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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어느새 이니안은 별들을 바라보던 눈도 감고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천천히 그러나 멀리 퍼져 나가는 잔잔하면서도 감미롭고 부드러우면서 평안하고 따뜻한 소리.
깨어 있는 이들은 이니안의 휘파람 소리에 몸을 맡겼다. 듣고 있노라면 절로 빠져들게 되는 그런 소리다.
“좋네요.”
그때 이니안의 귀에 들리는 목소리. 아무런 기척이 없었지만 포르시아는 자고 있지 않았다. 아마 이니안의 첫 물음에도 일부러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리라.
포르시아의 목소리에 이니안이 휘파람 부는 것을 멈췄다. 그 순간 사람들의 얼굴에 아쉬워하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경에게 그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어요.”
다시 들리는 포르시아의 목소리.
“경이 부는 휘파람 소리를 듣고 있으니 절로 마음이 편안해지네요. 계속 듣고 싶은데 무리한 부탁일까요?”
포르시아의 부탁에 이니안의 눈이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웃고 있는 것이다.
“휘이익 휘이이 휘이익 휘이휘이이이∼”
이니안의 입은 다시 감미로운 휘파람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그날 밤은 모두들 이니안의 휘파람 소리에 의지해 기분 좋게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
“젠장. 저 녀석 저런 재주도 있었나?”
땅 속에서 낮게 울리는 목소리. 마차와는 대강 4킬로미터 정도는 떨어진 곳이었다. 이니안이 눈치를 챌 듯해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새신으로서 갈고닦은 감각 덕분에 그녀는 그 거리에서도 이니안의 휘파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에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하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쳇. 기다려. 반드시 그 심장에 나의 크리스를 박아줄 테니까.”
입술을 질끈 깨물고 손에 들린 크리스를 꽉 쥐는 그녀는 다크 크리스 길드의 유일한 생존자, 미르였다.
그녀는 이니안에게서 도망친 후 안전한 지역에 들어섰다 생각했을 때 다시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카르세온들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극도로 조심스레 기척을 지웠기에 그들에게 들키지 않았다. 조심히 그들을 뒤따르면서 상황을 지켜본 결과 로즈의 진정한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칸세르 공작의 딸 포르시아. 그것이 그들이 죽이려 했던 자의 진정한 신분이었다.
의뢰를 완수하기 위해 홀로 살아남았는데 더욱 완수하기 힘들어졌다. 그래도 동료 네 명의 목숨 값이 더해진 일이다.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였다. 은밀히 포르시아의 뒤를 따르기 시작한 것은.
제도를 떠나 칸세르 공작의 영지로 향할 때도 그 뒤를 따랐다. 그 사이 몇 번이나 포르시아를 처리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어새신으로서의 본능이 그것을 말렸다.
거대한 위험이 포르시아의 주변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온몸의 감각이 경고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하지만 이니안이 나타난 후 모습을 드러낸 케라우를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저 뱀파이어 녀석이 계속 근처에 붙어 있었구나.’
정말 위험천만이었다. 대체 어떻게 태양이 뜬 낮에 뱀파이어가 활보하고 다닐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포르시아를 습격했다면 목숨을 잃는 것은 자신이었을 것이다. 아직도 발론이 저 빌어먹을 녀석에게 피를 빨리던 그 끔찍한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의뢰는 꼭 완수한다.”
미르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요사스럽게 빛났다.
***
지난밤 이니안의 휘파람 소리 덕에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어서였을까? 아침 해와 함께 눈을 뜨니 몸이 개운했다.
포르시아는 언제 그렇게 우울했었느냐는 듯 밝은 얼굴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세이버 경.”
“네.”
“고마워요. 덕분에 마음이 많이 편해졌어요. 경의 휘파람 소리는 정말 대단하네요.”
은은한 미소를 띠며 하는 감사의 말에 이니안 역시 웃음으로 답했다.
간단한 아침 식사 후 마차는 다시 예정된 길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병사들은 자신들의 직무에 충실했다. 그들도 이니안의 휘파람 소리 덕에 잠을 푹 잤는지 다른 때보다 얼굴에 활기가 넘쳤다.
[잠을 제대로 못 잔 건 너뿐인 것 같군.]
칼의 말에 이니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시간 정도 잤는지 모르겠어.”
[그나저나 나도 놀랐다. 너에게 그런 재주가 있을 줄이야.]
“그래?”
칼의 말에 이니안은 피식 웃었다.
분명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그런 휘파람 소리라니. 휘파람을 부는 것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다.
모두 한 사람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유독 이니안이 불어주는 휘파람 소리를 좋아했고 이니안도 그 사람이 자신의 휘파람 소리를 들어주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연습했고 그럴수록 이니안의 휘파람은 더욱 감미로운 소리로 변했다.
‘쉐이나.’
이미 세상에는 없는 아이.
그 아이를 떠올리자 이니안의 얼굴에 잠시 어둠이 머물다가 사라졌다.
이후의 여행은 순조로웠다. 가야 할 길이 멀고 지루하다는 문제점만 없다면 말이다.
영지를 떠난 지 2주가 조금 넘어서 제국과 제이난 왕국의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제이난 왕국을 가로질러 2주 정도 더 이동을 하자 드디어 갈라히벤 왕국의 국경을 넘어 갈라히벤의 젖줄이라는 비라인 강을 마주 볼 수 있었다.
이것은 생각보다 빠른 이동이었다. 갈라히벤 왕국의 무투회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그 일정에 맞춰 무리하게 이동한 때문이다.
그 때문에 마그나 후작령 이후 다른 귀족의 영지는 영주성을 방문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 이동했다. 병사들 역시 지속적으로 속보로 뛰듯이 걸었기에 다들 많이 지쳐 있었다.
하지만 별다른 위험이 없었기에 단지 체력적으로 지친 것이 전부였다.
“우와! 저것이 비라인 강이란 말이죠?”
마차의 창밖으로 얼굴을 내민 포르시아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강을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사이 포르시아의 복장에 변화가 있었다. 반소매의 얇은 여름옷을 입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계절적으로도 어느새 여름에 접어들 무렵이었고 또 갈라히벤 왕국은 무척이나 더운 지역이다. 대륙의 중부에 걸쳐 있는 나라였으니 당연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갈라히벤의 수도인 나이안에 도착할 것입니다. 이미 왕궁에 기별을 넣어뒀으니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이니안의 말에 포르시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의 공작가의 영애라면 일반 왕국에서는 국빈 못지않은 손님이었다. 그랬기에 왕궁으로 기별을 넣은 것이고 지금쯤 갈라히벤의 왕궁은 손님맞이를 위해 분주할 것이다.
비라인 강을 넘어 하루 정도만 더 가면 수도인 나이안이니 이제 거의 다 왔다고 볼 수 있었다. 비라인 강을 보고 있는 기사들과 병사들의 얼굴도 무척 들떠 있었다. 그들도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것이다.
마차를 싣고 강을 건널 수 있는 배를 찾느라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리고 겨우 찾은 배도 일행의 인원을 전부 태울 수 없었다.
“별 수 없지. 두 번에 나누어 이동한다. 우선 마차와 나, 케라우, 그리고 기사 여섯이 건너고 나머지는 그 다음에 건너도록 한다.”
이니안의 지시에 따라 먼저 건널 사람과 나중에 건널 사람이 나뉘어졌다. 배의 크기 상 마차를 올리면 사람은 열 명 이상 오를 수 없었다.
배의 선두에 케이로스가 도도한 자세로 앉아 강의 물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선원들은 그 모습이 신기한지 케이로스를 힐끔거렸다.
갈라히벤에 들어와서 겪은 신기한 일은 사람들이 케이로스를 그다지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경외시하는 듯했다.
어떤 이는 케이로스를 향해 양 손바닥을 모은 자세로 고개를 숙이며 무어라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리고 자연 그런 케이로스를 타고 다니는 이니안에게 더욱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포르시아를 비롯한 일행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지나쳤다. 사실 이곳까지 오면서 케이로스 덕에 크고 작은 문제들이 있었기에 은근히 걱정이 되었던 일이 잘 넘어가서 안심하는 분위기였다.
다만 케라우만은 무언가를 아는 듯했지만 별다른 말이 없었기에 굳이 묻지 않았다.
두 번에 나눠 강을 건넌 후 나이안의 방향으로 조금 이동하자 멀리서 한 무리의 인파가 나타났다. 갈라히벤 왕국의 깃발과 미오나인 제국의 깃발을 함께 세우고 달려오는 모습에 이니안이 마차로 다가가 포르시아에게 말했다.
“나이안에서 마중을 나온 듯합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마차에 있을 수는 없죠.”
포르시아의 말에 이니안은 케이로스의 등에서 내려 마차의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마차의 문이 열리자 포르시아는 우아하고 기품있는 동작으로 마차의 밖에 내려섰고 캐서린과 다프네가 그 뒤를 따랐다.
포르시아가 마차 앞에 자리를 잡고 서자 이니안과 다프네과 그 좌우 뒤로 호위하듯 서고 캐서린은 한 발 물러나 있었다. 그리고 케라우가 그 근처에 서 있었다.
이윽고 마중 나온 일행이 먼지를 일으키며 도착했다.
“워워.”
말을 멈추고 두 사람이 마중 나온 사람들에서 앞으로 나왔다.
그 둘은 공녀가 이미 마차에서 내려와 있는 것을 보고 서둘러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나머지 일행들도 말에서 서둘러 내렸다.
공녀가 땅에 내려서 있는데 그들이 말 위에서 공녀를 내려다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포르시아 오마 칸세르 공녀님. 저는 왕궁에서 나온 무마타 라오라고 합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녀님. 갈라히벤 왕국에 공사(公使)로 와 있는 듀카 자작입니다.”
두 사람이 허리를 숙이며 포르시아를 향해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어요, 무마타 라오님. 그리고 듀카 자작님은 참으로 오랜만에 뵙는군요.”
포르시아는 생긋 웃으며 그들의 인사에 답했다.
“그럼 여기서부터는 제가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무마타가 허리를 펴며 말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공녀님, 갈라히벤에 계시는 동안은 제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듀카 자작이 포르시아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어머, 그런 폐를 끼칠 수는 없지요.”
“아닙니다. 이미 공작 각하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그 말에 포르시아는 고소를 머금었다. 역시 아버지는 자신을 위해 이미 손을 써둔 것이다.
하지만 공사는 제국과 왕국의 외교적 협력을 위해 왕국에 파견 나온 외교관이다. 그런 외교관이 귀족가의 딸의 여행을 위해 사사로운 일을 하다니 그녀의 성격에는 맞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황자 전하의 전언 또한 있었습니다.”
뒤이어 낮게 속삭이듯 전해온 듀카 자작의 말.
“하아.”
포르시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아버지도, 약혼자도 공과 사를 구분할 줄 모른다는 생각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면 당분간 잘 부탁드리지요, 자작님.”
“네. 맡겨두십시오.”
사실 1황자도 칸세르 공작도 공과 사에는 칼같이 철저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법칙에는 예외가 있듯 사람에게도 예외라는 것이 있었다. 그 둘에게는 포르시아라는 존재가 바로 공통의 예외였다.
물론 포르시아가 그런 사실을 알 리 없었다. 그저 과도한 배려가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그럼, 무마타 라오님과 듀카 자작님은 저와 함께 마차로 가도록 하세요.”
포르시아의 제안에 무마타는 정중히 사양했다.
“어찌 제가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저는 말을 타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뜻이 그러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그럼 자작님께서는?”
“분부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자작은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갈라히벤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을 해야 했기에 그는 꼭 포르시아와 함께 있어야 했다.
사실 갈라히벤의 문화와 풍습은 정말로 대륙 속의 다른 대륙이라 불리는데 손색이 없을 정도로 대륙에 공통적으로 퍼져 있는 문화와 풍습과 달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처음 갈라히벤에 오면 그런 차이 때문에 자칫 커다란 실수를 하기도 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실수를 하더라도 몰라서 그런 거겠지 하고 넘어갈 수 있다. 그리고 갈라히벤의 사람들도 자신의 문화가 대륙의 그것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런 실수 한두 번은 크게 탓하지 않는다.
하지만 포르시아는 달랐다.
제국의 공녀이자 황자의 비가 될 사람이다. 그런 그녀가 하찮은 실수로 체면을 깎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자신이 사전 지식을 전하기 위해 이렇게 마중을 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