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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자작님의 우려와 달리 이것은 공녀님께 절대적으로 유리한 일입니다.”
그때 다프네가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요, 파이어 경?”
“갈라히벤의 모든 사람이 경외하는 보아닌의 용자가 진심을 다해 모시는 분이 포르시아 공녀님입니다. 자연 보아닌의 용자를 향한 경외는 공녀님께도 이어지겠죠.”
“그렇군요.”
다프네의 설명에 듀카 자작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리고 저 케이로스라는 늑대는 실내에 들어가면 세이버 경보다는 오히려 공녀님을 더 따르지 않습니까?”
이어진 그녀의 말에 듀카 자작의 얼굴이 더 더욱 밝아졌다.
“그게 정말입니까, 파이어 경?”
“네.”
다프네가 한 번 더 확실히 대답하자 듀카 자작은 세상이라도 다 얻은 듯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포르시아는 그저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그런 듀카 자작을 지켜보았다.
“은색 늑대가 따르는 여인을 이곳에서는 보아닌의 성녀라고 부릅니다. 보아닌의 용자 못지않은 존경을 받는 위치이죠. 용자의 경우는 어떻게 가끔 나타납니다만 보아닌의 성녀는 벌써 몇백 년째 없었습니다. 단지 기록으로만 남아 있죠. 은색 늑대가 지키는 성녀란 이미 이곳에서도 전설로만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저 늑대가 실내에서는 공녀님을 따른다니…….”
듀카 자작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미처 말을 끝맺지 못했다.
“제국의 공녀가 보아닌의 성녀라면 제국과 갈라히벤 왕국의 관계에도 무척이나 좋은 일입니다. 그들이 신성시하는 성녀가 제국의 황제 폐하를 섬기며 또한 황자 전하의 약혼녀라니 대단한 일이지요.”
듀카 자작은 어느새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어 감격에 찬 말을 계속 쏟아냈다. 양국의 관계에까지 생각이 미치는 것을 보면 그는 분명 외교관이었다.
“그 이야기는 이제 그쯤 하도록 하죠. 그것보다도 갈라히벤의 신기한 문물 이야기가 듣고 싶네요.”
포르시아의 제지에 듀카 자작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제가 너무 흥분했나 봅니다. 하하하.”
그리고 나서 듀카 자작은 포르시아의 요청대로 갈라히벤의 다양한 문화에 대한 설명을 계속했다.
마차 안과 밖 모두 갈라히벤의 신비하고 생소한 문화의 이야기 속에 흠뻑 빠져들고 있었다.
27장. 성녀님을 뵙습니다
푸른 초원을 가로지르는 관도를 달려 정확히 하루 만에 갈라히벤의 수도인 나이안에 도착했다.
나이안의 왕궁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해주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아니, 마차의 선두에 있는 케이로스의 모습에 수많은 사람들이 왕궁으로 향하는 대로에 뛰쳐나와 포르시아 일행의 행렬을 구경했다.
은색 늑대의 출현 소식에 본디 왕궁의 대전에서 포르시아를 기다리고 있던 갈라히벤의 국왕 메오루도 몸소 왕궁의 성문 앞까지 행차했다.
“허허. 어서 오시오, 제국의 공녀여. 우리 갈라히벤에 온 것을 환영하오.”
“환대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국왕 전하.”
메오루의 환대에 포르시아는 기품있는 모습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과연 제국의 공녀로구려. 보아닌의 용자를 앞세우고 우리 왕국을 방문하다니 말이오.”
메오루는 케이로스와 이니안을 흐뭇한 얼굴로 번갈아 보았다. 보아닌의 독실한 신자이기도 한 그가 살아생전 보아닌의 용자를 보게 되는 행운을 누렸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메오루 국왕의 말을 포르시아는 담담함 미소로 받았다.
“자, 어서 들어가도록 합시다. 일단은 여독을 풀어야 할 테니. 내 쉴 곳을 마련해 두었소.”
아무리 제국의 공녀라 하더라도 일국의 국왕에 비하면 그 위치는 낮았다. 국왕이 반 경어를 쓸 정도의 위치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포르시아는 보아닌의 용자를 앞세우고 왔기에 그 위치에 대한 존중으로 메오루 국왕은 반 경어를 사용했다.
국왕이 앞장서 왕궁 안으로 들어가자 포르시아와 이니안이 그 뒤를 따랐다.
물론 케이로스도 함께 안에 들어갔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보아닌의 신수인 은색 늑대가 보아닌의 나라나 다름없는 갈라히벤에서 못 갈 곳은 없었다.
“오오!”
왕궁의 복도를 얼마나 걸었을까? 국왕은 뒤에서 들려오는 탄성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국왕이 앞장서 걸음을 옮기는데 뒤에서 탄성이라니, 이것은 엄청난 무례였다.
하지만 뒤를 돌아본 국왕은 그런 무례를 탓할 수가 없었다.
“이럴 수가……!”
그도 놀람에 찬 소리를 토하고 있을 뿐이다.
달랐다.
케이로스의 위치가 달랐다.
왕궁의 입구에서는 분명 케이로스는 용자의 뒤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신수는 포르시아의 곁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거기에 가끔 장난치듯 자신의 머리를 작은 포르시아의 얼굴에 비비기까지 했다.
“이럴 수가…….”
포르시아가 웃으며 케이로스의 목덜미를 쓰다듬자 사람들은 경악에 찬 소리를 흘렸다.
“이런, 케이로스, 그만 하렴. 나중에 많이 놀아줄 테니까. 지금은 국왕 전하도 계신 자리니 말이야.”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 것을 안 포르시아는 조용히 달래듯 케이로스에게 말했다. 그러자 케이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당당한 자세로 포르시아의 곁에 섰다.
메오루 국왕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서… 성녀로고… 보아닌의 성녀가 나타났구나!”
국왕이 말이 선언이라도 되었을까?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이 포르시아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성녀님을 뵙습니다.”
극상의 예를 표하는 자세로 공손히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하는 인물들의 행동에 포르시아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심지어 국왕마저 자신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듀카 자작은 그런 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이 대충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물론 케이로스의 행동은 이니안의 지시였다. 마차에서 내린 후 칼이 이니안에게 보아닌의 성녀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기에 이니안이 케이로스에게 지시한 것이다.
[또 애완견 신세란 말입니까, 마스터?]
한숨 섞인 말을 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칸세르 영지에서도 했던 일이다. 갈라히벤 왕궁에서도 그런다고 해서 대단할 것은 없었다.
케이로스는 충실히 이니안의 지시를 이행했고 덕분에 포르시아는 이 자리에서 찬란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오오, 내가 살아서 보아닌의 성녀를 뵙게 될 줄이야… 실로 430년 만의 재래이나니. 보아닌이여, 감사합니다. 마라.”
국왕이 허리를 굽힌 자세로 보아닌의 성호를 그으며 기도하듯 말하자 무릎을 꿇은 이들 역시 성호를 그으며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보아닌이여, 감사합니다. 마라.”
갑작스러운 사람들의 행동에 포르시아는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무리 공녀라 하지만 일국의 왕이 그녀 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있는데 어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국왕 전하, 이 무슨 행동이십니까? 부디 옥체를 바로 하십시오.”
포르시아의 말에 메오루 국왕을 허리를 폈다.
“미처 성녀이심을 모르고 저지른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어느새 국왕은 포르시아에게 경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보아닌의 성녀라는 위치가 갈라히벤에서는 그런 것이다. 용자는 인정을 받지만 성녀는 숭배를 받는다. 국왕이라 해도 그 숭배에서 결코 예외일 수는 없었다. 몇백 년에 한 번 나타난 성녀이기에 당대에 성녀가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었다.
“무마타 레온, 경은 어서 신전에 이 사실을 알리게.”
“네, 전하.”
무릎을 꿇고 있던 무마타는 서둘러 달렸다. 왕궁에서 달리는 것이 묵인이 될 정도로 이것은 엄청난 일인 것이다.
“그럼, 준비해 둔 처소로 가시지요.”
하지만 국왕의 걸음의 애초의 예정과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귀빈 중의 귀빈만을 대접하는 별궁으로 방향을 바꿨다. 물론 그러한 사실을 포르시아 일행은 알지 못했다.
“우와! 훌륭하네요!”
캐서린은 안내받은 별궁을 둘러보며 연신 감탄성을 토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작은 궁전 하나가 포르시아 일인을 위해 준비된 것이다. 이것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파격적인 대우였다.
“부담스럽기만 한걸.”
갈라히벤 왕국의 사람들이 물러간 후 포르시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차에서 성녀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저 그런가 보다라고만 생각했는데 실제로 이곳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이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니안이 쓴웃음을 지으며 들어왔다. 그 역시 포르시아의 별궁 정도는 아니지만 제법 큰 저택 수준의 건물을 배정받았다. 하지만 그 자신의 임무가 포르시아의 경호였기에 그곳을 고사하고 이 별궁의 방 하나에 짐을 풀었다.
“하아.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가려고 했는데 이래서야 그러기는 틀린 것 같네요.”
케이로스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포르시아가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의 일은 보지 않아도 대강 알 수 있었다.
성녀라는 존재는 각 신의 교단마다 존재했다. 그리고 성녀가 나타났을 때의 일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포르시아는 그런 기록을 읽었고 때문에 앞으로의 일을 대강은 예상할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케이로스를 데리고 와서는.”
이니안이 면목 없다는 듯 말했다.
“아니에요. 케이로스를 영지의 저택에 둘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그리고 제가 케이로스가 좋은걸요. 후훗.”
케이로스를 보며 그녀는 웃음을 머금었다.
“예. 일이 이렇게 된 것 어쩔 수 없으니, 일단은 푹 쉬십시오. 사실 그간의 일정으로 몸이 상당히 피로하실 겁니다.”
“네. 그래야지요.”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포르시아는 욕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에 왕궁에서 제공해 준 시녀들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성녀님을 한 치의 불편함도 없이 모시는 것이 그녀들의 임무. 그녀들은 성녀님을 모시게 되었다는 소식에 감격에 떨었으며 불타는 의무감으로 이 별궁으로 왔다. 그리고 그 사명감만큼이나 동작이 재빨랐다.
“응? 케이로스, 너도 함께 들어갈래?”
케이로스가 포르시아의 뒤를 따르자 포르시아는 생긋 웃으며 케이로스와 함께 욕실로 향했다. 시녀들은 그 모습을 감격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쩝. 부럽네.”
그때 이니안의 옆에 서 있던 케라우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물론 그런 그를 향해 다프네의 살길로 불타는 눈빛이 쏘아졌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
“그게 정말인가?”
배꼽까지 내려오는 흰 수염을 기른 인자한 인상의 노인의 두 눈이 격정으로 심하게 떨렸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 노인의 머리에는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대머리라는 것이었다.
“네. 틀림없습니다, 교황님.”
무마타는 허리를 숙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그럴 수가. 아무런 신탁도 없었거늘… 은색 늑대가 나타나고 그 늑대가 용자와 성녀를 따르다니…. 용자와 성녀께서 하나의 신수를 데리고 함께 나타난 적은 우리 교단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네. 허어, 이럴 수가. 아니,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지. 어서 왕궁으로 가세나.”
현 보아닌 교단의 교황인 라고스는 서둘러 채비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신전을 벗어났다. 곁에서 무마타 역시 빠른 걸음으로 그를 쫓았다.
신전을 벗어나는 동안 라고스처럼 대머리에 교단의 사제복을 입은 신관들이 양 손바닥을 모으며 인사를 했으나 그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했다. 그 모습에 신관들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곧 자신들의 할 일을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