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디언 소드-95화 (95/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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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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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미안, 나와 함께 갈 거야?”

친구의 물음에 파르미안은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1년 전 염원하던 기사의 작위를 받았다. 평민이었기에 절대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기사의 작위.

하지만 왕립학교에서 알게 된 한 인물의 도움으로 검술 실력이 급속도로 늘었고 결국에는 기사의 작위를 받았다, 그것도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왕국의 인정을 받은 자유기사.

자신이 스스로 주군을 정하기 전까지 그는 기사의 작위를 가진 자유인이었다.

“가자.”

오랜 시간 고민을 하는 듯하던 파르미안의 입에서 허락이 떨어졌다.

“역시. 너라면 그럴 줄 알았어. 이제 기사 수행을 나갈 때도 됐잖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파르미안의 절친한 친구 마일론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갈라히벤으로 가자는 거야?”

“당연히 견문을 넓히려는 거지. 나 같은 사람은 다양한 곳을 보고 경험하는 것이 최고의 공부인걸. 게다가 갈라히벤은 대륙 속의 다른 대륙이라 불릴 정도로 재미있는 곳이고 말야. 우리 왕국에서는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을 알게 될 거야. 너도 좋은 수행이 될 거고. 게다가 책에서 읽었는데 갈라히벤 왕국은 매년 이맘때쯤 무투회가 열린다고 하더라.”

무투회라는 말에 파르미안의 눈이 빛났다.

“그래?

친구의 반응에 마일론은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이것 또한 자신이 의도한 것 중 하나였기에. 하지만 곧 파르미안의 두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이맘때라면 얼마 안 있으면 열린다는 거잖아. 여기서 갈라히벤까지 거리가 얼만데, 갈 수 있을 리 없잖아.”

“내가 그 정도도 생각 안 했으리라 생각해? 마법은 뒀다 어디 쓰게? 대륙 이동 마법진을 이용하면 되지.”

대륙 이동 마법진은 급히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법사 협회에서 대륙의 각 거점에 공간 이동 마법진을 설치하고 돈을 받아 사람들을 이동시켜 주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동을 위해 필요한 돈은 엄청났다. 거리가 멀면 멀수록 요금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랐다.

“대륙 이동 마법진을 이용하려면 돈이 많이 들 텐데…….”

“헤헷.”

돈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마일론은 품에서 묵직한 주머니를 꺼내 장난스레 위로 던져올렸다 잡았다를 반복했다.

그사이 짤랑거리는 소리는 그 주머니가 돈 주머니임을 알게 해주었다.

“뭐야 그건? 네가 그런 돈이 있을 리 없잖아.”

“뭐, 이 정도쯤이야. 장난 좀 쳤지. 결국 장사도 전략과 전술을 잘 활용해야 하는 법이지.”

마일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음 지으며 말했다. 그 말에 파르미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튼 마일론 이 녀석은 항상 과묵한 자신이 말을 많이 하게끔 만드는 특출난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그럼, 준비해서 내일 출발하는 거다.”

“알았어.”

그렇게 두 사람은 갈라히벤을 목적지로 잡고 여행을 하기로 했다.

***

첫 충돌 이후 더 이상은 길리안 길드의 산맥들과 부딪치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산맥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다.

이니안과 다프네의 제지로 산적들과 싸우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포르시아는 들을 수는 있었다. 무수한 비명 소리. 그리고 이니안의 검이 지나갈 때―포르시아는 누구의 검인지 모르지만―마다 들리는 살과 뼈가 갈리는 소리.

그 정도로도 포르시아가 몸서리치기에는 충분했다.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지자 포르시아가 마차의 창을 열고 이니안에게 말했다.

“세이버 경, 아무래도 처음 예정대로 산맥에서 거리를 좀 두고 가는 것이 좋겠어요. 제 쓸데없는 기분 때문에 여러분들이 고생하시고 또 아까운 이들이 목숨을 잃고 다치는군요.”

살짝 눈을 내리깔고 어두운 목소리로 말하는 포르시아는 풀이 많이 죽어 있었다. 온실 속에서 보호만 받고 생활한 그녀에게는 조금 전 있었던 일이 충분히 커다란 충격이었으리라.

이니안은 보일 듯 말 듯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일이 생길 것 같아서 최대한 안전한 경로로 길을 잡았던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는 경상을 입은 이도 없고 그리고 그다지 힘겨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예. 고마워요, 세이버 경.”

하지만 포르시아도 이니안의 그 말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라는 걸 잘 안다.

이니안이 입은 갑옷 곳곳에 아까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산적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을 거라 생각되는 핏자국들. 포르시아는 애써 그 핏자국들을 외면하면서 창문을 닫았다.

“아가씨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캐서린이 포르시아의 손을 꼬옥 잡으며 걱정스레 말했다.

“공녀님, 세이버 경의 말대로 저희 쪽은 별다른 피해가 없었습니다. 산적들까지 걱정하시는 공녀님의 마음 씀씀이는 매우 훌륭하십니다만… 그들은 그렇게 죽을 각오를 하고 그런 인생을 사는 자들, 공녀님께서 그들 때문에 힘들어 하셔서는 안 됩니다.”

다프네도 가만히 보고 있지 못하겠는지 입을 열어 포르시아를 위로했다. 다프네의 위로에 포르시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그녀는 힘이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왜?”

이니안의 걱정스러운 중얼거림에 케리우가 물었다.

“공녀님이 충격을 많이 받으신 모양이야. 곧 노숙을 해야 하는데.”

“쩝. 마음이 너무 고와도 힘들지. 그딴 녀석들까지 신경을 쓸 게 뭐가 있다고.”

케라우도 이미 포르시아의 반응을 본 후다. 그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마음 씀씀이. 그래서 포르시아가 더욱 예쁘게 보이는 것이지만 말이다.

“오늘은 이쯤에서 멈춰야 할 것 같군.”

불안한 마음으로 이동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냥 푹 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제는 하늘도 어둑어둑하다. 이동 가능한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정지!”

이니안의 외침에 대열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마부도 익숙한 손놀림으로 마차를 멈췄다.

“공녀님.”

이니안의 부름에 마차의 창문이 열렸다.

“오늘은 이곳에서 노숙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알겠어요. 그러도록 하지요. 저도 좀 피곤하던 참이에요. 저는 이만 쉴 테니 내일 출발할 때까지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포르시아는 창문을 닫은 후 마차의 뒤쪽에 마련된 작은 침실로 들어갔다. 작다고 하지만 그녀 혼자 자는 데는 충분한 공간이다. 포르시아는 많이 지쳤는지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몸을 묻었다.

평소라면 절대 그대로 놔두지 않는 캐서린도 이번만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포르시아가 침대에 몸을 묻자 캐서린과 다프네가 마차의 문을 열고 내렸다. 하루 종일 마차에만 앉아 있었으니 좀이 쑤실 만도 했다. 포르시아도 다르지 않을 텐데 그대로 누워 버리다니 상당히 상처가 큰 것이리라.

“당신이 진정한 기사라면 공녀님이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셨어도 경로를 바꿔서는 안 됐어요. 경의 실력이 대단한 것은 인정하지만 덕분에 공녀님께서 저렇게 의기소침해지셨어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다프네는 이니안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혹시라도 마차에 있는 포르시아에게 들릴까 상당히 작은 목소리였다.

“후. 이번만큼은 아무 말도 못하겠네요.”

이니안은 웃지 않았다. 사실 그도 자신의 행동에 상당히 후회하는 중이었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웃겠다는 자신의 결심대로 행동하지 못했다.

매서운 눈으로 이니안을 쏘아보던 다프네는 그런 이니안의 반응에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자, 다들 간단히 저녁 식사들 하고 쉬도록 한다.”

이니안의 지시에 기사들은 기사들대로, 병사들은 병사들대로 모여서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저녁이라고 해봐야 육포를 넣어 끓인 수프와 빵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이니안을 향한 다프네의 행동을 모두가 지켜보았기 때문인지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자 사방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병사들이 모여 앉은 곳 곳곳에 모닥불이 붉은 몸을 흔들며 빛과 열기를 발하고 있었다. 사이사이에 모포를 뒤집어쓰고 잠을 청하는 병사들도 있었다. 분명 이른 새벽 무렵의 불침번을 맡은 이일 것이다.

다프네도 주변 적당한 바위 곁에 등을 기대고 모포로 몸을 감싸고 앉아 있었다. 원래라면 마차 안에서 잠을 청하며 포르시아를 돌봐야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혼자 내버려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같은 이유로 캐서린이 다프네의 곁에서 모포로 온몸을 감싸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아직 밤공기는 상당한 냉기를 머금고 있었다.

“추우면 들어가도록 해요.”

“아니에요. 아무래도 오늘은 아가씨 혼자 계시는 게 편하실 거예요.”

다프네의 말에 캐서린은 도리질 치며 마차 안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다.

케라우는 이미 깊숙한 잠에 빠진 지 오래다. 빛이 사라지자마자 그는 모포를 뒤집어쓰고는 두 눈을 감았다. 지금까지 봐온 모습이기에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누가 뭐라 하더라도 태양이 떠오를 무렵이 되어야 두 눈을 뜰 것을 잘 알기에.

이니안은 마차로부터 제법 멀리 떨어진 곳까지 철저히 살폈다. 케이로스가 마차 곁에 엎드려서 포르시아를 지키고 있었기에 안심하고 제법 먼 곳까지 살필 수 있었다.

물론 이런 평원에 별다른 위험이 있을 리는 없었지만 3년의 용병 생활은 이니안에게 돌다리도 두들겨 보게 하는 철두철미함을 만들어주었다.

이니안은 마차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훌쩍 몸을 날렸다. 한 마리의 새라도 된 양 이니안의 몸은 가볍게 떠올랐다. 그리고 몇 번의 도약으로 마차의 천장 위에 올라설 수 있었다.

공작가의 마차의 천장에 올라서는 것은 무례함을 넘어서 위험하기까지 한 행동이다. 암살자로 몰아도 할 말이 없는 행동인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본 누구도 이니안에게 무어라 하지 않았다. 아니, 무어라 하지 못했다. 지금 이 자리에 포르시아를 제외하고 이니안을 어찌할 수 있는 이는 없었으니까.

다프네는 이니안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 행동에 다른 목적이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없었기에. 지난 며칠간 자신이 지켜본 결과 이니안은 진심으로 포르시아를 섬기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랬기에 눈살만 찌푸리는 것으로 끝낸 것이다.

‘하지만 저렇게 가볍고 부드러운 움직임이라니…….’

이니안은 마차의 천장에 착지할 때 어떠한 소음도 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잠이 들었을 포르시아를 배려한 행동이다.

하지만 그런 착지가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다프네의 찌푸려진 눈가가 살짝 떨렸다. 사실 그녀로서는 불가능한 동작이었으니까.

“주무십니까?”

천장에 벌렁 드러누운 이니안이 지나가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마차 안에서는 충분히 들을 수 있으리라. 마나를 사용해 소리가 마차 안에서 잘 들리도록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깊게 잠들었다면 알아차리지 못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잠든 것 같군.”

두 번째 말은 정말 그 누구도 들을 수 없는 혼잣말이었다. 자신의 물음에 마차 안에서 어떠한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잠들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마차 안의 소리는 마법의 방음벽 때문에 들을 수 없지만 사람들의 움직임 같은 기척은 느낄 수 있었다.

이니안은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하늘의 별들을 보며 누웠다. 잠시 그렇게 있더니 작게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휘이이 휘이이 휘이익 휘이휘익∼”

사람들의 시선이 마차의 천장을 향했다. 귓가를 간질이는 감미로운 소리.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평안하게 안정시켜 주는 부드러운 소리.

그런 휘파람 소리가 마차의 천장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마차의 천장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면 그것은 한 명뿐이다. 이니안이 불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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