 해당한다. 위에서 혹시 암살을 시도할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다.
그 때문에 메이린이 의아한 듯 마일론에게 되묻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