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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그래, 어쩐 일인가? 영지를 비우고 사라졌다 들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다니 말일세. 허허.”
소파에 앉은 칸세르 공작은 인자한 얼굴로 웃음을 흘렸다.
“네, 공작 각하. 제가 잠시 공녀님을 모시는 동안 공녀님의 몸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해서요. 그것에 관해 알아본다고 잠시 영지를 비웠습니다. 그리고 그게 무엇인지 대강 알았기에 이렇게 공작 각하를 뵈러 온 것입니다.”
바실러스는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귀족 간의 대화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직설적인 화법이었다.
과연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칸세르 공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얼굴이 굳기는 그의 뒤에 서 있는 시메티딘과 클레비클 역시 마찬가지였다.
‘역시. 후훗. 그런데 저들도 그 일에 관여했나 보군.’
극히 짧은 순간의 표정 변화였지만 그들의 변화를 유심히 살피고 있던 바실러스는 결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으음. 그런가? 그건 나도 모르는 일인데… 자네가 수고를 했군 그래. 정말 고맙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이런 장소에서 이야기할 만한 것이 아니군.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어느새 평소의 얼굴로 돌아온 칸세르 공작은 응접실 주변의 시종과 시녀를 훑어본 후 그렇게 말하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훗. 역시 능구렁이야, 공작.’
바실러스는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므로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두 사람이라… 감당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모두 바실러스 자신의 계산대로다. 정확히 따지자면 첫 만남은 계산이 어긋났지만 말이다. 그가 이곳에 홀로 올 수 있었던 것은 공작의 곁에 있는 마법사가 시메티딘 하나라는 가정에서였다.
한데 세상에는 드러나지 않은 흑마법사가 한 명 더 있었다. 그 하나의 변수 때문에 어쩌면 일이 상당히 복잡해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미 저지른 일이기에 여기에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내 집무실이네. 이리로 들어가지.”
앞장서 가던 칸세르 공작은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가면서 근처에 있던 시종과 시녀를 모두 물렸다. 그로서는 당연한 행동이다.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일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말이다.
“그래, 그럼 아까 하던 이야기를 다시 해보도록 할까?”
집무실의 책상에 앉은 칸세르 공작은 책상 앞의 소파에 자리를 권하며 물었다.
“아까 드린 말씀 그대로입니다. 공녀님의 몸에서 이상을 발견했습니다.”
바실러스가 소파에 앉아서 대답하는 순간 시메티딘과 클레비클의 그의 좌우에 섰다.
“그래,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 말이지?”
공작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어떤 사악한 대법에 걸리신 것 같았습니다.”
번쩍.
그 대답이 바실러스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공작의 눈에서 형형한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가 기사라든가 마법사라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순수한 그의 기세가 안광으로 화해 뿜어지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방 안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방 안을 가득 채우는 사납고도 무거운 기세. 그리고 넘실거리는 살기.
‘훗. 그렇게 나오셔야지.’
하지만 바실러스는 담담한 얼굴 그대로였다.
“자네, 뭔가 있군.”
방 안의 분위기가 급변했음에도 여전히 침착한 바실러스의 모습에 칸세르 공작이 차갑게 중얼거렸다.
“과찬이십니다.”
자신만만한 미소가 바실러스의 입가에 맺혔다.
“그럼 하던 이야기를 계속해 보도록 할까? 사악한 대법이라니 무얼 보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
칸세르 공작은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괴면서 스산한 눈으로 바실러스를 바라보았다.
“흑마법을 사용한 대법이니 사악하다고 한 것이죠.”
바실러스의 대답에 공작의 눈썹이 꿈틀했다.
“흐음. 거기까지 알고 있다면 거의 다 알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군.”
공작의 목소리에는 살기가 스며 있었다.
“그렇습니다. 여기 제 왼쪽에 서 계신 분이 대법을 걸었다는 것과 대법에 사용된 재료가 드래곤의 눈물이라는 것도요. 그리고 드래곤의 눈물을 사용한 대법이 어떤 것인지도 알고 있지요. 드래곤의 눈물이 쓰일 용도는 하나밖에 없으니까요.”
짝짝짝.
공작은 턱을 괴고 있던 손으로 짧은 박수를 쳤다.
“훌륭해! 내가 자네를 너무 우습게봤었군. 그저 우리 쪽 사람으로 포섭하라는 지시만 내려두고 잊고 있었으니. 내 지금까지 사람 보는 눈은 있다 생각했는데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야. 자네 같은 사람을 못 알아보다니.”
“수정구를 통해 본 것으로 상대의 진면목을 알기는 힘들죠, 특히나 보통 사람은 더더욱.”
바실러스는 여전히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나올지 정도도 알고 있겠군.”
칸세르 공작은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딱!
그의 손가락이 튀겨지는 순간 빛나는 구체가 바실러스를 몸을 크게 감싸 안았다. 그리고 구체 속으로 몰아쳐 오는 열화의 불꽃.
곧 구체는 시뻘건 불꽃으로 가득 찼다.
“어떻게 안 것인지 모르겠지만 알아서 안 되는 것을 알았어. 그러니 죽어야지.”
칸세르 공작은 불꽃이 가득 찬 구체를 보면서 무심히 중얼거렸다.
“으음…….”
그때,
두 가지 마법을 동시에 사용해 바실러스를 제거하던 시메티딘이 가는 신음을 흘렸다.
“자네, 왜 그러는가?”
의외의 모습에 칸세르 공작의 시선이 그를 향하는 순간, 구체 속의 붉은 빛이 점점 옅어졌다. 그리고 빛의 구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쩌정!
묘하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여전히 자신만만한 웃음을 짓고 있는 바실러스가 처음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대단하군요. 역시 대마법사라 불리시는 분입니다. 놀라운 마법 구경 잘했습니다.”
너무나 태연한 바실러스의 모습에 시메티딘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사용한 마법은 이렇게 간단히 무효화시켜 버릴 정도로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숨겨둔 한 수도 있었던 모양이로군.”
이번에는 칸세르 공작도 제법 놀란 탓인지 얼굴에 드러난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이 정도 실력이 없었다면 찾아오지 않았을 겁니다. 죽여서 입을 막는다는 가장 간단한 방법. 저 또한 충분히 예상할 수 있으니까요.”
“하긴. 포르시아의 몸에 일어난 일을 알아낸 정도의 사람이 내가 어떻데 나올지 예상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알면서도 왔다는 것은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어서일 테지. 원하는 게 뭐지?”
칸세르 공작 역시 직접적으로 본론을 말했다. 그도 바실러스도 이런 자리에서는 쓸데없는 말은 필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공작 각하의 그늘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의외의 말에 칸세르 공작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내 밑에?”
“네.”
잠시 동안 공작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담담한 눈으로 바실러스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방 안의 분위기는 긴장으로 인해 팽팽히 당겨져 있었지만 칸세르 공작의 두 눈만은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자네 정도의 사람이라면 굳이 내 밑에 들어오지 않아도 될 텐데? 시메티딘의 마법은 간단한 게 아니야. 그런데 그것을 그리 간단히 무효화했으니. 그 정도 실력이라면 당장이라도 마법사로서 상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고 말이야.”
“보통은 그렇겠습니다만 저는 조금 특이해서요.”
바실러스의 대답에 공작의 시선이 시메티딘과 클레비클을 향했다.
게다가 바실러스가 시메티딘의 마법을 무효화하는 순간 클레비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던 것을 공작은 놓치지 않았다.
공작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클레비클이 입을 열었다.
“이자는 흑마법도 익힌 듯합니다.”
“무슨!!”
클레비클의 말에 시메티딘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공작의 앞이라는 것도 잊고. 클레비클의 발언은 그 정도로 시메티딘에게 충격적인 것이었다.
“시메티딘.”
공작의 한마디. 그때야 시메티딘은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다.
“죄, 죄송합니다, 공작 각하.”
“됐네. 앞으로는 조심하게. 그리고 클레비클, ‘흑마법도’라고 말한 것은 바실러스 자작이 백마법 역시 익히고 있다는 것인가? 그래서 시메티딘이 저렇게 소리를 지른 것이고?”
“그렇습니다. 저자는 조금 전 시메티딘의 마법을 백마법으로 무효화한 듯했습니다만 그 안에 숨어 있는 암흑 마나의 기운을 제가 분명히 느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바로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만 저자는 분명 백마법과 흑마법을 동시에 익혔습니다.”
클레비클의 설명에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놓고 진행되는 세 사람의 대화에 바실러스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후후후. 공작 당신이라면 나의 가치를 알 것이오. 당신 정도면 내가 잠시 몸을 의탁하기에 부족함이 없지. 물론 어디까지나 ‘잠시’지만 말이야.’
“그렇다면 납득이 가는군. 포르시아의 몸에 남겨진 대법의 흔적을 알아차렸다는 것이. 어떻게 흑마법과 백마법을 동시에 익혔는지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런 것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지.”
“바로 보셨습니다, 공작 각하. 흑마법과 백마법을 동시에 익히는 것은 저희 가문의 비전입니다. 두 가지를 동시에 익혀야 익힐 수 있는 마법. 그것이 저희 가문의 마법입니다. 때문에 대대로 저희 가문의 사람은 몸을 웅크리고 있어야만 했지요. 하지만 저는 공녀님의 몸에서 흑마법의 흔적을 발견하고 공작 각하라면 몸을 의탁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사실이 그랬다.
대륙에 흑마법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백마법사에 비하면 적지만 그래도 제법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흑마법사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곱지가 않았다.
마법사로서 인정은 하되 경원시하는 분위기.
일단 흑마법이라면 사악한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일반인들의 인식 때문이었다. 실제로도 사악한 마법들이 많았고.
덕분에 흑마법을 인정을 하지만 귀족이 흑마법을 익혔다고 하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귀족의 체면을 깎는 일이라며 작위를 잃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귀족들이 흑마법을 대하는 이중적인 모습.
필요에 의해 인정은 하고 이용하지만 결코 흑마법사는 귀족일 수 없었다, 그들은 사악한 무리들이기에.
결국 흑마법과 백마법을 동시에 익힌 바실러스 자작가로서는 어찌할 수 없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숨기고 숨어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공작에게 흑마법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몸을 의탁하러 온 것이다.
“흐음…….”
생각에 잠긴 공작의 손가락이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하지만 바실러스는 이미 공작의 결론을 알고 있었다. 흑마법과 백마법을 동시에 익히고 있다니. 그런 인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이 공작이라면 분명 품 안에 거둘 것이다. 그것은 공작 역시 다르지 않을 것.
“좋아. 거두도록 하지.”
짧고 간결한 허락.
하지만 그 한마디에 바실러스는 공작 쪽의 사람이 되었다. 그것도 상당한 비밀을 알기에 처음부터 비중있는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미소 띤 얼굴로 바실러스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뭐, 자네라면 이럴 것도 예상하고 있을 테지. 그럼 시메티딘, 클레비클, 새 식구니 알아야 할 것들을 일러주고 인사시킬 곳에 인사시키도록 하게.”
“네, 알겠습니다.”
시메티딘의 대답을 들은 공작은 바실러스가 찾아오기 전 보고 있던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