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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포르시아가 마차에 오르고 뒤이어 다프네와 캐서린, 듀카 자작까지 모두 마차에 오르자 무마타는 앞서서 천천히 말을 몰아갔다. 도보로 이동하는 병사들을 배려해서 상당히 천천히 움직였다.
이니안은 케이로스를 몰아 무마타의 곁으로 움직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녀님의 호위를 책임지고 있는 이니안 세이버라고 합니다.”
그 누구도 이니안을 책임자로 임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새 스스로도 책임자라 칭할 정도로 이니안의 위치가 그렇게 결정되어 버렸다.
“아,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무마타라고 합니다.”
이니안이 다가오자 그는 과도하게 반가워하며 인사를 했다. 사실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그는 이니안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그것도 선망의 시선으로 말이다.
“갈라히벤에는 처음이십니까?”
무마타의 물음에 이니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기회가 없어 이제야 와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시다면 우리 왕국에 대해 생소하신 것이 많겠군요.”
“그렇지요.”
무마타의 말에 이니안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둘의 대화에 어느새 케라우도 곁에 와 있었다.
“아, 이 친구는 제 친구인 케라우라고 합니다. 용병이죠.”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무마타라고 합니다.”
“하하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케라우 드로 라토시스라고 합니다.”
케라우는 특유의 쾌활한 웃음과 함께 인사를 했다. 200년 만의 갈라히벤 방문이었기에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기대로 그의 가슴도 상당히 설레고 있었다.
“한데 아까 라온이라고 하시는 것 같던데요.”
“예. 라온입니다.”
“젊은 나이에 대단하시군요.”
케라우는 진정 감탄한 듯 말했다.
이니안으로서는 무슨 말인지 몰랐기에 그저 두 사람의 대화를 멀뚱히 지켜보았다. 단지 예전 선배 용병에게 귀동냥한 내용을 떠올리며 추측할 뿐이었다.
갈라히벤의 신분제는 대륙의 보통의 신분제와 다르며 호칭도 다르다는 이야기. 아마도 라온이라는 것이 신분 계급의 하나인 듯했다.
“케라우님은 갈라히벤이 처음이 아니신 듯하군요.”
케라우가 갈라히벤의 작위 체계를 알고 있는 듯하자 무마타는 놀랍다는 듯 말했다.
“하하, 아닙니다. 들은 것이 다른 사람들보다 좀 많을 뿐, 처음이나 다름없습니다.”
케라우는 자신이 200년에 와본 적이 있다고 해봤자 믿지 않을 것을 뻔히 알기에 대강 얼버무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처음이나 다름없다고 했지 처음이라고는 하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
“대체 무슨 이야기야?”
“아, 너는 모르겠군.”
이니안의 물음에 케라우가 승리자의 미소를 띠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 미소가 은근히 기분이 나빴다.
“뭐, 보통은 모르는 것이 정상이죠.”
이니안의 물음에 대답을 한 것은 무마타였다.
“우리 갈라히벤의 신분제는 대륙의 다른 나라와는 전혀 다르니까 말입니다.”
역시 이니안의 예상대로 신분에 관한 이야기였다.
“저도 거기에 관해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대륙과는 완전히 그 체계가 다르다고요. 하지만 어떻게 다른지는 듣지 못했는데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하하. 기꺼이 설명해 드려야죠.”
무마타는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저희 갈라히벤의 신분은 능력주의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능력이 있다면 그 능력에 걸맞은 작위를 얻을 수 있고 능력이 없으면 높은 작위를 가지고 있더라도 곧 작위가 낮아지죠.”
파격적인 신분제였다. 일단 한 번 작위를 얻으면 어지간히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영원히 그 신분이 굳어지는 대륙의 일반적인 작위 체계와는 그 궤가 달랐다.
“작위의 명칭이 다르다 뿐이지 우리 갈라히벤도 귀족은 다섯 단계의 계급을 가집니다. 최고위 귀족이 바로 ‘부만’입니다. 대륙의 공작과 같은 위치이죠. 그 다음이 ‘마단’, ‘라온’, ‘카임’, ‘로우’이지요.”
무마타의 설명에 이니안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작위의 명칭을 머리에 집어넣었다. 어디든 상대의 신분을 제대로 알고 신분에 걸맞은 대우를 하는 것은 중요했기에 특히 신경을 썼다.
“그렇다면?”
귀족의 작위를 숙지하던 이니안은 무언가를 깨닫고 놀랍다는 눈으로 무마타를 바라보았다.
“크크크. 이제 알았냐? 무마타 라온은 제국으로 치면 백작이시지. 일개 기사 따위인 너랑은 비교도 안 되는 분이지. 크크크.”
이니안이 깨닫자마자 바로 케라우의 공격이 들어왔다. 그의 공격에 이니안은 케라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웃는 얼굴로 멋진 반격을 날려 주었다.
“어디 겨우 용병 따위가 귀족 분들 말씀하시는데 끼어들어.”
웃음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
“쳇.”
이니안이 기사이기는 하지만 기사도 분명한 귀족이다. 계승 귀족이 아닌 단승 귀족이지만 어쨌든 귀족은 귀족. 이니안의 말에 틀린 것은 없었다.
“그래 봤자 겨우 몇 년짜리 귀족이.”
이니안이 한시적으로 기사의 작위를 칸세르 공작가에서 받은 것을 비꼬며 혼자 웅얼거렸다.
무마타는 그 모습을 무척이나 재미있게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어찌 보면 살벌한 듯한 말속에 악의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에, 그저 친한 친구의 작은 장난이라 생각한 것이다.
“신분을 모르고 무례를 저질렀군요.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아닙니다. 보아닌의 가호를 받는 용자이신데 그런 하찮은 신분 따위야 무엇이 대수이겠습니까?”
알 수 없는 말에 이니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쳇.”
케라우는 무엇인가 알고 있는 듯 고개를 획 돌렸다. 별로 알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이니안이 알아서 기분 나쁘다는 기색이었다.
“보아닌의 가호라니. 혹시 알고 있는 것 있어? 칼.”
[아아. 알고 있지. 물론. 이래봬도 유희를 즐기며 대륙에서 안 가본 곳이 없으니까.]
이니안의 물음에 칼이 대답했다. 칼은 현재 마차 안에 있었기에 의념을 사용해 대화를 했다.
“그게 뭐지?”
[뭐, 곧 설명을 듣게 될 거니까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말고 여유를 가지라고.]
그러고는 칼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보아닌의 용자요?”
“네.”
“생소한 말이로군요.”
“그럴 수밖에요.”
무마타는 당연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닌은 우리 갈라히벤에서 섬기는 신입니다. 자비와 환생의 신이시죠.”
이니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분명 창세신화에 그런 신이 존재했다. 다만 다른 왕국에서는 별로 중요시하지 않는 신이라 잠시 떠올리지 못한 것뿐이다.
“은색 늑대는 보아닌께서 직접 축복을 내리신 신수(神獸)입니다. 그래서 우리 갈라히벤에서는 은색 늑대를 신성시하죠. 그리고 그런 늑대를 데리고 있는 자를 보아닌의 용자라고 부릅니다. 은색 늑대는 그 기질이 강하고도 고고하여 쉬이 사람들 따르지 않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보아닌께서 축복을 내리신 신수인데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데 가끔 은색 늑대가 가까이 하는 인간이 나타납니다. 신의 축복을 받은 신수와 함께할 수 있다니 그야말로 신의 가호를 받는 용자라는 것이지요. 실제로도 은색 늑대와 함께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훌륭한 용자였습니다.”
설명을 하는 동안 무마타는 계속해서 이니안와 케이로스를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주변에서 같이 말을 타고 있는 갈라히벤의 병사들 역시 그런 시선은 마찬가지였다.
의외의 사실에 이니안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못 됩니다.”
이니안이 쑥스럽게 말했지만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변하지 않았다. 단지 케라우의 고개가 좀 더 심하게 돌아가 있었을 뿐이다.
“하하, 아닙니다. 은색 늑대와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용자의 자격이 있으십니다. 신의 가호가 따르는 용자께는 인간들의 신분이란 무의미한 것이지요.”
이니안은 이제야 갈라히벤에 들어온 이후 자신과 케이로스를 향한 시선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무마타의 말대로라면 나이안에 들어간 이후 자신이 상당히 피곤해질 것이라는 사실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갈라히벤의 귀족은 다섯 단계의 신분이 전부입니까? 대륙에는 계승 귀족의 전에 단승으로 귀족의 작위를 가질 수 있습니다만. 준남작이나 기사 같은 작위 말입니다.”
“그런 작위가 있습니다. 귀족들은 모두 평민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단계가 올라간 것이니 당연히 그런 작위가 있죠. 바로 ‘세르’라는 작위입니다. 다른 왕국이나 제국의 준남작에 해당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저도 세르부터 시작해서 라온에까지 올랐답니다.”
“젊은 나이에 대단하시군요.”
무마타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컸다. 라온은 계승 작위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르에서 스스로 라온의 작위를 손에 넣었다는 것이니 가진 바 능력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것이리라.
본디 신분이란 물려받은 것을 지키는 것보다 스스로 쌓아올려 가는 것이 몇십 배는 더 어려운 법이었다.
“과찬이십니다. 단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이니안의 칭찬에 그는 무척이나 쑥스러워했다. 그럴 것이 신의 가호를 받는 용자의 칭찬이 아니던가.
“아, 라온이 작위의 이름이라면 무마타는 성인가요?”
“아닙니다. 이름입니다. 저희는 성이 아닌 이름에 작위 명을 붙입니다. 그리고 성은 이름 앞에 쓰고요. 제 풀 네임은 로토 무마타입니다. 저희가 이름에 작위를 붙이는 것은 작위를 가문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능력으로 인정받은 것이라는 자부심 때문입니다.”
“그렇군요.”
알면 알수록 갈라히벤의 문화는 재미있었다. 나와는 다른 독특한 것을 알아간다는 것, 그것은 무척이나 신선하면서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 외에도 길을 가는 동안 무마타는 갈라히벤의 다양한 문화와 풍습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덕분에 이니안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길을 갈 수 있었다.
마차 안에서도 밖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 연출되고 있었다. 듀카 자작이 포르시아가 반드시 알아야 할 사항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그렇군요. 잘 알겠어요, 듀카 자작님. 이렇게 일부러 찾아오셔서 중요한 것들을 알려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그나저나 세이버 경 말입니다.”
듀카이 이니안의 이야기를 꺼내자 포르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세이버 경이 왜요?”
“공작님께 말씀은 들었습니다. 임시로 기사로 삼은 자라고요.”
“예.”
“이거 공녀님께서 운이 좋으시다고 해야 할지 나쁘시다고 해야 할지…….”
듀카 자작은 미처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이죠?”
포르시아는 의아해 하는 얼굴로 듀카 자작에게 물었다. 그에 대한 답으로 듀카 자작은 갈라히벤의 신앙과 은색 늑대, 그리고 은색 늑대와 함께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갔다. 마차 안의 세 사람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는 저보다도 세이버 경이 더 대단한 존재라는 건가요?”
“납득하기 어려우실 수 있습디다만 그럴 수 있습니다. 일단 은색 늑대와 함께하는 용자는 왕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치이니까요. 국왕 역시 독실한 보아닌의 신자이기도 하시고요.”
“그거 정말 대단하네요.”
듀카 자작은 일개 기사가 공녀보다 더 대접받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그녀가 언짢아할 거란 생각에 무척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포르시아의 반응은 그의 생각과는 정반대였다. 오히려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포르시아는 수하가 잘되면 그것을 기뻐하는 그런 넓은 마음을 가진 진정한 귀족이었지, 다른 이가 자신보다 잘되는 꼴을 못 보는 편협한 가짜 귀족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